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현담 4
故로 下經에 云如海普現衆生身일새 以此說名爲大海라 菩提普印諸心行일새 是故正覺名無量이라하니라 非唯智現物心이라 亦依此智하야 頓現萬象하야 普應諸類하나니 賢首品에 云或現童男童女形과 天龍及以阿修羅와 乃至摩喉羅伽等하야 隨其所樂悉令見이로다 衆生形相各不同하며 行業音聲亦無量이어늘 如是一切皆能現이 海印三昧威神力이라하니 然此文中에 言含法喩하니 智卽是法이요 海卽是喩니 識浪旣停일새 云湛智海요 無心頓現일새 故曰虛含이니 能應所應이 皆爲萬像이니라
고로 下經에 이르대 “바다와 같이 널리 衆生身을 두루 나타낼새 이로써 大海라 이름했니라. 보리가 모든 心行에 널리 印할새 이런 고로 정각이 무량이라 이름한다” 하나니라. 오직 지혜가 物心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智慧를 의지하야 몰록 萬象에 나타나서 널리 모든 類에 응하니 賢首品에 이르대 “或 童男童女의 形象과 天龍과 및 阿修羅와 내지 摩睺羅伽 등을 나타나서 그 좋은 바를 따라서 다 하여금 보게 함이로다. 衆生의 形象이 각각 같지 않으며 行業과 음성이 또한 무량하거늘 이와 같이 일체가 다 能히 나타남이 해인삼매 위신력이라” 하나니 그러나 이 글 가운데에 말은 법과 비유를 포함하니 지혜는 곧 이 법이요 바다는 곧 이 비유이니 識浪이 이미 멈출새 湛智海라 말하고 無心히 몰록 나타날새 고로 虛含이라 하고 能應과 所應은 다 만상이 되니라.
○皎性空之滿月이 頓落百川者는 第二對에 明能應之身이니 此之兩句는 唯性字是法이요 餘皆是喩나 以性該之하면 皆含法喩하니 謂若秋空朗月이 皎淨無瑕하면 萬器百川에 不分而遍하나니 性空은 卽所依法體요 滿月은 卽實報智圓이요 百川은 卽喩物機요 影落은 便爲變化니 佛之智月이 全依性空하야 惑盡德圓하면 無心頓應이니라 故로 出現品에 云譬如淨月在虛空에 能蔽衆星示盈缺이라 一切水中皆現影하야 諸有觀瞻悉對前인달하야 如來身月亦復然하야 能蔽餘乘示長短이라 普現天人淨心水하야 一切皆謂對其前이라하며 智幢菩薩偈에 云譬如淨滿月이 普現一切水에 影像雖無量이나 本月未曾二인달하야 如來無碍智로 成就等正覺하사 普現一切刹이나 佛體亦無二라하니 此則水亦喩刹이니라
○皎性空之滿月頓落百川이라는 것은 第二對에 能應의 身을 밝힘이니 이에 兩句는 오직 性字가 이 法이요. 나머지는 다 이 비유나 性으로써 이를 꾸리면 다 法과 비유를 포함하니 말하자면 만약 가을 하늘에 밝은 달이 밝고 조촐하야 티끌이 없으면 萬器百川에 나누지 않아도 두루하나니 性空은 곧 의지할 바 법체요 만월은 곧 實報智가 圓滿함이요 百川은 곧 物의 根機에 비유함이오 影落은 문득 變化함이니 부처님의 智月이 온전히 性空을 의지하야 迷惑이 다하고 德이 圓滿하면 無心으로 몰록 應하나니라. 고로 出現品에 이르대 “비유컨대 淨月이 虛空에 있음에 능히 많은 별을 가리고 차고 기우는 것을 보임이라. 一切水中에 다 그림자가 나타나서 모든 봄이 있는 이는 다 前에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아서 如來의 신월도 또한 다시 그러하야 능히 나머지 乘을 가리워 길고 짧음을 보임이라. 널리 天人의 淨心水에 나타나서 一切가 다 그 앞에 대한다고 여김이라” 하며 智幢菩薩偈에 이르대 “비유컨대 淨滿月이 널리 一切水에 나타남에 그림자가 비록 무량하나 本月이 일찍이 둘이 아닌 것과 같아서 여래의 무애한 지혜로 等正覺을 成就하야 널리 一切刹에 나타나나 佛의 體도 또한 둘이 없다” 하니 이는 곧 水도 또한 刹에 비유함이라.
若準離世間品인대 亦喩菩薩이니 偈에 云譬如淨日月과 皎鏡이 在虛空하야 影現於衆水나 不爲水所雜인달하야 菩薩淨法輪도 當知亦如是하야 現世間心水나 不爲世所雜이라하니라 亦以月喩所說法이니 上皆空月不同이어니와 若以相歸性則空亦名佛이라 故로 一切慧菩薩이 云法性이 本空寂하야 無取亦無見이로다 性空이 卽是佛이니 不可得思量이라하시니 則空色照水에 影落晴天이니 天은 猶空也라
만약 離世間品에 준할진대 또한 보살을 비유함이니 偈에 이르대 “비유컨대 淨日月과 밝은 거울이 허공에 있어서 많은 물에 그림자가 나타나나 物에 섞이는 바가 되지 않음과 같아서 菩薩淨法輪도 마땅히 알라 또한 이와 같아서 세간의 心水에 나타나나 세간에 섞이는 바가 되지 않는다” 하니라. 또한 달로써 설한 바 법에 비유하니 위에는 다 허공과 달이 같지 않거니와 만약 相으로서 性에 돌아간즉 空도 또한 불이라 이름하나니라. 고로 일체혜보살이 이르대 “法性은 본래 공적하야 取할것도 없으며 또한 볼것도 없음이라 性空이 이 곧 불이니 가히 사량하지 못함이라” 하니 空色이 物에 비침에 그림자가 맑은 하늘에서 떨어지니 天은 空과 같음이라.
○不起樹王羅七處於法界者는 第三에 明說經之處니 意取七處故라 言樹王者는 卽菩提樹니 謂畢鉢羅樹니 此樹高聳하야 特出衆樹일새 故稱爲王이라 言不起者는 謂不起菩提樹하고 而昇忉利天等이니 故로 下經에 云爾時世尊이 不離一切菩提樹下코 而昇須彌하사 向帝釋殿이라하며 法慧菩薩偈에 云佛子汝應觀如來自在力하라 一切閻浮提에 皆言佛在中이나 我等今見佛이 住於須彌頂이라 十方悉亦然하니 如來自在力이라하니라 三天에 皆有不起而昇之言이라
○不起樹王羅七處於法界 라는 것은 第 三의 經을 說한 곳을 밝힘이니 뜻에 七處를 取하는 연고라. 樹王이라고 말한 것은 곧 菩提樹니 畢發羅樹를 이름이니 이 나무는 높이 솟아서 특히 많은 나무중에서 빼어날새 고로 王이라 稱함이라. 不起라고 말한 것은 菩提樹에서 일어나지 않고 忉利天등에 오름을 이름이니 고로 下經에 이르대 “저때에 世尊이 一切菩提樹 아래를 여의지 아니하고 須彌山에 오르사 帝釋殿을 向함이라” 하며 法慧菩薩偈에 이르대 “佛子야 너가 마땅히 如來의 自在力을 觀하라 一切閻浮提에 다 부처님이 가운데에 있다고 하나 우리등은 이제 부처님이 須彌頂上에 계심을 봄이라.十方이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자재력이라” 하니라. 三天이 다 얼어나지 않고 올라 갔다는 말이 있음이라.
