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2. 3. 24. 12:16

1. 선

선은 신광이라는 사람이 유교와 도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고

있을 때에 인도에서 온 선사가 불교 사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를

방문하여도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달마의 곁에 서서 눈이 무릎에 차는 새벽까지 떠나지 않았다. 이에

달마가 그를 가련하게 여겨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가" 하고

물으니 눈물을 흘리면서 번뇌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달마가 대답하기를 "수행의 길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만큼 곤란하고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부단한 결의와 인내를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고는 절대로 달성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신광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서 자신의 왼팔을 잘라서 그것을 달마 앞에 내밀었다. 이 때

비로소 달마는 신광을 제자로 삼았으며 혜가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물론

전설적인 내용이지만 불안정하고 산란한 자아가 스승 앞에 나아가며

혜가는 팔을 잘라서 모든 자신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인간의 고통을 견뎌 내는 가장 근원적인 탐구

그 자체가 선의 실제적 발상인 것이다.

선사들과 대화를 하면서 수십 년 동안을 선원에서 결가부좌에 명상을

한다고 하여도 진정한 선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가리기 어렵다. 선이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심리적, 종교적, 철학적, 역사적 어떤 객관적

또는 실제적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 유일하고 확실한 내용은

자기 자신의 구체적 생명과 존재이다. 또한 그 근본 모순과 불완전성이며

단순한 동경과 구별되는 조화와 완성을 위한 생생한 탐구일 뿐이다. 만일

선의 이름하에서 실행되는 것 자아에 내재하는 실존의 곤경과 대결하여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면 참된 선이 아닌 것이다.

혜가가 달마에게 진리를 묻자 그는 "외부로부터 어떤 해결을 구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하였다.

선불교의 초기에는 질문에 관한 깊이가 궁극적인 깊이에 이르지

못했었다. 선은 어느날 일반적으로 지성적 개념적, 분석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직접적이고도 단호하게 자아의 급소를 찌르는 방법을 선택한다.

주와 객의 분리 속에 있는 자아의 급소에 부딪혀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아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어서 스스로

완성시킬 수 없는 것이며 주관, 객관으로 해결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나타난 공안에 따라서 좌선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적

장애와 불안에서 그 초점이 생긴다. 표면적으로 나타나 자아의 고통과

불안은 상처나 모순에서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자아로부터 일어난다. 외면적으로 모든 대사의 내용이

부정되어도, 내면적 자아는 주관성을 초월하지 못하여 순수하게 대상을

떠나지 못하고 자아로 남는다. 그러나 자아가 대상화되지 않는 생생한

근본 모순으로 남으면 그 모순이 모순 자체를 지탱하며, 자아의 외면적

또는 단순히 느껴진 것만의 부정성을 초월한다. 따라서 선을 수행하려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근원적인 모순, 대의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 예비적

목표가 된다.

대의는 자아 의식에 있어서의 자아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곤경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공안, 좌선, 섭심, 참선이라는 방법의 원래

목적은 자아를 각성시켜서 명확한 형태를 통하여 생생한 모순을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아가 참 자아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외적인 실패나 무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아의 본질에 있는

이율 배반으로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결국은 그 궁극적인 한계를

현실화시키게 된다.

주체가 되는 자아의 이런 현실화를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 향하기 위한

모근 가능한 내용이 소멸되고 부정되어야 한다. 자아가 주체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외부로 향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실제는

내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주관에 머물러 집착하면 주관이 향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안으로 향하여

자기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자아에 원래 내재하고 있는 근본 모순 그

자체를 철저하게 들어내게 된다.

자아가 전적으로 모순을 들어낸다며 주관도 객관도 없어진다. 자아는

제약된 주체가 아니라 주객을 모두 떠난 실존의 덩어리 그 자체인 것이다.

자아 의식에 있어서의 자아는 바로 행위인 동시에 사실인데, 자아를 깨고

해결하려는 것도 행위이며 사실이다. 자아로부터 나아간다면 궁극의

끝이며 최후의 한계이고 자아 의식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이다. 모순의

핵심으로서 현실화된 자아는 완전히 소실되지 않고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이러한 소극적인 밑바탕이 파열, 근절되어 전환될 때

자아는 사실상 대사를 실천하는데 대사가 곧 탄생이며 대오인 것이다.

