바이블의 진실 -이상훈 끝
[부록]
1. 인터넷 게시판의 글들
▷ '개독교'에 대한 단상 ①
하니리포터 김태혁 기자 *출처: http://www.hani.co.kr/
[필자주]-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를 말한다. 즉 '기독교 =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를 뜻한다. 현재 논란의 대상은 기독교가 아니라 '개신교'를 말한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기독인들을 이단 즉 '개독인' 이라고 칭하자. 그리고 개독인들의 잘못이 '인간적인 기독인들'의 잘못으로 오인돼서도 안되며, 또한 개독인들의 잘못이 기독교 전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될수도 없다.필자가 지금부터 논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개탄스러워하는 사람들 즉 '개독인'들이다. 그들의 교회를 '개독교'라 칭하자...
우리나라엔 논란과 비판의 그늘에 가려진 신실한 교회도 많이 있다. 한 예로 전북 전주의 안디옥 교회는 생긴지 몇 십 년이 됐지만, 아직도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헌금의 90%이상을 '구제와 선교'에 쓰고 있다고 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조차 개탄스러워하는 개독인들, 즉 이단들을 논쟁의 중심에 놓고, 안디옥 교회와 그 신앙자들과 같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뒤로 한 채, 우리의 개독교를 이대로 놔두어도 되는 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아직 개독교를 '기독교'로 거듭나게 할 불씨는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독자여러분은 대다수의 상식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을 유지하길 바란다.
얼마전 큰 문제가 되었던 KBS 방송의 '도올논어'. 10월 13일 제1강 '도올 김용옥의 공자와의 만남'으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도올은 개독교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개독교인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첫번째로 개독교가 도올 김용옥을 협박하여 입을 틀어막은 사건!
이번 사건이 단순히 김용옥 대 개독교 일개 사건이 아니라,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유는 개독교의 행태 및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개독교의 타 사상 및 비기독교인에 대한 위해, 협박, 위협, 반대운동, 실력행사, 무분별한 전도행각, 배타적 광기는 이제 위험 수위를 넘어서 타 사회구성원에게 막대한 심적, 물적 피해를 끼치고 국론분열을 일으켜 크나큰 사회악을 만들고 있는 수위에 이르렀다.
개독교는 그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계속해서 물의를 빚어왔고 불상 목자르기 사건, 진화론 배척사건, 단군상 파괴사건, 도깨비팬티 판매 중지 협박사건, 이수역 명칭 반대 위협사건 등으로 계속해서 비기독교 타 사회 구성원에게 협박과 위협, 공격으로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왔다.
이들의 행태는 정말로 이제는 가만 놔둘 수준을 넘어섰다. 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중세의 신권주의 종교독재자들을 보는 것 같다. 개독교는 이제 자신들과 반대되는 것에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반대, 협박, 위협을 가해대며 물리적, 법적, 심적으로 결국 자신들의 뜻을 관철해내고 있다.
이것은 사회 내에서 많은 수를 이용한 특정 종교계층의 일종의 양적 팽창이자 제국주의적인 패권장악 시도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국조 단군을 도끼로 부숴버리고 한마디 사과도 안하며 오히려 신문지상에 대고 "단군은 미친XX다, 우리는 계속 단군을 없앨 것이다"라고 떠들어대고, 단군상 건립주체에 대해서 온갖 협박과 위협을 가해대는가 하면 부패와 부정을 고발한 MBC 등 방송사에는 각목을 들고 몰려가 건물을 에워싸 폭력적으로 협박하고 이제는 한 철학자가 떳떳하게 학문적으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려는 것을, 자신들의 종교 교리를 조금 비판한다는 이유로 단체로 일어나 협박, 위협하며 입막음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범죄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고, 많은 숫자의 세력을 이용한 사회적인 위해, 협박, 범죄행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는 최근 스포츠투데이 사건, 교회 세습사건 등 양적 물적 팽창으로 온갖 비리와 부패에 휩쓸리고 있는 기독교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대로 개독교의 독단과 독주를 용납하면 결국에는 개독교가 한국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누구도 개독교를 비판하지 못할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개독교에 대해서 한마디 비판적인 말도 못할 그런 파쇼적인 시대가 올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시대는 왔다. 이 시대의 대표적 철학자 도올 김용옥씨(이하; 도올)가 기독교의 공갈 협박으로 입막음을 당했다. 세상에 학문적으로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도 못한단 말인가? 그 어떤 학자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어떤 비판논문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정말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도올이 개독교의 협박에 무릎끓은 일은, 우리들도 언제든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철학자 '도올'김용옥까지 협박을 당한 마당에, 이제 그 누구도 기독교를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선 국조 단군까지 업신여기고 대표적 철학자의 입까지 틀어막을 정도로 오만방자와 독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개독교에 대항하여 3200만 비기독교인과 진정한 기독교인이 모두 일어나야 한다. 이제는 안티개독교 운동을 벌일 때이다.
도올은 1982년에 고대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당시부터 초지일관 개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학생들은 이것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애증이라고 오히려 사랑이라고 느꼈다. 거의 20여년 동안 수많은 비판을 개독교에 대해 가했지만, 이번같이 이슈화되지 않았다.
이번 KBS에서 도올이 늘 지난날처럼 강력하게 되받아 칠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은유적으로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는 "도올이 많이 약해 졌구나!"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동안의 기독교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개독교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왜 과민반응을 하는가?" 단군상 비판등은 어제오늘의 이야기 아니다. 왜 요즘 부쩍 사회에 이슈화시키는가?, 그것은 도올이 말했듯이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 비해 너무 많이 변해서가 아닐까?
