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2. 3. 30. 14:54

22. 착어 (着語)*

 

스님께서 "산 밑에 한 조각 쓸데없는 밭이다" 하신 옛 분의 말씀을 들려 주고 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물건이 주인을 보고 눈을 번쩍 뜨고, 차수 (叉手) 하고 간절히 조옹 (祖翁) 에게 묻는구나."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자기 집의 본래 계약서는 어디다 두고서 몇 번이나 팔았다가 도로 사는가."

또 말씀하시기를, "경쇠소리 끊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나니, 가여워라, 송죽 (松竹) 이 맑은 바람을 끌어오도다" 하고는 또 "이익은 군자 (君子) 를 움직인다" 하셨다.

 

23. 결제에 상당하여 설법하다

 

스님께서는 법좌에 올라 불자를 세우고 말씀하셨다.

"대중스님네여, 자리를 걷어가지고 그냥 해산한다 해도 그것은 일 없는 데서 일을 만들고, 바람 없는 데서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는 일정한 것이 없고 일에는 한결같음이 없으니, 이 산승의 잔소리를 들으라.

담담하여 본래부터 변하는 일이 없고, 확 트여 스스로 신령히 통하며, 묘함을 다해 공 (功) 을 잊은 공 (空) 한 곳에서, 적조 (寂照) 의 가운데로 돌아가는 이 하나는 말 있기 전에 완전히 드러나, 하늘과 땅을 덮고 소리와 빛깔을 덮고 있었다. 서천의 28조사도 여기서 활동을 잊어버렸고 중국의 여섯 조사도 여기서 말을 잃어버렸다. 몹시 어수선한 곳에서는 환히 밝고, 환히 밝은 곳에서는 몹시 어수선하니 왕의 보검과 같고 또 취모검 (吹毛劍) 에 비길 만하여 송장이 만 리에 질펀하다.

또 무어라고 말할까. 땅이 산을 만들고 있으나 산의 높음을 모르는 것과 같고, 돌이 옥을 간직했으나 옥의 티없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또 무어라고 말할까. 큰 코끼리 〔香象〕 가 강을 건널 때, 철저히 물결을 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또 무어라고 말할까. 3현․3요․4료간․4빈주로서 완전히 죽이고 완전히 살리며, 완전히 밝게 하고 완전히 어둡게 하며, 한꺼번에 놓고 한꺼번에 거두며, 하면서 하지 않고 하지 않으면서 하며, 진실이면서 거짓을 덮지 않고 굽으면서 곧음을 감추지 않소."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알겠는가. 떨어버릴 것이 다른 물건이 아니니 어디로 가나 티끌이 아니다."

주장자를 내던지고, "떨어버릴 것이 다른 물건이 아니라 한다면 결국 그것은 무엇인가" 하고 할을 한 번 한 뒤에 말씀하셨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형세요, 산의 얼굴에 구름의 그림자로다. 방 (龐) 거사가 딸 영조 (靈照) 에게, `환한 온갖 풀잎 끝에 환한 조사의 뜻이라 하였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영조는 `이 늙은이가 머리는 희고 이는 누르면서 이따위 견해를 가졌구나' 하였다. 다시 거사가 `너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하니 영조는 `환한 온갖 풀잎 끝에 환한 조사의 뜻입니다' 하였다.

거사는 말은 지극하나 뜻이 지극하지 못하고, 영조는 뜻은 지극하나 말이 지극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말과 뜻이 지극하더라도 나옹의 문하에서는 하나의 무덤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말해 보라. 그 허물은 어느 쪽에 있는가."

한참 있다가 "환한 온갖 풀잎 끝에 환한 조사의 뜻이오. 안녕히 계시오" 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4. 해제에 상당하여

 

법좌에 올라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구 (主句) 인가, 빈구 (賓句) 인가, 파주구 (把住句) 인가, 방행구 (放行句) 인가. 대중스님네는 가려낼 수 있겠는가. 가려낼 수 있으면 해산하고 가려낼 수 없으면 내 말을 들어라.

