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之香 Atheism/바이블의 진실

바이블의 진실-이상훈 편저 15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9. 13:08

▣ 교회에 대하여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 1:22~23]

 

여기서 교회는 분명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의 교회는 ‘에크레시아’인데 그 뜻은 집회, 회중, 교회, 무리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에크레시아’라는 단어의 어근은 ‘~으로부터’라는 전치사 ‘엑크’와 부르다라는 동사 ‘칼레오’의 합성어로 그 뜻은 ‘~으로부터 부름다’ 혹은 ‘~으로부터 부름을 받다’라는 의미로 원어에서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같이 성경적인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교회)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영적인 성전을 전혀 모르고 조상들로부터 섬겨 오고 있는 외적인 건물성전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인간들 안에 창조 되는 하나님의 집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왜 모르고 있느냐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성전을 아무리 크게 짓고 교회 단장을 화려하게 잘 해 놓아도 하나님은 건물성전에는 아니 계신다는 것이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위와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성전)에는 아니 계신다’고 말한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같이 건물교회만을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 만일 예수나 스데반 집사가 와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현재 섬기고 있는 성전들을 모두 허물어 버리라고 말한다면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하고 있다.

한국 교회 100주년 종합조사 연구보고서(1982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지출예산을 보면 성직자의 생활비가 총 예산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심한 곳은 75%를 차지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교회가 성직자들의 구멍가게라는 비난의 소리도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니며, 또 성직자의 생활수준에 대하여 신도들에게 물은 설문에서 30%가 ‘사치스러운 편’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직자가 신도들이 바친 성금으로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으며 신도들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개신교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에 대하여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8]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위의 구절들을 근거로 아무런 행위나 공로가 없어도, 심지어는 악독한 죄인일지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두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어 천국에 간다는 주장인데,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행함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결론은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잘 음미해 보라.

 

+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기 34:11~12]

+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언24:12]

+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 [마가 10:17~21]

+ 내 형제들아 !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서 2:14~26]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 7:21~23]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믿음’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구약이나 예수의 말을 들어보면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의 말을 더 믿고 따라야 할까? 매사가 이런 식이다. 서로 엇갈리는 구절이 있을 때 성직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밥벌이를 위하여 예수의 말씀조차 무시하고 보다 신도를 끌어 모으는 데 유리하고 실천하기 쉬운 성경구절을 교리를 채택하는 것이다. 자기 재산까지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온갖 착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교리가 채택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기독교의 팽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교리가 채택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수 천, 수만 개의 웅장한 교회건물 지을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하는데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된 죄수 중의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있는가? 역시 같은 때에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 기독교대회에서 1,650개의 동시통역 청취기를 회원들에게 빌려주고 회의 후에 돌려달라고 광고를 하였으나 873개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약 50%가 없어졌다.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자들의 약 반수가 도적질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뿐인 교리의 결론이다.

도둑질, 강간, 뇌물수수, 세금포탈, 권력 남용 등 온갖 범죄를 다 저질러서 더러운 부를 축적하고는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고(개신교), 고해성사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천주교)는 유치한 교리의 결과인 것이다.

한국일보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 불신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 기독교인은 더 애국적인가? 아니다.

* 기독교인은 더 양심적인가? 아니다.

*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아무리 증가하고 많아져도 사회정화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예로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정당이나 정권,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국가 통치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부패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현재에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정치가들은 과연 좋은 평판을 얻어낼 수 있을까?

믿음만으로 천국간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교리다. 루터의 최대의 죄악이다. 이 교리대로라면 일평생을 살인, 강도, 사기, 도둑질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다가도 나중에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된 목사가 일평생을 남에게 베풀며 청렴결백하게 살고 민족과 인류를 위해 희생한 사람보다도, 일평생 도덕적인 삶을 산 성인군자보다도 낫지 않은가?

그 목사는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고 기독교를 안 믿은 애국지사나 박애주의자, 성인군자들은 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 것이 아닌가?

기독교는 이 사회에 참으로 잘못된 윤리관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빨리 천국에 가는 방법

 

병원에 주사 맞으러 온 기독교인이 옆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고 하도 떠들길래 그 옆사람이 하는 말,

“아줌마, 빨리 죽으면 천국에 빨리 갈 수 있는데 뭐하러 병원에 다니세요?”

이 말에 그 기독교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믿음이 강한 수녀들이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아파서 죽으면 천당 가는데 왜 약을 먹느냐는 것이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왜 병이 들면 빨리 낫기를 비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병이 들어 빨리 죽으면 그 가고 싶어하는 천국에 빨리 갈 수 있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기독교인들은 왜 그리 믿음이 약해서 약국 찾고, 병원 찾고, 기도원 찾고 하는가? 게다가 살려달라고 애타게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신앙간증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가관이다.

 

스페인의 기독교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했을 때 원주민들의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하자마자 머리를 때려 죽여 버림으로써 이 아이들이 천국에 가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고 한다. 즉, 천국에 가려면 믿음과 선행이 필요한데, 어린아이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세례만 받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유치한 교리가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살육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정통 기독교도들은 아무도 이들의 행동을 비난할 만한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좋겠지만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자 않아 기독교를 모른 채 죽었다거나 태어나자 마자 죽은 아이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건 너무 불합리한 교리가 아닌가?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착하게 살았지만 기독교를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불에 타는 고통은 있으나 그 벌이 영원하지는 않은 ‘연옥’에 간다고 하고, 세례도 받기 전에 죽은 죄없는 어린 아이들은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림보’라는 곳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연옥’이나 ‘림보’는 본래 Bible에는 없는 것을 천국과 지옥만으로 부족해서 교황이 만든 교리일 뿐이다. 이왕 만드는 김에 한 9단계쯤 만들어서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과 남의 도움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ex;태어나자마자 세례받고 죽임당함 애기)을 따로 격리시켜야 하지 않을까? 또 단순히 믿기만 한 사람과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을 똑같은 곳에 두는 것도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 또 예수 말씀처럼 자기 재산 다 털어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준 사람과 구두쇠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도 뭔가 차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내세관이 개신교인들보다 합리적이라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불합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불합리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기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스라엘에 태어난 사람들은 ‘유대교’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어떻고, 인도는 어떠한가? 중동의 이슬람종교권에서 태어난 사람, 히말라야 산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기독교의 교리대로라면 인간의 구원이 그가 태어난 땅에서 거의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 천주교의 전통

