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해설 4
21. 십행품
공덕림보살이 선사유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살의 10가지 행을 말씀하였다. 즉 즐거운 행〔歡喜行〕․이로운 행〔饒益行〕․어김이 없는 행〔無違逆行〕․굽힘이 없는 행〔無屈撓行〕․어리석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행〔無痴亂行〕․잘 나타나는 행〔善現行〕․집착이 없는 행〔無着行〕․얻기 어려운 행〔難得行〕․법을 잘 설하는 행〔善法行〕․진실한 행〔眞實行〕 등 십행(十行)이다.
이 십행에서는 특히 보살의 십바라밀행을 차례로 교설하고 있다. 십주에 머무른 보살이 자타를 이롭게 하는 만행을 일으키니 십행이 교설되고 있다. 이 보살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면서, 십바라밀이 근본이 되어 모든 행을 포섭하고 있다. 이처럼 공덕림보살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보살행은 바로 공덕을 쌓아가는 공덕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엄의 보살도는 십바라밀에 다 포섭된다. 십주의 갖가지 보살행은 십바라밀을 체로 하며, 십행은 십바라밀 그 자체이며, 십회향 역시 초회향이 바라밀행이며 다른 회향에서도 바라밀행이 그 기저가 되고 있다. 십지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토대 위에 일불승(一佛乘)적 보살도가 가장 잘 시설되면서 십바라밀행이 펼쳐지며, 아울러 각지에 십바라밀을 차례로 치우쳐 닦도록 역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엄대경 전편의 내용을 선재라는 구법자를 등장시켜 다시 한 번 재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입법계품〉의 보살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선재동자가 구법한 선지식의 해탈법문도 십바라밀에 배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계위에서의 보살행과 선재의 구법행은 십바라밀로 포섭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십바라밀은《팔십화엄》에서는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Danaparamita)․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Silaparamita)․찬제바라밀( 提波羅蜜, Ksantiparamita)․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 Viryaparamita)․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Dhyanaparamita)․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Up yaparamita)․원바라밀(願波羅蜜, Pra idh naparamita)․역바라밀(力波羅蜜, Balaparamita)․지바라밀(智波羅蜜, J naparamita)로 언급되어 있다. 이는 또 단바라밀(檀波羅蜜)․시바라밀(尸波羅蜜)․인바라밀(忍波羅蜜, 提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선바라밀(禪波羅蜜)․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원바라밀(願波羅蜜)․역바라밀(力波羅蜜)․지바라밀(智波羅蜜)로 표기되고도 있다.
그리고 이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력․지바라밀로 번역되어 상용되고 있다. 대승의 육바라밀에 중생교화의 입장에서 사종의 바라밀을 더하여 10이라는 원만수로 모든 보살행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화엄경》에서는 이 십바라밀에 대해서는 총설하기도 하고 따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교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십지품〉에서 다시 언급되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의 십바라밀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십행품〉에서는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이 닦아가는 주 수행법으로서 십바라밀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십주위에 해당되는〈명법품〉에서도 보살들로 하여금 행하는 일이 청정케 하는 10가지 법으로서 십바라밀을 설하였다.
제9강 화엄경의 내용 -십바라밀
보살의 십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므로 중생이 본성대로 사는 것이 십행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십바라밀로 전개되고 있다.
(1) 환희행(歡喜行)에서는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을 즐겁게 한다. 보시행은 곧 즐거운 행이니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즐겁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즐거운 행인가.
불자들이여,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서 가진 것을 모두 베풀되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이름이 남을 구하지 않으며, 이양을 탐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며, 제불의 본래 수행하신 바를 학습하고 청정케 하며 증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애락하게 한다.
그래서 빈궁한 곳이 있으면 원력으로써 부호의 집에 왕생하여 시여해서 가난한 이들을 기쁘고 만족하게 한다. 수없는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물러나거나 겁내지 않고 더욱 자비심을 증장시킨다.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이익을 얻고 있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이고 나의 좋은 벗이다. 구하지 않고 청하지 않았으되 찾아와 나를 불법 가운데 들게 하니, 내가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한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들을 자신의 복밭〔福田〕이라 생각하고, 찾아와서 구하면 기뻐하며 시여하라는 것이다. 복전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비전(悲田)과 은전(恩田)과 경전(敬田)을 들 수 있다.
