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바이블 5
▶ 유대민족의 기원
기독교인들은 늘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가 유대민족의 시조라고 알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아브라함은 신화적 인물이다. 그것은 성경속의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민족의 이집트로의 이주는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의 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아니다.
이집트 왕조를 구분할 때, 고대왕조와 중간왕조, 신왕조로 구분하는데, 중간왕조와 신왕조 사이, 즉 대략 BC 18세기 즈음에 이집트를 비롯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통치했던 족속이 바로 이 힉소스족이었다.
당시에 호전적인 힉소스(Hyksos)인들을 포함한 유목민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힉소스인들은 서쪽의 다양한 셈어를 사용하는 종족들로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일부가 인도,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이집트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말과 전차를 타고 질풍 같이 이집트에 침입해서 삼각주 동쪽을 200년동안 점령했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은 이집트 전 국토를 점령하지 못하고 이집트 남쪽만 직접 통치하고 북쪽은 방임했다.
이 시기에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셈족계열의 아피루(Apiru)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아피루라는 단어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도 등장하는데, 그뜻은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유목민족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에서는 아피루의 뜻을 '배고픈, 목마른, 맨발의, 먼지의, 말고삐를 잡은 하인' 등의 의미에서 추출한 헐벗고 굶주린 노예계층으로 해석 하는데 서구의 신학계는 다르게 본다.
BC 1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의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 : 시리아-팔레스틴의 군소국왕들이 이집트왕궁에 보낸 외교 서신)에서 하비루(Habiru)의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 편지에서는 하비루를, 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고, 국가 조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얽매이거나 제 스스로 행동하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비정착인들로 묘사하고 있다.(아마르나 서신에서는 하비루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우가릿 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하비루가 이집트 기록에 나오는 아피루에 대한 언급과 동일한 단어임을 분명하게 했다.)
아피루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잦은 가뭄 등으로 식량을 제때에 구할 수 없게 되자 비옥한 이집트 땅을 항상 동경했을 것이다.
또, 유목민들이 이집트의 델타지역에 이주한 것을 그림으로 설명한 BC 19세기 초의 이집트 12왕조의 고급 관료의 무덤인 베니하산(Beni Hasan)의 벽화에는 왕의 대로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한 일련의 무리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 벽화에는 37명의 아시아인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지도자 이름은 셈어인 이브샤(Ibsha :타지역의 지배자)라고 한다.
청동시대 말기 즉, BC 2천년 초기(고대이집트 12왕조 치하)에 이집트 문서들은 그들을 아피루라고 지칭한다.
흔히 알려진 대로 베두인이 아니다. 베두인들의 이주는 규칙적이 었던데 반면, 아피루인들은 이주는 그렇지 않았다.
아피루인들은 2천명 정도의 무리로 조직되었으며, 각 전쟁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실존인물 이라고 가정 한다면,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명 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씨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신의 이름의 약자인 YWH라는 이름의 씨족도 있었는데, 라틴어로 YHWH-야훼와 발음상 비슷하다.
요셉이 실존했다면 가정한다면, 그 시대의 파라오들은 필시 제12왕조와 제 13,15왕조에 각각 속하였을 것이다(중간 왕조와 그후시대).그때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보디발 수하에 있던 요셉처럼.창 39:1-4) 각계 각층에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요셉과 같이(창 41:45)당시의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식 이름을 받고 출세 하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이집트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여 2대왕조를(15대와 16대 왕조.BC 1790~1580년)를 지배하고 있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아피루인들은 이집트로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서 히브리인들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페피 2세 때에는 아피루들이 배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BC 2000년경의 첫 번째 중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야만인이란 약한 아시아인을 말하는데, 그들은 집이 없고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나무가 없으며 산을 고통스럽게 걸어다녀야 한다....(중략)....그들은 도둑놈들처럼 침입하여 분쟁을 벌인다. 나는 하 이집트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목을 베었다. 그들을 걱정하지 말아라. 아시아인들은 강가에 있는 악어와 같다. 그들은 낙오된 먹이를 잡지만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공격하지 않는다."
다른 자료에서는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이집트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고 수많은 베두인 포로가 국경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BC 1429년에 아멘호테프 2세는 3600명의 셈계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힉소스인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힉소스인들은 도시 이름에 셈어를 사용했고 셈족을 하급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
즉, 아피루들에게 고센땅(Goshen)인 델타에 정착하게 허락한 파라오는 힉소스 사람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그들 왕조와 동맹관계를 취했다.
성경에도 타지역 출신인 요셉이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 일화는 아피루들이 힉소스왕들 치하에서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는것의 암시일 것이다.