 

천주교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곧 ‘전통’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 전통들과 시작된 연도를 살펴 보자

▷ AD 300년 -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십자 긋기

▷ 321 - 일요일 법령과 그 강제 준수

▷ 394 - 이교의 매일 미사가 도입됨

▷ 400 - 성경적 안식일 준수자에 대한 박해를 시작

▷ 431 - 마리아의 지위를 격상시켜 “하나님”의 모친으로 부르기 시작

▷ 450 -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사형 언도

▷ 500 - 신부들의 옷이 신도들과 달라짐

▷ 526 - 임종 미사 제도 시작

▷ 593 - 연옥설 도입

▷ 607 - '만인의 주교‘란 교황의 칭화가 처음으로 사용됨

▷ 709 - 교황의 발에 키스하는 전통 시작

▷ 786 - 십자가, 형상, 유물 및 유골 숭배 시작

▷ 1090 - 묵주와 기계적인 묵주 기도 도입

▷ 1184 - 종교재판 시작

▷ 1190 - 면죄부 판매 개시

▷ 1215 -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고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제도 시작

▷ 1229 - 평신도의 성경 소유가 공식적으로 불법화됨

1545 - 교회의 유전, 즉 전통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선언됨

▷ 1546 - 경외서들이 성경에 추가됨

▷ 1854 - 마리아 무염 수태설 주장

1864 - 교황의 유론표(Syllabus of Errors) 종교,언론,양심,출판의 자유, 과학적 발견과 학문의 자유 정죄함.

▷ 1870 - 교황 무오설 주장

▷ 1950 - 마리아 승천설 주장

▷ 1965 -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로 승격

 

이러한 전통은 누가 만드는가?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Bible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교황이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전통’을 부정하고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며 뛰쳐나온 것이 개신교이다. 그러나 개신교인들도 천주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 십자가 숭배, 크리스마스 등을 그래도 따르고 있다.

 

▣ 천주교의 교황권과 고해성사

 

천주교의 그 위대한 ‘전통’ 중 교황권과 고해성사 문제를 살펴 보자.

 

[마태복음 16장]

+ 16절]"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베드로의 세 가지 특권은 첫째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권리(18절), 둘째는 천국의 열쇠(19절), 셋째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푸는 특권(19절)이다.

베드로가 받은 이 세 가지 특권이 제2대교황으로, 현재의 264대교황까지 내려오고 교황은 이 특권을 각국의 주교들에게, 주교들은 다시 주교수하의 모든 신부들에게 전승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신부는 베드로가 받은 세 가지 특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 중에서 풀고 맬 수 있는, 세 번째 특권 때문에 고해성사에서 신도들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자, 그러면 이 문제의 구절을 살펴 보자.

예수가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태16:16)이라고 대답하자 예수가 그 비밀을 지킬 것을 명하며 베드로에게 이러한 상급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배경은 마가8:27-30 누가 9:18-22 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반석 위의 교회 및 천국의 열쇠 운운 구절은 유독 마태에만 나타나고 있다.)

과연 이 예수의 신분 즉 그리스도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베드로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을까? 베드로의 대답이 이러한 상급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획기적인 것이었을까?

예수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베드로의 대답 이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예들을 보자.

1)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일러줌

2) 의심하는 요셉에게 꿈에서 계시됨

3) 하늘 문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하고 세상에 선포 됨.

4) 귀신의 군대조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이까?' 라고 말함.

5) 베드로 및 다른 어부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하며 경배.

6) 예수와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장면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구해주자 배에 있던 제자들이 모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하며 경배.

7) 베드로가 제자가 되기 이전 그의 형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메시아를 발견하였다' 라고 함.

8) 다음 날 '나다니엘'이 예수에게 ' 선생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나이다' 라고 함.

 

보다시피 베드로의 대답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었다. 후기 베드로를 숭상하는 자들의 문서 변조, 즉 가필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구절은 베드로 전후서를 포함한 1세기 모든 문서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는다. 베드로가 천국의 수문장이라는 정보는 AD 211년 교부 터툴리안의 저술(Scorpiace, x; ANF. iii, 643.)에서 보이기 시작할 뿐이다. 마태 16장 19절은 예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후일 기자가 삽입했다고 뜨루대학 신학교수 데이비스(Davis)도 주장하고 있다.

 

만약 문서변조가 아니라고 치자. 마태복음 18장 18절에는 풀고 매는 특권을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라고 하여 제자 모두에게 준 것으로 나와 있다.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

바클레이 주석에는 이 특권은 기독교인 모두가 받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기독교인 모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인가?

 

조찬선 목사는 아람어에서 ‘맨다’는 ‘금지’를 뜻하고 ‘푼다’는 ‘허락’을 뜻하며 ‘맨다’는 교회법을 위반한 신도를 교회에서 ‘출교’시킬 때 사용한 말이고, 푼다는 ‘입교’할 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즉 그것은 당시 율법의 두루말이를 실이나 끈으로 매고 풀 때에 사용하던 통상적이 용어로 즉, 백성들을 위하여 복음의 두루말이를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복음이 전파되게 할 것이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맨다라는 의미이고, 풀고 매는 특권은 기독교인 모두가 받은 것이라고 매튜 헨리도 주석서에서 해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신부가 고해성사에서 신도들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전혀 성서적 근거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특권이 2,000년간 264대의 교황에게 대대로 상속 계승되었다는 것은 천주교가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해도 성립될 수 없는 궤변이다.

