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의 진실-이상훈 편저 9
▣ 신(神)관념의 발생과 발전과정
신(神)관념은 씨족신,부족신,지방신(민족신),세계신 등으로 발전하는데, 신(神)과 그 신을 모시는 씨족,부족,민족은 흥망성쇠를 같이한다.
신(神) 관념은 원시시대로부터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신 관념의 주류(主流)진화과정은 최고 원시적 신 관념인 씨족신으로부터 부족신, 지방신, 수신(首神), 국민적 유일신의 단계를 밟는 한편 마나(mana), 애니미즘(animism), 토템(totem) 등 방계(傍系)관념의 진화과정이 별도로 전개되면서 때때로 주류진화과정과의 사이에 혼선을 이루어 오게 되었던 것이다.
씨족신은 원시장로(原始長老)의 신격화로부터 비롯되며, ‘노인(老人)’ ‘부(父)’ ‘조부(祖父)’ ‘지도자’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稱號)가 대부분이며, 처음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태를 가졌다가 점차로 인격화되는 경우가 많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각 촌락마다 각자의 씨족신이 있어서 최초에는 동물의 형태를 가졌다가 후대에 가서는 인격화하여 민간의 숭배대상이 되었으며, 고대 셈족에도 가나안人의 각 씨족에는 선조(先祖)이면서 군주(君主)의 의미를 지닌 씨족신 ‘바알(Baal)'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보편적 신이었고, 헤브라이人의 씨족신 ’여호와(Yahveh)'나 페니시아人의 씨족신 ‘틔리안․멜카트’ 그리고 모하메트 이전 아라비아人의 씨족신 ‘알라(Allah)'도 모두 선조이자 군주이며 각기 씨족사회의 지도자였다. 이외에 셈족의 여러 씨족신 ’에아(Ea)' '벨(Bel)' '마르두크(Marduk)' '신(Sin)' '샤마슈(Shamash)' '이슈타아르(Ishtar)' '나부(Nabu)' '에슈문(Eshmoun)' 등도 모두 씨족신이었다. 이러한 씨족신은 중앙오스트레일리아의 아룬타족,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 멜라네시아人, 시베리아의 골야크족, 동아메리카의 난디人, 남아프라카의 즐루人 등 전세계에 걸쳐 나타난다.
씨족신 시대에서 부족신(部族神) 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각 씨족신들 중에서 가장 힘쎈 씨족신이 그 칭호에 군주(君主)․창조자 (創造者)라는 의미를 첨가하여 더욱 발전하는 한편, 인지(認知)가 발달하고 생활양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각 씨족신, 동물신, 자연신의 세 가지 신관념이 분과화(分科化), 기능화(機能化)하게 되면서 인간생활이 미세한 부분까지 섭리를 행하게 되어 실로 신관념의 발달이 극도에 달하게 된다.
부족신 시대에서 분화발달의 극에 달하였던 신관념은 지방신(地方神)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리(整理)․간소화되기 시작된다.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그 예를 다 들 수 없고, 잘 알려져 있는 ‘제우스(Zeus)신'과 ’여호와신‘에 대해 알아 보자.
‘제우스’도 최초에는 인격(人格)의 보통성질을 구비한 야만인의 추장(酋長)으로 나타났었다. 이것은 제우스도 그리이스인의 원시추장을 신격화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제우스는 그리이스 여러 지방의 주신(主神)이 되어 점차 다른 신들의 기능을 흡수하고 그 토지 또는 기능으로부터 유래한 여러 가지 칭호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여러 신들과 인간의 부(父)가 되었지만 아직 유일한 세계 창조자는 되지 못했었다. 제우스의 도덕적 성격이 서서히 상향 발전한 사실은 문서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호머(Homenos)의 시(詩)에 의하면 제우스는 아가메논의 지적, 도덕적 성질을 가장 많이 구비한 보편화한 아가메논이었다. 제우스가 어느 때에는 충동과 감성의 동물이었고 어느 때에는 사려있고 위엄있는 지배자였었다. 또 핀더나 BC 5세기의 비극에서는 세계정의와 질서의 대표자가 되고 후대에는 전세계의 선사(善事)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리이스인의 정치적 권위 관념을 표현하여 그리이스 신화 중에 나타난 일신교의 관념에 가장 근접한 신이 되었다.
한 신(神)으로서 질서적으로 진보하여 저명한 대신(大神)이 된 가장 명료한 예는 헤브라이의 ‘여호와’에게서 볼 수 있다. 이 신은 본래 아라비아 북경(北境)에 거주한 어느 부족의 신이었던 것을 헤브라이人이 채용한 것인데, 헤브라이인의 특수한 품성과 결부하여 발달하였다. 최초에 이 신은 도덕적으로나 지적(知的)으로나 조야(粗野)했었는데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윤리상으로 고상한 신이 되었고 또 만능의 신이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이 신은 다른 여러 민족의 신보다 우월하며 가장 강한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시대의 헤브라이人들은 자연숭배의 다신교도였으며, 헤브라이인이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하는 일신교를 믿는 것은 모세때 이후이다. 헤브라이 역사의 각 시대에 있어서 그 민족이 이 신에 대해 가졌던 관념은 각 시대의 경제적 내지 지적(知的) 특징과 결합된 것이었다.
