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바이블 4
▶ 성기껍질을 전리품으로 챙긴 다윗
이번 단락에서 필자는 좀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한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무엘상 18장 25~28절]
골리앗을 죽여 영웅이 된 다윗을 두려워한 사울왕이 다윗을 사위로 삼겠다고 하면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다윗은 200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지고 왔다고 성경은 전한다.
도대체 여기에 등장하는 100개의 양피는 무엇일까?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에는 "불레셋 사람들의 포경 백 개만 잘라 오면 된다"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즉, 남자들의 성기 껍질을 일컫는 것이다.(아이가 태어나면 8일후에 양피를 벗겨서 할례를 하라고 한 구절이 있다.)
구약성서 새번역에는 다음과 같은 엽기적 주석이 달려 있다.
"13. 불레셋인들의 포피는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이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통한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구약성서새번역10-사무엘 상 하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장에서 죽은 시체의 바지를 벗겨놓고 성기껍질을 벗기고 있을 다윗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면서 동시에 쓴웃음을 지을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다윗이 양피을 200개나 가지고 온것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이라고 적혀 있으니 여호와의 자비로우심(?)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사무엘하 3장 14절]
사울왕이 사망한뒤, 다윗은 헤브론일대를 통치했으나 요압에게 패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때 사울왕가는 허수아비왕 이스보셋이 왕좌에 올라있었고 모든 실권은 아브넬이 쥐고 있었다고 한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하자 위기를 느낀 이스보셋이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게 되는데, 다윗은 그의 아내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은 다음과 같다. "미갈은 내가 불레셋 사람의 남근 백 개를 바치고 얻은 사람이오."
성기껍질 수백개를 결혼예물(?)로 바치고 얻은 귀한 아내이니 만큼 애착이 남다른 것 같다.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사무엘하 3장 15~16절]
그런데, 다윗의 첫번째 아내라는 미갈이라는 여자는 재혼을 한것 같다.(유대율법이 지켜지지 않았다니 정말 놀랍다!)
이스보셋이 아내를 빼앗아 다윗에게 바치려고 하자,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양피 수백개를 바치고 얻은 아내라서 그런지 구질구질한 일들이 다윗에게 따라다닌것 같이 느껴지는것은 왜일까?
우리는 임진왜란때 조선인의 코와 귀를 잘라간 일본인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사람들의 코를 전리품으로 잘라가서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일본인의 잔학성을 성토한다.
그런데, 성경속에서 다윗이 행한 짓은 가히 일본군의 잔학성을 뺨치고도 남지 않는가?
여호와라는 신(神)은 그런 잔혹하고 엽기적인 짓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다윗을 도와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게 했다.
이번에는 다윗과는 관련이 없지만 할례와 관련된 다른 전쟁 이야기를 살펴보자.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창세기 34장 2~4절]
창세기 34장에서 히위족의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성폭행하고는 아버지 하몰에게 그녀를 신부로 맞고 싶다고 말한다.
성폭행이라는 것이 나쁜짓이기는 하지만, 세겜은 디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위의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아들의 혼담을 매듭짓기위해 하몰은 야곱을 찾아오지만, 야곱은 할례받지 못한 자는 신랑으로 맞아들일수 없다고 나온다.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창세기 34장 15~17절]
세겜은 디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지 그녀를 아내로 맞기위해 할례를 받게된다. 그런데 결혼을 하는 당사자인 세겜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결혼식에 참가하는 그의 부족이 모두 할례를 받는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중략)....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중략)....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세기 34장 24절~35장 5절]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일부만 발췌했음을 양해드린다.
할례(포경수술)를 받아 통증이 심해지자, 그틈을 타서 3일후에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들고 세겜부족의 남자들을 살육하고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비록 성폭행이라는 것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여 부족전체가 할례를 받는 조건마저 수락한 사람을 죽여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부족전체를 무차별 도륙 시켰다. 게다가 그들 부족의 자녀와 아내들을 끌고오는 것은 무엇인가?
약속을 깨트리고 포경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습격했다는 그들의 비열함에는 치가 떨릴지경이다.
야곱은 자식들을 불러 그들의 비열한 짓때문에 다른부족이 쳐들어 올것을 걱정한다.
그러자 여호와는 벧엘로 도망가라고 일러준다. 여호와의 도움 덕분에 야곱의 부족을 추격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잔혹하고 비열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기는 커녕 도움을 주는 여호와의 도덕성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자신이 다스리는 부족을 위해서라면 도덕성과 공정성 따위는 내던져 버리는신, 그것이 여호와이다!
이런 초라한 부족신이 모습을 바꾸어 민족신으로 변모했을 뿐이다.