맨 처음 한마디와 마지막 한 기틀 〔機〕 은 3세의 부처님네도 알지 못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 꺼내 보이니, 북을 쳐서 대중운력이나 하여라. 천년의 그림자 없는 나무가 지금은 밑 없는 광주리가 되었다. 2천년 전에도 이러하였고 2천년 후에도 이러하며, 90일 전에도 이러하였고 90일 후에도 이러하다. 위로는 우러러야 할 어떤 부처도 없고 밑으로는 구제해야 할 어떤 중생도 없다. 그런데 무슨 장기․단기를 말하며 무슨 결제․해제를 말하는가."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친 뒤에 말씀하셨다.

 

두 쪽을 다 끊고 중간에도 있지 않네

빈 손으로 호미 들고 걸어가면서 물소를 타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니

다리는 흐르는데 물은 흐르지 않네.

閒斷兩頭不居中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할을 한 번 한 뒤에 "안녕히 계시오" 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나옹화상 게송

 

시자 각뢰 (覺雷) 가 짓고 광통 보제사 (廣通 普濟寺) 에 주석하는 환암 (幻艤) 이 교정하다.

 

 

1. 노래 〔歌〕 ․ 3수

 

1. 완주가 (翫珠歌)

 

신령한 이 구슬 지극히 영롱하여

그 자체는 항하사 세계를 둘러싸 안팎이 비었는데

사람마다 푸대 속에 당당히 들어있어서

언제나 가지고 놀아도 끝이 없구나

 

마니구슬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구슬이라고도 하니

이름과 모양은 아무리 많아도 자체는 다르지 않네

세계마다 티끌마다에 분명하여

밝은 달이 가을 강에 가득한 듯하여라

 

배고픔도 그것이요 목마름도 그것이니

목마름 알고 배고픔 아는 것 대단한 것 아니라

아침에는 죽먹고 재 (齋) 할 때는 밥먹으며

피곤하면 잠자기에 어긋남이 없어라

 

어긋남도 그것이요 바름도 그것이라

수고로이 입을 열어 미타염불 할 것 없네

집착하고 집착하면서 집착하지 않으면

세간에 있어도 자유로우니 그가 바로 보살이라

 

이 마음구슬은 붙잡기 어려우니

분명하고 영롱하나 붙잡기 어려움이여

형상도 없으면서 형상을 나타내고

가고 옴에 자취 없어 헤아릴 수 없구나

 

쫓아가도 따르지 못하는데 갑자기 스스로 온다

잠시 서천에 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옴이여

놓아버리면 허공도 옷 안에 드는데

거둬들이면 작은 티끌보다 쪼개기 어렵다

 

헤아릴 수 없어라 견고한 그 몸이여

석가모니는 그것을 제 마음의 왕이라 불렀나니

그 작용이 무궁무진한데도

세상 사람들 망령되이 스스로 잊는구나

 

바른 법령 시행되니 누가 그 앞에 서랴

부처도 마구니도 모조리 베어 조금도 안 남기니

그로부터 온 세계에 다른 물건 없고

강에는 피만 가득하여 급히 흐른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으나

보도 듣도 않음이 진짜 보고 들음이라

그 가운데 한 알의 밝은 구슬 있어서

토하거나 삼키거나 새롭고 새로워라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이라고도 하는데

마음이든 성품이든 원래 반연의 그림자라

만일 누구나 여기에 의심 없으면

신령스런 자기 광명 언제나 빛나리

 

도 (道) 라고도 하고 선 (禪) 이라고도 하나

선이나 도란 원래 억지로 한 말이거니

비구니도 여인으로 된 것임을 진실로 알면

걷는 수고 들이지 않고 저곳에 도착하리

 

부처도 없고 마구니도 없으니

마구니도 부처도 뿌리 없는 눈 〔眼〕 속의 헛꽃인 것을

언제나 날로 쓰면서 전혀 아무 일 없으나

신령한 구슬이라 하면 나무람을 받으리

 

죽음도 없고 남도 없이

항상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다니며

때에 맞게 거두거나 놔주니

자재하게 들고 씀에 골격이 맑아라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서거나 앉거나 분명하여 언제고 떠나지 않는구나

힘을 다해 쫓으나 그는 떠나지 않고

있는 곳을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네

 

하하하 이 어떤 물건인가

1, 2, 3, 4, 5, 6, 7

세어 보고 다시 세어 보아도 그 끝이 없구나

마하반야바라밀!

