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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오 & 국산약초와 녹차에 대한 불편한 진실 2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5. 5. 30. 20:45

82년 부산최초의 전통찻집이 생겼다.

일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다도 모임이 있었고 민족주의 열풍이 불던

1970년 대 우리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국의 녹차를 지식인들이 발굴해 놓았다.

지리산 자락의 야생녹차와 초의선사를 통해 명맥이 이어진 우리의 다도에 지식인들은

자부심과 환호를 질렀다. 일본식 다도에 익숙한 그들은 한국식 다도를 만들려고 문헌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일본식 다도의 변형을 시도했다.


80년대 초 태평양화학을 시초로  보성에 차밭을 만들어 차의 대량생산시대가 열린다.

지리산 자락에서 쌍계 화계 제다에서 고가의 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80년대에 90그램에 최저 2만원에서 10만원 선이었으니 부자들의 기호식품이었다.

일설에 부산대에 81년도 찻집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식자의 자문을 구한다.

필자가 아는 바로 82년 광복동 거리에 생긴 소화방이 부산최초인데

83년에 신기해서 들려보았다. 그 때 차라고 먹은 게 생강계피차 였다.

엄밀히 말하면 차가 아니라 탕이다. ㅎㅎ  

지금은 약제 혹은 비료나 세안용으로 쓰는 철지난 녹차 대작도 엄청 비싸게 팔았다.

커피값에 비하면 초고가였고 10여년전 된장녀가 간다는 스타벅스 처럼 80년대의

전통다실이 그런 수준이었다.

비료로 쓰는 대작 1인분이 80년대 중반까지 4천원이었으니 스타벅스 보다 심했다.

그래도 민족의 얼이 담긴 음료, 신토불이 음료, 신선이 준 음료라는 자부심으로 

그 모든 귀족적 부분이 상쇄되었다. 그리고 이 귀족성향이 이후 녹차의 몰락을 부른다. 


태생적으로 귀족의 음료 양반의 고급취향이라는 모피를 걸친 녹차.

비료로 쓰는 대작만 먹다가 5~6천원 하는 중작을 마시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80년대 중반부터 이제 세작과 우전세작이 나온다. 1인분 5천원 1만원.....

정말 1년에 한 번 마시는 음료였다. 

돈 없는 필자는 누가 사주지 않으면 아에 가지도 못했고 어떤 측면에선

그 귀족성에 거부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1990년에 지인이 부산차인연합회 총무였었다.

辛丑생 소띠 (지금나이 55세)인 남자였는데, 둘이 친구가 되어 그 친구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보이차 오룡차 철관음 ...국산차는 세작 우전세작...

등등을 음다하였는데, 그 때의 문화적 충격은 정말 "와우~~"라는 말 밖에 안나왔다. 

초등학교 졸업의 자수성가한 그 친구는 얼굴도 지질히도 못생겼는데, 

뛰어난 언변에 10년간 학원에서 다진 중국어 실력에 한문 거기에 다도와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등으로 수 많은 여자들을 꼬시고 있었다.

사귀는 여자들이 거의 다 대졸이었다. 나도 그 친구가 대졸인 줄 았았고...ㅎㅎ  


고급문화인 다도를 아는 것으로 여성유혹의 도구가 된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잘활용하고 있었다.

필자도 그 친구집을 토요일만 되면 찾아가 밤새 차를 마셨다.

버는 돈을 차에 투자하는 그 집에서 그의 지인들과 10여가지 이상의 중국차와 대만차 일본차

국내산 고급녹차 등등 정말 안마셔본 차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음다를 했다.

다도를 한다는 게 지금으로 치면 외제차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한문 등 어학에 소질이 있던 나에게 온 문화적 충격을 풀기위해 육우의 다경등 다도에 대한

책과 자료를 2-3년간 탐독하게 하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공부하고 그 결과물들을 쏟아낸 시기가

90년 중반에서 후반 이었다.

90년부터는 10년간의 투자에 성공한 태평양에서 저렴한 가격의 녹차(중작)이 쏟아져 나왔다.

대작은 이 이후 정말 사료의 길을 걸어갔다. 덕분에 필자도 매일 집에서 중작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보성 등지 차밭에서 중저가 중작 세작 녹차들이 쏟아져 나와서 녹차 보급에

견인차가 되었다. 90년 중반에 지금의 원두커피 처럼 온나라가 녹차열풍에 빠졌다.

녹차 찬양이 일어났고 지리산 자락은 전부 녹차 재배한다고 광풍이 일었다.

그러나 90년 초반부터 일본 유학파를 중심으로 변방지역에서 아라비카 원두가 칼을 갈고 있었다.

90년대 녹차의 전성기는 다기산업에 영향을 주어 수많은 고가의 다기가 나오기 시작햇는데,

고가는 몇 백에서 천만원 단위까지 귀족화는 끝이 없었다.

특히 90년대 중반 보이차 열풍이 부자들을 중심으로 불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보이차는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티벳인들의 일상음료이자 말과 야크의 사료인 보이차.






다음 내용은 녹차의 몰락 원인을 진단 합니다.


2015년 5월 30일 토. 紫霞仙人....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