故로 彼成四句하니 一은 不起一切菩提樹코 而昇一天이니 如前經文이요 二는 不起一處코 而昇一切處요 三은 不起一處코 而昇一處요 四는 不起一切處코 而昇一切處라 二四兩句는 取其結例之文이니 謂十方悉亦然은 取前一切閻浮提하야 對一切忉利亦然이니 則是第四句요 但取一閻浮하야 對一切忉利하면 是第二句니라 其第三句는 易故로 文無어니와 義必合有니 是則不起法界菩提樹하고 遍昇法界七處니라
고로 저 四句를 이루니 一은 一切 菩提樹에서 일어나지 않고 一天에 오름이니 마치 前의 경문과 같음이오 二는 一處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一切處에 오름이오 三은 一處에서 일어나지 않고 一處에 오름이오 四는 一切處에서 일어나지 않고 一切處에 오름이라. 二四 兩句는 그 例를 結한 文을 取함이니 十方이 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前 一切閻浮提를 取하여 一切忉利天을 對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이니 곧 이 第 四句요 다만 이 閻浮提를 取해서 一切忉利天을 對하면 이 第 二句니라. 그 第 三句는 쉬운 까닭으로 글이 없거니와 뜻은 반드시 合함이 있나니 이는 곧 法界菩提樹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두루 法界七處에 오름이라.
今言羅七處於法界者는 若略有二意하니 一은 令遍法界中에 皆有七處요 二는 令一一處로 皆遍法界니라 且初義者는 若約自狹之寬說遍인댄 應如下說處中十重之內에 遍於中八이니 以初一은 是能遍七處요 十是例餘佛故라 然下十重은 是約佛遍於處어니와 今明處遍於處- 自有二義耳니 所依之處- 旣遍法界인댄 能依之身도 居然遍也라 令直就遍法界言인대 略有五種이니 一遍法界同類刹中에 皆有七處요 二는 遍法界異類刹中七處요 三은 遍法界微塵刹中에 亦有七處요 四는 遍法界虛空容塵之處에도 亦有七處요 五는 遍法界하니 帝網刹中에도 亦有七處니라 二는 令一一處遍者는 如菩提場이 遍法界則普光中에도 亦有菩提場이며 忉利天中에도 亦有菩提場이며 夜摩兜率等七處에도 一一皆有菩提場이니라 如遍七處하야 亦遍非七處之處니 如化樂四王色界十八等非說經處에도 今菩提場이 亦皆遍滿이니라 如菩提場이 旣遍法界하야 其餘六處에도 一一皆遍六處와 乃至法界니라
羅七處於法界라 말한것은 간략히 두 뜻이 있나니 一은 두루한 法界 가운데에 다 七處가 있음이요. 二는 낱낱 處로 하여금 다 法界에 두루하게 함이라. 우선 처음 뜻은 만약 좁은 곳으로부터 넓은 곳에 가서 두루 說함을 잡을진대 응당히 아래 설한 곳 가운데에 十重내에 그 中 八에 두루하니 처음 一은 이 능히 七處에 두루함이오 十은 이 나머지 佛을 例한 연고라. 그러나 아래의 十重은 佛이 處에 두루함을 잡았거니와 이제 處가 處두루함을 밝힘에 스스로 두가지 뜻이 있으니 의지할 바의 곳이 이미 법계에 두루할진댄 能히 의지하는 身도 거연히 두루함이라. 이제 바로 遍法界에 나아가 말할진대 간략히 五重이 있나니 一은 遍法界同類刹中에 다 七處가 있음이오 二는 遍法界異類刹中에 七處가 있음이요 三은 遍法界微塵刹中에 또한 七處가 있음이오 四는 遍法界虛空容塵의 處에 또한 七處가 있음이오 五는 遍法界帝網刹中에도 또한 七處가 있나니라. 二는 令一一處遍이라는 것은 저 菩提場이 法界에 두루한즉 普光 가운데에도 또한 菩提場이 있으며 忉利天 가운데에도 또한 菩提場이 있으며 夜摩兜率等 七處에도 낱낱이 다 菩提場이 있나니라 저 七處에 두루한 것과 같이 또한 七處가 아닌 處에도 두루하니 저 化樂과 四王과 色界十八等 경에 설하지 않은 곳에도 이제 보리장이 또한 다 두루 가득하나니라. 저 菩提場이 이미 法界에 두루한 것과 같아서 그 나머지 六處에도 낱낱이 다 육처와 내지 법계에 두루함이라.
此亦有五하니 一은 遍一一同類刹이요 二는 遍異類刹이요 三은 遍法界塵이요 四는 遍虛空容塵之處요 五는 遍法界帝網刹이니라 更細而論인댄 非但一一處遍이라 隨一一塵하야 皆遍法界五重之處니 是則一處中에 有一切處니라 上二重釋遍이 皆遍五類하니 五類之中에 前三은 約事法界요 次一은 通事理니 理空事空故요 後一은 事事無碍法界니 由事卽理라 事理無碍故로 以理融事하야 遍於重重하나니 皆是如來說經之處니라
이것도 또한 다섯이 있나니 一은 낱낱 同類의 찰에 두루함이오 二는 異類刹에 두루함이오 三은 法界塵에 두루함이오 四는 虛空容塵의 處에 두루함이오 五는 法界帝網刹에 두루함이니라. 다시 자세히 논할진대 다만 낱낱處에 두루할 뿐만 아니라 낱낱塵을 따라서 다 法界 五重의 處에 두루하나니 이는 곧 一處 가운데에 一切處가 있음이니라. 위의 二는 거듭 두루함을 해석함이 다 五類에 두루하니 五類 가운데에 앞에 三은 事法界를 잡음이오 다음 一은 事理에 통하니 理가 空하고 事가 空한 연고요. 後의 一은 事事無礙法界니 事가 理에 즉함이라 事理가 무애함을 말미암은 연고로 理로써 事를 融合하야 거듭거듭 두루하니 다 이 여래가 경을 설한 곳이라.