 

2. 백납가 (百歌)

 

백번 기운 이 누더기 내게 가장 알맞으니

겨울이나 여름이나 만판 입어도 편안하구나

누덕누덕 꿰매어 천조각 만조각인데

겹겹이 기웠으매 앞도 뒤도 없어라

 

자리도 되고 옷도 됨이여

철따라 때따라 어김없이 쓰이며

이로부터 고상한 행에 만족할 줄 아나니

음광 (飮光) 이 끼친 자취 지금에 있구나

 

한 잔의 차 일곱 근 장삼이여

조주스님 재삼 들어보여 헛수고했나니

비록 천만 가지 현묘한 말씀 있다 한들

우리 집의 백납장삼만이야 하겠는가

 

이 누더기옷은 매우 편리하니

늘상 입고 오가며 무엇을 하든지 편리하구나

취한 눈으로 꽃보는 일 누가 구태여 하겠는가

도에 깊이 사는 이라야 스스로 지킨다

 

이 누더기 얻은 지가 얼마인가 아는가 몇 해나 추위를 막았던가

반쯤은 바람에 날아가고 반쯤만 남았구나

서리치는 달밤, 띠풀암자의 초암에 홀로 앉았으니

안팎을 가릴 수 없이 모두가 깜깜 〔蒙頭〕 하다

 

이 몸은 가난하나 도는 끝 없어

천만 가지 묘한 작용 다함 없어라

누더기에 멍충이 같은 이 사람을 비웃지 말라

선지식 찾아 진실한 풍모를 이었으니

 

헤진 옷 한 벌에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로

천하를 횡행해도 안 통할 것 없었네

강호를 두루 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고

원래 배운 것이라곤 빈궁뿐이라

 

이익도 구하지 않고 이름도 구하지 않아

누더기 납승, 가슴이 비었거니 무슨 생각 있으랴

바루 하나의 생활은 어디 가나 족하니

그저 이 한 맛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

 

만족한 생활에 또 무엇을 구하랴

우습구나, 미련한 사람들 분수를 모르고 구하네

전생에 지은 복임을 알지 못하는 이는

하늘 땅을 원망하면서 부질없이 허덕인다

 

몇 달이 되었는지 몇 해나 되었는지

경전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니

누런 얼굴에 잿빛 머리의 이 천치 바보여

오직 이 누더기 한 벌로 남은 생을 보내는구나

 

3. 고루가 (奇歌)

 

이 마른 해골이여 몇 천 생 (生) 이나

축생이나 인천 (人天) 으로 허덕였던가

지금은 진흙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으니

반드시 전생에 마음 잘못 썼으리라

 

한량없는 겁토록 성왕 (性王) 에 어두어

6근 (六根) 은 이리저리 흩어져 치달리고

탐욕과 애욕만을 가까이할 줄 알았으니

어찌 머리 돌려 바른 광명 보호할꼬

 

이 마른 해골이여 매우 미련하고 깜깜하여

그 때문에 천만 가지 악을 지었네

하루 아침에 공하여 있지 않음을 확실히 본다면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서늘히 몸을 벗으리

 

그때를 놓쳤으니 가장 좋은 시절이라

이리저리 허덕이며 바람 따라 나는구나

권하노니 그대는 지금 빨리 머리를 돌이키라

진공 (眞空) 을 굳게 밟고 바른 길에 돌아가라

 

모였다 흩어지고 오르고 빠짐이여

이 세계도 저 세계도 마음 편치 않구나

그러나 한 생각에 빛을 돌이킬 수 있다면

단박에 뼛속 깊이 생사를 벗어나리라

 

머리에 뿔이 있거나 머리에 뿔이 없거나

3도를 기어다니며 어찌 깨닫겠는가

갑자기 선각의 가르침 만나

여기서 비로소 잘못된 줄 분명히 알았나니

 

혹은 어리석음과 애욕으로 혹은 탐욕과 분노로

곳곳에서 혼미하여 허망한 티끌 뒤집어써서

머리뼈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디서 참사람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기 전에 잘못되었고 죽은 뒤에 잘못 되어