교회의 우두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지 결코 교황이 아니다. 교황은 사람들(추기경들)이 모여 선출한 교회의 대표자일 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주교의 교황을 수장으로 임명하셨다면, 그런 엉터리, 난봉꾼, 매독환자 교황들을 임명하셨겠는가? 교황직을 돈으로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라고 우길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일국의 왕이 교황을 교체시킨 적도 있었는데, 그 때는 왕이 하나님이 된 것인가? 또 유부녀와 간통하다 발각되어 그 남편에게 맞아 죽은 교황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천주교의 수장인가? 사람들이 모여 교회의 대표자를 선출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임명으로 허위 가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악이 아닌가? 또 천주교는 264대의 하나의 교회, 교황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단이란 죄명으로 얼마나 많은 신도들의 고귀한 생명을 처단하였는가? 이는 무죄한 자들의 피 위에 세워지고 유지된 부끄러운 제도이다. 범죄를 저질러도 고해성사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범죄를 무죄화 또는 정당화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살인을 하고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은 순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열 번 살인을 하고도 열 번 고해성사만 하면 만사를 용서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범죄를 장려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고해성사를 해준 신부가 마치 그가 사람의 죄를 사하는 신권(神權)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며 기만이고 위선인가? 그 위선과 죄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한 위선을 천주교는 약 2,000년 가까이 계속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신도들의 수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 위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해성사 제도의 문제점은 T.R 이바라의 저서 <기독교인>에서 “기독교인이란, 토요일에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에 또 하려는 사람이다”라고 한데서 더욱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해성사의 또 다른 문제점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는 용서가 주어지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하고는 성직자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한다면 그 성직자는 그에게 아주 값싸고 단순한 처방을 준다. “당신은 강간을 했으니 연보통에 10달러를 넣고 아베마리아의 기도를 다섯 번을 드려라. 그러면 그대의 죄는 말끔히 사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토록 자비로우시다.” 그 남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범죄자는 용서를 받지만 그 피해자는 어떻게 되는가? 기독교전체에서 그 사람의 범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단 한마디도 없다. 그 사람이 또 죄를 저지르면 그에게 필요한 일이란 다시 성직자에게 가서 고백하고 약간의 돈을 기부할 것이고 그러면 성직자는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그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 용서받을 뿐이다.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 대한 언급도 없다. 죄를 저지르고 고백하면 용서해 주는 자비로운 하나님일 뿐이다. 그 사람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다. 아마 하나님은 범죄자의 편이지 피해자의 편은 아닌 듯하다.

 

▣ 천주교의 ‘교황 무류설’(敎皇 無謬說)

역시 천주교의 ‘전통’인 ‘교황 무류설’(=敎皇 無誤說)을 보자

교황이 교황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앙이나 도덕 또는 교리에 관하여 선포한 내용은 절대로 틀림이 없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이거야말로 커다란 미신이 아닐 수 없다. ‘교황 무류설’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은 많다.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여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참고로 1998년 3월 1일자 「파수대」에 의하면 현 교황은 94회에 걸쳐서 천주교의 과거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죄를 구하였다고 하니 현 교황조차 교황무류설을 부정한 것이 아닌가?

 

▣ 기독교와 샤머니즘

히브리 종교가 솟아 나온 모든 출처는 귀신신앙으로 만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가 급성장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히브리 종교적 성향과 우리민족 특유의 강한 샤머니즘적 성향의 강한 공감대 형성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현세에서 힘들더라도 잘 참고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을 하자는 것이지만, 교회에 나가 병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가정 화목하게 해달라고, 아들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등 현재 살아있는 동안에, 즉 현세의 복을 비는 것은 사실 말만 기독교지 샤머니즘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성령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무속에서 바라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이들과 축복을 위해서 재수굿이니 병굿을 안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그 신학적 구조면에서는 동일한 형태의 것이다. ‥‥‥ 결국 성령의 이름으로 무속 행위를 하고 잇는 것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하는 신학적 우려를 낳게 하는 것이다. 성령 운동자들의 설교나 교인들의 신앙형태를 살펴 볼 때, 그 동기나 요인이나 목적에 있어서 샤머니즘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치병자나 추종자들은 자기의 치료방법이 샤머니즘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극구 주장한다. 그 근거로 예수님의 피와 능력,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유된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그런 단어만 제외한다면 그들의 치료 방법은 그 원리가 대부분은 샤머니즘의 것과 동일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 한국의 교회는 우리 민족문화적 입장에서 볼 때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본다. ........ 기독교가 이 지구상의 선교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짧은 시간의 가장 큰 양적 팽창을 한 기적적 케이스 중의 하나가 한국기독교라고 한다면(일본에서만 해도 신구기독교인이 함께 인구의 1%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하라), 그러한 기적이 외재적 물리적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역사의 내재적 이유에서밖에는 찾아질 수 없다는 시각의 방향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곧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한국인의 전통적 종교의식과의 사이에 특수한 친화감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오늘 한국기독교의 샤마니즘적 현상을 한국기독교인의 타락이라고 한국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책임을 지고 그 문제를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불트만이 말한 대로 예수의 자기 이해가 신화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예수는 무당이다. ...... 나의 무당이라는 용어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대체로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이분법에 틀을 박고 있다고 생각된다. 허나 이따위 또 하나의 신화는 인류학, 언어학, 비교종교학, 문화철학의 발달로 이미 옛날에 깨졌다.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구분은 신관(유일신-다신)으로도, 세계관, 우주관, 윤리관 등의 어떤 기준으로도 불가능하다. 즉 그 하나의 논리를 지속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저등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이미 그는 저등이라고 한 현상에 대한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이것은 근대화 개념과 함께 인류사에서 불식되어야 할 거대한 편견이며 기독교문명의 우월의식이 낳은 독단이다. 이런 종교사학적 운동은 시카고대학에서 계간되고 있는 『종교사학잡지』(History of Religions)라는 격조 높은 학술지에 의하여 영도되고 있다.