기독교는 물론 다른 종교집단도 마찬가지지만 자기들 내부가 정말 청렴하고 자신있다면,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할 것이다. 모든 종교집단들이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문제시 할 때는 자기들 내부문제가 심각하다고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독교 신자여러분 도올이 당신들에 대한 비판을 할 때가 그래도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도올같은 철학자가 아무런 말이 없는 그 날,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의 의의가 없지 않을까?
'개독교'에 대한 단상 ②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거짓 기독교와 거짓 목사, 거짓 신도. 거짓교회들에게 고한다.
필자는 기독교집안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요즈음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한 아랍지역에 태어나 숙명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여야 하는 멍에를 지지 않은 것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유태인이나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눈물겹도록 안심하는 바이다.
바로 집 앞에는 밤이면 밤마다 벌겋게 타오르는 '거대한' 십자가가 창밖 너머로 시야를 가린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을 보는 것도 중단했다. 이미 우리나라의 교회는 전국의 다방숫자보다 많아졌으며 '종교의 자유'란 미명하에 지하철, 도심 한 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안하무인처럼 떠들어대는 그들의 소리에도 이젠 지칠 지경이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나라의 천민적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점차 대형화돼 가고 있으며, 세금한푼도 내지 않고 부유한 신자들의 헌금으로 자신의 교회를 금빛 찬란한 장식물로, 으리으리한 대리석 건물로 몸단장하기에 바쁘다.
또한 연간 수 조원에 달하는 신자들의 헌금과 장부상에 기록된 신자들의 수로 인해 정치적인 로비마저 단행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에 반하는 법안은 통과되기 만무하며 앞으로 대성할 정치인은 반드시 천주교든 기독교든 불교신자든 어디 한 종교단체에 소속이 되어야만 유권자의 표를 얼마간이라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엔 엽기적으로 장남에게 교회재산을 물려주는 부의 세습화에 골몰하고 있다. 그들의 재산은 하느님이란 신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비자금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항상 우리나라 역사에서 저질러온 온갖 만행과 과오 앞에서 반성하기는커녕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옹호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최근 천주교가 이와 달리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활동은 상당히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반대파들에 대하여 그들은 항상 '이단'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벌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가의 논쟁은 접어둔 채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이단이라고 함부로 낙인을 찍고 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이단이라고 규정하는가?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성경에 따라 이단이라고 규정한다면, 필자는 내가 믿고 내가 의지하는 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들 또한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평균적인 사람들이 다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책임을 지듯이, 기독교인들 또한 그들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다. 신념이 옳다고 해서, 그들의 성경이 경건하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규정하면서 행해지는 온갖 사회의 악행은 마땅히 사라져야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책임 있는 기독교인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아질 때 그들 또한 진정으로 포교할 수 있는 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여, 적극적인 포교활동이 배타적 신앙생활로 연결되는 이단 개독교들이 기독교의 이름을 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안티조선일보가 있다면 안티기독교 세력이 있다. 왜 조선일보에, 유독 많은 종교 중에 기독교에 안티가 있을까? 한번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라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대부분의 상식있는 사람들에게 비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음을 느낀다. 사람들에게 기독교라는 이미지가 풍기는 들끊는 여론을 무시 할 수 없어 쓰라린 아픔으로 글을 썼다.
전북 전주의 안디옥 교회, 생긴지 몇 십 년이 됐지만, 아직도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생활하며, 정직한 사람들의 작지만 소중한 헌금의 90%이상을 구제와 선교에 쓰고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또 다른 이들을 찾아, 또 그들과 생사고락 하느라 필자의 기사를 접하기 힘들 것 같다.
독자여러분, 이같은 독실한, 진실한,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애뜻하고 감동적인 미담사례를 소개하여 필자를 반박해 주길 바란다. 예수님은 이번 크리스마스때도 늘 그러셨듯이 '대도시의 큰 교회' 보다는 작지만 사랑이 넘치는 작은 '안디옥 교회'를 찾아 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생일을 맞을 것 같다
▷ 기독교와 신에 대한 단상...
*출처 : http://www.religion.co.kr
(들어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작성자 :
- 글에 존대를 생략한 것에 대해, 미리 사과를 드립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다보니 이런 글쓰기가 더 편한 관계로...... ^^;
- 미리 말해두지만, 논쟁은 사양합니다. 글에도 있지만 전 이제 지쳤습니다.
- 이 글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생각이 흐르는 대로 쓴 잡설 비슷한 겁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비판은 환영하지만, 비난은 원치 않습니다.
- 익명으로 쓴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그 당사자가 되어 보면 제가 왜 그런지 뼈저리게 느끼실 겁니다.
0.
10년간의 교회 생활 끝에 그곳에서 떠나온 지 5년이 흘렀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타는 듯한 갈증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
오늘도 교문을 나와 걷는다. 교문 앞에 선교단체로 보이는 사람들이 즐겁게 기타를 치며 가스펠을 부르고 있다.
바보 같다는 감정적 비난을 던지던 것도 이제 옛일이 되어 버렸다.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내 마음은 더 이상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기독교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떠나 버렸다.
신의 이름은 너무나 흔하디 흔한 commodity가 되어 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쉽게 인간들 속에 회자되는 것처럼, 신의 이름도 너무나 쉽게 그들의 입에서 내뱉어진다.