그리고, BC 15세기 투트모시스 3세 치하에서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지배하의 영토들(팔레스타인 포함)에 파라오 왕권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정치에 간섭한다.
그들 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 위해 파라오는 그들을 용병으로, 혹은 신전업무를 돕도록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라오 아모시스(BC 1552년~1526년 통치)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민족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 치하에서 권력을 잡았던 아피루들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2류 일꾼집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피루들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로 쳐들어올때 그들과 함께 유입되었거나 또는 이전부터 정착하고 있던 아피루들이 힉소스인들에게 협조해서 이집트인들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힉소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해방 운동을 할 때에도 아피루들은 소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방임했다.
결국 왕권을 되찾은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마을과 신전을 태운 야만인들로 기록했고 문둥병자로 명명했는데, 힉소스인들과 같은 셈족인 아피루들도 경멸해야 할 민족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알지못하는 왕'이라는 것은 이집트 신왕조를 뜻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아피루들은 비롬, 람셋 성을 건축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특히 제국 시대라고 불리던 BC 13∼14세기는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념물들이 건립되던 시기였고 이 당시 삼각주 지역의 아바리스에서 피-람세스 왕궁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이집트 안에 있었다면 이집트 각지에서 건설되던 신전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이집트에서는 아피루인들이 적국에 동조하고 협조했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므로 아피루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예를들면, 멤피스의 아나스타시라는 파피루스에는 노동자의 벽돌 만드는 할당량이 적혀 있는데 노동자 40인의 대장은 80,000개의 벽돌을 하루에 바쳐야 했다. 그것은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2,000개씩을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노동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될 수 있다.
그후, 주로 이집트 18왕조시대, 특히 BC 1450∼1150년 사이 300년 간의 기록에 '아피루'란 말이 아주 활발히 언급되는데, 이 시기에는 이 아피루들은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붙잡혀 온 전쟁 포로, 혹은 건축 사업 채석장 같은 곳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 또는 노예의 의미로 변했다.
18왕조의 한 리스트에는 위대한 주인 세네브티시의 95명의 하인중 48명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 함은 베두인을 포함하여 주로 아피루인을 뜻한다.
이들 아피루인들은 이집트에 이주해온 다양한 씨족의 셈족 유목민이였고, 여호와를 숭배하는 부족도 그 씨족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와 세티 파라오의 조각상 뒤에 아피루인들의 신을 놓는 것도 허락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비아에 있는 신전에는 야훼라는 베두인들이 믿는 신의 이름도 적혀 있을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출애굽한 사람들이 주로 람세스 2세 통치하에 건축공사장에서 노예로서 노역을 당했던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이 출애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하비루또는 아피루라 불리우는 일단의 노예집단이 출애굽을 했던 것이다. 아피루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적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이집트에서 같은 셈족혈통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이라는 공감대만이 형성되어있을 뿐이었다. 출신 성분과 이주시기가 제각각인 아피루들은 부족마다 각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유대민족의 12지파는 후대에 점성술적 의미로 덧붙여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종교관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고(할례등은 이집트의 풍습임), 또 이집트에 그들의 종교성을 반영하면서 뒤섞여버렸다.
즉, 유대 민족이 형성된 것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이지, 그 이전에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해온 다양한 출신의 셈족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계에선 유대교가 형성된 것은 모세로부터 약 1600년 후인 에스라, 느헤미야 때로 보고 있다.
▶ 엑소더스는 허구였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이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논쟁을 거듭한결과, 이집트 탈출을 포함해서 모세에 관한 이집트 측의 사료는 전혀 없다. 구약성경등의 문헌 이외에는 이 사건을 입증한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연대에 관해서도 결정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서는 대별하면 BC 15세기설과 BC 13세기설 두가지가 있다.
첫째 설은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다.
그 근거는 솔로몬 왕(실제로 존재했다면 BC 961년경~922년경으로 추정됨)이 그의 치세 제4년, 이집트 탈출후 제480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기록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유다왕국)과 여로보암(이스라엘왕국)에 의한 왕국의 분열은 아마도 BC 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후의 일이며, 열왕기상 11장 4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40년간 통치한것으로 돼어 있으므로 솔로몬은 BC 961년경에 즉위한것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BC 958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BC 1483년경의 일이 된다.
특히 제18왕조의 투트메스 3세와 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2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무시할수 없다.
둘째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람셋을 세웠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람세스 2세치하였다는 설이다.
1920년대 이후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킬로미터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가 언급하고 있는 하비루의 활동이나,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여리고의 발굴 조사 등에 의하여 기원전 15세기설이 유력해 졌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기원전 13세기을 많이 따르고 있다.