나는 모든 종교현상의 원초적 충동은 고등이라고 하든 저등이라고 하든 모두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어떤 인간의 의식형태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원시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비샤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道家(老莊哲學)의 자연주의 철학도 샤마니즘과의 관계를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도가 계통의 사상가들이 대개 巫에서 나왔다는 것은 쓰마치엔(司馬遷)이 이미 밝히고 있다. ........... 중국에서 BC 3세기경에 漢醫學이 엄청난 규모와 체계를 갖추고 등장하게 되는 경로도 이 巫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의(醫)라는 글자의 윗대가리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巫의 추한 모습을 묘사하는 象形이다. 그리고 밑변은 술(酒)이다. 醫는 곧 술먹고 춤추며 병을 고치는 무당의 모습이다. 침을 탁탁 뱉아 흙을 이겨서 소경 눈에 발러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는 예수(요한 9:6~7)의 모습은 바로 이 무의(巫醫)의 모습이다. 이러한 무치(巫治, faith-healling)는 예수시대의 팔레스틴의 예수류의 무의에게서나 중국의 상고(尙古)시대의 무속이나 오늘날 말썽을 빚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도원이나 보스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미쎄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크리스챤 싸이언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문화의 주요 패턴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엘리아데의 비교종교사적 공헌에 의하여 더 이상 샤마니즘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견된 소수민족의 특수종교현상으로만 국한해서 보지 않고 전인류의 보편적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찰모시스:스러져가는 하나님』(Zalmoxis:The Vanishing God)이라는 역저 속에서 카스피해 연안의 동구라파 민속종교, 희랍세계, 인도-아리안, 휘노-우그리안, 알타이안, 몽고, 스라브, 북아메리카 인디안 등등의 모든 종교의식과 형태가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의 틀 속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철학사에서 알고 있는 파르메니테스나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가 바로 무당이라는 점 또한 희랍철학의 대가인 구트리(W.K Guthrie)를 위시하여 모리슨, 버케트 등등이 밝히고 있다.“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지배하고 있는 희랍사상이나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예수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이스라엘(헤브라이)사상이나, 그리고 또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을 지배하고 있는 무교(무당종교)사상이나,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인간의 종교적 상황을 좀 다른 언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플라톤의 동굴비유는 올페이즘에 근원을, 예수생애의 죽음과 부활의 비유는 영지주의(그노스티시즘)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 양자는 모두 지중해 연안의 토착적인 민속신앙의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동일성을 이해 못하면, 왜 어떻게 해서 중세기에 희랍사상과 기독교가 결합이 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합이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아퀴나스의 사상을 잉태시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서양문명의 성격을 규정짓는 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헬레니즘(희랍사상)과 헤브라이즘(유대사상)에 대해서도 서양사람들은 너무 양문화의 차이만을 확대해석했지 그 근원적 동일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올페이즘이나 영지주의나 우리말로 하면 동일한 굿놀이 종교입니다. 이 굿놀이는 모든 인류사회에 공통된 것이며 인류의 원시적 상황에 매우 근원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동굴의 비유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사슬풀린 죄수가 암흑에서 빛으로 나갈 때 눈이 부셔서 상당기간을 고생하여 적응하게 되고, 또 빛에서 어둠으로 들어갈 때도 갑자기 컴컴해져 동굴 속의 상황에 눈이 다시 적응하느라고 곤욕을 치르는 장면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암흑에서 빛으로, 빛에서 암흑으로 전이(바꿔짐)되는 고통을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무병(巫病)이라고 하고, 민속종교학에서는 넓은 의미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을 마귀에게 시험받으며 고통당하는 것도 일종의 무병입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어둠의 동굴 속에서 백일간 고통을 당하는 것도 동일한 유형의 무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병이 끝나면 신어미가 신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내림굿이라고 하는데, 내림굿은 바로 이 이니시에이션의 의식의 전형입니다. 예수가 세례요한한테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에 고유한 내림굿의 이스라엘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내림굿을 통하여 만신에게 신의 계승자임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경우에도 세례요한이 세례를 행할 때, 하늘이 갈라지며 신(성스러운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마가」1장 10절). 우리나라 내림굿에서도 이러한 장면의 묘사는 보통 있는 일입니다. 신이 내려온다고 해서 보통 강신(降神)이라고 말하지요.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복음」이며,............ 플라톤의 동굴비유 곧 그의 이데아론은 사실 알고 보면 우리나라 무속신앙과 동일한 토착신앙(샤머니즘)의 기하학적 표현입니다. 희랍에는 피타고라스라는 무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기하학주의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하학주의는 파르메니데스라는 무당의 철학에서 매우 강화되었고 플라톤은 바로 이 무당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계승하였습니다(피타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무당[샤만]이었다는 사실은 민속학자 엘리아데의 고증에 의함). ............. 예수생애에 관한 신화적 기록도 알고보면 이러한 샤마니즘의 예언자적 표현입니다. 유대민족에게는 예언자를 통한 신권정치의 전통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무당신앙은 이러한 샤마니증의 자연주의적 표현입니다. 빛과 암흑의 세계가 이원성을 가지면서도 우주 전체 속에서 용해되고 있는 좀 특수한 종류의 샤마니즘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이 하는 “방언”문제를 살펴 보자.

다음은 “방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이다.

“우리나라 교회에는 혓바닥의 괴상한 진동에서 생기는 요상한 공기의 떨림을 “방언”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신령한 것이라 하여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하고, 돈을 갈취해 먹는 파렴치한 도둑놈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일상언어 체계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어떠한 음성적 진동도 방언으로 간주될 수 없다. 사도행전 2장에서 이야기하듯, “방언”이란 “외국어”나“지방말”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여러나라에 전파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이 무교육자들에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권능을 준 사건을 말하며 나는 지중해 연안처럼 제각기 다른 언어가 교차되고 있었던 특수 상황을 생각할 때 가능할 수도 있었던 어떠한 사건을 “오순절 교회”의 사건으로 성서의 기자는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한글개역판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텅(tongue)"을 모두 "방언”으로 번역한데 반하여 공동번역판은 그것을 문맥에 따라 “외국어” “자기네 지방말”“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자기네 말”로 바꾸고 “방언”이란 말을 아예 없애 버렸다. 탁월한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언”은 문자 그래도 “사투리”이며, 한글개역판의 번역자들도 요새 교회에서 쓰는 의미의 “방언”이 아니라 “사투리”란 의미로 즉 “지방말(local language)"이란 뜻으로 ”방언“을 썼던 것이다. 요새 성령파 교회나 기도원에서 울려나오는 ”방언“은 백치 아다다의 말도 못되는, 사투리도 아니고 지방말도 아닌 도둑놈의 발광이다.”