입으로는 신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인간적 고뇌에 쉽게 상처입고 번민한다. 맹신이 더해갈수록 온실 속의 화초들처럼, 약하디 약해져 세상의 풍파에 견디지 못한다. 괴로워하고 눈물짓는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도피처로서의 절대자를 맹신(盲信)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왜 자신의 신을 믿는가? 나는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신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지 이미 신학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남들에게 그 존엄성과 위대함의 일부분이라도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맹신일 뿐이다.
단정적인 내 말은 그저 지적 우월감에 가득찬 거만함의 발로일까? 아니, 나는 최소한 이러한 불평을 늘어놓을 자격은 있다고 본다.
10년의 교회생활, 그리고 모 대학 신학과에 재학중이었던 애인 - 이었던 - 과의 대화, 그리고 모 교회 목사와의 신에 대한 1:1 대면 논쟁까지......
나는 신을 믿어보려 노력했다. 기독교 집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묵시적 압박을 받아들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실망했다. 그 끝없는 순환논법에 질려버렸다.
왜 a가 b인가?
성경에 b가 c라고 써있으니까.
왜 b는 c인데?
성경에 c가 a라고 써있으니까.
그러니까 왜 또 c는 a냐고?
성경에......
그들은 개개인의 패러다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신에 의해 극도로 좁아진 이성이 벽이 되어, 상대방은 그 대전제가 되는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꽤나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인다.
더 이상의 신에 논쟁은 하고 싶지조차 않다.
신학대생의 지성에, 목사의 지식에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것이 착오였을까? 이제 지쳤다. 예전의 그 정열도 이제 더 이상 한 톨도 남아 있지조차 않다. 물론 이 글도 누구와 논쟁하자고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자신의 자전적 고백일 뿐이다. 누군가 답변하더라도, 난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1.
성경에 대한 그 수많은 의문시되는 '신화'들을 요약하고 요약하면, 일단 커다란 두 가지 의문점이 남게 된다.
그 처음은 신이 과연 [전지 전능]한가 하는 문제로 요약된다. 그것은 곧 신이 인간에게 주는 시험과 선택,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주제와 부합되는 것이다.
신이 전지 전능하다면, 굳이 인간에게 시험을 할 필요가 없다.
전지 전능하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알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알수 있는 신이 굳이 인간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전지'하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기에 그 결과까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결국 자유의지라는 말 그 자체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행동해도 우리는 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빡빡하게 설명할 것 없이 조금의 에누리를 두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기 위해, 다차원적 평면우주라는 개념을 살짝 도입해보면 어떨까?
선택의 시간에서 신은 두개의 선택의 결과를 모두 알고 있고, 그 선택만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긴다고 생각하면 논리가 좀더 맞아 들어갈까?
물론 각각의 선택은 그 개개의 평면 우주를 같은 시간에 뻗어나가고 그 끝은 오직 신만이 안다면?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과 신의 '전지'함의 모순은 해결할 수 없다. '전지'라는 말 자체가 그 선택의 주체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까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시 선택이라는 것이 부정되고, 우리는 결국 신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물론 이 순환적 논리의 끝은, 신의 '전지'라는 개념에서 조금 후퇴하여, 신이 모든 것을 알지만, 그 선택의 자유의지만은 알 수 없다는 것으로 정의하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기독교적 논리에서 이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신의 전지전능은 기독교의 근본이요 대 전제에 속하는 패러다임의 기초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기독교는 그 존재의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므로......
2.
신은 우리를 사랑하는가?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신의 정체성, 즉 신의 그 다차원적 인격에 대해 논해보려 하는 까닭이다.
신의 다차원적 인격은 기독교 내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창조, 역사, 사랑, 분노... 기타 등등의 인격들.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인격들을 모두 신의 이름으로 통합하여,
그 어떤 모습도 신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한 인격들과 그들의 '신화'적 이야기들에 모순이 있건 없건, 전혀 의심이라는 것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의심이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 되는 편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신, 특히 기독교의 신이 여러 다른 종교들의 인격을 차례차례 흡수해 지금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는 학설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의 이름을 내세우기에 기독교는 너무 잔인하다. 가끔은 성경 구절의 행간에 흘러내리는 섬뜩한 붉은 피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귀찮게 복잡한 생각할 것 없이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자신은 나라의 대통령인데, 자신의 가족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처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가족들이 옆집 사람을 죽이고 그 집과, 재산을 빼앗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정당한가? 어쩔 수 없다는 윤리적 변명은 빼고라도, 과연 내가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으로서 나뿐만이 아니라, 그 상대편 또한 사랑했다고 빈말로라도 말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로, 신은 유대인을 위해, 가나안 사람들을 죽일 수 있도록 묵인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과연 신은 인간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여담이지만, 이 비슷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가끔 두렵다. '아멘!!'을 외치고 있는 신도들의 모습이 섬뜩하다.
서부극에서 미국의 멋진 카우보이가 '사악한' 인디언을 멸하는 '통쾌한'장면을 보고 즐거워하는 인간들의 군상과 다를 바가 없다.)
한때는 사랑의 신이이었지만, 저 부분에서는 또다시 전쟁의 신으로 인격이 바뀐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많은 인격이 나타났다 사라져 간다.
모두를 사랑한다라는 말. 아니, 이 말은 '선택받은'사람들만을 사랑한다고 고쳐져야 할 것이다.