세세생생 거듭거듭 잘못되었으나

한 생각에 무생 (無生) 을 깨달아내면

잘못되고 잘못됨도 원래 잘못 아니리

 

거칠은 것에도 집착하고 미세한 데에도 집착하여

집착하고 집착하면서 전연 깨닫지 못하다가

갑작스런 외마디소리에 후딱 몸을 뒤집으면

눈에 가득한 허공이 다 부숴지리라

 

혹은 그르다 하여 혹은 옳다 하여

시비의 구덩이 속에서 항상 기뻐하고 근심하다가

어느 새 몸이 죽어 백골무더기뿐이니

당당한 데 이르러도 자재하지 못하네

 

이 마른 해골이 한번 깨치면

광겁의 무명도 당장 재가 되어서

그로부터는 항하사 불조의

백천삼매라 해도 부러워하지 않으리

 

부러워하지도 않는데 무슨 허물 있는가

생각하고 헤아림이 곧 허물되나니

쟁반에 구슬 굴리듯 운용할 수 있다면

겁석 (劫石) 도 그저 손가락 퉁길 사이에 지나가리

 

법도 없고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고 물질도 없네

여기에 이르러 분명한 이것은 무엇인가

추울 때는 불 앞에서 나무조각 태운다

나옹스님 게송 3수 뒤에 붙임

 

구슬은 방향을 따라 색을 내어 사람을 미혹하게 하지마는 그 청정함은 불성을 표한 것이요, 마른 해골은 기운이 흩어지고 살이 없어져 사람들이 버리지마는 살아 있으면 불도를 행할 것이다. 또한 기운 누더기는 비단을 물리치고 누더기를 꿰매어 살을 덮어 추위와 더위를 막을 뿐이나, 그것이 아니면 장엄과 격식으로 스님네들 편히 살게 하여 불도에 들어가 불성을 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게송 세 수는 시작과 끝이 들어맞고 맥락이 서로 통하여 후인들에게 보여주는 바가 깊고도 절실하다.

나옹스님의 문장은 손 가는 대로 맡겨 미리 초하는 일이 없다. 진실한 이치를 토해내고 찬연히 써내며 운율이 빛나지만 세속의 문자를 그다지 깊이 알지 못하는 점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게송 세 수에 있어서는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으니, 반드시 애를 쓰고 깊이 생각해 지은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영가 현각 (永圈玄覺) 스님의 문투를 본떴겠는가. 뒷날 서역 (西域) 에 전해지면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님의 제자 아무개 등이 내게 발문을 청하기에 나는 그 제목을 읽고 문체를 살펴 그 청에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오한 이치에 있어서는 고기 〔貌〕 가 아닌데 어찌 고기를 알겠는가.*

 

전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 중대광한산군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지서연사 이색 (前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中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重大翠韓山君藝文舘大提學知春秋舘事成均大司成知書莚事李穡)은 쓰다.

 

 

2. 송 (頌)

 

산거 (山居)

 

바루 하나, 물병 하나, 가느다란 주장자 하나

깊은 산에 홀로 숨어 마음대로 살아가네

광주리 들고 고사리 캐어 뿌리채로 삶나니

누더기로 머리 싸는 것 나는 아직 서툴다

 

내게는 진공 (眞空) 의 일없는 선정이 있어

바위 틈에서 돌에 기대어 잠만 자노라

무슨 대단한 일이 있느냐고 누군가 불쑥 묻는다면

헤진 옷 한 벌로 백년을 지낸다 하리라

 

한종일 소나무 창에는 세상 시끄러움 없고

돌 수곽에는 언제나 시냇물이 맑다

다리 부러진 솥 안에는 맛난 것 풍족하니

무엇하러 명리와 영화를 구하랴

 

흰 구름 쌓인 속에 세 칸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스스로 한가하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이야기하는데

맑은 바람은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갑네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아 헛된 명예 끊었고

돌병풍을 의지하여 세상 인정 버렸다

꽃과 잎은 뜰에 가득한데 사람은 오지 않고

때때로 온갖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들리네

 