여호와는 유대인을 위하여 타 민족에게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 그는 유대인의 민족신으로는 적합할지언정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하나님으로는 적합치 않다. 타민족과의 전쟁에서도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유대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여호와가 유대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유대교가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타민족에게 전도를 하지 않는 희한한 종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약은 일개 유대민족의 경전일 뿐이지 타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서이다.
온갖 대량 살육과 근친상간, 불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 차별,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기록을 어찌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기는 하겠지만, 이왕 할례 이야기가 나왔으니 포경수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의사가 아니라서 의학적인 전문성이 없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포경수술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예컨데 포경수술이 없던 우리 조상은 성병도 거의 없었고 성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딸 잘 낳고 잘 살았다. 만약 우리 몸에 불필요한 것이 있다면 진화과정에서 퇴화해 없어질 것이다.
포경수술에 대해 의사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그 장점을 이야기 한다.
필자가 포경수술을 반대하는 의사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포경 수술은 성기표피에 문제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의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들이 말하는 포경수술의 장점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장점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것을 교인들에게 떠벌이는 목사들이 포경수술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포경수술이 목사들의 수입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것을 신조로 삼아야 되기 때문에 성경구절에서 할례에 대해 나오면 무조건 그것이 좋은것 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립보서 3장 2절]
바울은 할례의식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개'라는 극언도 서슴없이 말하며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5장 11~12절]
위 구절의 뜻 전달이 잘 않되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형제 여러분, 만일 내가 여전히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면 왜 내가 지금까지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내가 전하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례를 주장하여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그 지체를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1~12절 / 공동번역판]
바울은 할례를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아예 거세(去勢) 하라고 까지 말한다.
외경에 해당되는 도마복음서에서 할례에 대해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 이라면 애비들이 이미 아이가 할례된 채 어미 뱃 속에서 나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도마복음 53절]
이말이 정답 아니겠는가? 자연스러운것이 좋은것이다. 우리몸에 필요가 없는 부분이 있다면 진화과정에서 퇴화되 버렸을 것이다. 포경수술을 하지 않았어도 우리 조상들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포경수술이라는것은 유대민족의 경전이 갑자기 기독교 경전으로 탈바꿈하여 야기된 비극이다.
▶ 마누라를 상납한 아브라함
창세기 12장에는 깜짝놀란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브라함을 불러 호통을 친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창세기 12장 18~19절]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이주한다. 이집트에 들어가기 전,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 사래를 탐하는 자들이 자신을 살해할것을 두려워한 아브라함은 미리 아내에게 서로를 누이관계라고 하자고 약속한후 이집트로 들어간다.
그런데 두사람은 정말로 오누이 관계였다. 즉 아브라함과 사래는 근친혼을 한것이다.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창세기 20장 12절]
어머니만 다를뿐, 같은 형제자매끼리 결혼을 했다는것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당시 이집트를 비롯해서 중근동 지역에서 근친혼이 횡횡했다고 한다.
어쨋든, 이집트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파라오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아브라함을 처남(妻男)으로 여겨 노예들과, 양,소,나귀,낙타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게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파라오에게 남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여호와의 재앙이 쏟아진다.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는 속담이 딱 맞는 말이다. 아무래도 창세기 20장의 아비멜렉의 왕과 달리 재앙까지 받은 이집트 왕은 아브라함의 아내와 동침(同寢)까지 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파라오가 깜짝놀라 아브람에게 가서 이럴수 있느냐고 호통치는 대목이 윗구절이다.
이집트에서 추방된 아브라함은 파라오에게 받은 선물까지 챙겨 가지고 나왔다. 마누라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돈을 번 남편처럼 괴상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친여동생과 결혼 했다는 것은 더 엽기적이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으면 '기독교 윤리 실천 본부'같은 단체에서 입에 게거품을 물며 정죄하려고 달려 들었을것이다. 이것이 성경속에 나오는 거룩한 인물들의 행동이란 말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넘겨주는 이야기는 창세기에 두 번에 걸쳐 중복되어 기록되었는데, 첫번째는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창세기12장에서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두 번째는 창세기20장에서 아브라함 부부가 그랄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창세기 20장 1~3절]
이집트에서 벌어졌던 황당한 사건이 또 한번 벌어졌으니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한가지 우수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그의 아내를 넘겨줄때 사라는 90세정도의 노파였다는 점이다. 원래 그들이 성경에 등장할 때인 창세기 12장 4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벌써 75세였으며 아내 사라는 65세였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의 인물들이 장수를 했기 때문에 이상할것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나, 그랄에서 사라를 아비멜렉왕에게 넘겨주는 사건이 있기전, 여호와는 100세가 된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데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그말을 믿지않는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월경)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세기 18장 11~13절]
이렇게 창세기 18장에서 90세의 사라는 자신이 늙어서 아이를 가질수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0장에서는 아비멜렉왕이 사라를 또 한번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브라함은 월경마저 그쳐서 임신도 할수 없다고 한탄하는 90세의 할머니로 아비멜렉왕을 농락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창세기 26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으로 가장시켰다가 아비멜렉왕에게 들통난 이야기기 또 반복되고 있다.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창세기 26장 7~10절]
즉, 아브라함 처럼 아내를 빼앗길것을 두려워한 이삭이 사람들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소개한것이다.