봉건국가가 붕괴되고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신관념도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전국민에게 동일신의 숭배를 강요하고, 혹 어떤 국민에게는 원지방신(元地方神)들의 명칭만은 허용하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일신(一神)의 신하로 인정될 뿐이요 전국민의 숭배는 일신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국민적 유일신으로 발전한 예로는 헤브라인人의 여호와, 아라비아人의 알라, 그리이스人의 제우스, 로마人의 쥬피터, 바빌로니아人의 마르두크, 페니키아인의 몰로흐, 시든人의 아수라레트, 모압人의 케모슈, 페르시아人의 아후라마즈다 등의 신들이 있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세력이 팽창해짐에 따라 제국주의가 세계역사를 장식하게 되자 신관념도 또한 그 영향을 받아서 국민적 유일신은 자국민(自國民)의 숭배에만 만족하던 종래의 태도를 일변하여 피정복국가의 신들을 배격, 정복, 말살하고 그 국민들의 숭배를 강요하며 또 종교의 홍보 방식에 의하여 다른 국민에까지 침투하여 세계적 유일신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전인류에 군림하려는 시도를 강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에서 큰 성과를 거둔 신이 ‘여호와신’과 ‘알라신’이다. 여호와는 오늘날 전인류의 약3할을 포섭하였고 알라는 약1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현대는 유일신들이 세계적 지위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결전장인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다음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도올논어 강의에서 말한 내용이다.
“ 유일신(唯一神)으로서의 신(神)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일치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이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유대민족에게도 다윗왕조 이래로 일신론이 굳어진다. 중국에서도 진시왕때에 와야 ‘상제’ 등과 같은 통일된 신의 개념이 생긴다. 그 전은 모두 다신론(多神論)이고 이 다신론(多神論)의 모체는 조상숭배이다. 모든 신은 족보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반드시 인간의 족보가 있으며, 역사적 영웅, 지배자, 종족의 추장, 전사의 혼령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추상화되어 보편적인 신으로 되어간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를 더 들어 보자.
“태초에는 하느님(여호와)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 센 하느님, 어떤 동네의 종족신(種族神)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6세기, 유태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귀양살이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한다.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쇄신하는 길뿐이다. 구약시대 세계는 근동(近東)을 중심으로 겨우 몇 백 마일 크기의 3층짜리 케이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즈텍문화라는 게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는 중국이 있는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세계가 바뀜에 따라 종교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성인들도 동초서초(東抄西抄), 이것은 여기에서 꾸어오고, 저것은 저기에서 꾸어오고 해서 소프트웨어를 꾸미는데 이것을 종교의 발전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도 그걸 읽을 수 있다.”
“히브리인의 하느님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라는 부족신(部族神)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다곤’이나 모하브 민족의 ‘체모스’와 같은 부족신과 싸우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6~8세기에 나타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1세, 예레미아, 이사야 2세와 같은 예언자들은 야훼는 히브리인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이며 모든 역사와 인류의 심판자라고 끈질기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후 하느님은 ‘신앙의 가족’에 속하는 동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이나 집단을 돌봐주는 하느님이 되었다.”
이제 신 관념에 대해 윤곽이 뚜렷이 잡힐 것이다.
태초로부터 인류는 높은 산과 강, 바다 등의 지형으로 분리된 전세계의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각기 그들 고유의 신(神) 개념을 갖고 살았다. 중동의 여호와신과 알라신, 이집트의 오시리스,호르스,이시스,라아 등의 신, 앗시리아 제국의 야스르신, 수메르의 아누신,엔릴신,엔키신,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신,에아신,아누신, 셈민족의 바알신, 바빌로니아의 마루두크신,아쉬타르신,엔릴신, 그리스의 제우스신,데메테르신,아프로디테신,아폴로신,포세이돈신,아르테미스신, 이탈리아의 주피터신,비너스신,마르스신,베스타신,야누스신,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 신, 인도의 파라브라마, 중국의 반고, 일본의 천조대신, 한국의 환인,환웅,단군 등 그 민족의 근간을 형성하기까지 숱한 신들이 있었으며, 전쟁에 의하여 타민족이나 부족에게 지배받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하느님들은 그 민족에게는 절대 유일신, 또는 다신적(多神的) 존재, 혹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 그 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힘센 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약한 민족에 의해 창조되었던 신의 이름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힘센 민족이 만들어낸 신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神)과 그 신을 모시는 씨족, 부족, 민족은 흥망성쇠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여호와신이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하느님 신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와 더불어 여호와신이 득세하면서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은 ‘하느님’하면 ‘기독교의 하나님’밖에 없는 줄 알고 있는 실정이다.
여호와는 바이블에 숱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일뿐이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유대인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구약을 보라. 타민족과의 전쟁에서도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유대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여호와신이 유대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유대교’는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도를 하지 않는 희한한 종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약은 일개 유대민족의 역사서요, 유대교의 경전일 뿐이지, 타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서이다. 온갖 대량 살육과 근친상간, 불륜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기록을 어찌 성스러운 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대학 철학과의 중국철학교수로 있는 아리엘 교수에 의하면 오늘날 랍비정통의 유대교에 있어서 제일의적인 것은 『탈무드』이지『구약』이 아니다. 『탈무드』야말로 유대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탈무드』야말로 그들의 구체적 역사와 생활의 원형이다. 그에 의하면 『구약』은 하나의 역사서이며, 중국의 『二十五史』나 한국의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이상의 권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역설한다. 그가 모든 유대인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경전에 대해 매우 비성서적(우리가 보통 쓰는 의미에서의 성서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실체와 유리된 허구의식 속에서 그것은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오히려 여호와신를 섬기는 다른 민족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가? 왜 예수도 유대인에게만 전도하려 했겠는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전도한 건 예수의 12제자가 아니라 예수가 살았을 때는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인 것이다.