람세스 2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람세스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모세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시기는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강제로 동원 되었다는 람세스 성은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므로 출애굽은 제18왕조가 아니라 제19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사막에서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BC 1290년 전후에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고 이때는 람세스 2세 시대이다.
또한, 당시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정황상 람세스 2세가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락했다는 설도 유력시 되고 있다.
그러나 BC 13세기의 어느 해를 이집트 탈출의 연대로 잡느냐 하는 것은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올브라이트는 BC 13세기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BC 13세기말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세가 과연 실존 인물이냐는 원천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탈출했다는 나라, 즉 모세의 탈출로 가장 큰 피해를 보았을 이집트에서 모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뒤에 이어지는 5장에서 언급했듯이 모세와 너무도 똑같은 출생설화를 가지고 있는 바빌론의 사르곤왕의 탄생신화와 호루스의 탄생신화가 모세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역사상 이집트인들 만큼 역사를 철저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한 민족은 없다.
이집트인들이 모세의 탈출과 같은 대사건이 있었다면 고의적으로 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집트라는 말이 680번이나 나오는데 반해 이집트인들의 자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BC 1220년경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인 미네타프 왕 5년에 단 한 번 나온다. "이스라엘은 황폐화되었고 그들은 남아있지 않다"라고 승전비에 적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대규모적인 이동대신 수시로 소규모적인 이동이 지속되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피루들은 어째서 이집트를 떠나야 했는가?
사실 성경에서 여호와가 파라오에게 내린 10가지 재앙은 당시 이집트에서 매년 발생하던 자연 재해의 일종이다.
나일강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수위가 높아지며 물빛은 붉고 역겨운 악취를 풍긴다. 이것은 이 시기의 이집트는 우기이기 때문에 물이 불어나 강바닥에 퇴적되었던 동물들의 시체가 떠내려오기 때문이다. 홍수의 시기에 파리와 개구리가 불어나는 현상은 당연한것이며, 전염병이 번지는 것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막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오는 메뚜기 떼의 폐해는 고질적인 이집트의 재난 중에 하나였다. 암흑에 대한 설명도 매년 춘분을 전후하여 25일 가량 열풍이 불어오는데 열풍은 모래를 말아 올려 하늘을 덮으며 이로 인하여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재난은 그렇다 치고, 람세스 2세는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명령했을까?
이집트 역사상 가장 걸출한 영웅 중 한 명인 람세스 2세는 나일강 유역을 벗어나 히타이트, 즉 지금의 터키 지역까지 정복 전쟁을 시도했다.
자연히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젊은 장정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어 나가자 이집트 국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이 노동력을 대신한 것이 바로 아피루들이었다.
BC 1290년경에 이르자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아무르 왕을 상대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에 하나인 카데시(Kadesh)전투를 벌인다.
양측이 서로 이겼다고 주장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 볼 때 실제로는 무승부였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양측은 쌍방 간에 극심한 피해만을 초래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했다.
람세스 2세는 군대를 철수시켜 이집트로 돌아왔고, 그 후 히타이트가 람세스 2세에게 공주를 보냄으로써 양국 사이의 평화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자 갑자기 국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징병되었던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이집트인들 대신 농사를 지었던 아피루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아피루인들은 분쟁을 일삼는 데다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하던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을 배반한 경력도 있으므로 이집트 측에서 아피루들에 대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을것이다.
즉 평화시에도 분쟁을 잘 일으키는 아피루인들은 더 이상 이집트에서 필요치 않으므로 모두 추방시킨 것이 아닌가 하고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피루들은 대규모적인 이동대신 수시로 소규모적인 이동으로 빠져 나갔을 가능성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 성경의 출애굽 경로는 허구이다
출애굽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이려니와 성경에 나와 있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민수기 3장16절에는 유대인들이 갈대바다를 건넌 이후 도착한 출애굽의 8번째 기착지가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지적이다.
민수기 33장 1절~49절에 지적된 37개의 기착지들 중에서 에시온 게벨을 제외하면, 어떤곳도 장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아마도 다른이름이었거나 지명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예컨대 돕가는 지금의 세바레트 엘 카딤과 동일시 되고 있다)
출애굽 자체가 역사적으로 전혀 증거가 되지 않지만, 현재 학계 에서 출애굽의 경로를 밝혀내는데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 가설들이 너무나 많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세가지만을 열거한다.
첫째는 해안도로 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타당하지가 않다. 파피루스 아나스타지(Anastasi)의 자료에 의하면 해안도로들은 이집트의 요새에 의해 엄격히 감시되고 있었으며, 이집트 당국의 특별 통행증이 없이는 왕래가 허용되지 않았다.