한편 아비멜렉왕은 창밖을 보다가 황당한 일을 바라본다.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에는 다음과 같다. "불레셋 왕 아비멜렉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이사악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친여동생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 해놓고는 거리낌 없이 낮뜨거운 애정행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아비멜렉왕은 경악한 것이다.
이런 짓이 성경에서 되풀이 되는 이유는 중근동에서 유행했던 여러종류의 신화들이 마지막에 문서화 되면서 생긴것이라고 볼수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아내를 되찾는 남편의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케레트(Keret) 서사시를 들수 있다.
고대에 내려오는 여러 전승들에 따르면, 어떤 신화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어떤 신화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또 다른 신화속에서는 이삭이 아내를 여동생으로 가장시켰다가 낮뜨거운 애정행각이 발각되는등의 여러 종류의 전승이 내려왔을것이다.
여러가지 종류로 전해 내려오던 전승이 바빌론 유수이후 문서화 되면서 똑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겠다.
어쨋던간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로 가득차있는 경전을 언제까지 거룩하다고 여길것인가?
▶ 모세는 폭군인가?
모세는 신화속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성경의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에게 거역하는 반란의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지위가 확고히 자리잡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굶주림과 목마름과 함께 모세의 배타적인 여호와 숭배에 유대민족이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반란자들을 대적했으며, 그 과정은 끔찍하고 처참하기 까지 하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을 때, 그사이 유대인들이 금송아지(아피스 신상으로 추정)를 조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광경을 본 모세는 진노하여 돌판을 깨뜨리고, 출애굽기 32장 27~29절에는 레위족사제들이 모세의 명령에 따라 검으로 무장하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게 만들었다. 이런 대학살로 3천명이 죽었다고 출애굽기는 전하고 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 [출애굽기 32장 27~28절]
이것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십계가 공표되고 그렇게 빨리 성직제도가 조직되었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3천명이나 죽일수 있었을까? 그러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면,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고 모세는 그 자리에서 쫓겨 났을 것이다.
또한 황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은 거의 모든 유대인들인데 레위인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들중에서 3천명을 가려내 속죄용으로 죽였겠는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광신적 행위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모세가 자리를 비운사이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다는 것만 목사들이 설교하지 그 다음 대목에 모세가 3천명을 죽였다는 것은 쉬쉬하고 있다.
유명한 영화 십계에서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마지막 경고를 내리지만(그런대목이 성경에 없다), 끝까지 말을 듣지않자 지진이 일어나면서 우상숭배를 했던 사람들이 땅속으로 꺼진다. 성경내용과 영화내용이 완전히 딴판이다!
모세에 대한 반역은 또 있다. 이번에는 모세에 대한 레위족의 거역사건이다.
민수기 16장에는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향로를 가져오라고 명한뒤, 만일 신이 그들의 공물을 받아들이고,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기위해 그들 발아래의 땅이 열리지 않을 경우 그들은 무죄가 될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단과 아비람의 발아래 땅이 열리면서 그들 일족이 땅으로 꺼져버렸고, 그들의 추종자 250명도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한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민수기 16장 32~35절]
그러나 그런 기적과 같은 벌이 내려졌음에도, 유대인들은 모세와 아론이 동족을 죽였다고 원망한다.
그러자 민수기16장에는 여호와가 전염병 페스트를 퍼트려 1만4천7백명이나되는 히브리인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 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 [민수기 16장 46~49절]
사실상 몸서리가 쳐지게 끔찍한 구절들이다.
성경속의 그러한 사실들은 모세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지휘아래 사막을 유랑하는 유대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반란자들에 대한 잔혹한 처형과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을 도입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모세가 실존했다는 사실위에 세운 가설들이다.
그가 실존했건 하지 않았던 간에 그에게 거역한 반역자들에 대한 모세의 행동과 여호와의 재앙은 너무도 잔혹하다.