2) 여호와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짓기 전에 하나님의 신이 지면에 운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설은 제사문서(창세기 1장), 야훼문서(창세기 2장), 제2 이사야, 욥기, 시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오는 곳은 마카비 2서 7:28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구약, 그것도 외경(外經)에 속하는 마카비서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 전체 교리를 결정하는 부분이 정해 졌으니 말이다. 마카비서에 나오는 한 귀절로 교리를 삼은 근본목적은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선하심, 그리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인들이 외경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정작 중요한 교리를 외경에서 취한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강조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어떠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사고,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야 된다는 사고가 바로 직선史觀의 시원론(始原論)이고, 이 시원론은 ‘이원론의 산물’이다. 기독교의 창조주神觀 또한 이원론이며, 시원론이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신의 존재증명인 ‘제1원인론’을 비판하면서, ‘하느님(제1원인)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주 신관에 쐐기를 박는 주장이 현대과학에서도 제기되었는데, 아인스타인 이래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은 <A Brief History of Time(시간의 역사)>에서 그 결론을 ‘태초의 시간 경계는 무경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만약 성서에 하나님이 있었다 해도 그 하나님은 할 일이 없는 실업자 하나님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현대 과학에서는 약 100억~150억 년 전에 ‘대폭발(Big Bang)’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떤 한 점, 즉 특이점(singularity)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원뿔의 꼭지점과 같은 특이점에서 말이다. 호킹은 이 특이점을 지구의 북극, 남극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주는 북극의 한 점에서 시작된다. 남쪽으로 감에 따라 북극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우주는 점차 커지는데 ...... 우주는 적도에서 최대로 커졌다가 다시 작아져서 남극의 한 점으로 수축한다. 그러나, 설사 북극과 남극에서 우주의 크기가 0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두점은 특이한 점이 아니다.” 곧 이 두 점은 시공간이 이어지는 점이라는 것이다. 원뿔의 꼭지점과는 다르다.
호킹은 동료 하틀과의 연구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주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다.” “만일 우주가 처음 생긴 어떤 시작점이 있다면, 이 우주에 창조자가 있을 거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시작이나 끝이 없이 늘 스스로를 변화시켜 간다면, 도대체 신이 설자리는 어디일까?”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다만 하나의 시공연속체로 본래부터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주는 창조된 우주가 아니라 영원히 열려 있는 우주이며 스스로 변화해 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열릴 때 신(神)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호킹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 창조주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신의 사망선고인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 동양적 우주관에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신관에는 무엇보다 ‘理(principle)'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우주의 변화원리, 창조원리에 대한 인식이 없다. 스티븐호킹의 말대로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히 열려있는 우주로 존재하며, 늘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는 우주이다. 그러한 변화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일까? 변화하되 그 변화하는 원리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시공간 속에 살고 있으나 그 변화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하는 길, 법칙이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일정한 주기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이러한 춘하추동(春夏秋冬),생장염장(生長斂藏)의 우주변화원리를 표현한 것이 주역(周易), 정역(正易) 등과 같은 동양의 역(易)이다.
서양의 창조신관은 유목민족의 사막문화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농경민족처럼 순환적 시간관에 대한 인식이 생길 수가 없었다. 동양문화가 싹튼 중심지는 농경문화이다. 사막문화와는 달리 농경문화는 자연의 春夏秋冬 변화의 이치에 대한 확연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양떼 앞에 서 있는 목자(牧者)는 자신을 양떼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목자는 어디까지나 양떼 위에 군림하는 초월자이며 그 초월자는 또 그 양떼에게 법칙을 주는 입법자이다. 그러나 식물과 인간은 모두 천지자연의 거대한 생명체의 유기적 일부로서 이해될 뿐이며, 식물에게 농부가 법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은 식물 나름대로의 내재적 법칙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목생활의 사유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초월성(transcendence)이 강조되고, 농경생활의 사유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내재성(immanence)이 강조된다. 유목민족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초월적 신만을 유일한 실재로 간주하는 사유를 낳기 때문에 , 그러한 하느님숭배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리되고 땅은 부정된다. 그러나 농경민족의 내재성에 대한 강조는 하늘과 땅은 내재적 전체로 이해되기 때문에 양자는 이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의 비가 없는 데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농사를 짓는 땅이 없이 하늘의 비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경문화에서 하늘성(남성성)과 따성(여성성)이 상보적 관계를 이루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필연성은 현대물리학이 얼마나 이러한 “상보성”을 중시하고 있는가 하는 데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유목민족에게서 목자가 양떼의 질서를 창조하듯이 우주질서까지도 창조한 창조주신관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땅이 철저히 부정되는 사막의 유목문화와 하늘과 땅이 동시에 중요한 농경문화 중에 어디에서 발생한 진리가 더 보편타당성을 가질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결국 유목민족의 이원론적 사유구조를 치유하는 방법은 결국 농경민족의 사유구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생명은 어떤 한 분이 만든 게 아니라 생명을 창조해 내는 법칙 생장염장의 理는 우주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속에 있는 그 이치에 의해, 모든 생명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신들도, 모든 성자들, 인간도, 모든 동물들 ,풀 한 포기, 먼지조차도.