○無違後際暢九會於初成者는 四에 明說經時니 卽始成正覺時라 然有兩說하니 各是一師之義일새 以無違兩字로 會通이니 謂菩提流支는 則以前五會는 是初成卽說이니 以經初에 云始成正覺故며 三天에 皆云不起而昇이라하니라 第六會已下는 是第二七日後說이니 以別行十地經初에 云婆伽婆- 成道未久니 第二七日故라하니 例此則第九一會는 在後時說이니 以有身子祇園等故라하며 賢首는 則以初成하야 頓說九會之文이라할새 今疏會云이로다 賢首- 旣指歸云호대 常恒之說은 前後際而無涯라하시니 則在後時無過로다 故云無違後際니 後際는 卽通第九會- 在後時說일새 故로 不妨後際어니와 而宣暢九會는 在於初成이니라
○無違後際暢九會於初成 이라는 것은 四에 경을 설한 때를 밝힘이니 곧 비로소 正覺을 이룬 때니라. 그러나 兩說이 있으니 각기 이 一師의 뜻일새 無違 兩字로 會通하나니 菩提流支는 곧 前 五會로써 이 처음 이루자 곧 설했다 하니 이 경의 초에 이르대 “始成正覺이라 한 연고며 三天에 다 이르대 일어나지 않고 오른다” 하니라. 第六會 已下에는 이 第二七일 後에 說했다 하니 또 別行十地經 初에 이르대 “婆伽婆가 道를 이룬지 오래지 않은 第二七日인 까닭이라” 하니 이를 例한 즉 第九 一會는 後時에 있어 說하니 써 身子와 衹園精寺等이 있는 연고라 하며 賢首는 곧 처음 成道함에 몰록 九會의 文을 설했다 할새 이제 소에는 회통하여 말함이로다. 현수가 이미 指歸에서 이르대 “常恒의 說은 前後際에 걸림이 없다”하니 곧 後時에 있다고 해도 허물이 없음이라. 고로 이르대 後際에 어김이 없다 하니 後際는 곧 第 九會에 通하야 後時에 있어 설할새 後際에 방해롭지 아니하거니와 九會에 宣暢함은 初成에 있나니라.
上來에 分於三時는 約所表故요 初成頓演은 約圓融故라 又分三時者는 以法就機故요 能頓說者는 約佛德能으로 能頓演故니 以初後相卽일새 故로 無違後際하야 不妨初成에 頓彰九會니라 經에 云一念이 卽無量劫이요 無量劫이 卽一念이라 故普經十住品에 云過去無量劫을 安置未來今하고 未來無量劫을 廻置過去世하니 非長亦非短이라 解脫人所行이라하니 多劫이 不乖刹那어니 初成이 豈妨後際리오 上之二段은 廣如敎緣中辨하니라
上來에 三時로 나눈 것은 표한 바를 잡은 연고요 初成에 몰록 演說함은 圓融을 잡은 연고라. 또 三時로 나눈 것은 법으로 幾에 나아가는 연고요 능히 몰록 설한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德能을 잡아서 능히 몰록 演說한 연고니 初後가 서로 卽할새 後際를 어김이 없어서 初成에 몰록 九會를 드러냄에 방해롭지 않나니라. 經에 이르대 “一念이 곧 무량겁이오 無量劫이 곧 一念이라” 하며 고로 晉經 十住品에 이르대 “過去 無量劫을 未來와 至今에 安置하고 未來 無量劫을 過去世에 돌이켜 두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음이라. 解脫人이 行한 바라” 하니 다겁이 찰나를 어기지 않거니 初成이 어찌 後際를 방해롭게 하리오 위의 二段은 자세한 것은 敎緣中에 가림과 같음이라.
○盡宏廓之幽宗 被難思之海會者는 五에 明所被衆也라 然이나 上句는 略明經義하야 以爲能被니 義在旨趣之中이어니와 今爲成所被故로 略擧能耳라 宏者는 大也요 廓者는 空也요 幽者는 深也라 下句에 被難思之海會는 卽是所被니 言海會者는 以深廣故니 謂普賢等衆이 德深齊佛하시고 數廣刹塵할새 故稱爲海요 深超情表일새 是不可思요 數廣難量일새 亦不可思니라 卽深而廣이라 不可作深思요 卽廣而深이라 不可爲廣思니 眞應權實이 類例多端라 又不可思니 該徹果海일새 尤不可思니라
○盡宏廓之幽宗被難思之海會라는 것은 五에 입힌 바 大衆을 밝힘이라. 그러나 上句는 經에 뜻을 간략히 밝혀서 能被가 되니 뜻이 旨趣 가운데 있거니와 이제는 입힐 바를 이루기 위한 연고로 간략히 能을 들었을 뿐이라. 宏이라는 것은 大요 廓이라는 것은 空이요 幽라는 것은 深이라. 下句에 被難思之海會라고 한 것은 이 입힌 바라. 海會라고 말하는 것은 깊고 넓음을 쓴 연고니 말하자면 普賢等의 무리가 德이 깊어서 부처님과 같으며 數가 刹塵과 같이 넓음일새 고로 海라 稱함이오. 깊어서 情表를 超越함일새 가히 思量할 수 없음이오. 數가 넓어서 헤아리기 어려울새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나니라. 深에 즉하여 넓음이라 가히 깊다고 생각할수 없고 廣에 즉하여 깊음이라 가히 넓다고 생각할 수 없나니 眞應과 權實의 類例의 多端함을 가히 思量할수 없나니 果海를 꾸려 사무침일새 더욱 사의할 수 없음이라.
故로 初會에 云有十佛刹微塵數菩薩의 所共圍遶라하며 略列四十二衆호대 皆以刹塵無量으로 而爲其量이오 況口光所召 一一菩薩이 各領世界海微塵數菩薩하야 以爲眷屬하고 來至此會하야 毛光重現하야 周入刹塵하사 依正作用이 該攝三際하시니 諸大菩薩도 尙不能思어든 豈況凡情으로 測其涯際오 故云難思之海會니라
고로 初會에 이르대 “十佛刹微塵數菩薩이 함께 圍繞하는 바라” 하며 간략히 四十二衆을 나열호대 다 刹塵無量으로써 그 量을 삼았나니라. 하물며 口光으로 부른 바리요. 낱낱 菩薩이 各各 世界海微塵數菩薩을 거느려 眷屬으로 삼고 此會에 와서 毛光이 거듭 나타나서 두루 刹塵에 들어가며 依報 正報의 作用이 三際를 꾸려 攝하니 모든 대보살도 오히려 능히 생각하지 못하거든 어찌 하물며 凡情이 그 涯際를 헤아리리오. 고로 이르대 難思之海會라.