신이 그렇게 '전능'할 정도로 대단하다면, 땅을 하나 만들어 그곳으로 이주시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절대의 권능을 가진 신이 인간사에 그 능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게 곤란하다면, 아예 개입하지 않아야 더 옳을 것이다.
아니, 신이 모두를 사랑한다면, 그는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다.
절대자의 개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땅위에 살고 있는 피조물 사이를 묶고 있는 '인과율'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므로......
그의 개입은 누군가 특정인의 혜택으로 이어지며, 그 동시에 모두를 사랑한다는 명제는 깨어지게 되고 만다.
결국, 각각의 다른 성격의 신들을 어설프게 결합하여, 논리적 모순을 가져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3.
기독교의 명제는 극도로 단순 명쾌하다.
단 한치의 비난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야기 할 꺼리야 많지만 길게 할 수 없는 관계로, 한가지만 더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과연 천국에 갈수 있을까, 없을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으니, 이들은 그 누구도 천국에 갈수 없겠군. 예수를 모르고 죽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반박한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성인(聖人)은 어떻게 될까?
물론 완벽한 인간은 없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까? 참고로 나와 논쟁하던 목사는 당연히 지옥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
이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굳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므로......
한때는 신은 어디에나 계시다, 다만 믿는 방법이 조금씩 틀릴 뿐이라는 범신론적 접근으로 기독교를 믿어보려 했다. 하지만 당연히 안된다. 기독교의 그 독선적인 논리는 그러한 것들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므로......
공평하신 하나님? 과연 공평한가? 그것은 믿을 수 있는 기회의 공평함이라고? 과연 그런가?
예컨데, 내가 길가던 사람 2명을 붙잡고, "백만원만 빌려줘요, 내일 오백만원으로 갚지요. 만약 안 빌려주면 혼날 겁니다."라고 말했을 때, 한사람은 빌려주었고, 다른 한사람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자. 그들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인가?
빌려주지 않은 한사람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을뿐이다. 오히려 빌려준 그 사람이 '멍청'한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그 뜬구름같은 말을 안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한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것이 과연 공평한 것인가?
기회의 공평함은 단지 선택할수 있는 기회의 공평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까지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믿을수 있는 기회의 공평함을 주었는가?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것은 전자와 같은 그저 '멍청한 믿음'인가? 충분히 믿을수 있는 논거를 주고 선택을 강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 또한 바보가 아닐것이다.
충분한 이성적 소구를 거쳐 체득된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그저 '믿기'때문에 흔들리는 신앙의 모습이 간혹 보이는 것이 아닐까?
4.
기독교의 작태를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종교적 부패야 단지 기독교뿐만의 일이 아닐뿐더러,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하니 그것은 접어두기로 하자.
아니, 나는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보이는 교회들에 대해 몇 마디하고 싶다.
성경이 쓰여진 지 얼마가 흘렀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그 옛날의 원전과 얼마나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 시간의 흐름과, 몇 단계를 뛰어넘는 번역을 지나, 그 본원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았다 해도, 그 미시적 내용은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성경의 구절 하나하나에 집착해, 논쟁을 거듭하는 교단이나, 그로 인해 파생된 '이단'들......
그리고 구절 한 두개를 뽑아내 그 전후적 문맥이나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 의미를 무시한 채, 구절 자체로 '썰'을 풀어내는 설교......
갖다 끼워 맞추는 식의 '썰'풀기, 사람들을 그저 '행복'을 주기 위한 설교를 듣고 있자면 끝없는 졸리움에 견딜 수가 없다.
종교적 지식은 오직 목사들을 위한 독점적인 것들인가? 10년동안 교회의 설교를 들었어도, 내가 그것들에서 얻어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선전 선동가'의 기질이 성공적인 목사의 미덕이 되어버린 것을 보며, 나는 씁쓸한 한숨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기독교에서 마음이 떠나버린 나...
하지만, 나는 지금 왜 이런 글을 쓰는가? 아마도... 아직까지도 내겐 약간의 미련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온 컴플렉스로까지 발전되어 버린 기독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으므로......
- 현대 기독교 사상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 -
▷ 한 진실한 기독교인이 보낸 편지
" 아시다 시피 신학교에 들어가면 성서(성경이 아님)가 온갖 문서와 역사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책이란 것을 가르치지만 교회에 와서는 사실대로 알려 주지 않지요. 일차적으로 밥줄 끊기는 것이 두려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목사들에게 책임이 있고 기존의 틀을 바꾸지 않으려는 교인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뛰어넘는 실존적 고백'이라는 독일의 신학자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서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축자 영감설로 교인들을 우롱하는 목사들의 직무유기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 무조건 믿으라고 궤변을 늘어놓죠.
배운 도둑질이라고,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신학도들도 어느덧 물이 들어 무감각해져 가는 게 사실입니다. 진실을 말하라고 하면 '아직 교인들의 수준이 모자란다'는 개소리를 수 십 년째 울겨 먹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러니 무슨 놈의 신학이 발전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교회가 줄어들고 사기꾼 목사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름다운 세상은 결코 오기 어렵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저도 교회 가서는 이런 소리 아무한테도 못 합니다. 이단으로 몰리기 때문에 그냥 입 다물고 있습니다. 비겁한 짓이지요. 구약은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낡은 것이 되었다고 강변하면서도 유독 헌금을 말할 때만 말라기에 있는 '십일조'를 강요하니 웃기지 않을 수 없지요. 자기들은 십일조를 강요하면서도 사회를 향한 십일조는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짓도 하느님이 분노하실 일임에 분명하건만 이 대목에서는 그냥 입 다물고 있습니다. 보내 주신 글은 아무 생각 없이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 급급한 소시민에게 자극제가 되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출처 : http://www.emag21.com
▷ 기독교인들은 학교에서 단군상 철거를 주장할 자격이 전혀 없다!!
