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3. 5. 24. 23:04

 

 바벨, 덤벨, 웨이트 머신 등의 기구를 사용하여 신체를  단련하는 이 운동은 그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웨이트 리프팅(역도)과 발생을 거의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운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 발생에 대한 자료는 현재 자세한 문헌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지만, 대략 기원전 2,500년의 옛날 이집트에서 청년들 사이에 무거운 중량들기 운동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과, 기원전 1122∼249년의 고대 중국의 주조(周朝) 시대에는 군사를 위해 긴 활을 다루거나 검술과 더불어 중량들기가 특수 검사 종목의 하나로 국가에서 규정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특히 검투사와 레슬링 선수들이 힘과 인내를 위해 보디빌딩 훈련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기구가 주는 혜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돌이나 통나무를 들어올림으로써 보디빌딩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보디빌딩 훈련이 적자생존과 같은 필수물 이었고, 신체적 발달과 능력에 생명을 걸고 있었습니다.

보디빌딩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사람은 19세기 독일 출신인 철 아령 체조 보급자 유젠 센도(Euegen Sandow:1867-1925)입니다. 그가 출현하고부터 보디빌딩 운동은 본격적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 당시에는 가장 힘센 사람은 아니었으나, 해부학을 전공한 그는 체격과 신체의 강건함을 보여 줌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으며, 보디빌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1890년경 미국으로 건너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광고하고 다니던 플로렌쯔 지그필드란 사람에게 발탁되었습니다. 샌도는 아름다운 체격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근육발달의 아름다움과 균형미에 탄성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바벨과 덤벨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그는 주당 수천달러의 수입을 얻고, 책과 잡지 등의 판매를 통해서 하나의 사업으로 발전시켜 경영대회를 개최하여 우승자에게 금으로 된 자신의 조각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비로운 분위기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어느 날 그의 차가 추락했을 때 한손으로 차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 뇌출혈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 샌도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의해 이러한 분위기도 시들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1950년경부터 보디빌딩에 관한 일련의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올바른 트레이닝을 하기만 하면 기능장애가 생기지 않을뿐더러 반대로 건강을 높이고 체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확인됐으며, 이 결과 스포츠맨이 자신이 전문으로 하는 스포츠의 경기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이 트레이닝을 채택해서 근력강화에 노력하게 되어 애호가의 수가 급속으로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젠 산도우(Eugen Sandow(1867.4.2 - 1925.10.14))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Friederich Wilhelm Mueller)로 태어난 유젠 산도우는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Father of Modern Bodybuilding)"라고 불린다.

어려서부터 그리스, 로마의 검투사와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열렬한 찬양자였다.

19세에 이미 쇼에서 근육의 힘을 자랑하는 일(strongman stunts)을 하였다.
전설적인 플로렌츠 지크펠트의 눈에 들어 그의 쇼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우람한 근육과 의자에 감긴 체인을 끊는 등의 쇼를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산도우의 몸이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과 유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박물관에서 대리석 조각품을 측정하여 완벽한 신체를 위한 공식으로 그리스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그는 그렇게 정확한 비율로 그의 신체를 만들었다.
이때문에 의도적으로 근육을 미리 정한 수준으로 발달시킨 최초의 운동가인 그를 가리켜 "현대 보디빌디의 아버지"라고 한다.

유럽 지역을 순회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열린 1893년 세계 박람회에 나가게 된다. 그는 교양있는 외모와 높은 지성, 세련된 태도로 인기가 높아 갔다. 그는 건전한 정신만큼이나 중요한 "건강한 생활양식"을 강조한 보디빌딩과 영양에 관한 몇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다섯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Sandow's System of Physical Training,
Strength and How To Obtain It,
Body-Building,
Strength and Health,
Life is Movement)

산도우는 첫번째 보디빌딩 대회를 개최하였다. 1901년 9월 14일 "위대한 경쟁(Great Competition)"이라 불린 대회는 영국 런던의 로얄 알버트 홀에서 개최되었고, 그 자신이 심판이 되었다.

