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2. 4. 6. 12:10

제14강 화엄경의 내용-여래출현․제8회 이세간품

여래출현의 10종법 가운데 이어서 네번째 여래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4) 여래심

여래심은 바로 여래성기심으로서 여래출현에 있어서 특히 중요시되어온 교설 부분이다. 이 역시 10종심이 있음을 보이며 이 마음은 지혜와 같이 쓰이고 있다. 여래의 마음을 모두 볼 수는 없으나 다만 지혜가 한량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여래의 마음 또한 10가지로 교설되어 있는데 그 첫째는 여래의 지혜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건의 의지가 되지만 허공은 의지한 데가 없으니,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지와 출세간지의 의지가 되지만 여래의 지혜는 의지한 데가 없다.

 

이렇게 비유로 여래의 지혜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그 중에 열번째 마음은 특히 주목되어온 여래의 지혜이다. 그것은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무처부지(無處不至)의 여래심이다.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 왜냐하면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가지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허망한 생각과 뒤바뀐 집착으로 증득하지 못하니, 만일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온갖 지혜가 곧 앞에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큰 경책을 들고 있다. 이를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 또는 진함경권유(塵含經卷喩)라 부르고 있다.

이 미진경권유는 분량이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이 있어 삼천세계에 있는 일이 모두 쓰여 있으나, 이 큰 경책이 한 티끌 속에 있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며, 한 작은 티끌속과 같이 모든 작은 티끌 속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지혜가 밝은 사람이 청정한 천안을 구족하여 이 경책이 작은 티끌 속에 있어 이익이 되지 못함을 보고 꾸준히 노력하는 힘으로 저 티끌을 깨뜨리고 이 경책을 내어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즉시 방편을 내어서 작은 티끌을 깨뜨리고 이 큰 경책을 꺼내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이익을 얻게 하였으며, 한 티끌과 같이 모든 티끌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한량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일체 중생을 두루 이익되게 하는 것이 중생들의 몸속에 갖추어 있지만, 어리석은 이의 허망한 생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이익을 얻지 못한다.

여래께서 청정한 지혜눈으로 법계의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하고 말씀하시기를 "이상하고 이상하다.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를 가르쳐서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영원히 여의고 자기의 몸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같아서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 하시고, 곧 저 중생들로 하여금 성인의 도를 닦아서 허망한 생각을 여의게 하며 허망한 생각을 여의고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얻어서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이처럼 보살은 마땅히 여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처부지의 여래심은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왔던 부분이다. 우선 티끌 속에 경권이 들어 있다고 해서 여래장사상의 전거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여래장사상을 바탕으로 한 법계연기사상의 전거도 된다. 특히 미진을 깨뜨리고 경권을 꺼내어 이익을 준다는 측면에서 이는 여래성기의 출처가 되어, 매우 주목을 받은 여래출현의 경계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도〈여래출현품〉의 이 대목을 보고 불심(佛心)과 불어(佛語)가 하나인 줄을 깨닫고 너무 기뻐서《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자술하고 있다. 이 여래심의 여래출현상은 선교일치의 경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5) 여래경계

여래의 경계란 여래의 지혜가 활동하는 경계이니, 곧 중생계를 떠나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이다.

보살은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며, 마음의 경계가 그지없고 한량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나는 까닭이다〔如是如是思惟分別 如是如是無量顯現〕. 이 경계 역시 일체유심조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6) 여래의 행

여래의 지혜가 중생에게 응하는 것은 행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래행은 보살의 공덕행으로 나타난다. 여래행은 걸림없는 행이며, 진여의 행이 여래의 행이다.

그러나 진여가 생하지도 움직이지도 일어나지도 않듯이, 여래행 또한 불생(不生)․부동(不動)․불기(不起)이다. 기이불기(起而不起)인 것이다. 여래행은 시간의 범주를 초월하므로 현재에 활동하되 불기(不起)인 것이다. 이것이 성기(性起)인 것이다.