작성자:인류보완 계획 *출처 : http://cafe11.daum.net/chiwoo
기독교도들은 학교에 있는 단군상이 어린학생들을...어쩌고 운운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전국의 미션스쿨에서 행해지는 강제채플시간과 예수우상은 어찌된 것인가?
예를 들면 내가 다니던 명지 고등학교엔 예수의 우상이 있었지만 이거 가지고 뭐라 그런 인간은 없었다.
그리고 채플시간! 우린 고등학교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는데도 강제로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교목이었던 박재천이란 분은 교회의 주보를 모아와야 점수를 줬다!!!
집안대대로 불교신자라는 내 친구가 교회갈 수 없다고 사정까지 말해도 "기독교가 어떤 건지 나가봐~"라며, 억지를 부렸던 그분.....
한마디로 한 손엔 칼, 한 손엔 성경.....그 자체였다.
게다가 신앙대부흥회니 뭐니 해서 3~4일 동안 수업도 미뤄두고, 학교인지, 교회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추태 또한 부렸다.
심지어 경복여고 안에는 학교 안에 교회가 있으며, 강제로 예배참석하게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기독교인들이 불교학교에 다니며, 강제로 불교교리수업을 받고, 강제로 절에 가게 한다면, 당신들은 참을 수 있는가?
또한 학교에 있는 단군상이 종교성을 띄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도뿐이다.
설사 그것이 종교성을 띄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국의 수많은 미션스쿨에서 강제 전도를 하는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단군상 철거를 주장할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단군상 철거를 주장하려면, 전국의 미션스쿨에서 예수의 우상과 채플 시간을 없고나서 그런 주장을 해라.
그리고, 단군상을 뽀개는 것은 소수의 과격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변명하는 기독교인들... 기독교인들을 다 붙잡고 물어보아라.
학교에 있는 단군상 건립이 어쩌냐고. 100명중의99명은 모두 단군상은 우상이니까 학교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대답한다.
기독교 교리대로라면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정작 전국에 있는 미션스쿨에서 강제로 채플수업받고,강제로교회나가게하고,학교운동장에 예수우상 있는 거에 물어보면 아주 당연한 듯이 옳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가톨릭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맘이 넓고 포용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좀더 높은 영적성장을 하여야 한다. 생각해보시오 학교에 있는 단군상하나와, 미션스쿨에서 강제로 행해지는 채플수업과 예수우상........
자신들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눔에 있는 티끌만 탓하는 어글리한 한국의 개신교도들....
▷ 지옥에 갈 사람들과 천국에 갈 사람들. 인류보완 계획 10/22 25
정말 한국 기독교의 전도 행태는 역겨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목사에게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착하게만 사시고, 남한테 해 한번 안 끼치고..일만 하시면서..자식만 키우시면서 사셨는데 그런데도 천당 못 가나? 하니깐...못 갑니다..예수믿어야 함다. 헐헐~
그럼 우리나라 역사가 5,000년 기독교가 들어온 게 대략 100여년, 그럼 기독교 자체가 뭔지도 모르고 사신 4,900년동안의 조상들은 착하든 나쁘든 다 지옥갔겠네요? 했더니.. 그렀습니다 ...헐헐~
그래서, 내가 그분들은 예수자체를 모르고, 선택의 자유도 없었잖아요 했더니 그래서 지금 선교활동하는거 아님까 하고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릴하더군.
개신교들이 말하는 지옥이라는곳...
거기엔 단군부터 시작해서, 이순신, 세종대왕, 최영, 율곡 등등등....한사람도 빠짐없이 우리조상들이 거기 계실 것이다.
또한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모두 좌르륵 지옥행이다. 또,힌두교를 믿으며 영국과 비폭력독립운동을 행했던 마하트마 간디같으신 분들도 당연히 예수 안 믿었으니까 지옥이다.
따지고 보니, 개신교도들의 지옥에는 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훌륭하신분들도 무수히 많을 것 같다. 그저, 단순히 예수안믿었다는 이유로?
그렇다면 개신교의 천국에는 누가 가는가?
물론 588에서 불쌍한 이들에게 밥을 퍼주는 밥퍼목사님 같으신 분들도 천국가겠지만(이런분들께는 안티인 나도 고개가 숙여진다),정작 엉뚱하게도 단순하게 예수 믿었다는 이유로 그저 속물근성의 인간들과, 더우기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마지막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함께 천국행이 될 것이다.