▣ 직선사관과 순환사관
우리는 여기서 서양의 직선사관(창조-타락-종말)과 동양의 순환사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직선으로 인간세의 역사를 파악할 때에는 대부분 종말을 향한 어떤 가치관의 직선체계가 성립하게 마련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세는 좋아진다든가, 문명은 진보한다든가, 더 살기좋은 세상이 된다든가, 자유를 향유하는 계급이 더 많아진다든가, 자유의 의식의 점차적 증대가 이루어져서 좋다든가 하는 등등의 생각이 이루어진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사관은 이러한 기독교의 묵시록적 직선사관의 대표적인 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선사관의 병폐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직선으로 그 무엇을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은 반드시 그 역사의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가 역사 밖에 있게 마련이다. 그 역사 밖에 주체가 있어야 그 목표가 설정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그 목표에 의하여 일사분란하게 지배되고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밖에 있는 역사의 주체는 더 말한 나위없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God)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직선사관의 병폐는 역사 밖에 있는 역사의 허구적 목표를 향해 역사의 현실을 연역적으로 획일화시키며 너무 일률적으로 가치판단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무서운 독단에 의해 역사의 현실적 다양성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만들어가고자 했던 사회모순의 배경에는 분명 그러한 직선사관의 오류가 숨어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순환은 역사가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기독교문명 속에서 먹고 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체험이 본질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순환과 반복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일차적으로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중용』의 말을 빌리면 “시중(時中)”일 뿐이며 순환 그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반복적인 것일 뿐이다. 순환의 역사는 중용의 역사며 중용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자내의 밸런스에서 구하는 역사다. 직선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두지만 순환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안에 둔다. 역사의 목표란 현실적 인간에게 삶의 기준이 되는 이상(Idea)을 말하는 것인데, 이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영원한 이상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반드시 우리의 삶의 밖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죽어서 천당을 간다고 하는 생각은 나의 이상이 분명 나의 삶의 밖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확인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 있을 동안 나의 몸의 Input(밥)와 Output(똥)의 발란스를 취하여 완벽한 건강을 이룩한다는 것도 매우 일상적인 것 같지만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이상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것이다.
순환적 역사에 있어서는 역사의 목표가 상황적이며 자내적(自內的)이며 역사자체의 함수에 따라 역동적이다. 그리고 묵시론적 종말을 향해 모든 가치관을 일률적으로 휘몰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현실을 포섭한다.
돌아감이 없는 직선적 발전은 파괴일 뿐이요, 절망일 뿐이요, 단절일 뿐이요, 종료일 뿐이다. 그것이 헤겔의 오류요, 맑스의 오류요, 기독교 묵시론의 오류요, 사막문명권 사람들의 절망감의 오류인 것이다. ‘돌아감’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창조다. 돌아감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다. 이 돌아감의 창조를 헤겔사관에 빠진 자들은 정체(Stagnation)와 미개와 암흑으로 오인한 것이다. 발전을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미개한 자들이요, 암흑구덩이를 헤매는 자들이요, 유토피아의 신기루에 떠도는 가련한 유령들이다.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개명(明)하다, 밝다(明)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모르는 자들이 역사와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흉칙한 짓을 망령되이 일삼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앞을 향하여 계속 걸어간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은 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의 밖에서 바라보면 그 사람은 거대한 원의 궤적을 따라서 돌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직선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지니는 한계로 인한 근시안적인 착각이며, 우주만유는 초미시세계로부터 초거대세계에 이르기까지 순환으로 존재한다. 역사(歷史) 또한 통일과 분열의 연속이며, 순환이다. 새로운 왕조 또는 국가의 탄생기,통일기(統一期)(봄)-성장기(여름)-절정기(가을)-분열기,쇠퇴기(겨울)를 거쳐 또 새로운 왕조,국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관이든, 역사관이든 직선적으로 인식하기가 쉽다. 그러나 거대한 원(圓)의 극히 일부분을 잘라 보면 직선으로 보이는 것처럼 직선사관은 단견(短見)이며, 지극히 근시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신이 아니라 잔인한 신, 전쟁신이다..
+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엽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아라.[신명 7:16]
+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사무엘 상 15:3]
--> 여기서 여호와는 남녀와 소아(=어린이)와, 젓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명령한다 그러나 죽이는 것보다 약탈하는데 치중한 사울은 아말렛의 왕 아각을 잡아왔고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가져왔다. 이것이 하나님을 성나게 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사울은 결국 왕위에서 축줄된다.
어째서 젖먹이 아기들까지 죽여야 하는지는 여호와가 모세에게 내린 계율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 20장 5절]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죄인의 가족은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죽여서 대를 끊어 놓겠다는 실정법이 있었다.
성경속의 하나님 역시 그 당시 고대인의 사람들의 생각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매우 시대 착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젖먹이 아기까지 죽여야 하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만으로 내 부모와 형제들까지도 직접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한 야훼가 아닌가? 시대가 변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아으, 살 떨린다.
