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之香 Atheism/바이블의 진실

바이블의 진실-이상훈 편저 18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3. 23:53

3. 양독(洋毒) : 실증주의사관

 

근래에 서양에 유학 갔다온 역사학자들을 보면, 실증주의 사학이다, 랑케사학이다 하면서, ?유물이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우리 역사는 갈수록 짧아져서 필자가 국사를 배울 때 분명 실존인물로 배웠던 동명성왕마저도 전설 속의 인물로 바뀌어 버린 지 오래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은 커녕 고작 2,000년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역사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 기고만장하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실증사학이라는 도구는 식민사관의 대체품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① 실증사학의 배경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이태리의 파스즘은 국수주의를 내걸어 자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각색하여 국민을 오도하더니 마침내 파멸을 가져온 전철을 밟았다. 2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의 사학자들은 역사에서 국수주의가 국가를 멸망으로 몰고 온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실증사학을 주장하여 과장된 맹목적인 국수주의를 역사에서 탈색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랑케는 “전 시대를 관철하는 이념이란 없다. 이념이란 각 시대에 갖는 경향에 불과하다. 각 시대는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치스 독일에 파국을 가져온 역사적 배경 하에서 이러한 실증사학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무비판적 수용: 그런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신라가 동족의 국가 고구려,백제를 배반하고 당나라라는 외세를 업고 이들 두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싹트기 시작한 사대주의가 무려 1천 2백년 이상 이 나라 사학계를 지배하여 왔고 더구나 일제 식민사학까지 가세, 이 나라의 사학은 중화독과 왜독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인 현실과 과대한 애국주의, 국수주의의 고취로 국가를 멸망시킨 독일,일본,이태리의 경우와는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한국적인 배경에서 랑케의 실증사학을 아무런 검토없이 한국사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영양과다로 비대증에 걸려 몸을 가눌 수 없이 뚱뚱해진 사람과 영양실조로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말라깽이에게 똑같은 처방으로 수술을 하고 약과 주사를 주어 살을 빼자는 수작과 똑같은 일이 아닌가? 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적인 독특한 상황을 전혀 고려도 하지 않고 외국문화를 그저 털도 안 뽑고 삼켜버리자는 젖비린내 나는 수작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③ 실증사관을 올바르게 적용하지도 못했다. 랑케의 말대로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 하는, 원래의 진상과 사실을 추구한다는 기본이념까지 망각하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테두리 안에서만 한국사를 논했으니 진정한 의미의 실증사학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인 사학자들의 실증사관이 가장 선진학설이요, 가장 권위있는 사실(史實)인 양 이에 매혹되어 이를 인용하는 것이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는 전제하에 전부 서술의 대상에서 빼어버림은 물론 우리 국민의 역사상식에 속하는 4,300년 전의 단군개국 사실까지도 그에 관하여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전승되어 오는 사적(史籍)들이 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적들에 대한 일체의 고증(考證)을 무시하고 청동기 문화가 들어온 BC1000년경에 부족장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다느니, 철기문화가 들어온 BC400년경에 단군부족장이 눈부신 발전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등 단군의 개국기년과 그 본격적인 국가형성시기를 1,300년 내지 1,900년을 깎아내려 놓음으로써 일제 식민지 사관을 한층 굳혀 놓았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일제가 심어놓은 해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광복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열등적인 민족의식에로 한 없이 끌고가는 망국적(亡國的)인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학계의 실상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를 건국신화나 전설로부터 시작되는 바 이 신화, 전설은 각자 그 민족의 얼이 담겨있고 그 민족 통합의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애국심발로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금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적 방법이 역사학에 도입된 이후 고대사회의 개략적 문화변천 발전과정 생활양식 등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컨데 단군조선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은 현존 고사적을 종합하여 볼 때 만주와 중국대륙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도 남반부 만의 고고학이 우리 고대사를 조명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며 설사 고고학적 유물이 나왔다 할지라도 자료의 침식, 문자판독의 난해성 등 올바른 사실(史實)을 밝혀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실사(史實史)는 결국 역시 아직도 기존 고사적(古史籍)과 문헌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위 실증사학에 있어서도 상고사분야에 관해서는 문헌고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사 연구를 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현존하는 모든 고사적(古史籍)과 문헌들을 수집, 비교분석하여 그 가운데 보다 객관적 타당성과 합리적인 사실(史實)을 택하여 이를 기초로 우리 정사(正史)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고, 그 가운데 비록 신화,전설적 사실(史實)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후세에 터무니없이 위작되었다는 사실이 육하원칙에 의해 입증되지 못하고 있는 한 참고로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어느 일부 사실(史實)에 의해 기존 사실과 다른 새로운 사실이 판명되었다면 그 사실은 대체시키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실분야에 관한 기존 문헌까지 함부로 위서(僞書)라고 단정하고 그 사실을 역사 서술에서 빼어 버린다는 것은 소위 고증을 위주로 하는 실증사학에 있어서의 올바른 학문적 태도라고 볼 수 없다.