교도소에서 제일 인기있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한다. 불교는 윤회설과 후생에 전생의 업을 이어간다는 믿음과 어려운 교리때문에 인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리가 워낙 단순(예수믿으면 무조건 천국)한데다, 무슨죄를 져도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천국이 보장된다는 단순한 논리로 최고의 인기를 차지한다. 더욱이 사형수가 사형 당하기 전에 가장 많이 개종하는 종교 역시 기독교라고 한다. 난 안티 카페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 중엔, 남이 저지른 해킹을 대신 사죄하면서 자신에게 대신 욕을 하라는 정말로 양심있는 참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한 건 욕하고, 반말지껄이에다, 너희는 지옥에 가서 이를 갈게된다는 둥의 온갖 저주를 수없이 들어봤다. 정말로 예수만 믿었지, 인간성의 됨됨이는 싸가지 없는 속물근성의 기독교인들........ 그런 자들이 단순히 예수 믿었다는 이유로 천국간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서 세종대왕님이나 이순신 장군님들을 만나 뵙고, 지옥에서 불장난이나 하련다.^^;;
▷ 비판받아 마땅한 기독교인들
교회 신자들 중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불교 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착하고 성실하다.
또한 기독교의 사상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평안을 얻고 생활의 구심점이 된다면 우리가 이래저래 간섭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군상 파괴나 목사 세습, 기업화된 대형 교회, 거듭되는 목사들의 성범죄나 사기 행각 등을 지켜보면서 기독교가 믿음의 공간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일관하는 배타적인 성향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며 구약 성서에서의 유대 민족의 타락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성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교회를 차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믿음으로 용서받으려는 무책임한 교인들이다.
당신들의 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만 걷어가는 십일조,건축헌금,맥추감사헌금 등등(이단이 따로 없다!)
작성자: mydreaming *출처 : http://club.sayclub.com/@sayanti
한국의 개신교에게 있어서 언제나 이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들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유리한대로 교리를 이용해 먹는 개신교의 이단은 쉴 새 없이 등장하며, 개신교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 자체는 그 이단이라는 말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밑에서 십일조라는 것이 한국에서만 걷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구약 속의 율법에 십일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율법은 이미 예수가 폐하였다고 신약에 나와있다.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면 기독교인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고, 남자아이는 생후8일만에 할례를 받고, 아버지의 말에 거역한 아들과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할 것이다.
이것들을 현대에 어찌 지킬 수 있겠는가?
모든 율법은-십일조까지 포함해서-폐하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한국에서만 십일조를 걷어 가고 있다.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하여 성경을 유리한대로 해석하는 한국의 사이비 목사들이여.....
"십일조를 안내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다!" 라고 공공연히 떠벌이신 여의도의 조목사님......
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아들의 생후8일만에 포경수술을 하셨습니까?
돼지고기는 당연히 안 잡수시겠지요?
근데 하나님의 재물을 유용해서 아들에게 빼돌리시고, 아드님은 스포츠신문이나 찍어대니 모세의 율법대로 두 부자(父子)가 돌 맞으셔야겠네요......ㅡㅡ;;
십일조 뿐인가?
한국의 개신교는 추수감사절을 기독교의 큰 절기로 강조한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단지 미국의 명절일 뿐, 2000년의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 개신교 국가에는 이 행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로지 한국과 미국에서만 행하는 행사이다.
뭐, 한국의 개신교가 주로 미국에서 전도되었으니 영향을 받았다고도 생각 할수도 있겠지만은 진짜 이유는 추수감사헌금을 걷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맥추감사절이라는 것은 정말로 황당한 것이다.
맥추감사절은 오로지 한국에서만 지낸다.
도대체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민족도 아닌 우리들이 왜 맥추감사제를 지내야 하는가? 보릿고개 때문에?
하지만 보릿고개는 옛말이고, 맥추감사제는 그 후에 한국의 교회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구린 냄새를 풍긴다.
맥추감사제 역시 헌금이 목적이 아니고서는 이런 행사가 있을 리 없다.
또, 건축헌금에 대해서.....
역시 한국의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한마디로 교회건물이 번듯하게 있는 교회가 뻔뻔하게 건축헌금을 걷어가고 있다.
교회건물이 있는데 왜 건축헌금을 걷어 가는가?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더 좋은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수많은 개척교회가 난무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추태일 수밖에 없다.
이미 서구에서는, 교회에 사람이 줄어들어서, 더 이상의 교회건물이 필요 없는 현상이 지속되고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과거에 어느 개신교도 무리수를 두어서 교회건물을 확장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미국의 개척시기 역시 이주민들의 청교도 교회들이 초라하기 없었지만, 따로 건축헌금을 따로 걷어서 교회건물을 확장시키려고 한 경우는 없었다.
교회의 형편이 나아지면, 그 사정에 따라 교회건물을 신축, 또는 확장하는 것이지, 강제로 헌금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실지로 교회의 정신은 화려하고 멋진 건물보다, 구제사업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한국개신교는 들어온 수입 중에 교회헌금 중 사회봉사비는 고작 3.8%에 불과하고 선교비는 5.3%인 반면 급여, 건축 등 교회운영․관리비에 67%가 쓰인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야말로 구제사업으로 십일조조차 하지 않는 셈이다.
대부분의 신도들의 헌금은 교회건축과 운영비로 지출될 뿐이다.
그 외에도 헌금의 종류는 끝도 없다.
여전도회헌금, 해외선교헌금......등등등......
그렇게 수많은 명목으로 걷어들인 돈이 대부분 교회건물 건축과 운영비로만 지출된다는 것에 치가 떨리지 않는가?
차라리 여러분의 헌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정말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자신들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십일조나 걷어가는 한국의 교회야말로 구제사업으로 십일조조차 하고있지를 않고 있다.
새로운 종파가 생길 때 이단이라고 배척하시는 기독교인 여러분들.....
하지만, 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오로지 한국에서만 걷어가는 수많은 명목의 이름이 붙어있는 해괴한 헌금봉투를 보면 눈이 삥그르르 돌아갈 것이다.