보살은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겠다고 원한다. 그리고 보시함에 있어서 분별상이 없다. 보살은 이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나〔我〕'라는 생각 등 4상이 전혀 없다. 자기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 않고, 받는 이의 복밭도 보지 않으니 삼륜이 청정하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모든 재물을 다 희사하되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자기도 환희롭고 중생들도 환희롭게 일체를 베푸는 것이 보시며, 보시함에 집착이 없는 행이 바라밀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시가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보시하며, 어떻게 보시하며, 왜 보시하며, 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보시바라밀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보시란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뭘 베푸는가 하면 선근과 재물 등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푼다. 환희까지도 베푼다. 어떻게 베푸느냐면 무집착으로 베푼다. 분별심이 없이 사상이 없이 베풀기 때문에 삼륜이 청정한 것이다. 왜 베푸느냐면 자신도 기쁘고 남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2) 요익행(饒益行)에서는 지계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설하고 있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을 이롭게 하는 행인가.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위세를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으려고 한다. 보살은 욕심으로 인해 한 중생도 괴롭히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중생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요익행의 보살은 중생들이 오욕에 탐착하며 거기서 헤매느라고 자유롭지 못하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계율에 머물도록 하며, 그리하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남도 열반에 들게 한다.
이 지계바라밀 역시 중생들이 본성대로 사는 중생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보살은 자신만 제도해서는 보살이 아니다.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주어야 보살이다. 그래서 그 중생들도 다시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 주어야 바라밀행이 되는 것이다. 십바라밀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중생들이 십바라밀행을 할 수 있도록까지 하여야 바라밀행이 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무위역행(無違逆行)에서는 인욕바라밀로 중생을 어기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를 수순하고 인내하여 중생을 어김이 없음이다.
보살은 항상 참는 법을 닦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다.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그들이 모든 나쁜 것을 여의고 항상 참고 견디며 화평하게 살도록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참는 법을 성취할 때 남으로부터 온갖 나쁜 말을 듣거나 심지어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괴롭고 즐거움이 모두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을 내가 이해하고 남들에게 널리 말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4) 무굴요행(無屈撓行)에서는 정진바라밀로 도에 정진하여 퇴굴함이 없어 굽히지 않는다. 보살은 성품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므로, 한 중생이라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정진을 한다.
오로지 모든 번뇌를 끊기 위해 정진을 하고, 모든 의혹의 근본을 뽑기 위해 정진을 하며, 익힌 버릇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하며, 모든 중생계를 알기 위해 정진한다.
보살은 자신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영원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모든 세계에서 일체 중생에게 끝까지 무여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이 네번째의 굽히지 않는 행이다.
(5) 무치란행(無痴亂行)에서는 선정바라밀로 정혜가 바르고 밝아서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다. 보살은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미혹이 없다. 생각이 바르므로 세간의 모든 언어를 잘 알고 출세간법의 말을 할 수 있다. 보살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도 정법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한다.
보살은 잠깐 동안에 수없는 삼매를 얻어 갖가지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 산란치 않고, 삼매가 점점 더 깊어지게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을 몹시 두렵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하는 소리, 귀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 등도 보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한다. 모든 음성을 사유 관찰하여 그 성질을 잘 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무여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 이것이 다섯째의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을 떠난 행이다.
(6) 선현행(善現行)에서는 반야바라밀로 경계와 지혜가 훤출히 밝아 잘 나타난다. 보살은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말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을 것 없는 데에 머물러서 얻을 것 없는 몸과 말과 생각의 업을 보인다. 이 세 가지 업이 모두 없는 것인 줄 알며, 허망함이 없으므로 얽매임도 없다.
실제와 같은 마음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마음의 바탕을 알며, 세간을 초월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분별을 떠나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고, 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보살의 선교방편으로 생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조복되지 못했는데 그냥 버려두고 나만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중생을 교화하면서 무량겁을 두고 보살행을 닦아, 성숙하지 못한 이를 먼저 조복하게 하리라.' 이것이 여섯째의 잘 나타내는 행이다.