+ 어찌하여 이렇게 여자들을 모두 살려 주었느냐 ‥‥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두어라 ‥‥‥ 군대가 약탈해 온 전리품 가운데 살아 남은 것은 양이 육십 칠만오천 마리, ‥‥ 사람은 삼만 이천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이었다. 그 절반은 싸우러 나갔던 자들의 몫으로 돌아 갔는데 ‥‥‥ 나귀는 삼만 오백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예순 한 마리였다. 사람은 만 육천 명인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헌납된 사람은 서른 두 명이었다.[민수기 31:17~40]
+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실 땅을, 현재 차지하고 있는 민족들을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소탕해 주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그 성읍과 집에서 살게 되거든 .... [신명19:1]
+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하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로 삼아 부려라. ‥‥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붙이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말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 20:10~17]
+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에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 있어도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21:20~21]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굽 21:24~25]
+ 너희 가운데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 내는 사람이나 점쟁이가 있으면,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을 돌로 쳐라. 그들은 제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레위 20:27]
+ 이복 형제, 동복 형제 가릴 것 없이 너희 어느 형제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품에 안긴 아내나 너희가 목숨처럼 아끼는 벗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너희와 너희 조상이 일찍이 알지 못한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고 가만히 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 그런 사람을 애처롭게 보지도 말고 가엾게 생각하지도 말라. 감싸 줄 생각도 하지 말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죽일 때에는 네가 맨 먼저 쳐야 한다. 그러면 온 백성이 뒤따라 칠 것이다. 돌로 쳐죽여라[신명 13:7~11]
+ ....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신명 7장 1절~5절]
--> 단군상을 부수는 목사들이 일부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 성경을 보니, 그들의 행위는 철저하게 성경말씀대로 행한 것이 아닌가?
+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 [신명13장 13절~16절]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신명20장 13절~17절] --> 이방인 남자는 전부 죽이고, 여자와 재물은 약탈하라는 여호와 말씀이다. 하지만 신명기13장에 있는 약탈한 물건은 전부 태워버리라는 구절과는 정 반대 된다.
+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 [베드로후서 2;04] --> 천사의 죄도 용서한지 않았는데 과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까? 하나님은 용서의 신이 아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더니" [사사 20장 23절] --> 자신의 형제와 싸우라고 오히려 신이 시킨다. 화해와 용서가 아닌 자신에게 거역하면 전쟁으로 모두 휩쓸어버리라는 것이 구약속의 여호와인 것이다.
* 또한, 모세의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유대인만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유대인을 풀어주지 않자 하나님은 분노하셨다. 그리고 그 분풀이로 파라오나 이집트의 어른들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이집트의 천진난만한 갓난아이들을 죽음의 역병을 풀어 모두 죽여버리시는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다. 전 이집트의 집집마다 죽어버린 아이를 부둥켜 안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눈물을 흘린 파라오는 유대인에게 굴복하여 그들을 떠나라고 말하게 된다.[출애굽 11장~14장] --> 이런 장면은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신이다. 그러나 이집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잔인한 신이다. 우리는 제3자의 눈으로 공평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희한하게도 유대인의 입장에서만 본다. 그러니 한국 속의 유대인이라는 표현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이 외에도 죽이라는 얘기가 너무도 많다.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 등의 경전을 보면 신이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Bible을 보면 마귀, 사탄이 사람을 죽이거나 저주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다만 사람을 유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에 반해, 여호와神은 오히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저주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여호와는 사람을 자신이 만든 물건 이상으로 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워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뜻으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그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대량학살을 하고 있다. 예레미아 18장, 19장을 보면 예레미아가 여호와에게 원한을 갚아달라는 저주의 기도를 드리고, 이에 여호와는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하면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는 끔찍한 말을 하고 있다. 말문이 막히면 비유와 상징을 들먹이는데 죽이고 저주하는 일을 무엇으로 비유하고, 어떻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랄 것인가?
☞ 『구약』에 나타난 신이 한 일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신은 한 번은 자비를 베풀고 아홉 번은 분노하였고, 한 번은 사랑을 주고 아홉 번은 저주나 살인을 하였다.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야를 대머리라고 놀려 대자 엘리야는 그가 모시고 있던 신,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고 그러자 암곰 두마리가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인다. 출애굽할 때 이집트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다고 이집트 온 집안의 맏아들을 죽였는가 하면, 이집트에서 탈출한 7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다 주겠다고 해놓고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만들고 그들이 불평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들의 자식만 빼고 모조리 죽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주기 위해 그 곳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무 죄 없는 다른 민족을 모조리 죽였는가 하면, 자기를 욕했다고 죽이라고 시키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고 돌로 쳐죽이라고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고, 어떤 때는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사제들을 불살라 죽이고, 적들과 싸우다 빼앗겼던 십계명을 써 넣어둔 언약궤가 자기들 눈에 보여서 보았을 뿐인데 그 거룩한 언약궤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몇십명을 죽이고, 그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던 중 소가 뛰는 바람에 궤가 떨어지려 하자 어떤 사람이 궤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잡았는데, 그렇게 손댔다고 죽이기도 하였다. 기독교 초기에, 구약의 신은 신약에 나오는 신과는 영 다른 신이니 구약을 없애자는 종파가 생겨 소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는가 하면, 종교개혁 당시 어떤 사람이 루터에게 이 기회에 구약을 성경에서 아예 빼버리면 어떻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루터도 구약에 나오는 신이 신약에서 말하는 신과 다른 신이란 걸 알면서도 구약을 빼버리면 신약만으로는 경전으로 뭔가 부족한 것 같아 그냥 넣어두기고 했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루터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뒤에 <기독교죄악사>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천주교도들이 중남미의 원주민 수 천만명을 몰살시키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나, 청교도들이 북미대륙의 원주민을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하며 그 땅을 차지한 죄악은 바로 구약의 여호와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해 먼저 그 곳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무 죄 없는 다른 민족을 모조리 몰살시킨 것과 똑같은 정신구조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신은 부모형제, 자식도 다른 종교를 믿으면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신명13:7~11] 그러니 기독교도들이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원주민들을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몰살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만약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믿는 동양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면 기독교도들처럼 그렇게 원주민들을 몰살시켰을까?