체쿠에 주둔하고 있는 궁수대장 카켐웨르(Kakemwer)와 서기관 이네나(Inena)가 상부에 보고한 파피루스 아나스타지 제5,6번을 보면 해안도로로 탈출을 시도했던 두명의 노예가 수색을 당했고, 에돔 출신의 샤수 민족의 이동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수만명에 이르는 유대민족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것은 타당치가 않다.
두 번째는 횡선도로 가설이다.
민수기 33장 35절, 신명기 2장 8절에서는 유대인이 광야에서 진을 쳤던곳이 에시온 게벨(Ezion Geber)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다르브 엘 하지라 불리는 횡선도로를 이용했다면 갈대바다에서 수르, 파란, 씬 사막을 거쳐 직접 에시온 게벨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곳은 매우 험한 곳이며 사실상 성경과 맞지가 않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길을 이용했다면, 아라바 경계선을 따라가면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돔인들에게 통행권을 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아말렉족과 싸울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말렉족은 휠씬 더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홍해도로설이다.
그 길은 대상들이 이용하는 도로였으며, 여러정황을 고려하건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도로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가 있다. 신이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산을 찾아야 한다.
이미 시나이산(Sinai)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위치의 산, 즉 시나이 산봉우리들의 남쪽에 위치한 지점을 찾아내야만 한다.
사실상 출애굽이 실재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속의 이동경로와 일치할 수가 없다.
또, 민수기에는 맛사,므리바,에인 미쉬파에서 유대인들이 38년동안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목마름으로 불평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얻은뒤, 여호와에 대한 거역죄로 너희 세대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할것이라는 말을 듣게된 것이라는 것이 민수기에서 내린 결론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이 모세의 반석 후려치기 사건이 있었던 곳을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로 규정짓고 있다.
그곳은 가나안으로 가는 중요한 체류지였던 곳으로 팔레스타인 남쪽, 네겝지역에 위치하여, 에돔과 모압으로 통하는 십자로 였다. 정찰대들이 약속의 땅을 알아보기위해 떠난 곳도 그곳이었다.
유대민족이 38년동안 체류한 곳을 가데스 바네아로 규정짓는 것은 출애굽기 17장2~7절과 민수기 20장2~13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데스 바네아로 알려진 에인 코우데스나 그곳에서 10Km 에인 엘 코우데이라트로 추정되는데 두곳에는 모두 우물이 존재했다. 특히 에인 엘 코우데이라트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아주 풍부했던 곳이었다.
또, 민수기 13장과 신명기 2장에는 파견되었던 갈렙이 엄청나게 큰 거인을 목격하고, 두사람이 들어야할 정도의 큰 포도송이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포도송이와 거인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는 다른 거인종족인 르바임(모압인들이 에밈이라고 불렀다는)들이 예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다고 명시한다. (사무엘상에도 팔레스타인의 거인 골리앗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은 한세기후인 BC 12세기경에나 가나안에 등장한다.
또, 그들이 거인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 모세의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의 허구성
오경에서 광야에서 떠돌아 다니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서 그들을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잘못되고, 과장되게 기록한 면이 없지 않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기 16장 14절~15절]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민수기 11장 9절]
만나는 히브리어로 '만후' 라고하고 거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나왔는데, 성경에서는 만나가 땅에 서리처럼 내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나는 나무의 송진같은 수지(樹脂)응고물의 일종으로서 진딧물의 일종인 연지벌레라는 곤충의 공격을 받을 때 생성되는 것이다.
즉, 만나는 땅위가아닌 타라미스(위성류)라는 나무에 열리는 것으로, 땅에 이슬과 함께 내려온다는 출애굽기의 지적은 틀린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출애굽기 16장 19절~21절]
모세는 만나를 하루이상 보관하지말라는 당부를 하는데, 이것은 만나의 속성을 확인 시켜 준다.
그것은 구더기가 급속하게 번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출애굽기 16장 16절]
모세는 한사람에 한오멜씩 식구수대로 거두어들이라고 명령한다.
"또한, 거기에서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 [출애굽기 16장 36절]
즉,1오멜은 10분의 1에파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1오멜은 대략 3리터 반의 양이다. 그정도의 만나로 빵을 만든다면 적어도 5kg이나 한다.
이것은 성인을 기준으로 했을때에도 배부르게 먹고 남을 정도의 양이다.
게다가 그 분량이 사실 그대로라면 천명당 하루 소비량은 무려 3,5톤이다.
출애굽기 12장 37절에 따르면 이집트를 빠져나온 유대인 숫자는 딸린 식구를 빼고 장정만 60만명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딸린 식구를 뺐다는 60만명의 하루 소비량은 2100톤이다. 게다가 장정 60만에 아내와 아이 한명씩 있다고 계산하고 180만명으로 잡으면 만나의 하루소비량은 6300톤에 이른다!