 

(7) 여래의 성정각

여래의 지혜와 행의 근거가 곧 보리(菩提)이다. 부처님의 보리는 바다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것이 없다. 부처님의 보리는 모든 글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모든 말로도 나타낼 수 없으나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열어 보인다.

부처님의 보리는 허공과 같아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 보리는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으며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도 없는 까닭이다.

보살마하살은 자기의 마음에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처가 있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여래의 전법륜

여래는 마음의 자유자재한 힘으로써 일어남도 없고 굴림도 없이 법륜을 굴리니, 모든 법이 항상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글자와 온갖 말로써 법륜을 굴리니, 여래의 음성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까닭이다.

일체 중생의 갖가지 말이 다 여래의 법륜을 떠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말과 음성의 실상이 곧 법륜이기 때문이다.

 

(9) 여래의 반열반

보살이 여래의 열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근본 성품을 알아야 한다. 진여의 열반처럼 여래의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벗어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생겨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면 멸함이 없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래의 열반을 보이고 있다.

 

여래는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내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사모함을 내게 하려고 열반함을 보이신다. 그러나 여래는 참으로 세상에 출현하심도 없고 열반하심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는 청정한 법계에 항상 계시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열반함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가 떠서 세간에 두루 비치되, 깨끗한 물이 있는 그릇에는 그림자가 나타나서 여러 곳에 두루하지만 오거나 가는 일이 없으며, 그릇이 깨지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10) 견문․친근․선근

경에서는 보살이 여래의 정등각을 보고, 듣고, 친근하여 심은 선근이 모두 헛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내는 까닭이며, 내지 온갖 훌륭한 행을 이루는 까닭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러 좋은 비유로 부처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가까이 모신 선근공덕이 다함이 없음을 보이고 있다.

먼저 금강 비유를 들고 있다.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삼켜도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을 뚫고서 밖으로 나오니, 금강은 육신에 섞여서 함께 있지 않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처럼 여래께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유위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가서 무위의 가장 높은 지혜에 이르니, 이 선근은 유위행과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는 까닭이다.

또, 가령 마른 풀을 수미산처럼 쌓았더라도 그 가운데 겨자씨만한 불을 던지면 모두 다 타고 마니, 불은 능히 태우기 때문이다. 그처럼 여래에게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필경에 무여열반을 얻는다.

그리고 설산에 있다는 진귀한 선견이란 약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여래도 약왕이라 일컫고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고 있다. 여래의 육신을 보는 이는 눈이 깨끗하고, 여래의 이름을 듣는 이는 귀가 깨끗하고, 여래의 계행 향기를 맡는 이는 코가 깨끗하고, 여래의 법을 맛본 이는 혀가 깨끗하여 광장설을 갖추어 말하는 법을 알고, 여래의 광명에 닿은 이는 몸이 깨끗하여 필경에 위없는 법신을 얻고, 여래를 생각하는 이는 염불하는 삼매가 청정하여진다.

뿐만 아니라 만일 중생이 여래께서 지나가신 땅이나 탑에 공양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갖추어서 모든 번뇌와 근심을 멸하고 성현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가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보거나 들으면서도 업에 덮여서 믿고 좋아함을 내지 못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심게 되어 헛되지 않을 것이며, 내지 필경에는 열반에 들게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여래께서 계신 데서 보고 듣고 친근하면 그 선근으로 모든 나쁜 법을 여의고 착한 법을 구족하리라 원하고, 견문 친근하여 선근을 쌓도록 강조하고 있다.

 

38. 이세간품

 

제8회는〈이세간품〉한 품으로 보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보살의 200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10가지씩 모두 2,000가지의 대답을 한 것이다. 즉, 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 등 모든 지위를 포섭한 일체 보살행을 다시 한 번 총괄적으로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의지(依支)인가로 시작해서 무엇이 보살의 행이며, 선지식이며, 내지는 어찌하여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반열반하심을 보이셨는지를 설하고 있다. 모든 보살도를 총괄하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세간이라는 의미는 세간을 떠난다, 세간을 여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세간이 무엇이며 여읜다는 것은 어떠한 경계인가 하는 것을 짚어보게 한다. 그에 대해서 화엄가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세간이란 처렴상정(處染常淨)을 말하니 동사섭으로 중생계에 있으나 물들지 않는 경계이다. '처세간여허공 여연화불착수(處世間如虛空 如蓮花不着水)'라고 한 연꽃경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이세간품〉다음에 오는,《화엄경》의 마지막 품인〈입법계품〉에서 법계(法界)에 들어간다고 함도 다시 들어갈 법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제15강 화엄경의 내용-제9회 입법계품