대사라고 하는 것은 자아의 철저한 부정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인데, 헛된 공허나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타개이며 해소이다. 자아는

자신이 죽고 참진 리의 자기가 깨어나서 참된 자기로 탄생된다. 근본

모순의 타개와 해소는 그 자체가 직접적이면서도 단적인 통일과 통합이며

벗을 수 없는 궁극적 한계였던 것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본원적인

원천이다. 근본에 대한 한계는 전환되어서 근원의 밑바탕에 의한 철저한

근절과 전환, 역전이 깨달음이라 불리게 된다.

동도 정도 아닌 근거나 원천으로서의 참된 자기는 죽음도 아니며 공허나

추상도 아닌 참된 자기 그 자체의 근거이다. 동과 정의 대립 이전이며

스스로의 소외 상황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완성 성취하려는 자아의 열망과

탐구의 궁극적 원천인 것이다.

참된 자기 자신인 자아란 자아의 원천이며 형태가 있으면서 형태가

없으며 형상이 없는 형상이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표현한다.

형태가 없다고 하는 것인 이론적인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고정화된 형태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로서는 모근 형태를 산출하며

모든 형태로 자기를 표현하여 모든 형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무형이며 유형이라는 말은 권법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특히 왕향제의

대성권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적 사고 방식에서의 무형이며,

유형이란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근본의 형태로서 무극이 태극이 되며 이것을 일리 이기라 한다. 다음은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구궁인데 일이 변하여 구까지 되며

다시 일로 되돌아간다는 이론에 근거를 둔다. 손록당의 "태극권학"에서

전하는 무술적인 의미에서 내용은 일동 일정이 양의이며 두수족, 상중하가

삼재, 전진후퇴, 좌고우반이 사상, 진퇴고반정이 오행, 정과 신의 합, 신과

시의 합, 기와 정의 합이 내삼합이며 견 과, 주 슬, 수 족이 외삼합인데

이것을 합하여 육합이라 한다.

칠성은 두, 수, 견, 주, 과, 슬, 족이다. 팔괘는 붕, 리, 제, 안, 채, 열, 주,

고의 태극권 기법의 기본이며 구궁은 8수에 중정이 합친 것이라 했다.

하나로부터 변화된 모근 것은 하나로 되돌아온다는 것으로 중국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역에서 비롯되었다.

참된 것의 형태는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있는 것, 즉 무아이며 유아인데

표현을 애매하게 함이 아니라 내면성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참된 자기는 부모가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이전의 진면목이며 자신의

육체가 죽은 뒤에 화장하여 재가 된다면 그 재가 흩어진 후에 내가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 깨닫게 된다. 이것만이 자아 의식에 대한

실존적 모순을 넘어선 것이며 자각된 진인이 되는 것이 선 그 자체의

목적이 된다.

 

2. 선의 무의식

선의 수행은 대사에 대하여 그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예술가가 대상의 본질적인 실상을

무의식으로부터 표현하고 창조하여 하는 것과 동일하다. 예술성이나

뛰어난 창작성은 작가의 무의식이 우주관적인 무의식과 순수하게 합일될

때만 나타나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학자 스즈키 타이세쓰씨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글을

쓰고 있다.

선방의 어떤 화상이 법당 천정에 용을 그리려 했다. 그래서 화가가 용을

그리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화가는 실제의 용을 본 일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염려하자, 화상은 그에게 용을 못 본 것은 염려 말라 하였다.

스스로 살아 있는 용이 되어서 그리면 되니 관례적인 형태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화가가 "제가 어떻게 용이 됩니까?" 하자, 화상이 "당신 방에서 마음을

집중시키면 그것을 그려야 하겠다고 느껴지는 때가 올 것인데 그 때가

당신이 용이 된 순간이며 그 용이 당신에게 용을 그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오." 라고 했다.