(7) 무착행(無着行)에서는 방편바라밀로 중생을 포섭하되 집착이 없다.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순간마다 무수한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면서도 그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순간순간 많은 부처님을 뵙지만 부처님께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집착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장애가 없어 부처님의 보리를 알고, 법의 계율을 증득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머문다. 보살행을 닦고, 보살의 마음에 머물고, 보살의 해탈법을 생각하면서도 보살이 머무는 데에 물들지 않고 보살의 행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여 보살의 수기를 받는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시방세계의 낱낱 국토에서 무량겁을 지내면서 교화하고 성숙하게 할 것이며, 이 한 중생을 위해서 하듯이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할 것이다.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싫어하거나 고달픈 생각을 내어 그냥 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8) 난득행(難得行)에서는 원바라밀(願波羅蜜)로 대원을 성취하여 얻는다.
보살은 얻기 어려운 선근 내지 부처님과 성격이 같은 선근 등을 성취하였다. 보살이 모든 행을 닦을 때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해를 얻고, 부처님 보리에서 가장 넓고 큰 이해를 얻는다. 보살의 서원에는 조금도 휴식이 없고, 모든 겁이 다하여도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으며, 온갖 고통에도 싫은 생각을 내지 않으며, 대승의 소원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이 있는 것 아닌 줄 알지만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의 수효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중생을 버리고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중생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분별하지도 않고 둘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계와 법계가 같은 데에 깊이 들어가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을 위해 보살도를 닦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안온한 피안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째의 얻기 어려운 행이다.
(9) 선법행(善法行)에서는 역바라밀(力波羅蜜)의 힘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시원한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거두어 지녀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집이 되니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돌아갈 곳이 되니 큰 의지처를 주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니 진실한 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니 그들에게 업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홉째의 법을 잘 말하는 행이니, 보살이 이 행에 머무르면 일체 중생을 위해 시원한 못이 되어 모든 불법의 근원을 다하게 된다.
(10) 진실행(眞實行)에서는 지바라밀(智波羅蜜)로 진실한 행을 이룬다.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부처님들의 종성에 들어가고, 부처님들과 선근이 같고, 여래를 따라 배워서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성취되어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다.
보살은 이와 같은 증상심을 다시 일으킨다.
내가 만약 일체 중생에게 무상 해탈도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먼저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면, 이것은 내 본래 소원을 어기는 일이니 마땅치 않다. 그러니 반드시 일체 중생에게 위없는 보리와 무여열반을 먼저 얻게 한 후에 성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내게 청하여 발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생에게 불청객이 되어 일체 중생에게 선근을 쌓아 일체지를 이루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십행위에서 보살이 십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그 바탕에 제법존재가 무상하고 공임을 철저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도 그림자 같으며, 보살행이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 같은 줄 관하기 때문이다.
22. 십무진장품
〈십무진장품〉에서는 신(信)의 무진장을 비롯하여 계장(戒藏)․참장(懺藏)․괴장(愧藏)․문장(聞藏)․시장(施藏)․혜장(慧藏)․염장(念藏)․지장(持藏)․변장(辯藏) 등 10가지 다함없는 무진장행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필경에 무상보리를 성취케 한다.
장(藏)은 출생과 함장의 뜻이 있으니 만덕을 포섭함과 묘용을 출생함이 무진함을 나타낸다.
이 십무진장행으로써 앞에서 말한 10행의 법을 이루어 무진케 하고, 다음에 올 십회향의 법을 이뤄서 나아가게 한다.
제10강 화엄경의 내용 -제5회 3품
제5회의 주요 내용은 10회향법문이다.
23. 승도솔천궁품
세존께서는 다시 위신력으로 보리수 아래 내지 야마천궁을 떠나지 않고서 도솔천으로 향하셨고, 도솔천왕에 의해 설법처가 마련되었다.
24. 도솔궁중게찬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금강당보살을 위시하여 당(幢)자가 돌림자인 견고당․용맹당․광명당․지당․보당․정진당․이구당․성수당․법당보살 등 10보살들이 수많은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데 이르렀다. 이 제5회의 설주는 금강당보살이니 금강은 지혜를, 당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자비의 기치를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두 무릎으로 광명을 놓아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며 신통을 나투셨다. 10대보살이 차례로 게송으로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였다. 아래 게송은 금강당보살이 찬탄한 게송 가운데 하나이다.