깊은 산이라 온종일 오는 사람은 없고

혼자 초막에 앉아 만사를 쉬었노라

석 자 되는 사립문을 반쯤 밀어 닫아두고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한가로이 지내노라

 

나는 산에 살고부터 산이 싫지 않나니

가시 사립과 띠풀 집이 세상살이와 다르다

맑은 바람은 달과 어울려 추녀 끝에 떨치는데

시냇물은 가슴을 뚫고 서늘하게 담 (膽) 을 씻어내는구나

 

일없이 걸어나가 시냇가에 다다르면

차갑게 흐르는 물 선정을 연설하네

물건마다 인연마다 진체 (眞體) 를 나타내니

공겁 (空劫) 이 생기기 전의 일을 말해서 무엇하리

 

 

환암장로 (幻庵長老) 의 산거 (山居) 에 부침 ․4수

 

1.

온갖 경계 그윽하고 조도 (鳥道) 는 평탄하여

마음에 걸리는 일, 한 가지도 없네

이 몸 밖에 다른 물건은 없고

앞산 가득 구름이요 병에 가득 물이로다

 

2.

자취 숨기고 이름을 감춘 한 야인 (野人) 이거니

한가로이 되는대로 세상 번뇌 끊었다

아침에는 묽은 죽, 재할 때는 나물밥

좌선하고 거닐면서 천진 (天眞) 에 맡겨두네

 

3.

몇 조각 구름은 경상 (脛滅) 을 지나가고

한 줄기 샘물은 평상 머리에 떨어지는데

취한 눈으로 꽃을 보는 사람 수없이 많건만

누가 즐겨 여기 와서 반나절을 함께 쉬랴

 

4.

외로운 암자 바깥에는 우거진 숲 고요한데

백납 (百) 의 가슴 속에는 모든 생각 비었으니

마음 내키면 시냇물가에 나가 앉아

물결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네

 

 

산에 놀다 〔遊山〕

 

가을 깊어 지팡이 짚고 산에 이르니

바위 곁의 단풍은 이미 가득 붉었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을

일마다 물건마다 스스로 먼저 일러주네

 

 

달밤에 적선지 (積善池) 에 놀다

 

발길 닿는대로 한밤중에 여기 와서 노나니

이 가운데 참맛을 그 누가 알리

경계는 비고 마음은 고요하여 온몸이 산뜻한데

바람은 못에 가득 차고 달은 시내에 그득하다

 

 

양도암 (養道菴) 에서

 

지팡이로 구름을 뚫고 이 산에 올랐더니

그 가운데 암자 하나 가장 맑고 고요하다

암자의 사면에는 봉우리들이 빼어났고

소나무․잣나무 사이의 맑은 샘물은 뼛속까지 차구나

 

 

안심사 (安心寺) 에서

 

갑자기 안심사에 와서 이삼 일 동안

몸과 마음을 쉬고 양주 (襄州) 로 향하니

도인의 자취를 뉘라서 찾을 수 있으랴

동해의 바위 곁에서 마음대로 노닌다

 

 

늦가을에

 

한 줄기 가을바람 뜰안을 쓰는데

만 리에 구름 없어 푸른 하늘 드러났다

선뜻선뜻 상쾌한 기운에 사람들 기뻐하는데

눈빛이 차츰 맑아져 기러기 줄지어 날아간다

밝고 밝은 보배 달빛은 가늠하기 어렵고

역력한 보배 산들은 세어도 끝이 없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제자리에서 편안하나니

추녀 끝에 가득한 가을빛은 청홍 (靑紅) 이 반반이다

 

 

죽순 (竹笋)

 

하늘 기운 뜨거운 한여름철에

처음 돋는 죽순은 본래 티끌을 떠났다

용의 허리가 갑옷을 벗어 감추기 끝났는데

봉의 부리는 털을 헤치고 제몸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른 잎에 빗소리는 묘한 이치 말하고

파릇한 가지에 바람소리는 깊은 진리 연설한다

여기서 갑자기 영산 (靈山) 의 일을 기억하나니

잎새마다 풀잎마다 새롭고도 새로워라

 

 

새로 지은 누대 〔新臺〕

 

