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9. 15:16

▶ 구약은 성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 유대화를 하여 유대교에서 갈려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아직도 기독교의 경전으로 되어 있다.

이점에 대해서 초기기독교시절부터 수많은 문제가 야기 되었으며, 종교개혁때부터 현대신학까지 구약이 과연 기독교경전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켜왔다.

 

AD 1세기의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게 있어서 구약성경만이 그들의 유일한 성경이었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과의 차이점도 부각시켰다.

예를 들면 구약의 희생제사 는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무효화되고, 공동체의 일원을 상징했던 할례는 세례로 대체되었다. 또한 구약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들은 점점 그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율법은 공동체를 통일시키는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구약과 신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은 일찍부터 기독교경전으로서 인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약이 철저하게 유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구약과 상당한 기간동안 긴장관계에 있으며 아직까지도 구약속의 끔찍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는 신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구약속에서 수없이 기록된, 이방인에 대한 입에 담기조차 힘든 여호와의 저주들, 지킬수 없는 유대인의 율법, 공정성을 상실한 여호와의 징벌, 등등 정상적인 이성에 의해서는 이해되어질수 없는 고대인의 기록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의 구약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 되었으며, 구약의 거부라는 극단적인 종파와 신학이론까지 등장하게 했다.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보기로 한다.

 

(1) 마르시온 (Marcion. AD 85~160년경)

초대 교회가 겪어야 했던 성경의 해석자들 가운데서 마르시온의 해석 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학파를 건설하는 데 불과했으나, 마르시온은 자칭 정통파 교회를 대적할 만한 교회를 세웠으며, 그 교인 숫자가 한 때 급격히 성장함으로써 자칭 정통파와의 대결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될지 그 결과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마르시온은 구약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약만을 정경화 시켜서 기독교를 탈유대화시키려고했다.

그는 영지주의자로써 물질세계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러므로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는 역시 악하거나 무지하다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에서는 율법이 선포되고 신약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이었던 반면에, 구약의 여호와는 복수심에 불타는 열등한 저질신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열등하고 저질스러운 유대잡신의 율법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저주와 전쟁, 피의복수 명령을 내리는 배타적인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구약의 여호와는 우주를 창조한 저급한 데미우르고스(Demiurgus :제작자)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수없는 하나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약은 열등한 신의 말씀이기에 교회에서 구약을 읽어서도 안되고 기독교 교육의 기초로도 사용해서는 안되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과격한 바울주의자로 구약을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열등한 신의 율법과 문서로 간주하여 결국 구약 전체를 거부한것이다. 그가 인정하는 정경은 그에 의해서 탈 유대화된 10편의 바울서신(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과 누가복음 뿐이었다.

그리고 소아시아 출신의 선주였던 그는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 1992년]

물론 그는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여러분들이라면, 구약속에서의 무자비한 폭군 여호와에 대해서 이해할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주장은 3세기에 와서 마니교(Manichees. 215~277)도들을 통해서 신,구약의 구분정신이 더욱 확대되기도 했다. 마니교도들은 모세에게 내려진 율법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암흑의 왕'이 준것이라고 주장했던것이다.[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3권 / 이동진역 / 문학수첩 P.317]

 

(2) 델리취(F. Delitzsch. 1850~1922)

저명한 앗시리아 학자였던 델리취는 두 권으로 된 '대 사기극'(Die grosse Taeuschung)이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다.

즉, 델리취는 이 책에서 구약의 내용을 사기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한 가장 중요한 비판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약의 역사서들은 그 서술방식으로 인하여 역사적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없다.

둘째, 위대한 예언자들을 비롯한 모든 중요한 인물들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

셋째, 여호와는 특정한 민족의 신으로서 도덕적 수준이 너무 낮은 저질스런 신이다. 따라서, 그를 우주를 창조한 창조신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넷째, 그러므로 유대교의 여호와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한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다.

다섯째, 예수는 유대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다.

여섯째,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은 예언이 쓸데없음을 보여준다.

일곱 번째, 시편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저급한 사상을 갖고 있다.

 

(3) 하르낙(A von Harnack. 1851~1930)

독일 개신교 교회사가 였던 하르낙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마르시온: 이방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Marcion: Das Evangelium von fremden Gott)에서 마르시온이 구약의 정경성을 부인하게된 것은 오로지 기독교적인 하나님 개념의 본질에 대한 자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 다른 저서에서도,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찬 바울적 복음서를 신봉하고, 구약은 진리를 반대하고 진리로부터 후퇴케 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하르낙은 정의했다.

구약은 단지 바울의 안티테제(Antithesis)의 형태로, 율법과 복음, 진노와 은혜, 행위와 믿음, 육과 영, 죄와 의, 죽음과 생명의 강력한 대조를 보인다.[A.Harnack / History of Dogma,]

그는 후에 신학적으로 유명하게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AD 2세기에 구약을 거부한 것은 오류였다. 당시의 중심 교회가 이러한 오류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16세기 에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종교개혁의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와서도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경의 문서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하르낙은 구약을 기독교 정경에서 제거하지 못한 것은 종교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았다.

