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철학연구소 2014. 3. 3. 21:32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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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진심은 '어떤 말을 했는가' 못지않게 '어떤 행동을 했는가'에서도 찾아야 한다. 좋은 시, 좋은 글을 많이 썼지만, 실제 행적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숱하게 겪어왔다. 어떤 말을 했는가와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함께 고려해야만, 사람의 진심이나 충심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몽주가 진정으로 고려 충신이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그가 어떤 말을 했는가에 못지않게 어떤 행동을 남겼는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제껏 우리는 그의 말에만 주목했지, 그의 행적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말과 행적을 함께 고려해야만 그의 충심을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정몽주가 진정한 고려 충신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최상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왕조국가가 아닌 국민국가에서 그것은 더 이상 최상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충신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다. 그러므로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정몽주라는 인물의 '빙산의 일각'을 검토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면서 굳이 이 문제를 따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정몽주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정확한 지식을 갖자는 생각에서다.

정몽주 떠받든 조선왕조,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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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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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떠받든 주역이 조선왕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몽주는 조선을 거부한 인물이다. 정몽주에게 거부당한 조선왕조가 그를 충신으로 떠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조선왕조에서 정몽주 숭배의 공식적인 계기를 만든 인물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제3대 주상인 이방원이다. 그는 개경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처참하게 죽인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왜 정몽주 숭배의 단서를 제공했을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뒤 정몽주 띄우기를 시작했다. 앞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뒤 정도전을 철저히 파괴했다. 정몽주에 비하면 정도전은 조선왕조에 훨씬 더 공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정몽주는 띄우면서도 정도전은 철저히 밟아버렸다.

이것은 이방원이 정몽주에게는 악감정이 없는 데 반해, 정도전에게는 악감정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정몽주보다 정도전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능력 발휘 없이 죽은 정몽주에 비해, 정도전은 왕조 창업 과정과 요동정벌 준비과정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죽었다.

정도전이 남긴 유산은 정도전이 죽은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유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니 정도전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 겸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결과적으로, 선배 겸 친구보다는 라이벌로 끝났다. 정몽주는 고려 멸망 직전에 정도전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였다. '조선을 거부한 정몽주'를 통해 '조선을 만든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는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감정이 그만큼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근이 이방원에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한 이유

이방원이 정몽주를 띄운 데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방원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성계는 우왕·창왕·공양왕을 연달아 갈아치우고 왕이 됐다. 또 이방원 자신도 정도전과 이성계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이방원은 이런 하극상 풍조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충신의 대명사를 찾아내서 사회적으로 띄울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성계의 열렬한 동지였지만 막판에 '고려왕조 사수'를 외치다 죽은 정몽주는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충신이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충효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조선왕조의 적인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이방원의 광폭 정치를 과시하는 데도 유리했다. 

태종 1년 1월 14일자(양력 1401년 1월 2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측근인 권근은 이방원에게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다. '이전 왕조의 충신을 띄우는 방법으로 지금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게 권근의 논리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왕조의 정몽주 숭배가 시작됐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시대의 객관적 관점으로 정몽주의 충심을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객관적 판단이란 것은, 정몽주가 남긴 단심가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그의 충심을 냉정히 판단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1388년에 벌어진 이성계의 쿠데타(위화도 회군)를 지지했다. 이성계는 '지금 단계에서는 요동(만주)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임금인 우왕과 실권자인 최영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성계의 논리가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성계의 행위는 고려왕조의 시각에서 보면 엄연한 반역이었다. 만약 성공한 반역이 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엄연히 반역인 위화도 회군을 지지한 정몽주의 행위는 과연 충신의 행위였을까?

고려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 그러나...

맹자는 폭군 방벌 사상을 역설했다. <맹자> 진심 편에 따르면 "군주가 어질지 못할 경우에는 쫓아낼 수 있습니까?"라고 공손추가 질문하자, 맹자는 "이윤이 가진 뜻이 있으면 옳은 일이지만, 이윤의 뜻이 없으면 찬탈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윤은 은나라의 재상으로서 불의한 왕인 태갑을 탄핵했다가 태갑이 죄를 뉘우치자 복권시킨 인물이다. 이윤처럼 공정한 정신으로 폭군을 몰아내면 혁명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법 찬탈이라는 게 맹자의 사상이다.

맹자의 영향을 받은 유교 선비들은 '천명을 위반한 폭군을 쫓아내는 것은 충효 논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몽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동을 정벌하라"는 우왕의 명령은, 실현 가능성의 여하를 떠나 천명을 위배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왕명을 어기고 쿠데타를 단행한 이성계를 단죄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쿠데타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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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의 단심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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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직후에 정몽주는 충효에 위반되는 두 번째 행적을 남겼다. 쿠데타 주역인 이성계·조민수 편에 서서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

"그거야 우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의혹이 있었으니까, 가짜 왕을 몰아낸다는 심정에서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중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다. 우왕이 신씨라서 왕이 될 수 없다면, 창왕 역시 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왕을 폐위시키는 데 가담한 정몽주의 행위는 충효라는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었다.

물론 이성계나 정몽주는 창왕 대신 다른 왕족을 추대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조민수·이색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했다. 전적으로 자기 뜻이건 자의반 타의반이건 간에 정몽주 역시 창왕 옹립에 가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왕 정권에 참여했으므로 창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이듬해인 1389년에 정몽주는 이성계와 힘을 합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정몽주는 라이벌인 조민수·이색을 실각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창왕을 폐위한 논리는 창왕의 아버지인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것이었다. 가짜 왕을 폐하는 것은 충효 논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미 창왕 옹립 과정에 참여했으므로, 자신의 이전 행적과 모순되는 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따라서 창왕 폐위라는 행위 역시 정몽주의 충심에 대해 의문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폐위한 뒤인 1392년에 정몽주는 이성계와 더불어 최후의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동지인 이성계의 야심을 경계했다. 이때부터 그는 신왕조의 창업 가능성을 경계하며 권력투쟁에 나섰다.

그러던 중에 기회가 왔다.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잠시 쉬게 된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들에 대한 정치공세에 나섰다. 그 대상에는 이성계의 핵심 참모이자 정몽주 자신의 '절친'인 정도전도 포함됐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귀양 보낸 뒤에, 자객을 구해 정도전의 뒤를 밟도록 했다. 하지만, 정몽주 정권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에 이방원의 기습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몽주의 충심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다섯 가지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하나는 그의 말이다. 그는 단심가라는 시조(A)를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했다.

나머지 네 가지는 정몽주의 행적이다. 그는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B) 우왕을 폐위하고(C) 창왕을 폐위한(D) 뒤에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반대했다(E). 여기서 B·C·D는 충심을 의심케 하는 증거이고, A·E는 충심을 신뢰케 하는 증거다. 각각의 증거에 대해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부여할 것인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