진지한 노력이 있은 그 몇 달 후에 화가는 무의식을 통하여서 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 스스로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 그림이

쿄토의 묘심사 법당의 용의 그림이다. 또 어떤 화가는 용을 만났는데 이

화가도 용을 그리고 싶었었다 한다. 그런데 살아 있는 용을 본 일이

없어서 기회를 기다려 왔는데 어느 날 창문에서 실제의 용이 "여기 내가

있소. 나를 그리시오!" 하자 화가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생생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사물 속으로 직접 들어가소 내면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스스로가 그것의 생명과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무의식의 세계는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영역밖에 있다. 상식적이 아니며

가장 근원적인 느낌으로서 소위 혼돈된 자연으로부터의 의식적인 각성

이전의 순수한 느낌이다.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자아이며 자아는 무한한 가능성의 원천인 무의식과

그 의미가 통한다. 이러한 자아는 무심이며, 무심은 자기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의식적이며 제약되었던 행동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무의식의 세계와 소통되는 것이며 우주적 의식을 갖게 되는

상태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대하는 시간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을

떠나간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영위하지만 자신의 본능대로 살지는 못한다. 인산이 자기 자신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로서의 자기를 나름대로 의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고독하고, 방황하며, 무력해진다. 인간의 본래의 마음은 지금

판단할 수 있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프기 때문에

나타나는 무의식이라는 동작은 실제의 무의식이 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순수한 상태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린 아기의 배고픔과 성인의 배 고름이 동일하다고 가정하여도

어린아이의 배고픔 뒤의 먹는다는 행위와 어른의 행위에는 차이가 있다.

소위 지성, 교양이라는 자기 억압적 상태가 나타나서 무의식을 제압하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자아 의식은 깨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기능적으로 판단 기준을 삼는다면 의식 또는 무식이라 하는 것이 각

개인의 내부에서는 주관과 연관이 지어진다. 의식하고 있다는 내용은 감정,

욕망, 판단을 스스로 느낀다는 뜻이며, 무의식이란 내적인 면이나 경험을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어떤 감정과 욕망,

충동 등에 관계되어 나타나는 행위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과 전혀 무관한

상태의 순수한 자아를 뜻한다.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 현상으로 되는 것은 억압 상태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신,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을 되돌려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이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큰 변혁을 의미한다.

우주적 무의식은 우리가 그 무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만, 다시 말하여 우리가 실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한에만 무의식인

것이며, 우리가 깨어나 실제와 접하는 그 순간에는 이미 무의식이 아니다.

선의 목표는 개오인데 감정의 오염이나 지성의 작용이 없는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반성을 가하지 않은 나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선은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의 자각을 추구하며 타인에게도 자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수수께끼나 모순 투성이로 가득찬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선이란 단지 하나의 수행일 뿐이며 가르침이다.

 

3. 선공 조심법

조신과 조식은 외부적인 조건과 연관된 것으로 몸을 조절하여 심적인

상태를 보다 활력 있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인체의 완전한

내면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직접적으로 접촉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외부적인 어떠한 수단으로도 조절할 수 없으며 오직 내면의 심정 상황에

한정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 상태를 좋게 하기 위해서는 자세와

호흡을 조절하는 것도 어는 정도의 도움이 되기는 한다. 안정된 자세와

호흡은 사실상 정신면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조심의 목적은 신체를 휴식시키며 호흡과 기를 조절하며 뇌에 억압,

흥분 등의 상태로 연결되어 있는 각종의 잡념은 제거시키는 데 있다. 즉

조심의 최종적인 목표는 사고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몰입되어 있는 현상은 의식

세계와 무의식적 집중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의식의 집중은 심리적 사상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억압의 일종이며

모순을 나타내어 결국은 소멸시켜 버리는 방법의 일종이다. 무념무상,

무심, 삼매 등은 심적인 어떤 곳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켜 심령 그 자체를

일깨워서 활동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좌선에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방법은 자신의 심중에 있는 자기를

계속적으로 구속시키고 억압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속에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알 수 없는 일까지도 허다하게 나타나며 아무 필요도 없고

해답도 없는 의문이 연속적으로 발생된다. 모든 의문을 막아 줄 수 있는

것이 심리적 차원의 종교이며 신인데 여기에 맹종하게 되면 번뇌를 끊고

완전한 해방감에 들어갈 수 있다.