 

(4) 불트만(R. Bultmann. 1884~1976)

불트만은 구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은 유대인들에겐 계시로 받아들 여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는 이미 흘러갔고 끝이 났다......즉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유산된 역사'(Geschichte des Scheiterns)이다.

이러한 역사의 유산은 특히 언약(Bund), 여호와의 왕권 통치 (Koenigsherrschaft Gottes) 그리고 여호와의 백성(Gottesvolk)이라는 영역에서 일어났다. 결국 이러한 실패가 일종의 약속이 되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약속이며 신약의 전제(presupposition)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이 불트만은 구약과 신약의 완전한 신학적 불연속성을 주장했다.

 

(5) 바움게르텔(F. Baumgaertel. 1888~1981)

바움게르텔의 경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부정적인 방식'(via negativa)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일차적으로 종교에 대한 증 언이고, 이 종교는 비기독교적인 종교이고, 구약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구약은 원래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구약은 복음 밖에 있는 종교로부터 온 증언이다. 따라서 구약은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은 기독교 종교와는 다른 자리에서 생긴 것이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구약은 오직 우회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증언이다.

 

구약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입장은 구약 성경학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신약성경학자들의 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필 하우어(P. Vielhauer)와 헨센(E. Haenchen)같은 신약학자들은 구약의 근본진술들은 그 본래의 의도로 본다면 기독교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린다스(B. Lindars)는 구약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며, 구약은 "오직 복음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재촉하는 종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그것도 그 길을 인도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구약이 (신약에) 인용된 것은 그것이 의도적인 진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첫 번째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았고 이 보다는 해석된 권위를 가진 것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학자들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으며, 신약의 수용에 의해서만 구약은 교회의 성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구약성경을 제거하자!

그럼, 구약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학계에선 그 동안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서 구약의 의미를 보전시키기 위하여 억지논리를 만들어 왔다.

이런 보수적인 신학계의 대표적인 모델 세 가지만 추려서 그 의미와 한계점을 간략 하게 검토하기로 한다.

 

첫번째는 약속(Verheissung)과 성취(Erfuellung) 모델이다.

특히, 신약은 구약을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특징 지운다.(롬 4:13-25; 15:8; 갈 3:14; 참조. 마 1:22-23; 요 19:24-25 등).

이 모델은 신약을 중심으로 구약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여러 약속들은 신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박해받고 있는 유대민족에게 축복을 내려주겠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수에 대한 예언이 전혀 없다. 다만,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왜곡시켜서 인용했기 때문이다.(8장의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 참고) 또 다른 문제점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왜곡시켜서 사용한 구약의 일부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구약들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두번째는 모형론(Typologie) 모델이다.

구약의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模型, Typos)으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하는 것이 신약의 원형(原型, Antitypos)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표현하며(롬 5:14), 고린도후서 3장이나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모형과 원형으로 대조시킨다. 또한, 모세의 출생시에 일어났던 유아학살과, 예수출생시에 일어났던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은 미드라쉬적 서술법으로 연관성이 있다. 즉, 예수의 출생을 모세의 출생과 비슷하게 기록하여, 그가 모세처럼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의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모형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전부를 이렇게 모형론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또한 한 사건의 본래적 의미를 넘어서서 그 사건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은 미래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세번째는 기독론 모델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예수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행했던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흔한 구약 해석 방법이다.

이러한 해석의 대표자 중의 하나인 피셔(W. Fischer)는 예수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지만 구약의 선포에 담겨 진 사상과 구약에서 설명된 사건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베커(J. Becker)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편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구약성경에서 예고되었고, 미리 묘사되었으며 (이미) 현존한다."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단정 짓는다. 이는 오래 전에 자콥(E. Jacob)이 "구약신학은 오직 기독론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창시자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 이었다. 이것은 앞뒤 문맥이나 사건의 내용 등은 고려하지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구약에 주석을 다는 일이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구약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배타적인 고대 유대인이 남긴 문서이다.

특히 구약이 저질스러운 이유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전쟁과 폭력을 명령하는 여호와,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 죄를 지은 사람과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혹독한 벌, 사소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죽여버리는 여호와, 불합리한 율법 ,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를 요구하는 여호와, 종교와 정치의 직접적인 연결.......등등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독교 정경으로부터 구약을 제거하자는 마르시온적 태도는 중세기부터 종교개혁과 현대신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성경이 반인륜적이라는 이유로 어린이 금서목록에 올릴 것을 주장하는 변호사도 있었다.

 

"토픽 - 獨변호사 성경은 어린이에게 불량도서: 독일 변호사 2명은 성경이 끔찍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런 내용이 삭제되지 않을 경우 어린이 금서목록에 공식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청원서를 크리스티네 베르크만 가족장관에게 2일 제출.

이들은 일부 학부모를 대리해 제출한 청원서에서 성경이 섬뜩한 일부 내용을 신의 뜻이라고 미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량학살, 인종차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 간음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잔인한 처형, 자기 자식 살해 및 기타 외고집 행위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

한편 뮌헨 가톨릭교회 관계자는 성경을 어린이 금서목록에 올려야 한다면 역사책이나 신문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며 이들의 요구를 터무니없다고 반박하고 이런 문서를 제출한 변호사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논평." [뮌헨 AFP=연합뉴스]

 

참, 재미있는 기사가 아닌가?