“ 방언은 미국과 캐나다의 언어학자들이 150개의 원시인들의 언어와 25개 국어를 가지고 따져본 결과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으며, 일종의 퇴보적 언어 행위로서 유아기에 말 배울 때 응석부리거나 울면서 하던 말과 비슷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방언 현상은 사회 계층면에서 하류 내지 중하류층에 빈번히 일어나며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에 흔히 있는 것으로서 병에 시달리고 사업에 실패하고 살림에 쪼들리고 시어머니의 미움과 남편에게서 수모를 받고 사는 여인네들의 맺히고 쌓인 깊은 한을 기도로서 울고 불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가운데 방언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 방언, 예언, 입신, 투시 등등은 분명히 신기한 일이다. 아직 인간이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영역의 일들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신비들은 종교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지, 결코 기독교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 유아기 고착의 종교

 

믿음뿐인 교리는 유아기 고착의 종교를 만들어 낸다.

 

그대는 왜 신을 <아버지>라 하는가? 그리고 왜 <어머니>라고도 하는가? 이것은 유아기 고착이다. 유아기때 그대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대는 언제까지 부모에게 기생충같은 존재로 남을 것인가? 25살.... 그때까지 그대는 대학을 졸업하겠지만, 여전히 기생충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대가 독립하기를 원한다. 자, 지금이 바로 독립할 때다.

그러나 25년 동안 아무 생각없이 그대의 부모들은 단 한가지만을 가르쳐 왔다; 의존하라.

지금 그대는 세상에 던져져 있다. 그대의 온 정신은 그대를 구해줄, 예수와 같은 구세주를 요구한다. 그대는 양이 될 준비가 돼 있고, 양치기가 필요하다. 그대를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걱정하지 말아라. 단지 나만 믿어라. 그러면 내가 너를 구해줄 것이다. 내가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 신은 전지전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신이 수억의 사람들을 돌보겠는가? 그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곳에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확실히 성직자는 인간의 이러한 의존성을 이용하여 인류를 착취한다. 성직자는 위로의 마술사이다.

종교는 사업이 되었다. 그대들이 의지처를 찾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10달러 내고 아베 마리아 기도를 5회 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짐을 지지 않게 된다. -그것은 또다른 강간을 저지르기 위한 짐벗기일 뿐이다. 그것은 너무나 싸다.

그래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신과 직접 교통하지 말라. 그것은 죄가 되느니라!" 명백히 그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성직자는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또 바티칸 은행은 어떻게 버터 나가겠는가? 그 거래총액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도 클 것이다; 1년에 수천억 달러-그리고 모든 돈은 마약성 돈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은행을 경영하는 한 주교에 대해 구속 영장을 내렸다. 그들은 검은 돈을 세탁한다. 그것은 가장 큰 마피아 조직이다. 그러나 바티칸, 겨우 8평방 마일밖에 안되지만, 그곳은 특권지역이며 교황은 카톨릭 교회의 우두머리(長)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바티칸의 우두머리이다.

이탈리아정부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정부는 그 사업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일단 그 사실을 안 이상 그는 결코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교황이 그 주교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는가? 그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그를 이탈리아 정부로 넘겨주지 않는다. 그리고 교황은 마약에 반대하는 이야기만을 계속 해댄다‥‥‥

교황은 모든 돈을 그의 여행에 지출하고 있다. 교황이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을 때, 800만 달러를 지출했다. 교황에 앞서 영국 여왕이 그곳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200만 달러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과연 어디서 이 돈이 나오는 것일까?

교황은 그 사업자를 이탈리아정부에 넘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주필에서 추기경으로 승진시켰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돈의 출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의 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하고,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 자신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대 자신의 근원에서 찾아라 . 나는 자유야말로 궁극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의 종교

 