색신이 부처 아니며 色身非是佛
음성 또한 그러하나 音聲亦復然
색신과 음성을 떠나서 亦不離色聲
부처님 신통력을 보는 것도 아니다. 見佛神通力
《금강경》에서는
만약 색으로 나를 보거나 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以音聲求我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요 是人行邪道
여래를 볼 수 없다. 不能見如來
라고 하였으나,《화엄경》에서는 법신이 색신을 통해서 중생 앞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금강경》오가해의 종경송에 보면,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참되지 않고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요, 법신이 청정하여 광대함이 끝이 없다.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의 달이요, 만리에 구름없음에 만리의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법신이 응․화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으로 나투어진다고 하겠다. 우리는 석가모니불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로 모시고 있다.
25. 십회향품
금강당보살이 보살지광삼매에서 일어나 보살로 하여금 부처님의 회향을 닦아 배우도록 하였다. '회'는 돌리는 것〔轉〕이고 '향'은 나아가는 것〔趣〕이다. 십회향은 다음과 같다.
(1) 일체 중생을 구호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난 회향(救護 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回自向他〉
이는 자신을 돌려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회자향타(回自向他)로 요약되고 있다. 보살에게 선근이 있을지라도 만일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고자 하지 않으면 회향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지계바라밀을 맑히고, 인욕바라밀을 닦고, 정진바라밀을 일으키고, 선정바라밀에 들어가고,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대자․대비․대희․대사 등 사무량심으로 무량 선근을 닦아 두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일체지를 얻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선근을 닦을 때,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여 모두 청정케 해서 마침내는 영원히 고통을 떠나게 하여지이다'라고 회향한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여,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이익을 주며 마침내 모두 일체지를 얻게 한다.
(2) 깨뜨릴 수 없는 회향(不壞廻向)〈回小向大〉
불괴회향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어 안주하여 그 선근을 중생에게 광대히 회향하는 것이다. 비록 선근이 적으나 널리 중생을 포섭하여 환희심으로써 광대히 회향한다.
보살은 부처님 계신 데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부처님을 다 받들어 섬기기 때문이다. 보살들과 내지 처음 한 생각을 내어 일체지를 구하는 이에게서까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서원하고 닦으면서 지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에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수호하고 머물러 지니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에게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인자한 눈으로 평등하게 보고 선근으로 회향하여 널리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에 안주할 때 보리심을 더욱더 자라게 하며, 부처님들의 지으신 일을 따라 배운다.
(3)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等一切諸佛廻向)〈回自己因行 向他因行〉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시는 도를 따라 배워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회향이다. 보살이 모든 선근으로써 부처님께 회향해 마치고 다시 이 선근으로써 일체 보살에게 회향하고 내지 중생에게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는 도를 배울 때 모든 색과 내지 법의 육진경계가 아름답거나 추함을 보더라도 애증을 내지 않아 마음이 자재하며, 허물이 없어 청정하며, 기쁘고 즐거워서 근심 걱정이 없으며, 마음이 부드러워 여러 감관이 상쾌하다.
보살이 이와 같은 안락을 얻었을 때 또다시 발심하여 부처님들께 회향한다. 즉, '내가 지금 심은 선근으로 부처님의 낙이 더욱 늘어나게 하여지이다' 한다. 이런 선근으로 부처님께 회향하고 다시 이 선근으로 보살에게 회향한다. 즉, 원이 채워지지 않는 이는 가득 채워지게 하고, 마음이 맑지 못한 이는 청정하게 한다.
보살이 선근으로써 이같이 보살에게 회향하고는 다시 일체 중생에게 회향한다. 일체 중생이 심은 선근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순간에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듣고 스님들을 공경하여지이다고 원한다.
따라서 이상의 셋을 중생회향이라 한다.
(4)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至一切處廻向)〈回因向果〉
보살이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이다. 보살이 선근을 닦을 때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러지이다고 한다. 이 선근이 모든 여래의 처소에 두루 이르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내지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세계에 충만하여지이다고 한다.