이단이 따로 있는가!
자신들 유리한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원래 교리에서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개신교의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본인이 한국의 개신교에서의 헌금문제로 보았을 때, 한국개신교는 전부다 이단이다!
제발 있지도 않은 헌금명목을 만들어서 신자들의 고혈을 빨아내, 교회건물 치장하는 데에 허비하지 말라!
▷ 기독교인들의 기형적 사고
100년전 유럽인들의 사고=현재 한국 기독교인들 사고 안타까울 뿐이다. 유럽에선 기독교가 망해가는데 우리 나라에선 지랄브루스 중이니..... 솔직히 기독교인은 밥먹고 똥싸고 자는거 빼면 다 기형적 생각뿐이다. 인간보다 신을 존중하고, 같은 인간이라도 비기독교인을 벌레 취급하고 광신자가 산처럼 많고 타종교는 욕하고 때려 부수고 기뻐하며...
지들 욕하면 악마나 사탄으로 몰아붙이고..... 같은 기독교끼리도 의견이 다르면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 자신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어떤 거짓과 악랄한 방법을 쓰더라도 절대 선(善)으로 남고 싶어하고, 타인을 악마나 이단으로 몰아 부치며 쾌감을 느끼며.... 국가와 민족도 예수보단 덜 중요하며... 한 몸이니 지체니 하면서도 잘못한 크리스찬은 외면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 한 몸이니 지체니 하면서도 열 받으면 새로운 종파 만들어 25000개의 종파가 존재하는 싸이코적 분열집단 ... 아가페적 사랑을 말하지만 신 안에서만 사랑하는 조건적 차별적 사랑 ... 비기독교인이나 반기독교인에게 악행을 저지르며 예수이름 높혔네 천국에 가까워 졌네 하면서 좋아하는 싸이코... 아이러니 하게도 안티기독교 운동의 시작이 기독교인들이 절대 진리라는 성경과 기독교도들, 본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독교들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예수쟁이들이 이중인격자인 이유(작성일: 2000/08/16)
이유는 단순하다.
그 정신박약아들이 믿고 따르는 성경이 한 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와, 복수,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인정사정 안 봐주고 자기를 안 믿는 민족은 유대인을 시켜서 모조리 죽이거나 추방시킨다.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의 입을 통하여 "언놈이 네 왼뺨 때리면 얼른 오른뺨 내밀어" 라고 가르친다.
광신적인 예수쟁이 신학자들은 이 모순을 극복하려고 별의별 신학적 해석을 내리지만 거의 궤변에 가깝다. 현대의 예수쟁이들은 겉으론 신학의 하나님을 내세우며 속으론 구약의 하나님을 따르는 게 다반사다. 입맛대로 취사선택을 하면 되는 거다. 예수쟁이들은 어차피 성경의 말을 따르는 것이기에 전혀 양심의 가책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으리으리한 교회의 건축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 율법이나 규칙, 복장 등등의 사치성 의식에 신경을 많이 쓰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신약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우선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이러니 현대의 교회가 자기분열과 정신박약증에 걸리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 바이블은 聖經이 아니라 殺生經, 不倫經 이다.(작성일: 2000/09/16)
불교의 경전이나 유교, 도교의 경전, 민족종교의 경전들을 살펴보면 부처나 성인군자나 옥황상제가 사람을 죽이는 얘기가 나오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라.
구약을 보면 신(神)이 인간을 죽이는 얘기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그 뿐이 아니라 온갖 불륜이 다 나온다.
개독교도들은 오히려 솔직하니까 더 위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하하하, 가소롭다.
그러면 마호메트가 바람피는 얘기까지 더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는 코란은 더욱 위대한 경전이라고 해야겠구만 .....
바이블이나 코란은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한 유목민족에게서 생겨난 경전이고 동양의 경전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에게서 생겨난 경전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모든 수수께끼는 다 풀린다.
2.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글
▷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배타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하려면 인간을 경전에서 해방시키는 해석학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자기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때만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 예수가 한국집에 시집왔으면 한국집사람이지 이스라엘집사람이 아니다. 범인류적 기독교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과감하게 예수를 한국인의 人子로 만드는가 하는 것은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시련일 것이다.
▷ 기독교의 진리는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는 상태다. 콘스탄틴 황제와 바울은 가장 큰 왜곡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으나 그를 신격화하여 하늘 높이 띄워 놓고 인간으로부터 멀어져가게 함으로써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고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유아기적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신칭의’ 같은 유치한 사상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성서에 있는 “행위에 따라 보응받는다”는 교리를 부활시켜야 하며 원래의 윤회전생의 교리도 다시 되살려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들이 보다 도덕적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 예수는 인간을 “신”이라 선언했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5:48]고 하였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요한14:21]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가 말한 것을 따라 실천함으로써 예수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선언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는 이미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한 것이다.
▷ 예수도 석가, 노자, 공자 등과 같은 세계적인 성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할 수 있는 유연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예수는 신이고 다른 성인들은 인간이라는 유치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라면 다 인간이고, 신이라면 다 신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선언한 것이다.
▷ 구약은 폐기되어야 한다. 온전한 것이 나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하듯이 옛날 약속은 폐기되어야 한다. 구약은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구약의 정신은 “무리 안으로는 사랑과 자비, 무리 밖으로는 저주와 폭력, 살인”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더 이상 무리 밖이 없다. 이제는 무리의 범위를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한 것이다.