○圓音落落이 該十刹而頓周者는 六에 明說經本也니 本卽圓音이요 落落者는 疎遠聲也라 十刹者는 謂樹形等異類之刹을 經列二十하고 結有十佛刹塵하니 擧十以彰無盡일새 故云十刹이라 圓音之義는 下當廣說이어니와 略而言之컨대 一音之中에 具一切音일새 名曰圓音이요 一切音聲이 卽是一音일새 亦名一音이니 一多無礙를 總曰圓音이니라 經에 云佛演一妙音하사 周聞十方國하시니 衆音悉具足하야 法雨皆充遍이로다 一切言詞海와 一切數類音으로 一切國土中에 恒轉無上輪이라하니 皆圓音義也라 十刹齊聞하야 無有前後일새 故名爲頓이요 法界十刹에 無所不聞일새 故名曰周니라
○圓音落落該十刹而頓周라고 하는 것은 六에 經을 설한 근본을 밝힘이니 곧 圓音이요. 落落이라는 것은 멀리 통하는 소리라. 十刹이라는 것은 樹形等 異類의 刹이니 經에 二十을 열거하고 十佛刹塵이 있음을 결하니 十을 들어 無盡함을 드러낼새 고로 이르대 十刹이라. 圓音의 뜻은 아래에 마땅히 널리 說할 것이니 간략히 이를 말함이라. 一音 가운데에 一切의 音을 갖추었을새 이름하여 圓音이라 하고 一切의 音聲이 곧 이 一音일새 또한 一音이라 이름하니 一多가 걸림이 없음을 총히 圓音이라 하니니라. 經에 이르대 “부처님께서 一妙音을 연설하사 두루 十方國에 들리게 하니 많은 音을 다 구족하야 法雨로 다 두루 가득차게 함이라. 一切言詞海와 一切隨類音으로 一切國土 가운데에 항상 無上의 法輪을 굴린다” 하니 다 圓音의 뜻이라. 十刹에서 같이 들어서 前後가 없을새 고로 頓이오 法界十刹에 들리지 않는 바가 없을새 고로 이름하여 가로대 周라 하니라.
○主伴重重 極十方而齊唱者는 七에 別敘說儀也니 謂是通方之說은 擧一爲主에 十方爲伴이라 諸佛菩薩이 皆有主伴하니 遞互相望인댄 盡於十方에 隨一爲主하야 十方爲伴호대 隣次相壓일새 故曰重重이라 然相難明일새 今復略示호리라 言諸佛菩薩이 皆有主伴者는 略有三句하니 一은 果主果伴이니 謂遮那爲主에 十方佛이 爲伴이요 十方佛이 爲主에 遮那爲伴이니라 二는 因主因伴이니 謂此方法慧菩薩이 爲主에 十方法慧菩薩이 爲伴이요 十方菩薩이 爲主에 此方菩薩이 爲伴이니라 三은 果主因伴이니 謂如來爲主에 普賢等이 爲伴이니 此一은 亦名輔翼이며 亦得稱伴이요 彼佛이 爲主에 此方菩薩이 爲伴이니라 如法慧說法에 十方佛證이나 但名證法諸佛이요 不名因主因伴이니라 設爾爲伴이라도 自望本佛而爲主故니라
○主伴重重極十方而齊唱이라는 것은 七에 따로 설한 위의를 서술함이니 말하자면 通方의 說은 하나를 들어 主가 됨에 十方은 伴이 됨이라 제불보살이 다 主伴이 있으니 번갈아 서로 바랄진대 十方을 다하야 하나가 主가 됨을 따라서 十方은 伴이 됨이오. 隣次로 相壓함일새 고로 가로대 중중이라 하니라. 그러나 서로 밝히기 어려움일새 이제 다시 간략히 보이리라. 제불보살이 모두 주반이 있다고 말한 것은 간략히 三句가 있으니 一은 果主果伴이니 毘盧遮那가 主가 되면 十方佛이 伴이 됨이오 十方佛이 主가 되면 비로차나는 伴이 됨을 이름이오. 二는 因主因伴이니 此方의 법혜보살이 主가 되면 十方法慧菩薩이 伴이 되고 十方菩薩이 主가 되면 此方 菩薩이 伴이 됨을 말함이니라. 三은 果主因伴이니 如來가 主가 됨에 보현등이 伴이 되나니 이 一도 또한 輔翼이라 이름하며 또한 伴이라 稱함이오 저 佛이 主가 됨에 차방 보살이 伴이 되나니라. 저 法慧가 법을 설함에 十方諸佛이 證師가 되었으나 다만 이름이 證法한 諸佛이라 하고 因主果伴이라고 이름하지 아니 하나니라 설사 伴이 되나 스스로 本佛을 바라보면 主가 되는 까닭이니라.
言隣次相壓일새 故曰重重者는 略有二義하니 一은 此彼互望이니 如遮那爲主에 十方諸佛이 爲伴이요 此界之東阿閦如來爲主에 此土遮那와 與十方諸佛이 爲伴이라 次東第二佛이 爲主에 遮那與東第一佛과 及十方佛이 爲伴일새 則隨一佛하야 有法界諸佛重數하니 如十人爲主伴에 遞互相望하야 便爲十重主伴하니라 如一佛旣爾에 佛主菩薩伴도 亦然이요 因主旣爾에 因伴도 亦然이니 此一義中에 自有三義하니라
隣次相壓이라 말할새 고로 가로대 重重이라는 것은 간략히 두 뜻이 있으니 一은 此와 彼가 서로 바람이니 저 毘盧遮는 主가 됨에 十方諸佛이 伴이 되고 此界의 동방아촉 여래가 主가 됨에 此土의 자나불과 十方諸佛이 伴이 됨이라. 다음 동쪽에 제 二佛이 主가 되면 遮那와 東쪽의 第一佛과 및 十方佛이 伴이 될새 곧 一佛을 따라서 法界諸佛의 重數가 있으니 저 十人이 主伴이 됨에 번갈아 서로 바라보면 문득 十重의 主와 伴이 되나니라. 저 一佛도 이미 그러함에 佛이 主가 되고 보살이 伴이 되는 것도 또한 그러하고 因主가 이미 그러함에 因伴도 또한 그러하니 이 一義 가운데에 스스로 세가지 뜻이 있나니라.
二者는 如遮那一佛이 爲主에 十方菩薩이 爲伴하고 主佛旣徧에 伴亦隨徧이니 謂遮那處普光堂이시어늘 東方十佛刹塵數界外에 有金色世界文殊而來爲伴하시고 十方菩薩이 皆去十刹而來하시니 若此主佛이 向東一界하야 坐蓮花座라도 金色文殊- 來亦不相近하야 還去十佛刹塵數外하니 如長空明月을 列宿圍繞하야 萬器百川에 星月炳現이라 月如主佛하고 列宿如伴하야 一一水中에 遠近皆現하니 義當金色이 近東一界하면 其西蓮花色世界에 財首菩薩도 亦移近東一界하며 餘之八方도 皆移近東一界하니 如是主佛이 至東十佛刹塵數界外하사 坐蓮藏師子之座하면 正當本金色界處니라 由主佛至彼하여 其金色界- 近東亦十佛刹塵數界外요 其西方蓮花色世界는 正當裟婆之處니라
두 번째는 저 遮那一佛이 主가 되면 十方菩薩이 伴이 되고 主佛이 이미 두루함에 伴도 또한 따라 두루하니 遮那가 寶光堂에 처하거늘 東方十佛刹塵數界밖에 金色世界에 文殊가 와서 伴이 되고 十方菩薩이 다 十刹 거리에서 오니 만약 이 主佛이 東一世界를 向하야 蓮華坐에 앉을지라도 金色세계의 문수보살이 文殊가 오나 또한 서로 가까이 하지 아니하여 도리어 十佛刹塵數밖에 거리를 유지하니 마치 長空에 明月을 列宿이 둘러싸서 萬器 百川에 별과 달이 밝게 나타남과 같으니 달이 主佛과 같고 列宿은 伴과 같아서 낱낱 물 가운데에 遠近에 다 나타나니 뜻은 마땅히 金色세계가 東一世界에 가까우면 그 西쪽의 蓮花色世界의 財首菩薩도 또한 東一世界에 옮겨와 가까워지며 나머지 八方도 옮겨서 東一世界에 가까워지니 이와 같이 主佛이 東十佛刹塵數界밖에 이르러서 蓮藏師子의 자리에 앉으면 바로 本金色界處에 해당하니니 主佛이 저 곳에 이름을 말미암아서 그 金色界가 東쪽에 가까워짐이 또한 十佛刹塵微塵數 世界밖이고 그 西方蓮花色 世界는 바로 사바의 처에 해당하나니라.