(5) 다함이 없는 공덕장 회향(無盡功德藏廻向)〈回劣向勝〉
보살이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불국토를 장엄하는 회향이다. 범부와 이승의 복을 수희하여 무상보리에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일으킨 선근과, 삼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여 일으킨 선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광대한 경계를 깨닫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선근을 모두 따라 기뻐해서 일으킨 선근들이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선근 등을 모두 회향하여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
(6) 모두 평등한 선근에 들어가는 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回比向證〉
온갖 보시 등을 통하여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의 견고한 일체 선근을 따르는 회향이란 보살의 그 위덕이 널리 퍼지어 중생을 구제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많은 권속이 있어 다른 이들이 저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갖 보시를 구족하게 행하며, 부처님의 정법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라도 달게 받으며, 법을 구할 때 한 글자를 위해서라도 모든 소유를 죄다 버리며, 항상 바른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여 선행을 닦고 악행을 버리게 하며, 중생들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보면 자비심으로 구원하여 죄업을 버리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시할 때 잘 거두는 마음을 내어 회향한다. 이른바 색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며, 수․상․행․식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한다.
따라서 이 셋을 보리회향으로 묶을 수 있다. 이하는 실제회향이다.
(7)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따라주는 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回事向理〉
이는 보시 등의 선근을 쌓아 모아서 평등하게 일체 중생을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은 가는 데마다 모든 선근을 쌓아 모은다. 크고 작은 선근을 비롯하여, 모든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을 기르는 선근이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일체 중생이 모든 험난한 곳을 떠나 일체지를 얻어지이다고 회향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 모든 공덕이 청정하고 부처님의 평등을 얻는다.
(8) 진여인 모양의 회향(眞如相廻向)〈回差別行向圓融行〉
진여상과 같이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다. 선근으로 항상 원만하고 걸림없는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성취하여 대승에 안주하고 보살행을 맑게 닦아지이다고 원한다.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회향하기를 진여가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듯이, 선근의 회향도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고자 한다.
진여가 끝까지 청정하여 온갖 번뇌와 함께 하지 않듯이, 선근의 회향도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청정한 지혜를 원만케 한다.
(9) 집착도 속박도 없는 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回世向出世〉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선근을 존중한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합장 공양하고, 탑에 정례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청하는 데 마음으로 존중하나니, 이런 여러 가지 선근에 모두 존중하여 수순한다.
보살은 여러 선근으로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보현의 광대한 정진을 일으킨다. 부처님들이 보살로 계실 때 닦으시던 회향과 같이 회향한다.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을 배우며,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하시는 길을 따른다. 세간과 세간법을 분별하지 않으며, 중생을 조복하거나 조복하지 않음을 분별하지 않으며, 자신과 타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0) 법계와 평등한 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回順理事向所成事〉
이는 법보시를 비롯하여 모든 청정한 법으로 법계와 평등한 한량없는 회향을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법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법보시를 널리 행한다. 큰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들을 보리심에 편히 있게 하며, 중생들을 위해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선지식이 되어 선근이 자라서 성취하게 한다.
법보시한 선근으로써 회향하여 보현의 한량없고 끝없는 보살의 행과 원을 원만하게 성취하며, 허공과 법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일체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이 끝없는 지혜를 두루 성취하여 모든 법을 알게 한다.
이상과 같이 10종회향은 십바라밀이 체가 된다. 그리고 삼처회향(三處廻向)으로 묶을 수 있으니 중생회향․보리회향․실제회향이다. 자기만행을 돌이켜서 삼처에 향하는 것이다. 사찰에서는 상단을 향하여 항상 '삼처에 회향하여 다 원만하여지이다〔廻向三處悉圓滿〕'이라 축원하고 있다.
원효대사는《화엄경》을 이〈십회향품〉까지만 주석한 후 절필하고는 회향하러 중생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원효가 주석한《화엄경》은 물론《육십화엄》일 것이다.《육십화엄》은〈십회향품〉이〈금강당보살십회향품〉으로 되어 있다. 이 십회향은 원의 성격이 강하여 십회향원으로 일컬어지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