성경이, 특히 구약이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가득찬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르낙은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경의 문서로 보존 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구약이 제거되었을 때, 기독교의 케리그마(kerygma)가 상당히 빈곤해질 것이며, 창조신앙도 흔들리게 될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흔들리게 되면서, 어느종교를 믿어도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면 구원받을수 있다는 종교로 변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한다.(이슬람교도 이런 교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복음전파의 걸림돌이 되며 신자들이 줄어들게 될것이라고 두려워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 치고 발버둥 쳐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부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신교는 아직도 구약에 미련을 두고 성경의 무오성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구약속의 유대 민족신 여호와의 배타성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째서 유대인 제일주의의 선민사상, 즉 배타성으로 무장한 구약성경에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

또한, 비과학적인 창조주의 신앙을 버릴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구약을 버린다면, 다윈의 진화론도 신의 창조섭리로 받아들일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라고 필자는 충고하고 싶다.

필자는 본서에서 예수의 존재자체에 허구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가 허구의 인물이던 실존 인물이던간에 기독교가 배타적이지만 않다면 무엇을 믿던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약의 내용도 문제가 아주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자는 대체적으로 좋게 평가를 내릴수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모든이들 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훌륭한 가르침을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구약을 읽고 있자면 역겹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 기독교는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세계종교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 신약성경의 등장

초대교회시절에는 신약성경이 없었다.

또한, 당시의 교인들은 종말론적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 신약성경에 대해서 그다지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즉 ,초대 기독교인들이 성경(Scripture)이라고 했을 때, 이는 곧 구약을 의미한 것으로서 주로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역)라고 알려진 헬라어 구약성경을 의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짧은 경구들이 구전으로 전승되었고 사도들의 서신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구전시대라고 한다.

그러다가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기대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자, 각종 교파에서 신약성경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실제적 출현은 구전의 방법에서 기록의 방법으로 변하면서, 도마복음서와 같은 짧막한 경구와 사도들간의 서신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복음서, 행전, 계시록등 여러 종류의 많은 기독교 문헌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문서의 발굴로 인해 초대교회가 종말론적인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지녔고,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교파들,그리고 교파들간에 각각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들이 혼잡하게 난무했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바울의 서신들 뿐만 아니라 짧막한 구전의 전승들을 낭독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복음의 목록이 없었으므로, 교회에 따라 낭독하는 복음서들이 서로 달랐다.

각 교파마다 서로 다른 교리와 각각의 신약성경이 난무 했었기 때문이다.

 

신약문서의 첫 출발은 바울 서신이었고 가장 먼저 한 책으로 수집되기도 했다.

바울 서신들이 집성되어 발간된 장소는 AD 90년경에 에베소에서 된 일이라는 보는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얻을만한 역사적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두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를 매개로 해서 추리해 본 굿스피이드와 존 녹스의 가설이다.

그들은 빌레몬의 종 이었던 오네시모와 에베소 교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동일인으로 본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나왔을 때 객지에서 바울을 만나 바울에게서 아주 친근하고 많은 도움을 받게된다. 그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고나서 자기가 사랑하고 또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상전 곧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에 착수했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미국 침례교 학자 다나의 가설인데 바울의 사망이 그의 서신 수집의 계기가 됬을 것이고, 바울의 사망이 동기가 되어 다시 바울의 글을 읽게되고, 그것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구전에 의해서 전승되던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바울의 서신들보다 늦게 등장했다.

초기의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짧막한 구절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러한 가르침이 집대성 되서 도마복음서와 같은 문헌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학자들은 도마복음서가 초기의 복음서일것으로 추측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의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Q문서설인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때 이것을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Quelle)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예를들어, 도마복음서에는 예수의 행적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와 제자들의 문답을 담고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4복음서속에서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이 도마복음서속에 거의 다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해서,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은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외롭게 독립되었다가, 마침내 예수의 생애와 서신이 기록되던 사이에 연결을 지어주는 책으로 만들어 졌다. 공동 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것은 상당히 후대 즉, 2세기 말 이 후의 일이었다. 묵시록(默示錄)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으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특히, 로마에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낸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차츰 여기저기서 신약성경이 등장하고 있을때, 마르시온의 도전은 교회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르시온은 다른 영지주의자들보다 더 큰 위협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독자적 감독들과 독자적인 성경을 갖춘 교회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J.L.곤잘레스 / 초대 교회사 / 서영일 역 / 은성]

마르시온의 독자적 노선에 대항하여 자칭 정통파들은 전체적으로 기독교 경전의 목록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교파에서 스스로 정경(canon)을 작성, 발표했으므로 자칭 정통파 들은 정경화 작업을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경 목록이다.

 

AD170 년경의 무라토리 정경목록에는 현재의 신약 27서 중에서 베드로 전 후서,야고보서, 요한3서, 히브리서가 빠져 있다.