새로 지은 높은 누대, 그 한 몸은 우뚝하나

고요하고 잠잠하여 도에서 멀지 않다

멀리 바라보이는 뭇산들은 모두 이리로 향해 오는데

가까이 보면 많은 숲들은 가지 늘이고 돌아온다

독한 짐승들 바라보고 마음으로 항복하고

자주 오는 한가한 새들은 구태여 부를 것 없네

만물은 원래부터 이미 성숙했거니

어찌 그리 쉽사리 공부를 잃게 하랴

 

만 겹의 산 속은 고요하고 잠잠한데

오똑이 앉아 구름과 솔에 만사를 쉬었노라

납자들은 한가하면 여기 와서 구경하고

속인들은 길 없으면 여기 와서 노닌다

누대 앞뒤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산 북쪽과 남쪽에는 푸른 물이 흐른다

뼛속까지 맑고 시원해 선미 (禪味) 가 족하거니

한여름 떠나지 않고 어느 새 가을이네

 

 

단비 〔旱雨〕

 

가물 때 단비 만나면 누가 기쁘지 않으랴

천하의 창생 (蒼生) 들이 때와 티끌 씻는다

모든 풀은 눈썹 열고 빗방울에 춤추며

온갖 꽃은 입을 벌리고 구슬과 함께 새롭다

삿갓 쓴 농부들은 그 손길이 바쁘고

도롱이 입고 나물캐는 여인네는 몸놀림이 재빠르다

늘상 있는 이런 일들을 보노라면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 다 참되도다

 

 

진헐대 (眞歇臺)

 

진헐대 안의 경치가 어떠한가

온갖 봉우리들 모두 이리로 향해 오고

누대 앞뒤에는 맑은 바람 떨치는데

그늘이 엷거나 짙거나 하루종일 한가하네

스님네는 쌍쌍이 왔다 또 가고

새들은 짝을 지어 갔다 돌아오는데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았으면 걸림없이 트이나니

물색과 산빛은 서늘하게 담을 씻어내도다

 

 

한가한 때 감회를 읊다

 

40년 전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천태 (天台) 와 남악 (南嶽) 에 자취를 남겼거니

지금에 차갑게 앉아 생각해 보면

천하의 총림들이 두 눈에 텅 비었네

 

 

하안거 해제에

 

90일을 묶였던 발이 오늘 아침에 끝나니

3개월 동안의 안거 (安居) 는 찾아도 자취 없네

노주 (露柱)*와 등롱 (燈芼) *은 남북으로 떠났으나

석호 (石虎) 는 여전히 고봉 (高峰) 에서 싸우네

 

 

신설 (新雪) ․2수

 

1.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겁 (劫) 밖의 봄인데

산과 강은 한 조각의 흰 눈덩이다

신광 (神光:이조 혜가) 이 오래 서서 마음을 편히 하였다지만

오늘 아침 뼈에 스미는 추위만하겠는가

 

2.

산과 강이 한 조각의 흰 눈덩이라

동서남북으로 조사 관문 꽉 막았네

어젯밤에 보현 (普賢) 보살이

흰 코끼리를 거꾸로 타고 아미산에 내려왔네

 

 

모기

 

제 힘이 원래 약한 줄을 모르고

피를 너무 많이 먹고 날지 못하네

부디 남의 소중한 물건을 탐하지 말라

뒷날에 반드시 돌려줄 때 있으리

 

 

모란

 

꽃중의 왕이 두세 떨기 다투어 피었는데

다른 꽃들 위에 뛰어나 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어찌 저 남전 (南泉) 의 꿈에 보였던 것만이야 하랴*

눈을 뜨기 전에 붉은 빛이 뚫고 들어오네

 

 

작약

 

영롱한 그 자태에 어느 것을 견주리

붉고 흰 꽃빛이 창에 가득 비치었네

반쯤 피어 입을 열고 웃는 웃음은

온 하늘 온 땅에 짝할 것 없네

 

 

산차 〔山茶〕를 따며

 

차나무를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 없고

내려온 대중들 산차를 딴다

비록 터럭만한 풀도 움직이지 않으나

본체와 작용은 당당하여 어긋남 없구나*

 

 

반가운 비 〔喜雨〕

 