如是主佛이 極於東方하면 金色等伴刹도 亦極東方호대 終不見文殊- 從西向東하야 來近主佛하며 亦不見文殊- 從佛前過하야 向西近佛이니라 如是主佛이 極於西方이라도 亦不見有西方菩薩이 從東過西하야 來近主佛이니 十方皆爾니라
이와같이 主佛이 동방을 다하면 金色等 伴刹도 또한 東方을 다하되 마침내 文殊가 서로 좇아 동으로 향하여 와서 主佛과 가까움을 보지 못하며 文殊가 佛의 앞을 지나서 西쪽을 向하여 佛과 가까움을 보지 못하나니라. 이와같이 主佛이 서방을 다할지라도 또한 서방 보살이 東을 쫒아 西를 지나와서 主佛과 가까움을 보지 못하나니 十方이 다 그러함이라.
如人이 以十錢布地호대 錢心爲主하고 錢緣爲伴하야 第一錢當中하고 以第二錢으로 壓第一錢上하야 近東一緣之地하면 則開元通寶等이 皆近東一緣之地하야 如是錢錢이 重重相壓하야 皆漸近東하나니 如近東旣爾하야 更十錢近西도 亦然하니라 說一十信에 則已重重周於十方이니 如是第三會說十住時에도 亦如說信하야 重重遍於十方이며 行向地等도 皆然하니 則九會- 爲九重重이니라 如第一會重重이 遍法界하야 第二會重重도 還在第一會重重之上하니 則九會는 自爲九個重重이요 若四十八會인댄 爲四十八重重이며 若無盡會인댄 有無盡重重이니라 此는 一佛爲主에 餘菩薩爲伴이 重重如是어니와 十方佛爲主에 十方諸菩薩爲伴도 重重亦然이니 如是諸佛重重이 復互相遍이니라 故로 云主伴重重이라 極十方而齊唱이니 餘義는 至敎起因緣中辨하니라
마치 사람이 十錢으로서 땅을 팔되 錢心이 主가 되고 錢緣이 伴이 되어 第一錢은 가운데에 당하고 第 二錢은 第 一錢위에 눌러서 東方의 一緣의 땅과 가까이 하면 開元通寶等이 다 東쪽 一緣의 땅과 가까워지나니 이와 같이 錢錢이 重重으로 서로 눌러서 다 東쪽에 점점 가까워짐이라. 마치 東쪽에 가까워짐이 이미 그러한 것과 같아서 다시 十錢이 西쪽에 가까이 함도 또한 그러함이라. 한번 十信을 說한 즉 이미 重重으로 十方에 두루함이니 이와 같이 第三會 十住를 說하는 때도 또한 十信을 說하는 것과 같아서 重重으로 十方에 두루하며 十行 十會向 十地等도 다 그러한즉 九會가 九重重이 되나니라. 저 第一會 重重이 法界에 두루함과 같이 第二會 重重이 도리어 第一會 重重의 上에 있으니 九會는 스스로 九個重重이 되나니라. 만약 四十八會일진대 四十八重重이 되며 만약 無盡會일진대 無盡重重이 있나니라. 이 一佛이 主가 됨에 나머지 보살이 伴이 됨이니 重重이 이와 같거니와 十方佛이 主가됨에 十方菩薩이 伴이 됨도 重重함이 또한 그러하니라. 이와 같은 諸佛重重이 다시 서로서로 두루하나니라 고로 이르대 主伴이 重重하여 十方을 다하여 齊唱한다 했나니라. 나머지 뜻은 敎起因緣 가운데에 이르러서 가리리라.
○然上七對에 其有六身하니 初는 所依海印三昧는 卽是智身이니 湛智海故요 二는 說法之身은 爲化身이니 謂如水分千月故요 三은 說經處는 是意生身이니 隨意徧於法界處故요 四는 說經時는 卽力持身이니 持令永久故요 五는 被海會는 卽威勢身이니 菩薩衆中에 威光赫奕故요 六은 圓音과 七에 主伴은 皆相好莊嚴身이니 圓音은 卽一相이요 主伴은 卽坐蓮花藏師子之座하야 具相好故라 此段에 有六은 敎主難思에 己有四身일새 十身具矣로다 意云十身初滿에 卽說此經이라 然疏本意는 正示說儀等異하고 含具十身일새 故有三兩身名이 不全昭著하니라
○그러나 위에 七對에 그 六身이 있으니 初는 의지할 바 海印三昧는 곧 이 智身이니 맑은 智海인 연고요 二 說法의 身은 化身이 되니 물이 나누어 짐에 天月과 같은 연고요 三 經을 說한 곳은 意生身이니 뜻을 따라 法界處에 두루하는 연고요 四 經을 說한 때는 곧 力持身이니 하여금 길이 오래 가지게 하는 연고라. 五 海會를 입힘은 곧 威勢身이니 菩薩衆 가운데에 威光이 赫奕한 연고요 六, 圓音과 七, 主伴은 모두 相好壯嚴身이니 圓音은 곧 一相이요 主伴은 곧 蓮花藏師子의 자리에 앉아서 相好를 갖춘 연고라. 이 段에 六이 있고 敎主難思에는 이미 四身이 있으니 十身을 갖춤이로다. 뜻에 이르대 十身이 처음 원만함에 곧 이 경을 설함이라. 그러나 소의 本 뜻은 바로 說儀等이 다름이고 十身을 갖추어 포함할새 고로 三兩身의 이름이 완전히 밝게 드러나지 못했나니라.