▶ 기독교인이 모르는 두번째 십계명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처음 나오며 신명기 5장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십계명이 약간씩 미묘하게 다르다. 그 이유는 "제1계명은 무엇이고, 제2계명은 무엇이다....."라는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명은 분류하기에 따라서 10개도 되고, 11개도 되며, 12개도 될 수 있다.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은 편의에 따라 중세시대에 만든것임을 숙지하라)
그러나 3개의 종교가 10계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출애굽기 34장에서 10개의 계명이 주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십계명을 전해준 다음, 모세에게 율법을 전해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 숭배를 행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한 나머지, 손에 들었던 십계명 돌판을 산 밑에 내던져 깨뜨리고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한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에게 십계를 다시 받게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애굽기 34장1절]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십계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세가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을 필자가 요약하니 다음과 같다.
①아모리족, 가나안족, 헷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계약도 맺지말고, 혼인도 하지 말것이며,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찍어 버려라.
②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③우상숭배를 하지말라
④아빕월에 누룩 안 든 빵을 먹는 무교절을 지켜라.
⑤처음난 것은 다 내게 바쳐라. (첫 새끼 수컷은 다 여호와의 것으로, 처음 난 나귀 새끼는 양을 대신 바치고 싫으면 목을 부러뜨려 죽여라. 맏아들은 제물을 대신 바쳐라. 아무도 빈손으로는 여호와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⑥안식일을 지켜라.
⑦추수절과 초막절을 지켜라.
⑧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씩 여호와 앞에 나타나라.
⑨동물제물을 바칠 때 누룩 든 빵을 함께 바치지 말고, 과월절의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묵히지 말라.
⑩농토에서 난 햇곡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여호와에게 바치고, 숫염소 새끼를 제 어미의 젖으로 삶지말라.
이것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와있는 모세가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명들이 십계명 돌판에 새겨졌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출애굽기 34장 28절]
분명 여호와는 출애굽기 34장1절에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다시 써준다고 말했건만, 첫 번째 계명과는 아주 다르다. 똑같은 출애굽기안에서도 말이다!
첫번째 십계명은 모세가 깨뜨려 버렸으니, 기독교인들이 지켜야할 진짜 십계명은 두번째것이 아니겠는가?
▶ 에로틱 경전 아가서
구약성경중의 아가서는 권위주의적인 종교경전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적인 연애서적(戀愛書籍)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는 목사들이 설교할 때 거의 손도대지 않는 부분으로도 유명하다.
혹자는 아가서의 관능적 표현이 심오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는데, 이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궤변(詭辯)이라고 할수 있겠다.
구약성서새번역4권에 실린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겠다.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 중의 하나를 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아가가 구약성서 안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랑의 시(또는 연애시집)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가는 매우 관능적인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어떤 신앙 조목, 또는 사랑의 윤리적 의미라든가 사랑의 결과로서의 출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전념한다. 그 안에는 타민족들의 연애시에 가까운 내용과 형태뿐만이 아니라, 이교(異敎)와 신화의 잔재들도 들어 있다. 게다가 해석을 위한 명백한 열쇠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구약성서새번역4-룻기,아가,코헬렛<전도서>,애가,에스델(축제오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입문 中]
그렇다면 8장으로 구성된 아가서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가서에서는 유방,허벅지,배꼽,입술,머리카락등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지면관계상 아주 선정적인 부분만을 추려보겠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가 4장 5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가 5장 3절]
윗구절은 공동번역판을 보면 뜻이 더욱 확실해 진다.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아가 7장 1~3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가 7장 7~8절]
놀랍게도 아가서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해 탐미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아가 7장 13절]
7장 13절에는 합환채라는 식물이 등장하는데, 공동번역판에는 자귀나무, 새번역성서에는 만드라고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식물에 대해 구약성서새번역4권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22. 학명은 Mandragora officinarum(영어로는 mandrake).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이 풀은 줄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그 뿌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통속적으로는 임신 촉진제로 쓰여졌다(창세 30,14-16). 그러나 히브리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이 식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마약제와 최음제의 집합명사일 수도 있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구약성서새번역4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주석 中]
놀랍게도 그 식물이 임신촉매제, 혹은 마약이나 최음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가 8장 1절]
윗구절의 공동번역판 동구절에는 "아, 임이여, 우리가 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누이라면, 밖에서 만나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어 드리련만"이라고 번역되어져 있다.
친남매 사이간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키스를 할수 있다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다소 충격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아가 8장 8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가 8장 10절]
이상으로 아가서에 대한 분석을 마친다. 이처럼 목사들이 펼치기를 두려워하는 구약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권위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충격이겠지만 말이다.