집중을 유리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공안인데, 이것은 좌선과정

중에 스승이 제자에게 던지는 일종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공안은 우리

자신 속에 있으며 선가에서 꾸밈없이 볼 수 있는 것을 지적해 준다.

공안이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질 때 그것을 자각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각을 효과있게 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형태를 취한다. 일반적으로는

선문답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불리는 것이 실제로 나왔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많이

아려지지는 않았는데 단지 도를 추구하는 구도자에 의하여 또는 선사들이

승려에게 질문을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선을 체계화고

깊이를 더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12세기 송나라 선사들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이 가운데 조주에 관한 내용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조주는 종심선사인데 그 이름은 그가 하북성 조주현의 관음원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안휘성 지주의 남천선사를 찾았다. 그

때 남천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서 쉬고 있다가 조주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상서러운 상을 보았느냐?"

"상서로운 상은 못 보았으나 누워서 졸고 있는 여래는 보았습니다."

이런 뜻밖의 대답에 벌떡 일어난 남천은

"네가 지도받는 스승이 계시냐?"

"네 한 분 계십니다." 하고 대답한 조주는 그 스승이 누구냐는 남천의

물음에 대답하지도 않고 "겨울이라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기는 큰

스님의 건강을 살피십시오." 했다. 조주는 남천을 스승으로 꼽았다는

뜻이며 남천은 비범한 제자를 얻었다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한 번은 조주가 남천에게 무엇이 도인가를 물었다. 남천이 대답하기를

"평상의 마음이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네가 거기에 도달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잘못된 것이다."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어떻게 도를 볼 수 있습니까?"

"도라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잘못 깨달은

것이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면 너의 시야는 허공과 같이 일체의

제한과 장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은 외재적 관념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들은 조주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날 조주는 남천에게 물었다.

"유를 깨달으면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의 한 마리 물소가 되어야지!"

이러한 이상한 말에도 조주는 깨닫게 해 주었다고 감사해 하였다.

그러자 남천이 말했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문을 비쳤다."

이상의 두 가지 대화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조주의

정신과 깨달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그의 일생 동안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첫째로 남천은 선의 중심 사상을 평상심이라 표현했으며, 도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초월한 것이며 외부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로 유를 깨닫는 것으로, 도는 어디에나 없는 곳이 없다는 존재적

의미이며 "그런 사람은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 의 한 마리 물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의 물소는 제자의 주의력을 끌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도와 일체가 됨은 전체 우주와 그 안에 담겨진 삼라만상과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조주는 투철한 통찰력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남천이

말하기를 밝은 달빛이 그의 영혼의 창문에 스며들었다고 한 것이다.

깨닫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번은 동쪽과 서쪽에 따로 거처를 하고 있는 승려들이 한 마리의

고양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 때 남천이 고양이를 붙잡아서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바른 말을 하면 이놈을 살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그는 무자비하게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 버렸다.

그날 밤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조주에게 남천이 그 일을 이야기했다.

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얹고 밖으로

나갔다. 이 때 남천은

"만일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고양이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데." 라고 하였다.

남천참묘의 공안은 선가에서 자주 논의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고한 고양이를 잔혹하게 죽였으며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가? 그리고 조주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

나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신발을 이고 나간 것이 어떻게

고양이를 살리는 방법이었을까?

이것은 의식을 초월하여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며 무의식까지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앞의 물음은 승려들이 고양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 충격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이 아직도 한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현을 무자비한

행위로써 자유와 초연의 노정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조주는

신발을 이고 나간 행위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가치가 전도되어

있으며 속인들의 아귀들의 아귀다툼의 시비와 곡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 우스운 거동은 흥분된 스승의 신경을

누그러뜨리는데 이바지하였음에 틀림없다.

 

어느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개에게도 역시 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무"

개에게 불성이 없다면 불교의 근본 교의에 어긋난다. 그래서 다시

묻기를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데 어찌 개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태어나기 전 세상의 업식 때문이다."

다른 때에 한 제자가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이 때 조주가 대답하기를

"유" 라 하였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면 어째서 저렇게 개의 껍질을 쓰고 태어났을까요?"

그가 명지를 범했기 때문이지.