베드로 전서를 제외한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 3서, 요한 계시록등의 책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거쳐서 정경으로 채택된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은 그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신약 27권 중에서 베드로후서, 요한2 3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정경이 5세기 초에 시리아(수리아) 말로 번역, 발표되어 표준성경의 구실을 하였는데 그것을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동방의 시리아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22권짜리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4세경의 유세비우스(270~340)는 정경을 호모레고메나(Homolegomena: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 책),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일부의 반대가 있었던 책), 노타(Nota:가짜책)의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정경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2 3서를 안티레고메나에 분류했고, 요한 계시록은 호모레고메나에 분류했지만 노타에 넣어야 된다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4세기 경의 예루살렘의 키릴(AD 315~386)은 신약성경의 강의목록에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을 소개했다.

요한계시록은 11장에서 언급했듯이 로마제국을 비판것이라는 입장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경전 이었다.

AD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경와 똑같은 목록을 제시했다.

이 신약성경 27권을 393년에 힙포 레기우스에서, 397년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각각 정식 채택하였고 어거스틴도 이 정경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것이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된것이다. [박창환 / 성경의 형성사 / 대한기독교서회] [김남중 / 논문:성경의 형성사]

 

 

▶ 본문비평에 쓰이는 신약의 사본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AD 2~10세기 사이에 쓰여진 사본들만 남겨져 있을뿐 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본들 역시 내용이 같은것은 하나도 없다.

초기 번역본에 대한 사본들도 약 1만개 이상 보존되어 있고 교부들의 인용문도 수천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부분이든 전체든 신약이 수록된 헬라어 사본은 대략 5,500여 개 정도가 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은 단편들뿐이지만 신약 전체의 40%가량을 포함한다.

반 이상이 AD 4세기경의 것들이고 그중 가장 오래된 단편적인 사본 하나는 AD 140년경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파피루스는 모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본상의 차이로 인해 AD 2~4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지배적인 신약의 본문유형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

 

신약의 사본에는 대자사본(大字寫本)과 소자사본(小字寫本)이 있다.

9세기까지 신약은 헬라어 대정자(大正字,대문자)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도 없이 연속하여 기록했다.

9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헬라어 성경체와 같은 초자체(草字體,소문자)로 단어와 단어 사이도 띄어서 기록하고 구두점도 생겨나게 된다.

전자에 속하는 사본으로 바티칸 사본(부호 B),시내 사본(부호 S),알렉산드리아 사본(부호 A),에프레임 사본(부호 C)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사본은 대개 8세기 이후의 것으로, 현재 2,300가지 이상이 있다.

사본을 읽는 데는 후자가 더 쉬우나, 연대가 후대의 것이고 정정 가필 등이 많아 원본을 회복해 보려는 본문비평에는 대자사본이 보다 유효하다.

성경 사본 형성 과정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자신의 교리대로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본문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문서의 양이 많아질수록 후대에 변조된것일 가능성이 높다란 것이다.(반대로 교리에 맞지 않으면 삭제하는 경우가 있었는 했으나, 그럴 경우에는 삭제보다는 내용을 변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본의 자료로는 무엇보다도 파피루스(papyrus)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일강(江) 연안에 있는 갈대의 일종인 다년초이다. 이 자료가 BC 11세기부터 문서에 사용되었고, BC 2세기 말경부터는 점점 송아지가죽이나 양가죽이 이에 대용되게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성서의 사본과 번역본]

5,500여개의 사본중에서 파피루스 사본은 98개, 대문자 사본 300개(가죽종이), 소문자 사본 2800여개등이다.

 

각각의 신약의 사본역시 구약의 사본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같은 것이 거의 없는데, 구약의 경우 서기관들이 필사할 때의 오류와는 양상이 다르다. 영지주의는 물론 수많은 종파로 갈려져 극심한 혼잡을 이루었던 초대교회시절,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내용을 추가하거나 변조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물론 초대 기독교인들도 구약도 위조했다.)

신약의 문서적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 케일 박사의 논문집 '현대인의 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 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는수도 있다. 이건 그가 속한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다. 하옇든간에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그리고 물론 보다 많은 계획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댈수 없을 정도의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중략)....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 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 한줄로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 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 겨레는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서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초차 하지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2,3세기 경에 마무리 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사본들을 살펴보자.

 

(1) 시나이 사본 (Godex Sinaiticus)

1884년 시나이산의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독일 신학자 C.티셴도르프(Constatin von Tischendorf)에 의해 발견된 AD 4세기경의 사본이다.

첫 번째로 발견된 것은 구약성경에 속하는 43매의 박피지(薄皮紙)로, 작센 후작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고 하며, 이것은 라이프치히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후에 다시 티셴도르프가 수도원을 3차 방문했을때 구약성경의 150장과 신약성경 부분 148장을 발견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헌상 했다. 이 자료는 페테르부르크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혁명 후인 1933년 영국에 10만 파운드에 팔아넘겨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나이 사본은 구약의 상당 부분과 신약의 정경(正經) 전부와 바나바서신 및 허마의 목자와 같은 약간의 외경(外經)이 들어 있는 것으로, 1881년의 영어성경 개정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무려 1만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 손에 의한 것들로 세번 수정되고 네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낸 일류 전문가 프리 드리히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서 3천 군데나 베낄때 잘못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52~8:11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요한복음 5:4; 8:1~11, 마태복음 16:2,3, 로마서 16:24, 마가복음 16:9-20, 요한일서 5:7, 사도행전 8:37 등과 많은 내용들이 없으며 외경까지도 정경으로 담고 있다. (내용들이 없다는 것은 해당구절이 후대의 추가된 내용이라는것을 시사하고 있다)

 

(2)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AD 330~340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본으로 1457년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었으며 10과 1/2X10인치나 되는 큰 사이즈의 필사본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바티칸사본은 구약에서 창세기 1:1~46:28, 시편 105:26~137:6, 사무엘상, 열왕기상, 느헤미야의 부분들이 없고,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9:14 이후,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모두 없다.