▶ 쓰레기 더미(율법)속에서 발견한 왕거니(십일조)
이제 말많고 탈많은 십일조(tithe)에 대해서 살펴보자.
십일조라는 것은 현재 미국의 일부 오순절교회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헌금제도로, 전세계적으로 한국에서만 판을치고 있는 헌금제도이다.
특이한점은 수많은 개신교 교파가 서로 이단이라면서 헐뜯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십일조제도 만큼은 이단시 되는 그 교파의 것을 너도나도 앞다투어 채택했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목숨걸고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것을 보고 여러분들은 손가락질을 하지만, 다른율법은 전부 제쳐두고 십일조 조항만을 꺼낸 일반적인 한국의 개신교 자체가 가증스러움의 극치라고할수 있겠다.
앞서 누누히 설명했지만,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쓰레기속에서 뭔가 재활용(?) 할만한 것들이 있는지 뒤지는 목사가 있고, 쓰레기를 보물로 착각하고 남김없이 전부 주워담는 광신자가 있다.
목사들은 쓰레기 더미(율법)속 에서 기가막힌 왕거니 하나를 발견해서 끄집어 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 이다.
(1) 성경속에서의 십일조
십일조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나누어준 십일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여호와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에게 준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한 오경의 내용을 보자.
십일조에 대해서 구약은 두가지로 약간 어긋나는 언급을 한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장 28~29절]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으로서 유다교로 개종하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주었다. 삼 년마다 나는 그 선물을 그들에게 가지고 가서 모세의 율법서에 제정된 법대로, 또 우리 할아버지 하난니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명령한 대로 그들과 함께 먹었다." [ 토비트 1장 8절]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와 외경인 토비트(천주교에서는 경전으로 인정함)에서 십일조는 3년에 한번 내는 것으로, 레위인들뿐만 아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세금처럼 되어 있어 특별한 수입이 없는 레위인을 위한 '십분의 일 세'로 나온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민수기 18장 20~24절]
신명기 법전에서는 십일조가 빈곤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나눔의 잔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일종의 세금으로 성전의 봉사자들의 몫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레위족들은 성전봉사는 물론 그 밖에 국민교육을 책임지고 또 국가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며 사법, 재판 등과 의료 사업까지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이 강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으므로 십일조를 지켜야한다!"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 14장에는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하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1년 365일 십일조를 강요하는 한국의 교회는 무슨 베짱인가?
돈에 눈이먼 목사들이 애써 말하려 하지 않고 숨기는 구절이 아닌가?
(2) 십일조의 역사
십일조에 대해서 두산동아세계대백과의 설명을 따르면 아래와 같다.
십일조는 서유럽에서 자의(自意)로 즐겨 바치는 신앙행위 였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면서 세금의 형식이 강해졌다.
교회는 1078년 라테란 공의회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을 통하여 영주들이 세금으로 걷어들이는 십일조를 환수하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수입의 1/14 또는 1/15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1789∼1790년 대혁명의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두산동아세계대백과 EnCyber / 십일조항목]
성경에서도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세유럽에서도 십일조를 거두기는 했지만 영주들에게 내는 세금의 형식이 강했다. 그리고 그나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역사저편으로 사라져버렸던 십일조제도가 미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된다.
알다시피 초기에 미국을 개척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고, 지금은 근본주의자들이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얼마전까지 미국은 근본주의자들의 천국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는 근본주의가 판을 치는것이다)
1900년대 초에 미국의 캔서스주에서 시작되었던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된 오순절교회분파에서 십일조가 다시 부활했다.
특히 오순절교회는 방언, 안수치료등을 강조하는 미신,기복신앙적인 종파로, 철저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했고, 어떤 오순절 교회에서는 예배중에 헌금바구니를 3번 돌리는 곳도 있다.
"십일조를 안내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다!"라는 말라기의 구절을 자주인용하는 어느 유명 목사님의 교회는 오순절교파에 속한다.
이런종류의 교파는 미신에 가까운 성령운동을 매우 강조하고, 현세적인 기복신앙(믿음이 신실한 신자는 반드시 부자가 된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교파가 얼마나 위험천만한것임을 알면서도 대한민국의 목사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십일조제도를 너도나도 채용했다.
더 나아가서 사기꾼같은 일부 사이비적인 목사들은 성령운동같은 것도 받아들여서 신자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3) 양심을 팔아먹고 성경을 악용하다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14장에서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그것도 레위인들과 과부,고아,나그네등에게 베풀어주는 나눔의 잔치같은 것이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두산동아세계대백과 EnCyber / 십일조항목]
두산동아세계대백과 역시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 나눔의 잔치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개신교에 만연한 십일조제도는 어떤가?