최근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생했던 전쟁 때 세르비아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전파라는 미명하에 피를 섞어서 정화한다는 구실로 보스니아계 회교도들을 성폭행하였다. 기독교인들이 회교도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면 그들이 기독교인의 성스러운 피로 인하여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으며 구원의 백성으로 개조될 수 있고, 또 그로 인하여 태어나는 자녀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논리에서 여러 기독교인 남성들이 윤간하여 성은을 베풀었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이나 북중남미 침략 때에도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그 기독교인들은 강간 행위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복음 전파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기독교 세력이 전세계를 지배한다면 전세계 인구의 2/3나 되는 비기독교인 부녀자들은 모두 그런 기독교인들의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피로 정화하고 강간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종교가 될 것인데, 그래도 그러한 기독교만이 진정한 신앙과 구원을 보장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일부의 기독교인들일지라도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가 타종교, 타인종을 이방인 취급하고 스스로만이 선민임을 자처하도록 교육해 왔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한 우월감과 독선적인 배타성을 가진 기독교가 땅 끝까지 이르러 세계를 정복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기독교가 지금도 입을 열기만 하면 ‘세계 선교’,‘인류 구원’을 외치고 있으니 이는 인간의 인성과 종교의 기만과 죄악이 교차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적을 용서하셨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의 용서와 사랑의 가르침은 다 잊어버리고 기독교인 이외는 모두 적대시하고 살인으로 대응한 적이 있다. 즉 “타종교인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과 순종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한다. 정복자인 천주교인에게 순종하면 살 수 있고 거역하면 이단으로 처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주교가 4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였다. 북미를 침략한 청교도들 역시 중남미를 침략한 천주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타종교와 공존의 여지가 없는 종교였다. 이처럼 기독교는 타종교, 타종파와 공존할 수 없다면 결국 기독교는 인류를 괴롭히고 살상을 일삼는 종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종교가 우월감과 독점욕에 사로잡혀 타종교를 무시하고 정복하는 것은 침략행위이다. 영토나 재산을 약탈하는 것보다 타종교의 신앙을 부인하고 말살하려는 행위는 더 큰 죄악이다. 그러한 강제적인 정복의 심각성은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그 정복은 사회적으로 대립과 분쟁을 조장하고 결국 종교전, 즉 성전(聖戰)의 원인이 되어 인류를 고통과 신음 속으로 이끌고 가는 끝 없는 죄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지한 기독교의 선교운동과 세계 정복욕 때문에 지구촌은 실로 인류의 종말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독선과 배타성 때문에 타종교와는 물론 기독교 내의 자기 파 안에서까지 끼리끼리 흩어지고 분열되어 하나가 될 수 없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가 과거에 걸어 온 역사가 이를 사실(史實)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장로교는 제2차 세계대전(1945년) 전에는 하나의 교파뿐이었으나, 그후에는 기독교와 예수교로 분리되었고, 예수교 안에서도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었는데, 약 50년 후인 지금 현재 정부에 등록된 교파 수만도 128개나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200개가 넘었을 것이라고 하며, 교파 수는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이것도 지금까지의 기독교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이런 배타적인 종교가 인류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인류를 기만해 왔고, 또 계속 기만하고 있는 것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조찬선 목사의 다음의 솔직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 타종교와의 공존공영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위반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이러한 책<기독교 죄악사>이 중세기에 나왔다면 본 저자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을 것이다.

평화적으로 서로 공존공영하기 위하여 무엇이 중요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떤 한 종교의 성경구절이나 교리가 대다수인 인류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가? 하나의 종교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대다수의 인류를 배척, 차별, 학살, 희생시켜도 된다는 말인가?

과거의 종교 단체들은 언제나 필요할 때는 자기들의 교리를 수정하고 바꾸어 왔다. 앞으로도 필요할 때는 각자의 배타적인 교리를 수정해서라도 인류는 생존해야 한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종교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필요에 따라 교리를 수정해 온 것이 사실인데, 갑자기 앞으로는 수정할 수 없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 않은가?“

 

▣ 서구사회가 잘 살고 개화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가?

 

서구사회가 잘 살고 개화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 아니고 르네상스(문예부흥)를 계기로 기독교 신앙을 뿌리친 자유주의자,자연주의자,계몽주의자,범신론자,경험주의자,무신론적 실존주의자,박애주의자들의 끊임 없는, 목숨을 건 기독교와의 투쟁으로 인하여 사나왔던 기독교가 조금 양순해지고 개화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정치,경제,사회 등이 발전하여 잘 살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오히려 사회악을 조장해 낸 온상이라 볼 수 있다. 그 일례가 중세의 암흑시대이다. 조금은 양순해졌다고 볼 수 있는 기독교는 언젠가 다시 사나와질 잠재적 소질을 얼마든지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말세의 심판관이다. 서구가 기독교 때문에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기독교가 0.1%도 안되는데 잘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서구사회는 기독교적 독선보다는 범신론적 동양사상과 인간의 각성을 이야기한 불교에 많이 접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나라가 잘 사는 것은 식민제국주의, 침략주의와 원주민들의 희생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 침략자들이 그들의 땅을 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등의 만행이 없었던들 과연 오늘과 같은 번영이 쉽게 가능했을까?

 

▣ 기독교 죄악사

 

국내의 한 원로목사가 펴낸 자성록(自省錄)<기독교의 죄악사 上,下>는 과거의 기독교도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반성 뿐 아니라 교리 문제까지 지적하며 근본적 수정을 촉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자 조찬선(82) 목사는 일본 도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 이화여대, 목원대 교수, 전국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미국연합감리교 목사 등을 지낸 원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그는 "기독교의 죄를 폭로해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혁명적인 개혁을 통해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필자가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라즈니쉬의 기독교 비판내용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한 사람은 기독교 내부에서, 한 사람은 기독교 외부에서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차이는 존재한다. 조찬선 목사는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라즈니쉬는 기독교 자체를 날조와 왜곡의 역사 위에 세워진 거대한 미신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찬선 목사의 자성록을 들어 보자.

 

“ 사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무시하고 정복한 대표적인 종교였다. 예를 들면 천주교가 ‘선교 복음화’라는 미명하에 중남미 대륙으로 들어가서 원주민들에게 범한 침략,약탈,살인, 파괴, 그리고 정복의 죄과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또 원주민들이 쌓아올린 그 찬란했던 잉카(Inca)문명, 타이노(Taino)문명, 아즈텍(Aztec)문명 등을 말살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죄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곳을 복음화시켰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하지 않는가? 도대체 그러한 선교는 누구를 위한 선교였을까? 자기들의 영토확장을 위한 선교였을까? 아니면 진실로 원주민을 위한 선교였을까? 어떤 이유의 선교였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방을 위한 선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죄악은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자유는 존중할 줄 알면서도 타인, 즉 원주민들의 신앙의 자유는 부정하고 개종을 강요하였다. 청교도들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말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자유와 문명과 종교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이 서진(西進)하는 찬란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숲 속에 사는 야만인들에게 그들의 숲과 강과 땅을 빼앗은 것은 당연지사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주로 타인종, 타문화, 타종교를 폭력으로 정복하거나 말살하고 자기들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인, 강도 행위를 일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북중남미 원주민들의 오늘의 운명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원주민들은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종되어 가고 있다. 총칼과 성경을 들고 온 기독교인들 때문에 망해가고 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선교란 이름으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을 말살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도 무공해 자연 속에서 태평세월을 노래하며 그들이 쌓아올린 문화와 문명과 신앙 속에서 마음껏 행복과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문화나 문명은 서구인들의 문화, 문명처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살아남은 그들의 후예들은 지금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도 닮지 않고 속엔 야욕만 가득 찬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란 미명하에 끊임없이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비극인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대부분이 불행과 혼란을 가져다주는 종교의 역할을 했을 뿐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건설한 미국 땅에서 원주민들은 지금도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들어간 곳마다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진실로 고통과 박해와 죽음을 뜻하는 종교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30년 전쟁, 천주교의 개신교 말살작전, 종교 재판소, 기독교의 유대인 차별과 학대, 회교도들과의 충돌 등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전쟁과 충돌이 있었을 뿐 평화는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때문에 인류가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여 왔는가를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극소수의 예외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복음전파나 선교사업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천주교의 교황 체제와 조직적이고도 엄격한 명령 하에서 금력과 무력으로 타민족, 타인종, 타종교, 타영토를 강제로 정복하고 그 위에 천주교를 올려 놓은 것이 바로 천주교의 발전사요, 팽창사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개신교도 그런 면이 많다.