 

(3)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eia)

5세기초에 기록되었고 1627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루카리스에 의해 영국왕 찰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헬라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4) 기타사본들

이 외에도 중요한 사본들로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베자 사본(5, 6세기)등이 있다.

AD 4세기부터 10, 11세기의 언셜체 사본은, 대부분은 단편들이지만, 그 고대성 때문에 과거 신약 성경 본문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여겨졌다.

소자사본(小字寫本)들은 초서체로 쓰여진 9세기에서 17.8세기의 것들이다. 모두 2,500여 개가 넘는 사본이 남아 있지만 역시 대부분 단편들이다. 이밖에도 매일매일의 예배 중에 읽혀지던, 신약 성경에서 발췌된 글을 수록한 독서성구집등도 신약의 원문을 복원해 내는 중요한 비교문헌중에 하나이다.

 

(5) 기타 역본들

AD 1000년경 이전에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된 라틴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고대 슬라브어, 고대 그루지아어 역본들도 신약 성경 본문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성경이 이미 사용되고 있기도 했고 구약의 완역이나 부분역에 이어 신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콥트어(Coptic)는 고대 이집트어의 가장 후기 형태인데 3세기경에 처음으로 한 방언으로 신약이 번역되었고 4세기 후에는 거의 모든 성경이 이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콥트어 역본 대부분은 12~14세기경의 것으로 3세기의 것과는 다른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트어(GOTHIC) 역본은 번역자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번역자가 알파벳을 만들어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몇 개의 역본 중 하나이다. 4세기 중엽 울필라스가 만든 역본의 일부가 전해지고 5,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렌테우스(Argenteous) 은(銀)역본은 보라색 양피지에 은색 잉크를 사용한 호화판 사본으로 고트어 역본 중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다.

아르메니아어(ARMENIAN) 역본은 예배시에 시리아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 반대해서 5세기초 성경과 전례서의 번역이 시작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8세기에 원래의 역본을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이 역본은 어법의 아름다움과 번역의 정확성이 매우 탁월하여 역본 중의 여왕이라 불린다. 이 외에도 시리아어, 그루지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 역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6)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사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역시 그가 사용한 사본의 필사본으로서,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서 실수로 잘못 인용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1901년 이집트 룩소에서 발견된 모들렌 파피루스(Magdalen papyrus : P64)라는 세조각의 파피루스가 있다.

이 작은 파편은 1953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감정되었으나 1994년 티데라는 사람이 AD 66년의 것이라고 주장한적이 있다.

이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2단(段)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2~3세기의 파피루스 사본은 모두 1단 형식이고, 2단형식은 구약성경의 사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1세기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AD 5세기 경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nus)사본도 각 페이지 마다 2단(段)으로 나뉘어져 있고 한 단에는 46~52행의 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 사본도 1세기의 유물이 될수 있을까?

또한 작가는 2~4세기에 사용된 언셜체와 글씨체가 약간 다르다며 이 사본이 1세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1세기의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붓 또는 두터운 펜을 사용해 흘려쓰는 러스틱(rustic)체가 유행했다.

나머지 그의 주장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들 이다. 글자 몇개밖에 나오지 않은 작은 파편을 가지고 마사다 요새에서 발굴된 문서와 비교하거나, 일부의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가지고 쿰란의 사해사본과 비교한다.

필자가 이 사본의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글자가 붙어 있다는 것을 느낄수 없었다. 신약의 사본이 두루마리 사본과 달리 대부분 양면을 기록한 코덱스 사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필자가 확인한 사진이 한쪽면 뿐 이었다고 해도, 그 한쪽면에 붙어 있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E와 T의 글자 끝부분이 아주 살짝 겹친것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미미해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글자는 확실하게 전부 떨어져 있었다.

그외에도 그 작가는 야고보가 처형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가르켜 노미나 사크라라고 불렀다고 주장하면서 사본에 기록된 글자와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형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그렇게 불렀다는것은 어디에서 근거를 찾는지 모르겠다. 야고보가 산헤드린에 끌려온것은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오지만(물론 요세푸스의 저작물은 위조 가능성이 크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 용어를 사용했다는것은 어디에 근거 한 것일까?