1925년 그가 죽었을 때, 진흙 속에서 차를 밀어낸 직후 뇌졸증으로 58세의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1면 기사"가 났다.
실제 죽음의 원인은 매독의 고통스런 합병증 때문인 것 같았다.

보디빌딩 스포츠에 대한 그의 기여를 인정하여 1977년 이래로 미스터 올림피아에게 산도우란 이름의 동 조각상이 수여된다.  

 

 

 

 

조 웨이더(Joe Weider)

조셉 E. 웨이더(Josef E. "Joe" Weider, 1922년 11월 29일, 카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출생)는 국제보디빌딩연맹(IFBB)의 공동 설립자이며 미스터, 미즈 올림피아와 지금은 사라진 마스터즈 올림피아 보디빌딩 대회의 창설자이다.
IFBB를 설립하기 전에 웨이더는 1939년 Your Phisique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29년 후 1968년에 이름을 Muslce Builder로 개칭하고 1982년에는 지금의 Muscle & Fitness 가 되었다.
웨이더 출판왕국에서 발행하는 다른 잡지로는 Shape, Men's Fitness, Living Fit, Prime Health and Fitness, Fit Pregnancy, Cooks, Senior Golfer, 그리고 Flex 가 있다.

고물 자동차 바퀴와 차축으로 그 자신의 바벨을 만든 후, 웨이더는 17세에 7달러를 가지고 출판왕국을 시작하였다.
어른이 되어서 그는 일류 가정용 및 클럽용 운동기구를 창안하였다. 보디빌딩에 영양학을 도입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웨이더는 또한 일련의 보충제를 시장에 공급하였다.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운 아놀드 슈워제네거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보이 스카우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건강한 미국을 향한 그의 노력에 대하여 수 많은 상과 인정을 받았다.

웨이더의 전체적인 접근방법( 육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학적인)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에 걸쳐 발전되었다. 그는 혁신가가 아니라 많은 자료로부터 성공적인 요소들을 만든 종합자라고 주장한다.

웨이더는 그의 비판자들로부터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를 조정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개입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고, 전직 IFBB 심판 중 웨이더가 판정 과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한 심판은 없다. 

 

 

 

 

 

 

한국 보디빌딩의 역사 보디빌딩역사

 

1946년 12월 4일 명동 시공관에서 개최 되었던 제1회 미스터코리아선발대회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보디빌딩 행사로서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앞선 일본보다 무려 6년이나 먼저 개최된 스포츠 행사였습니다.
요즈음과는 다르게 학생부, 일반부 구분도 없었으며, 체급의 나누어짐도 없이 일반부 대회만 있어 입상의 기회는 그만큼 적었습니다.

초대 미스터코리아로서는 YMCA 소속의 조순동 선수가 차지하였으며, 제2회 대회부터 제6회 대회 때까지는 6.25 사변으로 대회를 치르지 못하고, 제7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던 곳인 전라남도 광주시 서중학교에서 1955년 12월 18일 개최되어 홍정식 선수가 미스터코리아로 선발되었습니다.

그 후 협회 사정으로 8회, 9회 경기가 치러지지 않다가, 제10회 대회는 서울 동화극장에서 1958년 10월 14일 열려 현 대한보디빌딩협회 김덕현 부회장이 종합 우승을 하였고, 1960년대 말까지 21회의 미스터코리아선발대회를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보디빌딩은 더욱 발전되어 갔습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명 보디빌더로서는 박국경, 김용운, 이창윤, 오점석, 장완수, 신정태, 김희언, 김상기, 유회식, 배기철, 홍영표, 정휘용, 김창남, 조판오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현재 이들은 보디빌딩 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사명감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보디빌딩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 한해도 빠짐없이 치러진 이 행사는 어느 종목보다도 역사와 뿌리가 깊고, 전통 있는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동양권에서는 가장 먼저 보디빌딩을 보급한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