조주는 동일한 문제에 동일한 대답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 까닭은

그가 신기한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의 목적을 위하는

성실성 때문이었으며 상대가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 대처하여 서로 다른 대답을 하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있다, 없다 라는 어떠한 의미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러한 의미를 무시하고 무의미한 무라는 발음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된다. 이 무라는 소리의 단순한 반복은, 온 마음이 이 반복하여

결국은 그 소리와 자신이 일치하게 된다. 무라고 소리를 내고 있는 "무"

그 자체가 될 때에 의식의 인격체가 아닌 "무"로서의 "무"가 되는 것이다.

의식은 "무" 속으로 들어가 전 우주가 "무"에 속한다. 나라는 것도

"무"이며 완전한 집중이 된다.

이러한 것은 집중선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의 예인데 전환, 연상,

명상과 함께 조심의 수행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5. 수선공 @]

수선공은 와식 기공의 일종인데 수면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수련자의 자세가 잠을 자는 듯한 자세일 뿐이며 체는 정, 의는 동으로서

안신 건체를 목표로 하는 양생법의 일종이다.

 

@[ (1) 안신 @]

바르게 누워서 목이 편안할 정도의 베개를 베고 팔과 신체를 자연스럽게

편다. 팔굽의 관절은 약간 굽혀서 느슨하게 하고, 손바닥은 아래로 향하며

몸의 양측면에 붙인다.

다리는 어깨 넓이 정도로 벌리는데 발은 밖으로 향하여 팔자 형태가

되도록 벌린다. 시선은 상방으로 향한 뒤에 다시 양미간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코끝을 향한 뒤에 배꼽 아래 단전 부위를 내려다본다. 이후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며 혀를 윗이빨의 안쪽 입천정 앞쪽에 붙인다. 이빨도

서로 가볍게 맞댄다.

호흡은 깊고 길게 하는데 흡기 시에는 기가 사방에서 배꼽 아래

아랫배로 모여든다고 상상한다. 호기 시에는 기가 아랫배에서 전신을

향하여 밖으로 발사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을 집중하여 깊고 긴 호흡으로

24회 반복하고 자연 호흡으로 돌아온다. 자연 호흡 상태에서는 의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연공 중에 나타나는 전신의 팽창 감각과 신체가 떠오르는 느낌은 자연

반응이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안신법은 신경 계통의 질환에 매우 좋은 효과를 내는데 머리를 많이

쓰는 현대인의 안신양정에 좋다. 아울러서 피로를 풀어 주며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온다.

 

@[ (2) 강혈 @]

바르게 위를 향하여 눕고 편안한 베개를 밴다. 팔꿈치 관절을 약간

굽히고 팔을 편다.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하도록 한 뒤에 신체 양측면에

팔을 붙인다. 양팔의 뒤꿈치를 서로 붙이고 발끝을 팔자로 벌린다.

두 눈을 위로 떠서 본 뒤에 다시 양미간으로 의수점을 옮긴다. 코끝을

향한 뒤에 일직선으로 내려서 양발의 용천혈을 의수한다. 두 눈을 감고

이는 서로 맞문다. 혀끝을 윗이빨 안쪽의 입천정에 댄다. 깊고 긴 호흡을

한다.

흡기시에는 양발의 용천혈에서 서서히 위로 올려서 아랫배 근처에

이르게 한다. 의식의 이동은 결국 기를 움직이게 한다.

호기시에는 이와 반대로 의식을 하복부에 집중시킨 뒤에 자연 호흡을

한다. 자연 호흡을 할 때는 의념의 집중이 필요하지 않다.

연공 도중에 양다리가 저려 오거나 팽창되는 느낌이 들고 기혈이

유동되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의 하나이다.

강혈의 수련은 혈압을 조절하는 효력을 낸다.

 

@[ (3) 보정부혈 @]

바르게 누워서 편안한 높이로 베개를 벤다. 두 손을 포개어서 중극혈

위에 올린다. 왼손이나 오른손 어느 쪽이 위로와도 좋다. 중극은 배꼽 아래

4인치에 있으며 족궐음간경의 혈이며 삼음과 임맥이 만나는 곳이다.