다음의 김종성씨의 고백을 들어보면 구약이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나 교인들은 성경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며 믿으라고 한다. 필자는 한때 바이블을 외우려고 대든 적도 있었으며, 바이블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바이블이 긍정적으로 보일 때 필자 자신의 심성에 이상하게 잠재된 잔인성이 표출됨을 보고 놀랐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일 때와 이스라엘 백성이 싸움에서 이길 때, 나 자신도 모르게 무협지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블을 읽고 믿는 사람은 사나와지고 도전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왜 일반 신자들은 이런 걸 모를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신'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을 보면서도 어려워서 뜻을 이해하기 힘드니까 그저 성직자들이 가르쳐 준 대로 순진하게 믿기 때문이다. 과거 중세기에는 일반신도들이 Bible을 보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었는데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Bible을 가지고 있으되 Bible의 말씀은 따르지 않고 성직자의 가르침만 따르고, 교회의 가르침만 믿고 교회에서 보라고 한 책만 보고 있으니 ‘현대에 살고 있는 중세인’이라고나 할까?
기독교인들은 제발 눈을 뜨기 바란다. 목사가 설교시간에 읽어주는, 듣기좋은 성경구절만 편식하지말고,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라. 여러분이 추종하는 신이 어떤 신인지 제대로 보기 바란다.
☞ 안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밖으로는 저주와 폭력, 살인을?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가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무리 안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구약의 <신명기>를 보면 이방인의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를 전리품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고 있다 이방인은 죽여도 되고 간음해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과 자비는 무리 내적으로 무력과 비방은 무리 외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구에는 무리 외적인 이방인이라는 게 더 이상 있지를 않다. 오늘날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전 인류사회를 향하여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공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구약의 신화가 폐기되어야 할 가 장 큰 이유 중의 하나다.
뒤에서 언급할 기독교의 수많은 죄악사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이면을 보면 바로 “안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밖으로는 저주와 폭력을” 내세우는 구약의 정신에 중독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Bible은 왜 어려울까?
지금의 Bible(한글개역판)은 이조末에 번역된 성경에 지금의 맞춤법이나 문법에 맞게 약간씩만 수정해 놓은 것으로 지금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온통 어려운 한자말과 고어투성이로 되어 있다.
▷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 ‘상관’은 ‘호모 섹스’를 뜻함.
▷ 팔레스타인 사람의 양피 100개를 가져오면 사위를 삼겠다 --> 여기서 ‘양피’는 남근의 가죽이다
▷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 야곱이 거기서 밤을 세고
▷ 너희가 벽돌을 여수히 바칠지니라 --> 너희가 벽돌은 똑같은 수량을 바쳐야 한다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한개)[마가 5:29] -->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공번)
▷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한개) [시편82:1] --> 하느님께서 신들을 모으시고 그 가운데 서시어 재판하신다. (공번)
의사들이 처방전에 ‘아스피린’이라고 쓰면 될 것을 Acetyl Salicylic Acid라는 화학명을 써서 보통 “ASA"라고 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스피린이라고 쓰면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고 ”ASA"라고 쓰면 못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러함으로써 나의 진단과 치료가 결코 아스피린 한 알 먹어서 해결될 정도의 시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위장할 수 있고, 그래야 돈을 받아먹고 살 수 있고, 또 그래야 그들의 의사로서의 권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ASA"를 아무리 아스피린으로 풀어써도 인간의 질병에 대한 의사의 침범할 수 없는 특수영역은 남는다. 의사들은 단지 너무 부당한 정치 사회적 권위까지 점령하고 고수하려는 병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들이 쉬운 ‘공동번역판 성경’보다는 어려운 ‘한글개역판 성경’을 고집하는 것은 의사들의 이러한 심리도 포함하여 복합적이라고 본다. 어려운 한자 고어투의 성경말씀을 써야 뭔가 고상하고 위엄도 있을 것이며, 신자들이 물어 보면 대답하면서 권위도 세울 수 있고, 한 번 다 읽어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복음서끼리의 모순과 오류에 대한 골치 아픈 질문도 피할 수 있고, 간통, 강간, 근친상간 등의 불륜과 무자비한 학살 등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 등등 .... 중세의 성직자들은 왜 일반인들이 성경 보는 것을 금했을까? 지금의 성직자들은 왜 일반인들이 성경의 자세한 뜻을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순진한 신자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어려워서 도대체 글 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가르쳐 준 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직자들만이 읽고, 성직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라틴어 성경이라야 그들의 권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라즈니쉬는 “구약성서는 「플레이보이」「펜트하우스」보다 더욱 지독한 도색문학,388페이지에 달하는 X등급의 에로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모순과 오류투성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 사나운 종교, 피의 종교 - 기독교
왜 성경에는 그렇게 살인, 저주, 복수 등의 얘기가 그렇게 많이 나올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수렵민은 죽이는 민족이다. 왜냐?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만나는 문화는 모조리 정복해 버리는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침략적인 민족에서 제우스나 야훼같이 벼락을 주무기로 쓰는 호전적인 신들이 나오는 것이다.”