3년에 한번씩이 아니라 1년365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으니, 신명기의 구절을 벗어난 비성경적이라고 할수 있다.
더구나 거두어 들인 헌금의 대부분은 사회봉사가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 건축, 목회자 및 교회운영비로 거의 사용되고 사회구제활동으로는 십일조 조차 하지 않는실정이다.
개신교는 10%정도를 사회봉사에 투자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선교비까지 포함한 비용으로 순수한 사회봉사에는 코뭍은 돈만 사용한다.
한마디로 소외되는 사람과 함께하는 나눔의 잔치는 뒷전이고, 교세확장, 교회건물증축에 대부분의 수입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문제되는 것은 위선적인 행태이다.
근본적으로 구약시대의 율법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지킬래야 지킬수도 없는 것들뿐이다.
필자는 그러한 율법에 대해서 앞에서 누누이 언급했다.
그 지킬수도 없는 헤괴망측한 율법들을 언급하면 개신교인들은 율법은 폐기 되었는데 왜 그걸가지고 따지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많다.(사실 앞서서 언급했듯이, 율법이 폐기되었는지 폐기되지 않았는지는 신약의 내용이 서로 어긋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율법은 폐기되었는데 어째서 십일조만큼은 여전히 존속하는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옹호하려고 인용하는 예수의 말이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리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태복음 23장 23~24절]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십일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십일조는 하루살이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낙타로 비유하고, 하루살이에 불과한 십일조는 걸러내고, 낙타와 같이 거대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외면하고 있다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비판하고 있다.
성경구절을 자신들에게 유리한쪽으로 악용하는 자들을 뭐라고 부르는가? 바로 사이비 이단이 아닌가?
성경구절을 악용하면 십일조가 아니라 전재산을 갖다 바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장 32절]
위의 개역한글판의 뜻이 모호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4장 32절 / 공동번역판]
여기서 초대교회의 신도들은 전재산을 바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을 알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전재산을 바치게 한뒤,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일부 이단교파들이 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이단으로 비치겠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이들의 생활은 초대교회인들의 공동체적인 생활과 유사하다.
또한, 누가복음 21장 1~4절에서 예수는 전재산을 헌납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한다.
마태복음 10장 34~39절,누가복음 12장 51장~53절 에서 예수는 집안식구들이 원수이며 부모자식, 전재산을 모두 버리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권유한다.
오늘날 가끔씩 사회고발 프로그램에 집도 전재산도 교회에 바치고 가족도 버리게 만드는 이단종파들이 나와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런 이단종파들은 위에서 언급한 예수의 말에 가장 합당한 종파가 아닌가?
성경을 악용하면 얼마든지 전재산과 가족도 버리게 만들 수 있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예수가 그렇게 말을 했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잘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대로 전재산을 교회에 갖다바치고 가족도 내팽겨두려는 사람이 여러분의 주변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말릴 것이다.
이제 십일조에 대한 결론을 내보도록 하자.
십일조는 제정일치의 고대 이스라엘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의 일종이었을 따름이다.
오늘날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국민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그 위에 또 기독교신도로서 교회에 십일조를 또 바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건축헌금,여전도회 헌금,해외선교 헌금,일천 번제헌금,구역헌금....등등의 헌금은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수 없다.(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한센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갔다는 등의 억지적인 끼워맞추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은 중세시대이후 사라져버렸다가 미국의 일부 오순절교파에서 1900년대에 다시 부활해서 그 교파에서만 행해지고, 유럽이나 미국의 다른 개신교교파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오순절파는 한마디로 현세적인 기복신앙적인 교파로, 방언,안수치료등의 미신적이고 기복신앙적인 성령운동을 펼쳐나갔고, 신실한 신자는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현세주의적인 기복신앙이 강한 종파이다.
이 오순절교파의 교리가 한국에 퍼져서 미신에 가까운 성령체험주의와 십일조, 현세주의적인 기복신앙등이 한국개신교의 여러종파에 깊숙이 침투해 버렸다.
쉽게 말하자면, 그들의 교리는 돈이 잘 벌리는 군침도는 교리로써 돈에 눈이먼 한국의 목회자, 사기꾼 사이비 목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그들의 교리를 하나둘씩 수용해간 것이다.
기독교가 십일조를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며, 구약의 다른율법은 전부 제쳐두고 십일조만을 끄집어 내는 것은 위선 그 자체이다.
16세기 천주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 베드로성당을 짓기 위해서 면죄부 판매를 강행하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가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땅에서는 천주교의 성당보다 개신교의 교회가 더욱 화려하기 그지없다.