당시 유대인이 자녀를 한명씩만 두었을리가 만무하므로 유대집단이 하루동안에 먹어치운 만나의 양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애굽기 16장 35절]
40년동안 만나를 먹으며 지내다니, 과연 사막지역에 그토록 많은 타라미스 나무가 있었을까?
이번엔 메추라기 기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직접 기록 되었다고 철썩같이 믿는 기독교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수기와 출애굽기의 메추라기 기적은 서로 엇갈리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출애굽기 16장 12~13절]
출애굽기16장에서 배가 고프다고 투정하는 유대민족에게 여호와는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고 아침에는 만나를 보내 배불리 먹인다. 그러나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내용이 다르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민수기 11장 4절~6절]
유대인들은 만나에 대해 불평을 해대면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소연 한다.
그러자 여호와에게 한탄하는 모세에게 메추라기의 기적을 일으킨다.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수기 11장 32절 34절]
민수기에서 여호와가 보인 메추라기의 기적은 탐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나타난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유대인들을 위한 여호와의 축복과 기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견해 인것이다. 벌써 모세오경이라는 텍스트에 대해서 모순이 생기지 않는가?
또, 수확한 메추라기의 양 또한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숫자이다.
실제로 구약속의 지적과 같이 시나이 반도의 지역에서는 수많은 철새들이 이동한다.
봄에는 남에서 북으로,가을에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며, 메추라기 역시 마찬가지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에이탄체르노프에 따르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새들의 이동은 네겝지방을 통과한다
사실, 시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뻗어내리는 산줄기는 맹금류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철새들이 이동하는 일종의 통로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여호와가 주는 메추라기의 양은 상식을 초월하는양이다.
'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하루에 주파한 거리는 44km 815m에 이른다고 전한다.
실제로 수많은 무리가 도보로 하루에 이렇게 많이 이동했다는 것은 거의 과대평가임이 분명하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민수기 11장 31절]
민수기에는 메추라기들이 하루에 날아야 할 거리만큼의 하늘을 아무방향으로나 날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2천평방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공간을 메추라기가 뒤덮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조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메추라기떼는 아무리 많아도 수만마리 정도라고 한다.
민수기 11장 32절에 따르면 메추라기를 아무리 적게 거두어들인 사람이라도 10오멜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적게 거두어들인 사람도 한사람당 35리터의 메추라기를 잡아들였다는 말이되는 것이다.
메추라기 한 마리당 300그램으로 잡았을 때, 가장적게 잡은 사람도 무려120마리를 잡았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애굽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가정하면, 유대인들이 시나이반도를 지날 때 만나와 메추라기떼를 만나서 수확하여 식량으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구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내용이다.
▶ 가나안 정복설
앞에서 모세의 엑소더스가 이집트의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말해 두었다.
이번에는 고고학에서 바라보는 히브리민족의 가나안정복에 대해서 연구하는가나안 정복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이 가설들은 고고학이긴 하지만, 구약학자들이 연구해오는 중요한 가설이기도 하다.
가나안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후기청동기 시대(B.C 1550~1200)의 말에 해당한다.
아마르나 시대를 고려하면 당시 가나안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은 이집트의 패권정치의 공백과 북으로부터 밀려온 새로운 이주자들의 소요, 그리고 가나안 내의 도시국가들 간의 정치적인 알력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올 시기의 여러 성읍들을 발굴한 후의 고고학적인 결과는 유대인들의 가나안 출현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곧 중앙산지의 벧엘(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쉐펠라의 라기스, 그리고 갈릴리의 하솔(여호수아에 의해 멸망)은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성경의 입장을 옹호한다.
하지만 성경의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된 몇 요새화 된 성읍들은 이 시기에 파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는 여리고를 초토화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수6:24), 이곳을 발굴한 케욘(K. Kenyon)의 입장은 여호수아에 무너졌다고 주장하는 여리고의 실재 성벽은 기원전 1550년 경의 것으로 이것은 힉소스의 추방과 관련하여 이집트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이스라엘의 침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주장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말에 여리고는 단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는 입장이다.
아이 성의 점령사건도 마찬가지다. 초기청동기 시대의 말에 파괴된 이후 후기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는 성읍이 들어 서지 않았던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파악한다.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들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기원에 관해 소개하는 모든 이론들은 크게 5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대민족이 한꺼번에 외부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둘째는, 유대민족이 여러세대에 걸쳐 가나안에 점진적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셋째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의 토착민으로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는 가정,
넷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에 철기문명을 가진 유목민이 정착하여 유대민족으로 발전했다는 가설,
다섯번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틈타 아피루,농민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우선, 유대민족이 외부로부터 가나안에 이주해왔다는 가설을 살펴보자.