위에서부터 양미간을 거쳐서, 코끝을 지나고 중극혈까지 의수를

이동시키며 눈을 감고 이를 맞물면서 혀는 위쪽의 입천정에 붙인다.

깊고 긴 호흡을 하는데, 흡기 시에는 기가 사방 팔방에서 중극혈로

모여드는 것으로 상상하고, 호기시에는 중극혈에서 전신으로 발사되는

것으로 상상한다. 심호흡으로 24회 반복한다.

연공 진행 중에는 손이나 신체의 일부 또는 아랫배에서 소리가 나는 것

등은 염려할 것 없는 반응 현상이다.

보정부혈의 수련은 방광 계통의 질환이나, 유뇨, 요폐 등의 질환에

효과가 있다.

충맥과 임맥의 균형을 돕는다.

 

@[ (4) 회양장력 @]

보정부혈의 자세와 같이 취하는데 양손을 기해혈에 댄다. 기해는

강장회양의 혈이며 축정의 지점이며 임맥에 속한다.

기해는 배꼽 아래 한치 오푼에 있으며 배의 정중선 관원과 신궐의

중간에 있다. 보정부혈식의 호흡과 의념을 기해혈에 두는 것만다르다.

회양장력은 양위, 유정, 임병, 소복통, 월경부조, 폐경에 효과가 있으며

신허에도 효력이 있다.

 

@[ (5) 보허환양 @]

보정부혈식과 같으나 양손의 위치를 신궐혈에 댄다. 또한 보정부혈과

같으나 의념을 신궐혈에 둔다. 중복부의 안쪽에서 유동이 있거나 소리가

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무력한 체력을 가진 사람과 신경 쇠약 등에

좋은 효과를 낸다.

 

@[ (6) 조기부심 @]

보정부혈의 자세와 동일하게 하지만 양손의 의치를 잔중혈에 댄다.

잔중은 족태음, 소음, 수태양, 소양, 임맥이 합쳐지는 중요한 혈이다.

보정부혈의 호흡 방법과 동일하지만 의념을 잔중에 두는 것이 다르다

복통, 기관지염, 심장 질환 등에 효력이 있다.

 

@[ (7) 보간명담 @]

바르게 위를 향하여 누우며 머리가 편안한 정도의 높이로 베개를 벤다.

양손을 포개어 오른쪽 간 위에 올린다. 의념을 위로부터 양미간, 코끝,

간의 위치까지 이동시킨다. 눈을 감고 이빨을 맞문다. 혀는 윗이빨 안쪽의

입천정에 댄다.

깊고 긴 호흡을 하는데 흡기시에는 대기가 간을 내려누른다고 생각하고

호기시에는 입으로 내쉬는데 혀를 아래로 내린다. 24회 반복한다.

 

@[ (8) 부건위 @]

바르게 누워서 양손을 위 위에 포개어 올린다. 의념을 머리에서 양미간,

코끝, 위까지 끌어내려서 위의 형태를 하나하나 상상한다. 눈을 감고

이빨은 맞물며 혀를 윗이빨 안쪽의 입천정에 댄다.

깊고 긴 호흡을 하는데 흡기 시에는 대기가 위로 향하고 내리누르며,

호기시에는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혀를 아래로 내린다. 24회 호흡한다.

비의 이상과 위염, 소화 불량 등에 효과가 있다.

 

@[ (9) 안락 @]

안신과 같은데 손바닥을 위고 향한다. 머리에서 의념을 이동시켜서

양미간으로 옮기고, 두 눈은 감고서 눈동자를 돌린 뒤에 옥침에

집중시킨다. 다시 양미간으로 의념을 돌려서 집중시키며 입을 다물고

이빨을 맞물리며 혀끝을 윗이빨의 안쪽 입천정에 댄다.

호흡은 깊고, 가늘고, 길게 하는데 흡기 시에는 공중에서 양미간으로

기가 모이고 호기시에는 밖으로 발사되는 것으로 상상한다. 24회 호흡하고

자연 호흡으로 돌아간다.

연공 도중에 몸에서 전기가 흐르는 듯한 현상이 생기는 경우도 있으나

무해한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