雖空空絶迹이나 而義天之星象이 燦然이요 湛湛亡言이나 而敎海之波瀾이 浩瀚이로다 若乃千門潛注라 與衆典爲洪源이요 萬德交歸라 攝群經爲眷屬이로다
비록 空하고 空하여 자취가 끊어졌으나 義天의 星象이 燦然하고 湛湛히 말이 없으나 敎海의 波瀾이 浩瀚함이로다. 만약 이에 千門이 潛注한지라 衆典으로 더불어 洪源이 되고 萬德이 交歸한지라 群經을 섭하여 眷屬을 삼음이로다.
第五雖空空絶迹下는 言該本末也라 文有兩意하니 一은 理事相望이요 二는 諸敎相望이니 今初也라 亦是遮於伏難이니 恐有離言호대 夫大象은 無形이요 大音은 無聲이라 希微絶朕하야 難思之境이니 豈有形言者哉아 則心絶動搖하고 言亡戱論하야사 自入眞趣어늘 何用廣陳言相하야 飜欲擾人고할새 故今釋云호대 非言이면 何以知乎無言이며 非相이면 何以顯乎無相이리오
第五 雖空空絶迹下는 말이 本末을 꾸림이라 文에는 두가지 뜻이 있으니 一은 理事相望이오 二는 諸敎相望이니 이제 초라. 또한 이 伏難을 막음이니 어떤 사람이 힐난하되 “대저 大象은 形이 없고 大音은 소리가 없음이라 希微하여 조짐이 끊어져서 생각하기 어려운 境界이니 어찌 形言이 있을까보냐 곧 마음은 動搖함이 끊어지고 말은 戱論이 없어야사 스스로 眞趣에 들어가거니 무슨 用이 널리 言相을 진술하야 도리어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고” 할새 고로 이제 해석하야 이르대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말 없음을 알며 相이 아니면 무엇으로써 相이 없음을 나타내리오”
十忍品에 云了法不在言하야 善入無言際나 而能示言說은 如響徧世間이라하니 斯則以言顯無言也요 又云佛以法爲身하사 淸淨如虛空이라 所現衆色形으로 令入此法中이라하니 斯則以相顯無相也라 又云色身非是佛이며 音聲亦復然이어니와 亦不離色聲코 見佛神通力이라하니 具上二也니라
十忍品에 이르대 “法이 말에 있지 않음을 요달해야사 잘 무언의 際에 들어갈수 있으나 능히 언설을 보임은 마치 메아리가 세간에 두루함과 같음이라” 하니 이는 곧 말로써 말없음을 나타냄이라 또 이르대 “부처님께서는 法으로써 몸을 삼으사 청정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나타나는 바 뭇 色形으로 하여금 이 법 가운데 들어가게 한다” 하니 이는 곧 相으로써 無相을 나타냄이니라 또 이르대 “色身은 이 佛이 아니며 음성도 또한 다시 그러하거니와 또한 色聲을 여의고 부처님 신통력을 보지못하다” 하니 위에 두가지를 갖추었음이라.
法華에 亦云호대 諸法寂滅相은 不可以言宣이로대 以方便力故로 爲五比丘說이라하니 斯亦以言顯無言也요 金剛經에 云若見諸相非相하면 則見如來라하며 亦以相顯無相也요 淨名에 云夫說法者는 無說無示나 不言不說일새 故로 云當如法說이라하며 又云無離文字說解脫也라하며 又云雖知諸法不生不滅이나 而以相好로 莊嚴其身하며 雖知諸佛國과 及以衆生空이나 而常修淨土하며 敎化諸群生等이라하니 皆是言與無言과 相與無相이 不相離也니라
법화경에 또한 이르대 “제법에 적멸상은 가히 말로써 펼수 없음이로대 方便力으로써 五比丘를 위하여 설한다 하니 이 또한 말로써 無言을 나타냄이니라. 금강경에 이르대 만약 諸相이 相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하였으니 또한 相으로써 無相을 나타냄이라. 정명이 이르대 “대저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니 설하지 아니함을 말한 것은 아닐새 고로 마땅히 如法히 說한다” 하며 또 이르대 “문자를 여의고 해탈을 설할수 없다” 하며 또 이르대 “비록 모든 法이 불생불멸함을 아나 상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며 비록 모든 불국과 및 중생이 공한 줄을 아나 恒常 淨土를 닦으며 모든 群生등을 교화한다” 하니 다 이는 言과 無言과 相과 無相이 서로 여읜 것이 아니니라.
十住品에 云欲以寂靜一妙音으로 普應十方隨類演이라 如是皆令淨明了일새 菩薩이 以此初發心이로다 一切衆生語言法을 一言演說無不盡이라 悉欲了知其自性할새 菩薩이 以此初發心하며 世間言辭靡不作하야 悉令其解悟寂滅하니 欲得如是妙舌根하야 菩薩이 以此初發心이라하니 皆卽言無言이라 其文非一이니라 今疏文中엔 但略明其無碍之義니 文有二對라 初對는 無相이 不碍相이요 後對는 無言이 不碍言이니 今初對也라
十住品에 이르대 “적정한 一妙音으로써 널리 十方에 응하야 類를 따라 연설함이라 이와 같이 다 하여금 조촐하여 밝게 요달하게 할새 보살이 이로써 처음 발심함이로다. 일체 중생의 어언법을 一言으로 연설함에 다하지 않음이 없음이 다 그 자성을 了知하고자 할새 보살이 이로써 처음 발심하며 세간의 言辭로 짓지 않음이 없어서 다 하여금 그 적멸을 알아 깨닫게 하니 이와 같은 妙舌根을 얻고자 하야 보살이 이로써 처음 발심한다” 하니 다 말에 卽하여 말이 없음이라. 그 文이 하나가 아니니라. 이제 疏文 가운데에 다만 간략히 그 障礙가 없는 뜻을 밝힘이니 글에 두가지 對가 있음이라. 初對는 無相이 相에 걸림이 없음이요 後對는 말이 없음이 말에 걸리지 않음이니 지금은 初對라.
雖空空絶寂者는 法性이 本空일새 空無諸相이요 緣生之法은 無性故로 空이어니 復有何相이리오 借空遣有에 有去空亡일새 故曰空空이니라 淨名에 云唯有空病하니 空病亦空이라하며 中論에 云諸佛說空法은 爲除於有見이니 若復見有空이면 諸佛所不化라하니 故知非有非無也니 非有는 卽空이요 非無는 卽空空也라
雖空空絶跡이라고 한 것은 法 性이 本來 空할새 空하여 모든 相이 없고 연으로 생하는 법은 性이 없는 까닭으로 공하거니 다시 무슨 상이 있으리오 空을 빌려 有를 보냄에 유가 가면 空이 없음일새 고로 가로대 空空이라. 凈名이 이르대 “오직 空病이 있으니 空病도 또한 空하다” 하며 中論에 이르대 “諸佛이 空法을 說함은 있다는 견해를 除하기 위함이니 만약 다시 空이 있다고 보면 諸佛이 敎化하지 못하는 바라” 하니 고로 알라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니 有가 아닌 것은 곧 空이오 無가 아닌 것은 空空이라.