이 이론은, 13세기 정복설(13th-conquest)이라고도 불리며, 올브라이트(Albright), 존 브라이트(John Bright), 라이트(G. E. Wright)등의 학자들이 지지했다.
이 이론의 특징은 성경의 기록을 기원전 13세기에 유대민족이 통일된 단일체로서 가나안을 침략했다는 가설이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 연대를 기원전 1220년으로 상정하고 민수기 14장 33절을 바탕으로 기원전 1260년을 출애굽의 연도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 1장 11절을 근거로 노예였던 유대 민족에 의해 람세스와 비돔성이 건축되었다고 전제했지만, 막상 람세스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했지만 이집트 제18왕조 점령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다는 주장이 효력을 잃는다.
그 외에도 여리고, 아이, 기브온 등의 유적에서는 군사적 충돌에 관련된 역사적 증거가 성경적 기록과 맞지 않는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 문제점에 대해서 보완한 것이 점진적 이주설(The infiltration theory)이다.
알트(A. Alt), 노스(M. Noth), 바이페르(M. Weippert), 밀러(J. M Miller)등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이집트에서의 아피루들의 대규모 이동이 없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가나안 정복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점유 또는 정착으로 여겨진다.
여러 차례로 다양한 기원을 갖는 아피루 집단들이 정착해 가면서 가나안 정복은 다윗시대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처음에는 가나안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은 없었고 단지 점진적인 유목민들의 침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광야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가축들을 먹일 목초를 찾아 인구가 희박한 중앙산지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가나안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통혼하기도 했지만, 후기에 들어서 유목민들이 가나안의 비옥한 지역인 해안평야, 이스르엘 평야, 그리고 쉐펠라 등으로 확장할 무렵이 되서야 가나안인들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경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신속한 가나안 정복은 여호와 신앙을 강조하였던 신명기 학파들의 종교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A. Al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단계에서는 전적으로 이주가 평화로왔다. 반유목들(semi-nomadic)들이 가나안 변두리 지역에서 겨울을 지내며 살다가 점차 여름에도 가축떼를 먹이기 좋은 가나안 구릉 지역으로 정착하여 농경화되었다. 가나안 고원 지대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에는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민과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착이 완료되고 통합되면서 더욱 수가 많아지자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으로부터 평야와 저지대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다. 군주제 초기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격렬한 군사적 충돌과 함께 영토확장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유대민족이 원래부터 가나안 토착민이었다는 가설을 설명해 보겠다.
이것은 농민 반란설(The peasant revolt theory)이라고 불리며, 멘델혼(G. E. Mendenhall), 고트왈드(N. K. Gottwald)등의 학자들이 주장했다.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왕국들을 전복하기 위해 그들의 적대세력들과 손을 잡았던 요단 동편으로부터 반란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후 이주한 유대민족들은 요단 서편 지역에서 사회적인 혁명을 주도했다.
이집트의 정치적인 후광을 업고 도시국가들을 유지하는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유대민족이 야합하여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민족은 큰 저항없이 가나안의 여러 성읍들을 차지했다는 견해이다.
이 학설은 세겜지역을 아무런 반항없이 점령하게 된 성경의 일부 기록과 파괴된 흔적이 없는 여러 성읍들을 유대인들이 접수하게 된 배경을 일부 지지하는 듯하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등에는 농민폭동에 관한 그 어떤 기록이나 암시도 없다.
멘델혼(G. E. Mendenhall)은 아피루(Apiru)와 히브리(Hebrew)라는 두 어휘를 동의어로 보고, 그 뜻을 '자신에게 입지를 부여했던 사회조직으로부터 의무를 폐기하고, 그것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거부한 자'라는 뜻으로 재정의 했다.
멘델혼은 "만약 초기에 유대인이 히브리인라고 불려졌다면, 그들이 관계를 끊었던 정통적 사회의 관점에 의해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초기의 유대인들은 폭압적인 도시 통치 체제하에서 빠져나온 가나안의 토착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소수의 아피루 집단이 가나안에 당도했을 때 전제군주에게 핍박받던 가나안 농민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가나안 농민들에게 모세의 언약이 호응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멘델혼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이 처음 제기 되었을때 학계에서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러나 브라이트(Bright)의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Israel)의 제2판에서 이 이론이 거론되자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후에 이 이론은 강력한 기반을 제공하는 지지자들이 나타났다.
멘델혼(Mendenhall)은 정치적,주체적 반란을 주장한 반면, 고트왈드(N. K. Gottwald)는 물리적,지리적 반란을 거론했다.