또한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너무 작은 파편이라서 방사성 동위원소도 할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다복음서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AD 220~340년쯤의 것으로 판명했는데 왜 과학적인 검증을 피하는 것일까? 그리고 티데라고 작가의 이런 궤변은 신학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킹제임스 성경 이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

말씀보존 학회에서는 'KJV'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기존의 교회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른바 KJV는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사본에 충실하지만, 그 이외의 성경은 레닌그라드 사본, 사해문서,70인역,알렉산드리아 사본등을 참조로 했다는 것을 비난의 근거로 삼는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로마서 13장 9절

[NIV]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KJV]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NIV와 개역성경은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구절을 삭제했다고 한다.

 

② 고린도전서 7장 2절

[NIV] "비도덕적인 일이 많기 때문에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KJV] "음행하지 않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③ 창세기 10장 21절

[개역한글]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펫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KJV] "셈은 모든 에벨 자손의 조상이요, 형 야펫의 동생이라. 그에게서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야펫과 셈의 관계가 서로 엇갈리게 등장한다.

 

④ 출애굽기 22장 28절

[개역한글]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KJV]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네 백성의 치리자들을 저주하지 말지니라."

 

⑤ 민수기 24장 8절

[개역한글]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꺽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KJV] "하나님께서 그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으니, 그의 힘이 마치 유니콘과 같도다. 그는 그의 원수 된 민족들을 삼키며, 그들의 뼈를 꺽고, 그의 화살들로 꿰뚫으리로다."

 

KJV에는 유니콘으로. 개역한글판에는 들소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몇가지 예로 필자가 말씀보존 학회에서 일부만 가져온 것이다.

말씀보존학회에서 제시하는 엇갈리는 구절은 끝이 없고, 그걸 다 옮기는 것은 쓸데없는 지면낭비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맞을까?

그러나 정확히 따지자면 필자는 KJV보다 요즘나온 성경 NIV,공동번역판,표준새번역등이 훨씬 우월하다고 평가를 내린다.(개역한글판은 여기서 제외하겠다. 번역이 엉망인데다가 잘 쓰이지 않는 고어가 많아서 뜻이 제대로 파악이 않되는 개판성경이라고 필자는 평가를 결론 내린다.)

KJV판을 적극 지지하는 '딘 버간 학회'(Dean Burgon Society)의 도날드 웨이드박사(Dr. D. A. Waite)에 의하면 새미국표준역본(NASV)은 구약전체에서 따져볼 때, 20,000군데에서 30,000군데의 바뀐 내용을 담고 있으며, 새국제역본(NIV)는 마소라 본문을 기초로 했지만 가장 오래된 사해문서와 라틴어 역본, 페쉬타, 탈굼등도 번역에 참조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킹제임스역본(NKJV)은 표준원문(Textus Receptus)으로 BHS를 번역의 기초로 삼았으며, 70인역,라틴번역판,고대 역본,사해 사본도 참조했다고 주장하면서 정통(?) KJV와 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사용하는 신약은 네슬/알란드(Nestle/Aland)의 제27판 헬라어 신약성경이다.

반면에 KJV는 '헤 카이네 디아테케'(He Kaine Diatheke : 헬라어로 신약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본문(Triniterian Bible Society에서 재출간한 것)을 사용했다.

이것은 프레드릭 H.A. 스크리브너(Frederick H.A. Scrivener)가 편집하여 1894년에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최초로 출간한 헬라어 원문의 사본이다. 이것은 베자의 5번째 판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최근에 계속해서 발견되는 성경의 사본들은 성경을 복원시키는 자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최근에 발견된 더욱더 오래된 사본들을 아예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KJV는 히브리 원문인 마소라사본에 충실하다고 주장하지만, 마소라 사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AD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BC 2세기에 제작된 사해문서와 연대기 적으로도 비교도 않되는 것이다.

또한, 원래 자음뿐이던 히브리어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만들어 붙였으며, 예레미야서의 경우 마소라 본문이 70인역보다 7분의 1정도나 내용이 많다. 즉, 마소라 사본 역시 나중에 많은 내용이 덧붙여진 것이다.

 

앞서 본문비평에 대해 언급했듯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본을 비교 검토해야 한다.

오로지 마소라 사본만으로, 그것도 마소라 계열의 레닌그라드 사본조차 배격하면서 오래전에 편찬된 BHK1만을 고집하겠다는 것은, 알기쉽게 잘 번역된 공동번역판 또는 표준새번역판 성경을 외면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개떡같이 번역된 개역한글판만을 고집하겠다는 외고집 행위나 다름없다.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공동번역판 또는 표준새번역판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싶었지만, 개신교인들이 주로 보는 성경이 개역한글판 이기에 어쩔수 없이 개역한글판을 사용했다)

 

더욱이 '한글판KJV'는 '개역한글판'만도 못하다. 대한성서공회의 설명에 따르면 개역한글판이 오래전에 번역된것이기는 해도 여러번에 걸친 개정에 의해 본문비평에 따른 연구결과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에 '한글판KJV'는 '영어KJV'를 한글로 번역한 2중 번역이다!

만약, 히브리어나 헬라어 사본들을 비교 검토해서 직접 한글로 번역했다면, 그것은 그 순간 KJV가 아니라 독자적인 버전의 성경이 된다. 결국 '한글판KJV'는 '영어KJV'를 한글로 번역한 2중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성경으로는, '현대인의 성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TEV(Today's English Version)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은 2중번역이어서, 신학자들의 연구에 쓰이지도 않고 예배용으로 외면받는 성경이다.