물론 그 과정에서 천주교가 행한 선행(善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단 그 공적과 죄악을 비교할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인류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 큰 죄악을 남겼다. 다시 말하면 천주교와 개신교, 즉 기독교의 발전은 주로 타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음을 사실(史實)이 증명하고 있다. 숫자로 나타난 중남미의 실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무력으로 그 세력을 팽창시킨, 호전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침략하였던 기독교는 예수 없는 기독교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또 처형하는 종교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자각한 기독교는 180。의 정책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피상적으로라도 평화, 사랑, 희생, 봉사 등을 앞세워 과거의 추했던 모습을 감춰버리고 미소 짓는 가면을 써야 했다. 짙은 화장도 해야 했다. 천하에 없는 선남선녀로, 또는 천하에 없는 미남미녀로 보이게끔 가장을 해야 했다. 신부와 수녀들의 우아한 옷차림이나 성직자들의 의상은 일종의 고차원적인 화장술이다. 마치 창녀가 숫처녀로 가장한 것처럼 사기극을 벌여야만 했다. 살인강도가 성직자의 가운을 훔쳐 입은 것처럼 어색한 연극을 연출해야만 했다. 전형적인 위선과 기만의 표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과거사를 모르는 대중은 물론 교육 미달의 성직자들까지도 그 가면에 속아서 기독교를 항시 사랑, 평화, 희생, 봉사의 종교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한 그들에게 기독교의 정체를 알려준 사람이 도리어 이단이요, 적그리스도라고 화를 낼 지경에 이르렀다. 조직적인 세뇌공작과 미소작전이 100%적중한 셈이다. 현상과 본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 자체는 ‘예수의 사랑’이다. 그러나 기독교역사를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사랑’의 정신과는 상반된 ‘증오’와 ‘탐욕’이다. 이는 전달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일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 일부가 기독교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콜럼버스와 천주교도들의 만행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는 악마 그 자체였다. 그를 수 차례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원주민들에게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았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천주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구실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고 타락한 영혼이기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으로 노예들을 합숙시켜 남자들은 금을 채굴시키려고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는 원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노예 부부가 함께 거하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여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식사는 잡초였다. 그들은 동물로 취급되었는데, 아이가 태어나 산모의 영양부족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복음전파보다는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살인강도집단으로 변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말살작전을 전개하였다. 또 살아남은 원주민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아 돈을 챙겼다. 이러한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일에 「성자」라는 칭호를 주자고 교황에게 청원서를 보냈다니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가?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백인천주교인이란, 곧 악마, 살인자, 약탈자, 배신자, 강간자라는 뜻밖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십자가는 살인마 집단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잡아 압제하고 고문하고, 약탈, 강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선교요, 복음화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같은 것은 없었다.

천주교는 대개 이러한 방법으로 세계 복음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1,500년도 초기에 유럽에서 온 천주교인들은 남미 페루 지방 일대에서 840~1,35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다. 그것은 그 지방인구의 94%였다. 또 그들은 16세기 중에 중남미에서 6,000~8,00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고 그 학살은 계속되었다.

기독교 침략자들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짓고 성경을 들고 기도하면서 선교하였다. 자기들의 침략 행위를 개척과 발전이라는 미명과 기독교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약 350년 동안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빼앗고, 1억 2천만의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북중남미를 정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책임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그렇게 무자비한 침략행위에 성직자들이나 교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하였는가 반성해야 한다. 더 많은 땅을 빼앗기 위하여 죄 없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돌아온 살인마들을 축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 문화와 종교 말살을 선두 지휘하고 잉카나 마야문명의 자료를 불태워 버린 행위나 강제 개종시켜 온 신부들이나 목사들의 죄를 누가 물을 것인가?

침략자들이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죄를 인류 전체에게 속죄하여야 한다. 특히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우수한 인종이지만 원주민들은 무식한 야만인이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당연하였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또 무식한 야만인에게 복음을 전달하여 천주교에 귀의할 수 있게 하여 주었으며, 선진 서구 문명을 소개하여 주었다는 변명을 지금도 계속하는 비인도적인 인간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양심 유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의 출정을 역설했던 성 버나드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 바란다. 악인을 처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악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종군하였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쓴 수기(授記)의 일부도 소개한다.

“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이것이 사랑과 자비와 희생정신으로 충만한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의 수기이다.

교황이 십자군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패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알라신과 여호와 신의 대결에서 알라신이 승리한 것을 뜻하지 않는가? 즉 회교의 신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보다 적어도 그 당시는 더 강했거나 유능했다는 증명이 된다.

또 만일 교황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말을 선포하였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뿐만 아니라 200년 동안이나 수많은 살인극을 연출하였으니 그 죄악이야말로 천지창조이래 최대 최악의 잔인한 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들도 전범재판에 출두하여야 된다는 말도 나옴 직하다. 그리고 교황무류설(교황무오설)은 자동적으로 무효화될 것이다.