교세확장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교회건물짓느라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16세기의 부패한 천주교를 닮아가고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은 16세기 종교개혁이전의 유럽교회 전철을 밟고 있는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성경구절 하나를 지목해 보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장 21~22절]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9장 21~22절에도 있음)
성경구절을 끄집어내서 십일조를 정당화 시키는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의 말처럼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목사들은 전재산을 전부 다 내놓고 천막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으면서 살아라.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목사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입맛에 맞는 성경구절만 골라내서 악용하는 무리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수 없다!
제4장 / 허구의 구약사
성경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인가?
그러나, 성경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나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신화이자 바빌론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들이다.
고고학에 의해서 드러나는 역사는 성경속의 사실에 대해서 외면한다. 엑소더스의 이야기는 이집트나 주변지역의 어느 문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들은 다양한 씨족출신의 아피루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다. 아피루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다.
신학교에서도 역사적 비평법에 의거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허구의 인물임을 가르켜주고 있다.
그러나 목사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성경속의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양, 입에 침을 발라가며 교인들에게 세뇌시킨다.
그리고 그 신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단군은 허구...."운운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 청동기 시대에 태어난 최초의 인류 아담
필자는 뒤에 이어지는 5장에서 창세기의 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모방한 것과, 6장에서 창세기의 비과학적인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대홍수나, 성경속의 천지창조를 믿겠다고 우기는 자들이 정말 많다.
성경속의 연대기를 가지고 추리를 해보아도 창세기의 사실들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 노고에 의해 드러난 수많은 고대문명의 유적을 가지고 판단해 보아도 창세기의 연대기는 황당스럽기 그지없다.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부터 이삭까지의 연대기가 언급되어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고, 노아의 경우 950세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창세기의 연대기를 계산해보기 위해서 그들이 생존해 있었던 모든 년수는 필요가 없다.
그들이 생존해 있었다는 대부분의 기간이 자손들이 살아있었던 기간과 겹치기 때문에, 그들이 몇세에 자식을 낳았느냐를 따져 연대기를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친절(?) 하게도 창세기에는 그들이 몇세에 자식을 낳았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아담(130세에 셋을 낳음)-셋(105세에 에노스를 낳음)-에노스(90세에 게난을 낳음)-게난(70세에 마하랄렐을 낳음)-마하랄렐(65세에 야렛을 낳음)-야렛(162세에 에녹을 낳음)-에녹(65세에 무드셀라를 낳음)-무드셀라(187세에 라멕을 낳음)-라멕(182세에 노아를 낳음)-노아(500세에 셈을 낳음)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아들인 셈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1556년이 걸렸다.
이어서, 창세기11장에는 셈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계보가 언급되었다.
셈(100세에 아르박삿낳음)-아르박삿(35세에 셀라를 낳음)-셀라(30세에 에벨을 낳음)-에벨(34세에 벨렉을 낳음)-벨렉(30세에 르우를 낳음)-르우(32세에 스룩을 낳음)-스룩(30세에 나홀을 낳음)-나홀(29세에 데라를 낳음)-데라(70세에 아브라함을 낳음)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까지는 390년의 세월이었다.
이어서 창세기21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고 했고, 25장에는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다고 한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고 언급되어있는데, 안타깝게도 몇세에 요셉을 낳았는지는 언급되어있지않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잠시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이주해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맡긴다는 대목이 창세기에 있다.
그의 증손자 요셉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신임을 받고 그의 일가가 이집트로 이주해서 정착 한다고 한다.
우리는 위의 자료로 성경의 연대기를 추리할 수가 있다.
대략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1550년쯤 후에 대홍수가 발생하고, 대홍수 이후 대략 400년정도 후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서 파라오와 만나게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연대기가 아닌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세계사만 가지고도 성경의 연대기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것인지 느껴질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다량의 유물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긴 시기인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Paleolithic Age)는 BC 3만∼1만년경 정도에 유지되었다.
구석기 시대에는 석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굴벽화, 암벽부조, 조각상들도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회화로는 알타미라, 라스코, 퐁드곰,뒤끄?도두베르 등의 동굴 벽화가 대표적이며, 조각으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로셀의 비너스'등 풍만한 여체를 강조한 조각도 발견되다.
프랑스 로셀에서는 BC 2만 5천년경의 뿔잔을 든 여인상이, 프랑스 축크 드두베에르 동굴에서는 점토로 빛은 들소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BC 3만 년과 BC 2만 5000년 사이, 즉 오리냐크문화와 그라베트 문화 전기 동안에 석회석 판석 위에 여성의 성기와 남근(男根)을 나타낸 구석기시대의 미술이 도르도뉴 페라시의 오리냐크문화지층에서 출토되는 등 수많은 유적이 발굴 되었다.