기독교는 죽이는 민족, 즉 수렵민족, 유목민족의 신화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사람을 많이 죽여 온 것이다. 여호와신이 죽인 인간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여호와신을 자신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을 제외하고 다른 신을 믿는 모든 이방인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라고 명령하였다.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죽이라‘는 명령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봉자, 기독교도들이 세계 도처에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무차별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참으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역사이다. 그들끼리 구교니 신교니 하면서 싸워 죽이고 또 회교와 싸워 죽이고, 다른 대륙에 가서는 원주민들을 또 그렇게 많이 죽여 온 것이다.
라즈니쉬는 이 점을 너무도 잘 간파했다.
“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세계를 문명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예수그리스도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중국은 이미 문명화된 나라였다. 인도 역시 예수 이전에 벌써 수 천년 동안 찬란한 문명을 누려온 나라였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전기구를 버려야 한다. 도대체 그들이 문명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이 있는가?
자이나교나 불교는 최고의 고등종교들이다. 그들은 타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단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자신을 군병이라고 부른다. 군병들과 교회....? 확실히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사람을 많이 죽여 왔다. 기독교는 군대집단이다. 기독교인들이 한 일이라곤 세계를 문명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착취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는가? 그들은 사냥꾼들이 동물을 죽이듯이 원주민들을 죽이곤 했다. 그들은 게임을 즐기듯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거의 전멸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간 사람들은 다름아닌 영국에서 쫓겨난 범죄자들이었다. 그들은 살인, 강간 등 온갖 극악한 범죄들을 저질렀다. 그들이야말로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은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통령, 수상, 부자, 그리고 가장 근사한 문명인이 되었다. 바로 그들이 동물들을 대하듯 인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일들이 미국에서도 벌어졌다. 그렇게 큰 규모로는 아니지만 그 행태는 여전히 똑같다. 영국에서 쫓겨난 범죄자들이 미국으로 갔다. 그들은 두 개의 주를 발견했고, 그 주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들도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그리고 다른 유럽국가들에서 온 사람들은 미국의 원주민인 홍인종 인디언들을 전멸시켰다.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깊은 숲으로 쫓겨났다. 그곳을 보호거주지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단지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곳은 히틀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독한 포로수용소이다.
히틀러는 포로수용소 둘레에 전기가 흐르는 가시철조망을 설치했었다. 그런데 미국에 온 사람들은 더 한층 아름다운 방법을 동원했다. 먼저 그들은 대부분의 원주민을 살해했다. 그런 다음 소수의 원주민에게 연금을 지급했다. 원주민들은 삶의 조류에 뛰어들지 못하고 보호거주지에만 머물렀다. 그들은 교육의 문턱에조차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들은 땅을 빼앗긴 대신에, 많은 연금을 받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매우 문명화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원주민들은 연금은 받지만 일자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돈을 가지고 도박하고 술마시면서 그들의 삶을 탕진하는 일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은 연금을 타내기 위해 더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고 있다.
원주민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미국사회에 뛰어들지 못하게 한 것은 아주 교묘한 전략이다. 원주민들이 도박하고 술마시며 그들의 삶을 탕진하는 사이에, 그들은 미대륙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의식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전기가시철조망을 두르는 것보다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원주민의 삶을 박탈하였다. 원주민들은 자유를 위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다. 자유란 곧 연금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다물고 술이나 먹고 간음하고 도박하는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들 삶의 전부이다.
이주민들은 살인을 저지르며 많은 땅을 갈취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릴 요량으로 소수의 땅만을 구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땅의 소유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땅을 구매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뉴욕전체를 90달러에 샀다. 겨우 3백년 전에 90달러에 뉴욕전체를 사다니?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땅들도 뉴욕과 같은 방식으로 구매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땅에 대한 댓가를 지불했다고 만족하고 있다.“
“ 기독교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죽여왔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성전,십자군 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슬람교도들도 신을 위해 싸우는 그들의 성전을 <지하드>라고 부른다. 기독교는 구도자들이 아닌 군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예수교의 수도사들은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7세의 소년을 우리에게 달라.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충실한 군병으로 개조시킬 것이다.”
세계 도처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겨우 7세의 정신연령에 머물러 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7세쯤에서 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힌두교와 같은 신념으로 채워지고 그들의 지성을 모조리 상실해 버린다.