經에 云無中無有二요 無二亦復無라 三界一切空이 是則諸佛見이라하니 此卽空空也요 次云凡夫無覺解일새 佛令住正法이어니와 諸法無所住라 悟此見自身이라하니 則空亦無所住矣니라 又上無中無有二는 空也요 無二亦復無는 空空也요 三界一切空은 成眞空也라 又廻向品에 云法性이 本無二며 無二亦復無라하니 皆空空也니라
經에 이르대 “無 가운데에 둘이 없고 둘이 없음도 또한 다시 없음이라. 三界의 一切가 空함이 곧 諸佛의 見이라” 하니 이것이 곧 空空이라. 다음에 이르대 “凡夫는 覺解가 없을새 부처님께서 하여금 正法에 住하게 하거니와 諸法은 住한 바가 없음이라. 이를 깨달으면 자신을 본다” 하니 곧 空도 또한 住한 바가 없나니라. 또 위에 無中에 둘이 없음은 空이오 無二도 또한 다시 無라고 한 것은 空空이라. 三界와 一切가 空한 것은 眞空을 이룸이라. 또 廻向品에 이르대 “法性은 本來 둘이없으며 無二도 또한 다시 없다” 하니 다 空空이니라.
言絶迹者는 空有斯絶일새 心行處滅이요 行處滅故로 跡不可尋이라 謂若有有可有인댄 則有無可無어니와 今無有可有일새 亦無無可無니라 以無遣有하면 無卽是跡이요 以空遣空하면 空亦是跡이니 以有遣故로 遣之又遣之하야 以至於無遣이니라 若以無遣無인댄 無遣도 亦是跡이니 有所得故로 如鳥履沙어니와 若無所得인댄 當句卽絶이라
絶跡이라고 말하는 것은 空과 有가 이에 끊어져서 心行處가 滅하니 行處가 滅한 고로 자취도 가히 찾을수 없음이라. 만약 有가 가히 有라고 함이 있을진댄 無가 가히 無라고 함이 있거니와 지금 有가 가히 有할 것이 없을진대 또한 無도 가히 無라고 함이 없나니라 無로써 有를 보내면 無가 곧 이 자취요 空으로써 空을 보내면 空도 또한 이 자취니 보냄이 있는 연고로 이를 보내고 또 보내어서 써 보냄이 없는데 이르나니라. 만약 無로써 無를 보내면 보냄이 없는 것도 또한 이 자취니 얻는 바가 있는 연고라. 마치 새가 모래를 밟는 것과 같거니와 만약 얻는 바가 없으면 當句가 곧 끊어지리라.
故로 出現品에 云了知諸法性寂滅하면 如鳥飛空無有跡이라하니 故云空空絶跡이리라 以空空이 不碍於相일새 故致雖言이니 雖字는 生下義天之星象燦然也니 謂依於晴空하야 不碍星象燦爛이니 晴空은 卽是義天이니 依第一義天하야 不碍法門星象하며 又以不碍星象하야사 方知是空이요 不碍法門하야사 爲眞第一義空矣니라 上卽以空爲本이요 法門爲末也라
그러므로 出現品에 이르대 “諸法의 性이 寂滅함을 了知하면 마치 새가 虛空을 날음에 자취가 없는 것과 같다” 하니 고로 이르대 空空絶跡이라 함이라. 空空이 相에 걸리지 않을새 고로 雖라고 말함에 이르니 雖字는 아래에 義天의 星象이 燦然함을 낸 것이니 晴空에 의지하야 星象이 燦然함에 걸리지 않음을 말함이니 晴空은 곧 이 義天이니 第一義天을 의지하야 法門의 星象에 걸리지 않으며 또 星象에 걸리지 아니하야사 바야흐로 이 空을 앎이오 法門에 걸리지 아니하야사 眞實한 第一의 空이 되나니라. 위에 곧 空으로써 根本을 삼고 法門으로 末을 삼음이라.
○湛湛亡言 而敎海之波爛 浩瀚者는 二約無言이 不碍言也니 則以無言爲本이요 言卽爲末이라 湛湛者는 海水澄凝之相이니 意明動依於靜일새 無言이 不碍於言이라 故로 下經에 云雖復不依言語道나 亦復不著無言說이라하니라 若碍於言인댄 則身子被訶요 不碍於言인댄 則文殊攸讚이어든 况文字性離라 卽言亡言가 故雖無言이나 而敎海之中에 波爛浩瀚이니 大波曰爛이라 是以佛證離言이나 流八音於聽表하시고 法本非說이나 演大藏於龍宮이니라 故知至趣非遠이라 心行得之則甚深이요 言象非近이니 虛懷體之而目擊이니 言絶之理而非絶이요 繁興玄籍而非興이라 卽言亡言也라 融常心言하야 無所遣矣니라
○湛湛妄言而敎海之波瀾浩瀚이라는 것은 無言이 말에 걸리지 않음을 잡음이니 곧 無言으로써 根本을 삼고 말은 곧 末이 되나니라. 湛湛하다고 한 것은 海水가 맑은 모양이니 뜻은 動이 靜에 의지함을 밝힘일새 無言이 말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 고로 下經에 이르대 “비록 다시 言語道에 의지하지 않으나 또한 다시 言說이 없는데에도 着하지 않는다” 하니라. 만약 말에 걸리면 곧 身子가 꾸지람을 입음이요 말에 걸리지 않을진댄 곧 文殊의 稱讚하는 바이거든 하물며 文字性을 여읜지라 말에 卽하여 말이 없음이겠는가. 고로 비록 말이 없으나 敎海 가운데에 波瀾이 넓고 넓음이니 큰 波濤를 爛이라 함이라. 이로써 佛이 말을 여임을 證得하셨으나 八音이 聽表에 흐르고 法은 本來 說함이 아니나 大藏經을 龍宮에서 演說했나니라. 고로 至趣가 멀지 않음을 앎이라. 心行으로 이를 얻으면 심히 깊음이요 言象은 가깝지 않으나 생각을 비워 이를 體達하야사 目擊하리니 말이 끊어진 이치이나 끊어짐이 아니오 玄籍을 번거로이 일으키나 일으킨 것이 아니니 말에 즉하여 말이 없음이라. 心言을 融常하야 보낼 바가 없나니라.