그야말로 KJV를 제외한 나머지 성경은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대해서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광신자들의 추태에 불과하다.

 

 

 

 

맺음말/기독교는 성경의 오류를 안고 자폭할 것인가?

종교란 인간에게 옳바른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내세운 사랑이라는 가치는 고귀한 것이다. 필자는 그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막상 교회 공동체안으로 들어 가보면 무시무시한 위계질서와 복종만이 존재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것이 아니라 맹신을 부추기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고 한다.

목회자는 신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기 보다 무조건적인 복종과 맹신을 가르킨다.

목회자는 필요에 따라서 성경구절을 민법 몇조 몇항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용하며, 사랑보다는 맹신을, 사랑보다는 복종을, 사랑보다는 증오를 설교한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교회는 무시무시한 비이성과 몰상식으로 가득찬 사이비 종교의 소굴이다.

사이비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과 윤리에서 어긋나는 것을 가르키는 종교가 사이비 종교이다.

과학을 부정하며,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절대복종을 가르치며, 민주사회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미신행위를 일삼으며, 증오를 설파하는 기독교는 이땅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사이비 종교집단이며 동시에 모든 사이비 종교의 원조다.

실제로 최근에 등장한 신흥 사이비종교들의 교리와 집단체제가 기독교와 유사하다는 점은 정말로 관심이 가지 않을수 없다.

 

문자 그대로를 믿는 것만이 옳은 믿음이라는 문자주의적 도그마(dogma)는 주류 기독교를 아직도 꽉 붙들고 있다.

합리와 이성, 심지어 민주주의의 원칙도 망각하고 오로지 성경만이 기준으로 자리잡힌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냥 받아들일수 없는 전설과 신화들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며 윽박 지르고, 그 많은 시행 착오 속에서 찾아낸 과학을 어떻게 해서든지 흔들어 버리려고 악을 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런 작태에 어리숙한 사람은 빠져들지는 모르나 지성인들까지 현혹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신자들은 목사가 설교시간에 읽어주는 성경과 그 해석법에만 의지하려한다.

목사가 한마디 하면 신도들은 "아멘" ,"할렐루야","믿쑵니다"를 연실 외친다.

나중엔 자기네끼리 경쟁이 붙어서 목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고 들어가는것이 아주 가관이다.

인간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가는 기본적인 매너 라든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 지니고 있어야할 가치관이라든가, 이런것을 배울수 있는게 아니라 다들 목사의 노예가 되고 싶어 환장을 한다. 이는 스스로 사고할수 있는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한심한 모습이다.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 무시무시한 모순점을 감당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그 모순들을 합리화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자신을 속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가책감이 성경에서 비롯되는것 만큼 비극적인 것이 없다.

분명 성경의 말중 의심이 들게하는 사악한 성경 구절은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의문을 가진 신자들이 질문을 하면 목회자들은 "이것은 상징적인 구절이다."라고 하면서 모순을 합리화 시키고 모순과의 타협을 본다. 이쯤되면 이것은 충분히 자기기만이라고 할만하다.

 

문제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이 성경의 오류를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다는 점이다.

왜 목사들은 그들이 배웠던 내용을 신자들에게 솔직하게 가르쳐주지 못하는가?

기독교는 허위와 기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종교,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면 신자가 떨어져 나갈 종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성경구절을 요리조리 끄집어 내는 삯꾼목사들의 행태는 놀랍기 그지없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은 배타행위를 하면서도 성경을 들고 나오고, 창조과학을 한다고 하면서 성경책을 들고 나온다.

성경책이 이교도를 찌르는 칼이되고, 과학의 발목을 잡는 ?'이 되고, 소시민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강도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기독교인은 성경의 문자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않될 절박한 때가 이르렀다.

성경을 들고 거짓과 악을 행하는 목회자의 영혼의 노예로 계속해서 살아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성경이 오류로 뒤얽혀 있다 하더라도 목회자들이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필자의 성경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경으로 거짓과 악을 행한다.

타락한 목회자, 그리고 증오를 설교하는 사탄교의 교주를 물러가라고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성경으로 남을 공격하고, 성경으로 그들의 거짓을 정당화 시킨다.

성경이 거짓과 악을 행하는 사탄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데에는 성경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본서는 평신도들이 성경의 문자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뜨이지 않는 광신자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광신자는 자신들이 믿는 경전과 교리의 명백한 오류 앞에 이르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광신자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변화되는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현상을 '맹신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맹신 증후군'(true-believer syndrome)이라는 말은 사기극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는 명백한 인지적(認知的)인 장애를 말한다.

자신이 따르는 종교나 신념이 오류와 잘못이 있다는것을 의식적으로 알면서도 맹신 증후군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거짓말하게 된다. 이런 형태의 자기 기만은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의심을 잠재우고 믿어버림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인간의 심리현상중 하나이다. 맹신 증후군에 빠져있는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필자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성경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수많은 종교가 함께하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이다.