<그리스도의 군병>이란 말은 너무나 추한 말이다. 군병이 되려면 그대의 마음을 7세에 고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오직 뒤떨어진 사람들만이 충실한 군병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의문도 던지지 않고 다만 명령에만 복종할 뿐이다. 바로 모든 종교인들은 기발한 질문, 그 종교에서 대답할 수 없는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들을 원한다.“
기독교는 발생에서부터 전도에 이르기까지 죽음에서 죽음으로 일관되어 전도된 사나운 신앙교였다. 기독교(바이블)가 가는 곳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나 순교라는 거룩한(?) 죽음이 항상 따라 다녔다. 기독교가 발생하여 순교한 것은 그 당시 신에 대한 인식 이전에 로마제국의 박해와 탄압에 괴로움을 당하는 유대민족으로서 노예처럼 비참하고 처절하게 사는 것보다는 신의이름을 빙자하여 로마제국을 사탄(마귀)으로 몰아 부치고 투쟁을 신앙의 의식으로 승화시켜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순리적 적응이나 설득보다는 순교나 광신적 행위로서 전도되었든지 아니면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로서 전도된 사나운 신앙교라는 것이 사실이다.
4) 여호아는 정말 전지전능한 신인가?
◉ 보복하는 신
+ 모세가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너희 가운데서 싸우러 나갈 사람들은 나서라. 미디안을 쳐서 미디안에 대한 야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민수기 31:3)
+ 이스라엘의 강하신 이, 주 만군이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아! 내가 원수들을 속시원히 물리치고 , 적에게 보복하리라.” (이사야 1:24)
◉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신
+ “메로즈는 저주를 받아라”고 야훼의 천사가 선언하였다. “저주, 저주를 받아라. 그 안에 사는 것들, 저들은 야훼를 도우러 나오지 않았다. 야훼를 도우러 용사들과 더불어 나오지 않았다.”[판관기 5:23]
◉ 시험하는 신 - 전지(全知)하다면서 왜 시험을 할까?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세기 22:1-2)
+ 이 백성들이 조상들처럼 내가 가르쳐 준 길을 명심하고 바로 가는 지 시험해 보리라(사사기 2:20-23)
◉ 어리석은 신
여호와신의 판단능력을 잘 보시라.
+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데 한 사람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셈으로 손을 내밀어 상대편 불알을 잡았을 경우에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 버려야 한다. 조금도 애처롭게 여기지 말라.[신명 25:11~12]
또 「사무엘 하」 24장에는 다윗왕이, 여호와신이 시키지도 않은 병적 조사를 한 죄의 대가로 벌을 받게 되는데, 여호와신이 제시한 세 가지 벌 중에서 다윗왕이 선택한 벌은 전염병이었다. 이로 인해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백성들이 죽게 된다. 그것도 7만 명밖에 안 죽은 것은 여호와신이 인정이 많아서였다. 여호와신의 천사가 더 죽이려고 하는데 인정 많은 여호와신이 “이제 그만하면 됐다. 손을 거두어라.”고 하신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대로 병적조사를 한 다윗왕인데, 정작 벌을 받은 것은 아무 죄 없는 백성 7만 명이었다.
역시 사무엘하 11~12장에 보면 다윗왕이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자 여호와신은 이에 대한 벌로써 다윗왕의 부인들을 빼앗아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웃들과 동침하도록 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나온다. 죄를 지은 것은 다윗왕인데, 그 벌은 아무 죄 없는 그의 부인들이 당하여야 한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아무래도 이건 너무 멍청한 판단이 아닌가? 게다가 여호와신은 밧세바가 임신한 다윗의 자식은 죽인다. 그리고 다시 밧세바가 임신하여 낳은 자식(솔로몬)은 희한하게도 사랑한다고 한다.
여호와신은 다윗을 너무 편애한다. 너무나 관용적이다. 백성을 7만명이나 죽일 정도의 죄와 간통죄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만 죽인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Bible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윗왕의 죄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백성들 7만명과 다윗의 자식(솔로몬의 형), 그리고 욥의 시험을 위해 희생된 욥의 자식들과 노예들에 대해서는 보상은 커녕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시험을 하거나 벌을 내리는 것은 좋은데 왜 하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Bible에서의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인간일 뿐이다. 결국 성서란 인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란 한낱 파리 목숨일 뿐이다. 단지 하나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나의 시험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까?
하긴 도공(陶工)이 도자기를 박살내듯이 창조주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자기가 부수겠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 후회하는 신, 뉘우치는 신
+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어 마음이 아프셨다. [창세 6:5-6]
+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야훼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셨다가 후회하신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사무엘상 15:35]
+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사무엘상 15:10]
+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사무엘하 24:16]
사무엘상15장의 얘기는 사울왕이 모조리 다 죽이라는 여호와신의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 중에서 기름지고 좋은 것은 여호와신께 제물로 바치려고 살려둠으로써 여호와신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호와신은 사울이 왕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몰랐을까? 알았다면 후회할 일도 아닐텐데.......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왕이 저지른 죄 (병적 조사)때문에 여호와신이 백성7만명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고 나서 그것을 뉘우친다고 하고 있다.
여호와신은 홍수를 일으키기 전에도 세상 사람들이 패악한 걸 보고 사람을 만드신 걸 후회하였다. 그리고는 노아 가족만 빼고 모조리 몰살시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모두 다 착해졌는가? 여호와신은 여전히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보기엔 여호와신은 사람 죽이는 데에만 그 전지전능한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여호와신이 죽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