가물 때 내린 단비, 그 기쁨 말해 무엇하리

만물은 왕성하고 해는 풍년이라 하늘의 도가 존귀하다

신룡 (神龍) 의 얼마만한 힘이든지

결국에는 한 방울만 가지고도 온 천지를 적신다

 

 

환봉 (幻峯)

 

본바탕은 거북털 같아 찾아도 자취 없는데

우뚝 솟은 봉우리 몇 겹이던가

바라보면 있는 듯 분명히 나타나고

찾아보면 없어져 텅 비었네

설악 (雪嶽) 은 속은 비고 산세는 험준한데

부산 (浮山) 은 겉도 알차고 모양도 영롱하다

뿌리를 바로 꽂아 푸른 하늘에 서지 말라

뉘라서 그 꼭대기에 길을 낼 수 있으리

 

 

석실 (石室)

 

견고한 그 온몸을 누가 만들어내었던가

천지가 나뉘기 전에 이미 완연하였다

텅 빈 네 벽은 몇 천년을 지냈으며

분명한 세 서까래는 몇 만년을 지냈던가

어느 겁에도 우뚝하여 무너지는 일이 없고

어느 때도 크낙하여 부서지지 않는다

법계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너른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윽하고 그윽하다

 

 

환암 (幻菴)

 

몸은 허공꽃과 같아서 찾을 곳이 없는데

여섯 창에 바람과 달은 청허 (淸虛) 를 둘러싸고

없는 가운데 있는 듯하다가 다시 실체가 아니라

네 벽이 영롱하여 잠깐 빌어 산다네

 

 

곡천 (谷泉)

 

만 골짝 천 바위와 소나무 잣나무 사이에

신령한 근원은 깨끗하고 바탕은 편하고 한가하네

깊고 깊은 골 속에서 항상 흘러나오나니

마시는 이 온몸 뼛속까지 차가워라

 

 

소암 (笑菴)

 

오늘도 영산 (靈山) 의 일이 분명하나니

여섯 창을 활짝 여니 새벽바람 차가워라

빙그레 짓는 미소 누가 알아보겠는가

네 벽이 영롱하여 세상 밖에서 한가하다

 

 

현봉 (懸峰)

 

허공에 걸려 있어 마음대로 오가고

우뚝이 뚫고 나와 푸른 하늘에 꽂혀 있네

동서남북 아무 데도 의지할 것 없나니

뾰족한 것들 다 누르고 홀로 우뚝하여라

 

 

회암 (會菴)

 

갑자기 지음 (知踵) 을 만나 입을 열고 웃나니

지금부터 여섯 창에는 기쁨 항상 새로우리

이제는 남의 우러름을 바라지 않나니

네 벽의 맑은 바람은 세상 밖의 보배일세

 

 

죽림 (竹林)

 

만 이랑의 대나무가 난간 앞에 닿아 있어

사시사철 맑은 바람은 거문고 소리 보내주네

차군 (此君) *은 빽빽하되 하늘 뜻을 통하고

그림자가 뜰안을 쓸되 티끌은 그대로라네

 

 

인산 (仁山)

 

어떤 일이나 막힘 없으면 스스로 통하니

높은 묏부리는 뚫고 나와 뭇 봉우리 누른다

온갖 형상을 머금었으나 모든 모양 떠났거니

백억의 수미산인들 어찌 이만하리오

 

 

고주(孤舟)

 

온갖 일을 아주 끊고 나 홀로 나와

순풍에 돛을 달고 밝은 달에 돌아오네

갈대꽃 깊은 곳의 연기 속에 배를 대니

부처와 조사가 엄연하나 찾을 줄 모르리라

 

 

대원 (大圓)

 

허공을 꽉 싸안고 그림자와 형상을 끊었네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자체는 항상 깨끗하다

눈앞의 진풍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달이 밝구나

 

 

헐암 (歇菴)

 

모든 인연을 다 던져버리고 돌아왔나니

네 벽에는 맑은 바람 솔솔 불어오네

지금부터야 무엇하러 다시 집착할 것인가

비좁으나마 널따란 곳에 그저 앉아 있으리

 

추산 (秋山)

 