고트왈드는 멘델혼의 모세의 언약 개념이나 종교적 이념들을 제거하면서, 출애굽의 역사적 가치에 큰 회의를 품었다.
멘델혼이 단기간에 일어난 반란과 이스라엘의 출현을 설명했다면 고트왈드는 그 과정이 약 2세기에 걸쳐 사회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지대의 철기 1기(Iron 1)의 문물의 정착은 저지대에서 철수한 반란 집단의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핑켈슈타인의 이스라엘의 유목 기원설(Finkelstein's view of Israel's nomadic origins)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이론은 철기 1기의 정착 과정의 연구로, 고고학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여 이론을 세운 것이다.
이 이론을 먼저 제기한 것은 프리츠(Fritz)였는데, 그는 후기 청동기의 가나안 문화와 오랜 접촉을 가진 초기 유목민들이 철기 1기의 정착민이었다고 본것이다.
하지만 프리츠는 이들 유목민이 원래 어느 지역에서 유입해 들어왔다고 보는 반면, 핑켈슈타인은 가나안 철기 1기의 정착민은 토착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철기 1기의 정착민을 유대민족의 시조로 여겼고, 프리츠도 정착과정중인 고지대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핑켈슈타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초기 철기 1기 정착민은 중앙 산지와 작은 산간 분지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목축과 농업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과수 농업은 에파래미트(Epharaimite)고지의 서쪽 경사면에 정착한 후에 진행되었다. 이런식의 정착은 정착민이 유목민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철기 1기의 취락 형태는 중앙에 공간을 두고 그 주위에 거주지가 둘러싼 전형적인 타원인데 그것은 유목민의 취락구조(duwwar)와 닮았다. 또한 철기 1기 거주민들의 지하 저장 시설의 광범위한 사용은 정착중인 유목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간결하고 넓은 실내, 기둥과 4개의 방으로 된 집들은 베두인 양식에서 발달된 것이다. 이 양식은 철기 1기 정착민보다 앞선 유목민의 것임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칼라웨이의 해변 평야로부터의 인구 대체설(Callaway's theory of displaced population from the coastal plain)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칼라웨이는 철기 1기 정착민이 해변 평야와 세펠라(shephelah)로부터 온 농경민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로, 옥상 물탱크를 지닌 주택이 고지대에서 발견된 사실과 당시 비탈에 계단형 농지를 만들었던 점 등을 들어, 유물이 세펠라와 해변 평지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그는 고지대 철기 1기 정착민은 바로 세펠라와 해변 평지에서의 인구증가와 충돌로 발생된 피난민이라고 한다.
이 가설이 농민 반란설과 비슷한 점은 철기 1기 정착민들이 저지대로부터 올라온 피난민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도 렘체의 진화적 이스라엘 설(Lemche's evolutionary Israel)이 있다.
렘체는 혁명적 기원설을 거부하고 대신 진화적 이스라엘을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재구성 하기 위해서는, 바빌론 유수이후에나 등장한 성경은 역사적 근거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고고학적 자료로써 재구성하려고 했다.
렘체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BC 14세기 전에 아피루의 거주지가 중앙 고지대에 있었으며, 아피루는 팔레스틴의 작은 성읍과 분지로부터 도망 온 토지 보유권자이거나 이전의 예속된 농민들로 구성된 반사회적 구성원들이었다.
아피루는 그 당시 정착민이 아니었고 일부는 농작을 했지만 대부분 무법적인 약탈자로 살았기 때문에 고고학적 자료로써 그들의 생활상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100년 후에 고원지대에 새로운 정착민이 등장했다.
이때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철기1기 정착민은 농경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단일 종족화가 진행되어 이스라엘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R. B.쿠트와 K. W. 휘틀럼의 종합이론(The synthesis of Coote and Whitelam)을 설명해보겠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하면서, 역사가의 직무는 비교 역사학과 인류학적 정황 안에서 고고학의 기록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기 1기 정착의 성격과 지역을 검토한 결과, 그들은 고고학적 증거가 정복설, 이주설, 반란설과 잘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쿠트와 휘틀럼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끝무렵에 발생한 경제적 쇠퇴라는 정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크게 의존했던 지역간의 무역이 약해지면서 가나안 성읍의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지대에 있는 성읍 중심지의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유목민, 농민, 약탈자들이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에는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고지대에서 농업이 발달하여 여러 집단들을 불러들였다.
이에 농업과 유목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착이 착수되었다.
그 결과 고지대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적,인종적 형태가 등장했다.
쿠트와 휘틀럼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오로지 농민이거나 약탈자 무리거나 유목민만은 아닌 이 모두의 결합체였다고 보았다.
이들 학설의 장점은 협소한 접근법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광범위한 종합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비평적인 역사학자들은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복은 오랜 기간을 두고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일치된 견해를 갖고있다.