싫든좋든 기독교인,불교인,천도교인,무신론자,민족주의자,뉴에이지 등등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광신자들이 야기시키는 분란과 분쟁은 끝이 없다.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논쟁에 빠져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것도 모자라서,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종교와 사상에까지 온갖 비방과 음해를 퍼트린다.

그리고 단순한 비방과 음해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기독교인들은 실력행사와 폭력까지 서슴치 않는다.

 

"단군은 허구!"라고 광신자들이 주장한다면, 우리 안티 기독교인들은 '엑소더스는 과연 실재했는지',' 예수는 실존인물인지',' 대홍수는 과연 역사적 사건인지'를 묻지 않을수 없다.

사탄이니 마귀니 하면서 타종교를 음해한다면, 우리 안티 기독교인들은 구약속의 '여호와'가 과연 공의로운 신이었는지도 묻지 않을수 없다.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했다는 등의 비현실적인 판타지(Fantasy)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어째서 악의적인 비방을 끝도없이 퍼트리고 다니는가?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침공해 왔을 때,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본국인 카르타고를 쳐들어 갔다.

허를찔린 한니발은 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카르타고로 되돌아 갈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니발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의 뼈아픈 참패로 인해 카르타고는 망국(亡國)의 운명으로 내달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 안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장수가 되어 한니발(광신자)의 조국인 카르타고(성경)에 역습을 가하고자 한다.

먼저 전쟁을 일으킨것은 한니발(광신자)이었으니 그대들은 '믿음의 전신갑주'와 '구원의 투구'를 몸에 두르고 적을 맞아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맹신증후군에 빠져있는 그들을 변화시키는건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안하무인격의 행동은 잠재워줄 필요가 있다.

이제 광신자가 배타행위의 칼을 뽑아들었을때 기독교 내부에서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막지 않으면 않된다.

그리고 기독교가 행한 숱한 악행에 머리숙여 깊이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계에서 영향력이 높지 않은 일부 진보 기독교인 몇몇이 사죄하는것은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이다.

폭주하는 광신자를 기독교 내부에서 막지 않는다면, 필시 기독교는 스스로가 갖고 있는 성경의 오류와 함께 자폭(自爆)의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와같은 이유로 두서없이 성경을 분석해 보았다.

그러나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기독교를 배타하면서 자기종교를 전파하려는 시도에 안티바이블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분명히 기독교 평신자들의 눈을 떠주고, 기독교의 배타행위를 잠재우기 위한 두가지 목적으로 이책을 기록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배타하면서 자기종교를 전파하는데 안티바이블이 사용된다면 이는 필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일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에 화(禍)를 불러오는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따라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타종교와 사상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려고 했다. 그것이 결국 안티 기독교라는 화(禍)를 불러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기독교가 저지른 미련한 짓을 절대로 따라하지 않기를 충고드린다.

 

이제 타 종교를 짓밟으면서 성장하던 제국주의적 종교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종교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왔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다. 이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자연 도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오히려 변화에 역행하고 있다. 아직도 구약속의 여호와와 성경의 문자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결국 서구 기독교보다도 더 급속하게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것이다.

한국 기독교, 이제 깨끗하게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고 근본부터 변하지 않으면 않될 시기가 도래했다.

그 얄팍한 성경구절 몇장 몇절 운운하면서 몰상식과 비이성을 강요하려 하지 말고,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야 한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제 아무리 성경의 오류를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정녕 기독교인들 이라면 우리의 주장은 씨도 안먹힐 것이다. 또한 사랑이 넘치는 기독교인에게 더이상 성경의 오류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저차원적인 성경의 문자로 부터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성경의 문자에 매달리며 목회자의 타락을 합리화 하는데 성경이 쓰이고, 과학을 짓밟고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데 성경이 쓰이고, 타종교를 공격하는 일에 성경이 쓰인다면 기독교는 반드시 성경의 오류와 함께 자폭(自爆)하고 말것이다.

타락한 목회자와, 배타성에 찌들은 광신자와, 창조과학회를 깨끗히 정리할 때가 왔다. 그들은 기독교안에 내제된 무시무시한 폭탄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폭발하게 되어있다.

시대가 어느시대인데 절대복종만을 강요하는 설교가 언제까지 통용 될것이며, 독재자도 물러간 이 시대에 언제까지 황제같은 목회자가 군림을 할것이며, 과학은 계속해서 발전하는데 창조과학회의 사이비과학이 언제까지 먹힐것이며, 다원주의의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했는데 언제까지 마귀니 사탄이니 하면서 싸움판만 벌이고 다닐것인가? 이것들은 언젠가 때가 되면 차례로 폭발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시한폭탄들이다.

목회자의 타락에 염증을 느낀 신자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갈것이고, 창조과학회의 몰상식한 짓에 지성인들이 폭발을 일으킬것이며, 반기독교인으로 돌변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자신들에게 던진 수류탄을 다시 그들을 향해 되던질 것이다.

이 폭탄들은 모두 성경의 무오류성 이라는 기독교의 도그마가 만들어낸 시한폭탄들이다.

이 폭탄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성경의 오류라는 폭탄을 끌어안고 자폭의 길로 갈수 밖에 없으리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