가을바람 한 줄기가 엷은 구름 쓸고 나면

온 땅의 봉우리들은 묘한 빛이 새롭구나

그로부터 달빛은 밝고 깨끗하리니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는 것 사랑한 것 아니다

 

 

순암 (順菴)

 

만상이 모두 한 생각에 돌아가 사라지니

여섯 창에는 밝은 달이 고요하고 쓸쓸해라

티끌티끌이 남의 집 물건이 아니니

조그만 암자에 온 법계가 다 들었네

 

 

절안 (絶岸)

 

눈길 다한 하늘 끝은 푸르다 가물가물한데

그 가운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편편하여 끝없는 곳에서 몸을 뒤집으면

그 작용은 언제나 공겁 (空劫) 이전에 있으리

 

 

서운 (瑞雲)

 

한 줄기 상서로운 빛, 이것을 보는가

허공을 모두 싸고 뻗쳤다 걷혔다 하나니

여기서 몸을 뒤집어 몸소 그것을 밟으면

비바람을 몰고서 곧장 집에 돌아가리

 

 

보봉 (寶峰)

 

써도 다함이 없고 값도 물론 비싸니

층층으로 높이 솟아 푸른 하늘에 꽂혔다

구슬의 광채는 안팎으로 항상 나타나지만

마음먹고 찾아가면 길은 더욱 멀어라

 

 

영암 (映菴)

 

모양과 빛깔이 분명한 이것을 아는가

여섯 창 밝은 달이 산과 강을 비춘다

찬 빛을 모두 쓸고 몸을 뒤집으면

위음왕불 겁 밖의 집으로 뚫고 지나가리라

 

 

고원 (古源)

 

조짐과 자취가 나타나기 이전의 한 가닥 물줄기여

아주 맑고 담담해서 그 자체 편안하네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가〔邊〕도 겉도 없나니

그 복판 〔中〕 을 모르고 지낸 지 몇 해이런가

 

 

담적 (湛寂)

 

바닥까지 맑고 맑아 담 (膽) 을 뚫을 듯 차가운데

또렷하고 분명하여 자체 항상 편안하다

온갖 훌륭한 경계는 무심에서 나타나니

공부는 고요한 곳에서 보아야 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태양 (太陽)

 

허공을 모두 감싸 안팎이 없는데

금까마귀는 세계 어디에나 스스로 분명하다

온 하늘에서 단박 몸을 뒤집어버리면

한 길이 당당하여 겁 밖이 태평하다

 

 

현계 (玄溪)

 

묘한 이치와 진실을 말하는 것, 그 모두 허망한데

그 가운데 한 줄기가 난간 너머 잔잔하다

침침하고 고요한데 누가 볼 수 있는가

한 줄기 그 소리가 밝은 달에 실려오네

 

 

서암 (瑞巖)

 

흰 기운이 하늘을 찔러 허공을 차게 하는데

푸른 솔은 사방에 여기저기 꽂혀 있다

끄떡없이 다른 경계와 간격이 없지마는

꽃비는 여전히 망령되게 뿌린다

 

 

옥림 (玉林)

 

아주 깨끗해 티가 없는 신기한 보배는

뿌리와 싹이 사철따라 변하지 않네

집 안에 본래 있어 남에게서 얻는 것 아니거니

가지와 잎은 공겁 (空劫) 전에 무성하였다

 

 

영매 (嶺梅)

 

불쑥 솟아나 푸른 하늘에 꽂혔나니

얼음 같은 자태와 옥 같은 뼈는 공겁 전에 있었다

묏부리들이 험준한데 누가 갈 수 있는가

섣달의 봄바람은 세상을 벗어난 오묘함일세

 

 

징암 (澄菴)

 

성품 달이 맑고 뚜렷해 본래의 공 (空) 을 비추건만

사립문을 닫아 두어 사람들이 다니기 어렵구나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거니 누가 거기 가겠는가

이 작은 암자가 금년에는 바로 그 가난함일세

 

향암 (響菴)

 

맑은 메아리가 허공을 흔들고 시방에 떨치나니

여섯 창에 찬 달이 당당히 드러났네

삼라만상이 모두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니

띠풀 사립문도 다 광명을 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