 

▷ 청교도들의 죄악

 

앞에서 언급한 천주교도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원주민을 살상했다면 북미대륙에서는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역시 1억여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지금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결국 천주교도나 개신교도나 잔인한 침략, 약탈자 근성에 있어서는 피차 일반인 셈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듯이 청교도들 역시 처음에 북미 대륙에 정착하여 어려웠던 당시 원주민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들의 세력이 커지자 도리어 원주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악마로 돌변하였으니 그 점에서도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사교로 생각했던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원주민을 단순히 이단으로 취급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영혼조차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성직자들이 그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런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지침이 그들의 신념이 되었으니 그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중남미 지역에서의 천주교들과 같이 북미지역 청교도들도 그러한 철저한 종교적인 독선을 유일 절대적인 것으로 북미대륙에 정착시켰다. 기수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성직자들이었다. 여기서도 종교가 권력과 결탁해서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약 300년 동안 최소한 1억이상의 원주민들과 또 원주민들의 식량의 근원이었던 야생들소 6,000만 마리를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결국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나라를 빼앗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강탈하였다. 토지를 만인의 소유로 믿었던 에덴의 아메리카에 기독교 침략자들이 들어오자 낙원은 살인이 자행되는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쓸모 없는 지역을 수용소로 설정하여 살아남은 원주민을 수용해 버렸다. 현재 백인의 평균수명은 76~78세에 달하고 있는데, 원주민의 평균수명은 아직도 40세 중반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기독교인들은 총칼로 빼앗은 땅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을 위하여 약 300년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1,200~1,500만 명의 흑인들을 잡아와 주로 남북아메리카와 서인도지방 등에 팔아 버렸다. 노예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치부(致富)에 열중한 것이다.

이들이 학살한 원주민들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보다 몇 십배가 되는 엄청난 숫자인데 양심적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인정하지도 않고 문제삼지도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 원수들까지 찾아가서 추모하고 학살자들을 비난하며 재판까지 하면서, 왜 북중남미에서 희생당한 원주민들을 위해서는 찾아가는 사람도 없고 학살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들의 한에 맺힌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는 추모행사도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심판자는 왜 아직까지 이 사건을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 종교 재판

 

종교재판소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였다. 종교재판소에서의 처형 결과 2,000만명이었던 스페인 인구가 200년 후에는 60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고 하니 종교재판소의 횡포가 가히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11월 10일자「재림뉴스」(p2)는 천주교의 종교재판과 개신교 박해를 통해서 순교당한 신도 수를 약 5,000만 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개혁자들도 이러한 악행을 범하였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은 춤췄다고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했으며,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잘라 처형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시켰다. 이와같이 그가 종교법원에서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던 4년 동안 그는 76명을 추방하거나 투옥하고 54명을 처형하였다. 유명한 사건으로 스페인의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과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칼뱅의 저서『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제네바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 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칼뱅의 살인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정통을 내세우기만 하면 살인을 해도 되는가? 정통은 살인 금지의 제5계명보다 더 크고 중요한가? 칼뱅은 그 자신이 절대시하던 성경을 무시하고 ‘이단’이란 죄목으로 수없는 살인을 감행하였으니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한 게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칼뱅은 정통이고 세르베투스는 이단인가? 살인자가 정통인가? 이단인가? 결과를 보면 살인자가 기독교인을 죽인 것이 아닌가?

나와 다른 교리나 성경해석 등의 신앙체계를 가진 자는 모두 ‘이단’이라는 칼뱅식의 배타성과 독선의 결과로 오늘날 전 세계 개신교의 교파 수는 25,500개나 된다. 이 많은 교파가 ‘나는 정통, 너는 이단’이란 논리 하에서 서로가 대립, 배척, 반목하면서 이단과는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도 같이 드릴 수 없다고 거부하여 분열을 계속해 왔다. 기독교가 이와 같이 인류의 화합은 고사하고 기독교인들 자신들끼리도 끼리끼리 흩어지고 갈기갈기 쪼개져서 인류사회를 분열, 대립시키는 집단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은, 분열과 대립의 사회악을 조장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독선과 배타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지구촌은 지금의 북아일랜드처럼 교파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칼뱅은 개혁이란 업적은 남겼으나 동시에 교파분열이라는 씨를 뿌리고 배타적인 독선의 인습을 세운 과오를 범했다.

 

▷ 마녀 사냥

 

앞에서 라즈니쉬의 말을 빌어 얘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기에 약간만 추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마녀로 찍힌 여성들의 재산은 고문관들의 상금으로 주어졌다. 마녀 사냥은 고문관들에게는 손쉽게 재산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인간의 붉은 피가 금화, 은화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녀로 찍힌 여인들은 화형당하거나 아니면 냄비구이(뜨거운 냄비 속에 넣고 찜 쪄 죽이는 형벌)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16세기 독일 농촌지역에서 마녀 처형은 사나이들의 호색적인 구경거리였다. 마을의 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줄을 이어 장이 섰고, 토산품집에서는 돗자리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완전 나체인 마녀들은 스트리퍼보다도 매혹적인 존재들이었다. 마녀 사냥이야말로 악마적인 행위 바로 그것이었다.

 

▷ 종교전쟁으로 인한 인류 살상

 

서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이 거의 모두 기독교로 인한 종교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청교도전쟁, 100년 전쟁,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 일어난 아일랜드 사태, 중동전쟁 등 끝없는 유혈 종교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고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세계의 모든 전쟁이 왜 하나님을 믿는 나라에서 일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인 성민(聖民)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걸 보면 여호와를 닮아서 그러는 것 같다. 하나님을 내세워 하나님 백성, 성민(聖民) 운운하며 잔악한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시키는 악랄한 행위는 어디에 비할 수가 없다.

 

▷ 고대 올림픽의 중단

 

올림픽이란 올림프스 산에서 제우스신을 제사지내는 하나의 제전행사(祭典行事)였다. 그러므로 여호와신을 믿는 기독교도들은 이단이라고 몰아붙여 올림픽행사를 중지시키게 된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국교로 정한 것이 391년이며, 그후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명으로 찬란했던 고대 올림픽이 단 번에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