 

제9회 역시 한 품인〈입법계품〉으로 이루어져 있다.〈입법계품〉은《화엄경》의 마지막 품으로서 품수는 39품 중 한 품이지만, 그 분량은 권수(62~80)로나 페이지수(대정장 10, pp. 331~446)로 볼 때 총《화엄경》분량 중 약 4분의 1에 해당되는 방대한 양이다.

〈입법계품〉의 별행경은 다른 대부분의 화엄부 경전보다 일찍 성립된 품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선재동자의 구법을 통해 전편의 내용이 재현되는 형식이 취해지고 있다.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한 선재동자가 보살의 가르침대로 선지식을 역참하여 보살도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원과 행을 성취함으로써 법계에 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선재의 구법 여정이나 선지식의 해탈법문은 화엄의 보살도를 말해 주는 주요 자료가 된다.

〈입법계품〉도 근본법회와 지말법회로 나눌 수 있다. 근본법회에서는 세존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대장엄중각에서 사자빈신삼매에 드신 후 설법하시는 내용이다. 그 자리에 보현의 행과 원을 성취한 보살과 성문들과 세주와 함께 계시는데 보현보살과 문수사리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다.《화엄경》청법대중 가운데 성문들이 보이는 곳은 이 근본법회뿐이다.

지말법회는 그 자리에 있던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공양올리고는 남쪽으로 인간세계를 향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수보살이 복성의 동쪽 장엄당 사라숲에 머물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수다라를 말씀하니 복성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 선재동자도 함께 있었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어머니 태에 들 때부터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쌓이기 시작하였으므로 부모와 친척들이 선재라는 이름을 지어줄 만큼 복많은 이였음을 알았다. 또 이 동자가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며 선근을 많이 심었고 선지식을 항상 친근하였으며 삼업에 허물이 없고 지혜로 불법을 깨달을 수 있는 근기임을 알았다.

문수보살이 이렇게 선재를 관찰하고는 선재와 대중들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법을 연설하였다. 선재는 자재한 지혜와 변재로 부처님법을 설하는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하게 된다.

선재는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는 너무나 다른 점을 발견하고 반성을 하였다. 선재가 생각하기를, 자신은 어리석고 교만하며 탐내고 성내는 마음이 많아서 생사 고통의 성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해탈의 문을 찾는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쳐 주길 문수보살에게 청하였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과거에 심은 선근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한다고 칭찬하며, 온갖 지혜를 구족하는 첫째 인연은 선지식을 친근하고 공양하는 것이니, 그 일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였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여쭈었다.

보살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어떻게 보살행에 나아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깨끗이 하며, 어떻게 보살행에 들어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성취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따라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생각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더 넓히며, 어떻게 보현의 행을 빨리 원만케 합니까?

이에 문수보살이 한량없는 부처님을 뵙고 원력을 성취하면 보살행을 구족하게 되며, 모든 세계 모든 겁 동안 보현행을 닦아 행하면 보리도를 성취하리라고 한다. 그러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고, 온갖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지식의 여러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는 남쪽으로 승낙국을 찾아가 묘봉산에 있는 덕운비구를 만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닦으며 내지 보현행을 빨리 원만히 할 수 있는지 묻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선지식을 찾아나서는 선재는 세간의 복이 많은 이로서 선근과 신심이 있었기에 문수보살을 만났고, 강한 의지로 발심하여 해탈도를 구하는 수행자로서의 보살이 되어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재는 덕운비구 선지식을 만나 해탈법문을 들었다. 덕운비구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보는 법문