▷ "야훼의 책을 보면 페이지,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뜩 실려 있다. 구약성서에 바탕을 둔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시대 우주관 위에 서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다.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우리 것은 더 이상 아니다.“
▷ 구약의 신 야훼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야훼는 유대민족의 신일 뿐 그리스도가 말한 하느님이 아니다. 따라서 야훼 신앙은 일제시대 때의 신사참배와 다를 바가 없는 반민족적 행위이다.
▷ 구약의 정신에 매달려 남의 민족신은 숭배하고 우리민족의 실존했던 시조 단군의 동상을 훼손하는 등의 철없는 짓을 그만해야 할 것이다. 매국노와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기독교의 성서(Bible)도 다른 종교의 경전들처럼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모순과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일부분의 글로서 전체 글(성서)을 증명하는 논리학의 오류(순환 오류)를 간과한 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미신을 부르짖는 것은 부시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대하던 태도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기독교인들은 모든 종교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유연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산의 정상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각자가 가고 싶은 길로 가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다른 모든 종교를 인정할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자세가 요구된다. 만약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면 이 세상은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조셉 캠벨이 한 다음의 이야기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내 친구는 카톨릭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관리들은 도저히 서로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산을 정반대쪽에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길밖에 보이지 않지만 정상에 가까워지면 다른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보이고 내가 올라온 길만 길이라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카톨릭신부들이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해주고 불교 스님들이 성탄절을 축하해 주는, 이러한 광경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기독교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배타적, 독선적 주장을 고집하는 개신교인들은 과거 예수를 죽였던 유대인들의 사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개신교인들은 하루빨리 구약이라는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 “과거의 종교 단체들은 언제나 필요할 때는 자기들의 교리를 수정하고 바꾸어 왔다. 앞으로도 필요할 때는 각자의 배타적인 교리를 수정해서라도 인류는 생존해야 한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종교인(기독교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필요에 따라 교리를 수정해 온 것이 사실인데, 갑자기 앞으로는 수정할 수 없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 않은가?“
▷ 종교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종교가 있는 것이다. 신(神)을 노예 수집상으로 만들지 말고, 하루빨리 주객(主客)이 전도된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3. 글을 마치면서
필자는 신학대학을 다닌 적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의 전문가(專門家)는 아니며 잡학가(雜學家)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비전문가’이므로 까불지 말라고 얘기한다면 그들에게 다음의 죠셉 캠벨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하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다.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로부터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로부터 한 수 배우기 때문에 일단 문제를 위에서 내려다볼 줄을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두 전문가는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
캠벨은 필자가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거인(전문가)의 어깨 위에 올라 탄 난쟁이(배우는 자)가 거인보다 더 높이, 더 많이 볼 수도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얘기하고 있다.
사실 캠벨은 스스로 자신을 낮춰 ‘잡학가’라고 얘기했지만 비교신화학분야의 세계적인 거성(巨星)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異見)을 달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은 좁은 분야의 전문가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에게 열심히 배운 것에 있다. 도올 김용옥 선생도 지금과 같은 실력을 갖춘 비결을 끊임없이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묻고 배운 데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필자는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기독교를 알기 위해 많은 국내외 석학들의 어깨를 오르내렸다. 따라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물 안에서 보면 우물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다. 그러나 우물 밖에서 보면 우물은 참으로 좁은 세계이다. 성직자들은 비록 그들이 전문가라고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은 좁은 우물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비록 다른 종교를 공부하고 다른 분야를 공부해도 그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우물이 최고하고 하는 대전제(미신)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바깥 세계를 그 우물의 틀에 맞춰서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 세계관과 영적전쟁(죠이선교회, 1995) >의 저자(著者) 안점식과 같은 사람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예수의 유일성을 변증하기 위해 동서양의 모든 종교, 철학, 사상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고 그것들을 성서(Bible)의 말씀을 잣대삼아 깔아뭉개면서 기독교가 제일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한마디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그가 그렇게도 철썩같이 믿고 있는 바이블의 무오류성, 하느님의 성령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대전제 자체가 이미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전제가 ‘참’이라면 안점식의 주장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의 수많은 노력은 모두 헛공사인 것이다.
그는 성서의 말씀들은 열심히 연구했는지 모르지만 그 성서의 말씀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았거나 무시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의 오류는 시작된 것이다.
거의 모든 성직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서에서 이 구절 저 구절 끌어다 맞춰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밖에 없다. 그들은 성서 안에서 맴맴 돌고 있다. 이러한 좁을 우물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어 가수 조영남(목사)이나 도올 김용옥 등은, 이들의 눈으로 보면 ‘이단’인 것이다. 옛날 같으면 화형에 처해 졌어야할 사람들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비유에서 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하듯이 ........
또 필자와 토론하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필자가 쓴 글 중 일부를 꼬투리 삼아 그 글 전체를 쓸데없는 글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지금도 종교토론이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의 게시판에는 이런 류의 기독교인들이 제법 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성서에는 모순과 오류가 발견되니까 성서는 쓰레기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정말 잘못된 증명법이다.
아마도 본서의 내용 중에는 일부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구실로 전체 글을 매도하는 기독교식 증명법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다 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포용력 있는 기독교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나와준다면 이 글을 쓴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본서를 읽고 토론을 원하는 사람들은 “한국기독교성서포럼 ( http://xbible.glad.to)”을 방문하여 많은 분들과 대화를 나누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