고고학은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려거나 부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고고학은 단지 발견된 것을 통하여 기술하고 그 자료를 통하여 학문적인 이론을 전개해 갈 뿐이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있어서 고고학이 가지는 성질과 같다.
[김희보 / 구약이스라엘사 / 총신대학출판부] [레온 우드 / 이스라엘의 역사 / 기독교 문서선교회] [김정우 / 역사서연구 /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강의안] [정규남 / 구약개론 / 개혁주의신행협회] [글리슨 아처 / 구약총론 / 기독교문서선교회]
▶ 같은 사건에 대해서 일치하지 않는 성경
흔히들 성경의 첫부분에 나오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다섯 개의 문서를 '모세 오경'이라고 한다.
일반신자들은 모세가 직접 기록했다고 철썩같이 믿지만 학자들은 아무도 모세 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믿지 않는다.
기초적인 지식이 없더라하더라도 누구라도 아무 편견을 갖지 않고 구약을 읽어보면 그것이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모세 오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신명기 34장 5~6절]
그 뿐이 아니다. 창세기36장 31~39절의 에돔왕들의 계보는 모세가 죽은지 한참 지나서야 등장했던 왕들이다.
또 창세기 21장 34절과 26장 14~18절, 13장 17절에는 블레셋 사람이 등장하는데 블레셋은 BC 1200년 경까지는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지 않았다고한다.
또한 각각 다른이에 의해서 서술되었음이 증명된다.
예를들어 유명한 모세의 바위후려치기사건을 보자.
출애굽기 17장 에서는 모세는 여호와가 명령한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후려쳐 물을 얻는데 그곳을 므리바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중략)......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출애굽기 17장 2~7절]
그러나, 민수기 20장에 따르면 그 사건은 여호와는 물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벌을 내린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중략)....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중략).....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민수기 20장에 2~13절]
모세는 지팡이를 두번쳐서 물을 얻는데, 여호와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모세는 물론, 아론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므리바라는 지명도 같다.
앞서서 지적한 바와같이 여호와가 보여준 메추라기 기적도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서로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다.
메추라기 떼는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의 자비로 등장하지만, 민수기에서는 불평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징벌이다.
학자들은 모세 오경은 모세에 의해서 씌여진 것이 아니라 바빌론 유수이후 그 전에 있던 여러 자료들을 참고해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는 5경을 벗어나서 다른 구절도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가나안 정복에 관한 내용들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첫 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내용들을 서로 비교하면,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 10장 36~37절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헤브론을 점령했다고 기록하지만, 사사기 1장 10절에서는 유다 지파가 이 성읍을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여호수아 10장 38~39절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드빌(기럇세벨)을 파괴하고 그 성읍의 모든 거민들을 진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호수아 15장 13~19절과 사사기 1장 1~15절에 다르면 그 공을 갈렙사람 옷니엘에게로 돌린다.
여호수아 12장 7~24절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과 도합 31의개의 성읍과 이름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예루살렘(수15:63), 게셀(수16:10), 다아낙(수17:11~13), 그리고 므깃도(수17:11~13) 등의 성읍들은 여호수아서의 다른 곳을 참고하면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점령하지 못한 성읍들로 기록되었다.
사무엘하 10장 17~18절에 따르면 다윗군에 의해 죽은 아람 병거는 700승의 사람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역대상 19장 17~18절에서는 다윗군에 의해 죽은 아람 병거는 7000승의 군사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소바 왕 하닷에셀과 다윗왕의 전투에 대해서도 사무엘하 8장 3~4절에는 마병이 1700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으나, 역대상 18장 3~4절에서는 마병이 7000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열왕기하 24장 8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의 나이가 18세였다고 하지만, 역대하 36장 9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이 유대의 왕이 될때의 나이가 8세로 되어 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의 시기도 다르다. 열왕기하 8장 26절에는 아하시야가 유대의 왕이 될 때의 나이가 22세였지만, 역대하 22장 2절을 보면 아하시야가 유대의 왕이 될때의 나이가 42세로 되어 있다.
열왕기상 4장 26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마구간을 4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지만, 역대하 9장 25절에서는 마구간이 4천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열왕기 7장26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놋으로 바다를 만들도록 하는데 그 용량이 2000밧이었다고 하지만, 역대하 4장 5절에 따르면 그 용량은 3000밧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미 400여 년 전에 홈즈는 '리바이어던'에서 여러 가지 자세한 이유를 들면서 5경은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밝혀 놓았다.
오경은 물론이려니와 오경이외의 구약속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사건기록들을 보면서 언제까지 성경은 무오하다고 주장할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