〔憶念一切諸佛境界 智慧光明普見法門〕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덕운비구 선지식은 대보살들의 지혜로 청정하게 수행하는 문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하며, 남쪽 해문국에 있는 해운비구를 찾아가서 보살행을 물으라고 한다. 해운비구는 광대한 선근을 일으키는 인연을 분별하여 말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선재동자는 덕운비구 선지식으로부터 염불(念佛)해탈문을 얻고는 덕운비구의 가르침대로 다시 해운비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렇게 해서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선지식을 친견하여 해탈문을 성취하게 된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선재가 찾아간 선지식을 우리는 53선지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선재는 선지식을 54번 만나며, 만난 선지식 수도 54분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고 한 곳에서는 두 선지식을 함께 만나기 때문에 53선지식이라 일컫고 있다.

이렇게 선재가 역참한 선지식을 보면 우선 보살이 다섯(문수․관음․정취․미륵․보현보살)이다. 그리고 비구 5(덕운․해운․선주․해당․선견비구), 비구니 1(사자빈신비구니), 우바이 4, 장자 9, 거사 2, 천신 1, 여신 10, 천녀 1, 바라문 2, 선인 1, 왕 2, 선생 1, 동자 3, 동녀 2, 뱃사공〔船師〕 1, 외도 1, 유녀(狀女) 1, 싯닫타 태자비 1, 태자모 1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42계위와 대비시키고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법장은《탐현기》에서 문수가 선재로 하여금 여러 곳을 순력하여 선우(善友)를 구하게 한 것에 다음과 같은 8가지 뜻이 있음을 들고 있다.

궤범이 되기 때문이다. 선재는 법을 구하는 묘한 모범을 이루고, 선지식은 법을 설하는 좋은 규범을 보여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자취를 모범으로 삼아서 행하게 하는 것이다.

행연(行緣)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범행을 이루는 데는 선지식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견만(見慢)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신학(新學)보살인 선재로 하여금 법을 구하는데 여러 부류의 선지식을 만남으로 해서 스스로의 교만을 깨뜨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마(細魔)를 여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 매여 하나만 고수한다면 후행(後行)이 증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착하는 허물도 있는 까닭이다.

행(行)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재가 한 법문을 얻어서도 수행할 수 있는데 그렇게 널리 구하는 것은 보살행과 선우의 행과 법을 구하는 행 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지식에 의탁함으로써 신(信) 등의 다섯 가지 지위의 차별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의 지위는 신위의 선지식을 만나면 신위이며, 주에 있으면 주위이니 한 몸으로 오위(五位)를 거친다. 있는 곳에 따라서 곧 그 지위가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불법이 깊고 넓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식은 비록 지위가 법운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직 이러한 하나의 법문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찌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보살의 경계를 요달하겠는가'라고 하며 다른 선지식을 찾아가 보살도를 배우도록 일러주고 있다. 선재 또한 비록 지위가 등각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사오나 어떤 것이 보살행이며 보살도인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선지식에게 보살도를 묻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연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는 선지식과 더불어 하나의 연기를 이루니 능입과 소입이 두 가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 외에 선재가 없으므로 하나가 곧 일체임을 드러내서 선재가 모든 지위를 거침을 밝힌다. 또 선재 외에 선지식이 없으므로 일체가 곧 하나임을 나타내어서 여러 지위가 선재에게서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거둠과 펼침이 자재하며 서로 원융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그 특기할 만한 점을 화엄의 만수인 10가지만 찾아보려 한다.

(1) 선재가 선지식을 만나 발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근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체적인 자각이 배제될 수 없다.

선재가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는 복성에 사는 수많은 우바새․우바이, 동남․동녀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재가 가장 선근이 깊었기에 문수보살이 부처님 세계를 말씀하실 때 당시의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 너무나 다름을 느끼고 참회를 하며 부처님을 닮고자 발원하였던 것이다.

(2) 선지식들의 해탈법문은 그들의 이름, 처소, 신분 등과 밀접하게 연계됨을 발견할 수 있다.