○若乃千門潛注與衆典爲洪源下는 諸敎相對하야 而論本末이니 卽以華嚴으로 爲根本法輪이라 文有兩對하니 上對는 爲開漸之本이니 謂千門異義- 潛注衆經이 如海潛流四天下地하야 有穿鑿者- 無不得水니 則知衆流- 依海水라 故로 海爲衆水之源이요 華嚴이 爲諸敎之源矣로다 下對는 爲攝末本이니 則萬德交歸- 若百川歸海어든 海能普收일새 卽爲其本이라 故로 昔人이 云九流於是乎交歸요 衆聖이 於是乎冥會라하니 彼約會歸涅槃이어니와 此約會歸法界니라 故로 論에 云無不從此法界流하야 無不還證此法界故라하니라
○若乃千門潛注與衆典爲洪源下는 모든 敎를 相對하야 本末을 論한것이니 곧 華嚴經으로써 根本法輪을 삼음이라. 글에 兩對가 있으니 上對는 漸次를 여는 根本이니 千門의 다른 뜻이 衆經에 潛注함이 저 바다가 四天下地에 潛流하야 穿鑿者가 있으면 물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곧 알라 衆流가 海水를 依支함이라. 그러므로 바다는 衆水의 根源이 되고 華嚴은 모든 敎의 根源이 됨이로다. 下對는 末을 攝하여 本에 돌아 감이니 곧 만덕이 서로 귀의함이오 百川이 바다에 돌아감에 바다가 널리 거두는 것과 같을새 곧 그 根本이 됨이니라 고로 옛 사람이 “이르대 九流가 이에 교차하여 돌아가며 衆聖이 이에 모인다” 하니 저는 열반에 돌아감을 잡았거니와 이는 法界에 돌아감을 잡았나니라. 고로 論에 이르대 “이 法界를 쫓아 흐르지 않음이 없으며 도리어 이 法界를 證得하지 않음이 없는 연고라” 하니라.
故로 法華에 云於一佛乘에 分別說三이라하니 一乘이 卽是三乘之本이니 一佛乘者는 卽華嚴也라 會三歸一은 卽攝末歸本이니라 故로 第五經에 云始見我身하야 聞我所說하고 卽皆信受하야 入如來慧는 卽指華嚴하야 爲根本也요 除先修習學小乘者는 卽所流也요 我今亦令得聞是經하야 入於佛慧는 卽攝末歸本也니 是經은 卽是法華라 法華는 攝於餘經하야 歸華嚴矣니라 是則法華에도 亦指華嚴하야 爲根本矣니 其義分明이로다 餘如下說하니라
고로 法華經에 이르대 “一佛乘에 分別하여 三乘을 說한다” 하니 一乘이 곧 이 三乘의 근본이니 一佛乘이라는 것은 곧 화엄이라. 三을 모아 一에 돌아간다는 것은 곧 末을 섭하여 本에 돌아감이니라. 고로 第五經에 이르대 “처음 나의 몸을 보아서 내가 설한 바를 듣고 곧 다 믿어 받아서 如來慧에 들어감은 곧 화엄을 가리켜 根本을 삼음이오 오직 먼저 소승을 배워 수습한 자를 제외함은 흐르는 바요. 내가 이제 또한 이 經 들음을 얻어서 佛慧에 들어가게 한 것은 末을 섭하여 本에 돌아감이니 이 경은 곧 법화라 법화는 나머지 경을 섭하여 화엄에 돌아감이니라. 이는 곧 법화에도 또한 화엄을 가르켜 근본을 삼았나니 그 뜻이 분명함이로다 나머지는 아래에 설한 것과 같나니라.
其爲旨也- 冥眞體於萬化之域이요 顯德相於重玄之門이오 用繁興以恒如하고 智周鑒而常靜이로다
그 旨趣가 됨이 眞體가 萬化의 域에 冥合함이요 德相을 重玄의 門에 나타냄이라 用이 번거롭게 일어나나 써 恒常 如如하고 智慧는 두루 비추나 恒常 고요함이라.
第六其爲旨也下는 旨趣玄微라 於中有二하니 先明理事無碍요 後顯事事無碍라 雖此經中에 廣說於事하며 及說於理나 而皆無碍일새 故以無障碍法界로 而爲旨趣니 此門은 卽義分齊中意라 就初理事無碍中에 二니 先示三大요 後融眞妄이라 前中에 問曰初往復無際等에 己明三大어늘 今何重說고 答略有三義하니 與前不同하니라 一은 前直就法界宗上하야 約義以明三大어니와 今約能詮經中에 具說三大일새 故로 不同也라 二는 前辨三大之相이어니와 今明三大所在니 體在何處오 所謂萬化等이니라 三은 前明三大融拂이니 爲成己宗이어니와 此明三大互在는 爲遮異釋이니 意辨不相捨離하니 爲無碍義니라
第 六 其爲旨也下는 旨趣가 玄微함이라 그 중에 二가 있으니 먼저 理事無礙를 밝히고 後는 事事無礙를 나타냄이라 비록 이 經 가운데 널리 事를 說하고 理致를 說했으나 다 걸림이 없을새 고로 無障碍法界로써 旨趣를 삼으니 이 門은 곧 義分齊 가운데의 뜻이라. 처음 理事無礙에 나아가서 둘이니 먼저 三大를 보이고 後는 眞妄을 融合함이라. 前中에 물어 가로대 “처음 往復無際等에서 이미 三大를 밝혔거늘 지금 어찌 거듭 說하는고” 答이라 “간략히 세가지 뜻이 있으니 前과 더블어 같지 않느니라. 一은 前에 바로 法界宗上에 나아가서 뜻을 잡아 三大를 밝혔거니와 이제는 能詮의 經가운데에 三大를 갖추어 說함을 잡음일새 고로 같지 않나니라. 二는 前에는 三大의 相을 가렸거니와 이제는 三大의 있는 바를 밝힘이니 體가 어느 곳에 있는고 이른바 萬化等이라. 三은 前에는 三大를 融合하여 떨침을 밝힌 것은 자기 宗을 이루기 위함이요 여기에 三大가 서로 있음을 밝힌 것은 다른 해석을 막기 위함이니 뜻은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아서 걸림이 없는 뜻이 됨을 가림이라.
如昔人이 云其爲體也는 則不生不滅이며 無去無來라 以不滅로 爲無生하며 以不生으로 爲無滅等이니라 其爲相也는 則同異類之殊體- 微細容持요 同異類之別質이 展轉重現이니 微細之理는 難見일새 況之以芥甁이요 重現之理는 易觀일새 喩之以帝網이라 其爲用也는 則不分而遍하고 不去而臻하며 一多大小而互爲하고 延促靜亂而相在等이라하니 斯則別顯三大之相이어니와 今但明其不離 則是深玄할새 名理事無碍니라
옛 사람이 이르대 ”그 체가 됨이 곧 不生不滅하며 無去無來함이라. 不滅로써 不生을 삼으며 無生으로써 無滅등을 삼았느니라. 그 相됨이 同異類의 다른 體가 微細하게 容持하고 同異類의 다른 바탕이 전전히 거듭 나타나니 미세한 이치는 보기 어려움일새 이를 芥甁에 비유하고 거듭 나타난 이치는 관하기 쉬울새 이를 帝網에 비유함이라. 그 用이 됨은 즉 나누지 않으나 두루하며 가지 않으나 다다르며 一多大小가 서로되며 延促靜亂이 서로 있다는 등이라“ 하니 이는 곧 따로 三大의 相을 나타냈거니와 이제는 다만 그 여의지 아니하면 이 深玄함을 밝힐새 理事無礙라 이름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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