그리고 BC 1만년이 지나면서 신석기시대가 도래한다. 이시기에 이르면 유적은 더욱많이 발견된다.
소아시아 남부의 차탈휘위크에서는 BC 6500년경~BC 5000년경에 이르는 신석기 시대의 취락지(聚落址)가 발견되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고 생각되는 방을 비롯하여 많은 방을 가진 가옥집단(家屋集團)이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독수리, 춤추는 인물들, 소나 사슴 등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신(女神)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을 좌우에 거느린 여성상(女性像)이나, 그 남편이라고 생각되는 남성상(男性像)도 출토되었다. 공예품으로서는 정교한 돌로 만든 단도(短刀)나 구슬을 연결한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또, 사해(死海)의 북쪽에 있는 여리고에서는 BC 5000년대에 속하는 도시가 발굴되었다.
1953년에는 석고(石膏)로 살을 붙이고 채색한 두개골(頭蓋骨) 몇 개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사실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72년 발굴이 시작된 바르나(Varna) 유적지에서는 BC 4000년경의 도시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BC 4000년경의 황금제품을 비롯하여 동기(銅器),석기,토기 등 약 2만 5000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BC 3000년경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나일,인더스,황하(黃河) 등의 강(江)의 유역에서 발생된 문명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토기의 발달은 BC 4000년경부터 뚜렷해진다.
소아시아,그리스 본토, 루마니아 등지에서 각각 특색 있는 가지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에는 기하학적 모티프로부터 양식화된 동물, 식물의 문양이 새겨졌으며,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radio carbon)의 함유량에 따른 연대측정을 거쳐 검증된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대충 조사해 본것이다. 찾아보면 끝도 없을 것이고 쓸데없는 지면낭비이니 이쯤 해두겠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이주는 힉소스(Hyksos)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했던 BC 18세기 말에서 BC 16세기 초까지인 이집트 제15~16왕조시대라는게 정설이다.
창세기의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등장해서 1946년후에는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후, 2000년만에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설수 있었겠는가?
국가가 생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청동기 시대는 되야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나마, 아담이 등장한후,1500년쯤에 대홍수가 일어나 모두 휩쓸어 버렸다고 한다.
그후 400년쯤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잠시 이주해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맡긴적이 있다고 창세기에는 언급해 놓았다.
그렇다면 대홍수이후 400년만에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선 셈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궤변인가?
BC 3만년경에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이후, BC 3100년경에야 이집트에 제1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잠시 이주한 시기가 이집트 제1왕조라고 억지주장을 해보고 계산을 해보자.(이건 진짜 억지주장이다!) 그렇게 억지로 계산을 해보아도 노아가 방주를 만들기도 전에 BC 5000~4000년경의 바르나와, 여리고 등지에서는 도시가 들어서고 있었으며,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탄생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지 오래라는 이상한 연대기가 계산되어 버린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흙으로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고 있을때, 여호와는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이주시기를 이집트 1왕조 시대로 한것도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주시기를 이집트 1왕조 시대로 계산하면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비교해서 엄청난 역사적 공백기간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일가가 이집트로 이주한 BC 18세기 말~ BC 16세기로 계산을 하면,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등장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가장 빠른 시기를 기준으로 계산해도 아담은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의 처음단계에 해당되는 순동기 시대(純銅器時代)에 등장했다. 이집트 이주시기를 BC 16세기로 잡아도 아담은 청동기 시대 태어났다.
순동기 시대(純銅器時代)에는 구리, 금,은과 같은 금속을 사용했고,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 구리와 주석을 혼합해서 만든 단단한 합금인 청동을 쓰게된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구리로 청동검을 만들고 있을때, 여호와는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있었다!
성경으로 파악할수 있는 알수 있는 인류의 역사는 6000년정도이다.
그럼, 또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세기의 인물들이 살았다는 1년은 오늘날의 1년과는 다를수도 있다고.
제발 정신을 차리기를 부탁한다. 창세기의 인물들이 900세까지 살았고 100세에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할일인데, 필자는 그걸 모두 인정하고 연대기를 계산해보았지만 역시 모순이 드러날뿐이다.
그래도 할말이 없으니까, 그 당시의 1년은 오늘날의 1년과 다르다고 말을하는가?
그 당시에는 지구의 자전속도가 빠르기라도 했단 말인가?
차라리 여러분이 창세기를 새로 쓰길 바란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후손들의 숫자를 늘이거나, 그들의 수명과 자식을 낳은 시기를 늘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