(3) 총 54분의 선지식 가운데 여성이 21분(비구니, 우바이, 여신, 천녀, 동녀, 유녀, 태자비, 태자모)이나 되는 것이다. 이는 비남비녀(非男非女) 역남역녀(亦男亦女)라 할 수 있는 보살은 여성 선지식에 넣지 않은 숫자이다.

그리고 십지 계위는 모두 여성 선지식에 해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십지는《화엄경》에서 화엄보살도를 총괄하며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대표하는 계위이다. 그 자리는 특히 비심(悲心)이 증대된 자리이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같이 화엄세계에서는 숫자적으로나 해탈경계로나 남녀의 차별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여성에게 자비․청정․수순중생의 덕이 수승하며, 생불(生佛)하는 특징적인 장점까지 있음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화엄경》에서의 여성 선지식은 여래의 행덕을 드러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4)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화엄보살도의 계위인 42계위와 그 속에서 수행하는 10바라밀에 차례로 배대되어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5) 이들 선지식의 계위는 법계로 향해가는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일위일체위이다. 선재는 각 선지식에게서 모두 해탈문을 증득하며 선지식은 일위일체위의 일승보살 계위를 다양한 방편으로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수행계위를 두루 지나는 선재의 지위는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다.

(6) 인과불이의 보살도를 보여 준다. 그것은 선재가 문수․미륵․보현보살을 만나는 여정에서 특히 더 보여 주고 있다.

선재동자가 비로자나장엄장 대누각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미륵보살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을 칭찬받고 보리심 공덕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누각에 나아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니 문이 열렸다. 그리하여 누각의 갖가지 장엄과 불가사의한 자재로운 경계를 보고 해탈문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륵보살이 다시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듣고 삼매에서 일어나니 누각의 장엄이 다 사라졌다. 그리하여 미륵보살이 다시 문수보살에게 가서 보살행을 배우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때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가르쳐준 대로 110성을 지나서 보문국의 소마나성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뵙기를 희망하였다. 이때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 110유순을 지나와서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였다.

"선재동자가 만약 신근(信根)을 여의었다면 조그만 공덕에 만족하고 행원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며, 내지 두루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선재를 칭찬하였다. 그러고는 선재로 하여금 보현행원을 성취할 결심을 굳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재가 일심으로 보현보살을 만나려고 정진하여 드디어 보현보살을 만나서 보현의 자유로운 신통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선재동자는 보현의 행과 원의 바다를 믿어서 보현보살과 평등하고 내지 부처님의 해탈자재도 모두 평등하였다.

그때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공덕바다가 한량없음을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세계 티끌 수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다 물을 마셔 다하고 大海中水可飮盡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맬 수 있으나 虛空可量風可繫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도다. 無能盡說佛功德

 

이 게송 또한 기도시 항상 하는 염불문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게송이다.

이처럼 선재는 처음 문수보살에게서 시작하여, 미륵보살에게서 불과에 들고 다시 문수를 만나 보현행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일단 그 여정이 끝난다. 따라서 이는 인과 과가 둘이 아닌 경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선재 역시 초발심에 해탈하여 법계에 들었으며〔入法界〕계속해서 선지식들을 만나 무수한 해탈문을 증득함으로써 펼쳐 보이는 중중무진한 화엄일승보살도는 불세계를 장엄하는 행이다.

(8) 선재나 선지식 모두 여래출현의 존재이다.

(9) 이외에도 무진법계연기나 화엄성기 등, 후에 체계화된 화엄사상이나 수증법이 이들 선지식의 해탈경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해인삼매, 일중다․다중일, 일즉다․다즉일, 동체․이체의 상즉․상입, 일엄․일체엄의 보엄․보문, 일단일체단․일성일체성, 융삼세간불의 화엄경계가 선재가 여성 선지식들을 만나는 여정에서 적나라하게 교설되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10) 이러한 모든 선지식의 해탈경계와 보살도는 보현보살의 행과 원에 포섭되며 10대원으로 대표된다. 이 보현보살의 10종 대원은《사십화엄》의〈보현행원품〉에만 나타나는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