가령 3백년 전에 살았던 10대 조상의 무덤을 파보면 특수한 경우를 빼놓고는 그 무덤 속에서 유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무덤에서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족보의 기록을 믿을 수 없으니 10대조 할아버지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족보가 위조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10대조 아니라 100대조 할아버지라도 생존했었다는 것을 어찌 부정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고대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중국, 몽고, 만주,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열도 등인데 현재 한반도, 그것도 반쪽에 불과한 남쪽에 있는 우리가 고고학을 위주로 상고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상고사 분야에 있어선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기술함이 주(主)가 되어야 하고 고고학적 실증은 부(副)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사학계는 고고학이 주가 되어 상고사를 마구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관의 탈을 쓴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도 해방이 되지 않고 있다.

 

4. 외래 종교의 폐해

 

1) 유교의 폐해

 

유교는 중국중심주의 즉, 중화(中華)사상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중국 주위에 있는 민족은 다 오랑캐인 것이다. ?동이(東夷)?라고 할 때, 이(夷)자를 우리 스스로 “오랑캐 이”자라고 읽고 있는 지경이다. 우리 민족 스스로 오랑캐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분 못하는 정신나간 학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사서를 보면 그들은 동이족을 존경하고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1102년 고려 숙종 7년에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어요. 그런데 ?아, 여기 말이야 기자(箕子), 은나라의 3현 중 한 사람이었던 기자가 와서, 조선에서 왕 노릇을 했다고 그러는데, 기자의 무덤이 있습니까?? 기자가 있긴 뭐가 있어요. 기자가 도망간 데는 ?섬서성 태원현?이에요. 우리 나라에는 없어요. 그런데, 정문(鄭文), 예부상서 정문이라는 사람이 평양에 기자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무주고총(無主古?), 주인 없는 무덤 하나를 만들어서 이것이 기자묘(箕子墓)다 하고서는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그곳이 본래 단군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어요. 그 어떤 제사를 지낼 때, 주된 신을 주벽신(主壁神)이라 그러는데, 원래 단군 할아버지가 주벽신이었어요. 그런데, 단군 할아버지는 저 서향(西向)으로 만들어놓고, 기자를 주벽으로 딱 만들어 놓은 겁니다. 게다가 기자는 초하루 보름마다 제사를 지내고, 단군 할아버지는 봄가을로 한번씩 지내고. 고려시대 때 또 그렇게 육갑잔치를 했었어요.

 

기자는 무슨 얼토당토 않는 기자냔 말이에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신나간 행동 한 것을 보면, 책을 다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참, 어떻게 우리 민족이 이렇게 정신나간 민족인가?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시 했던 거예요. 유교의 피해라는 게, 정신을 홀딱 훑어 가버렸거든요. 그런 피해가 있었어요.

 

불교에 의한 피해는 앞에서 삼국유사 얘기하면서 잠깐 다루었는데 다른 종교에 비하면 그래도 피해가 덜한 편이다.

 

2) 기독교의 폐해

 

필자는 앞에서 기독교를 반민족적 종교라고 규정했다.

구약성서는 유대민족의 선민(選民)사상, 유대민족의 국수주의(國粹主義)가 짙게 배어있는 유대민족의 역사서일 뿐이다. 여호와신은 유대민족의 신으로서 유대민족을 가나안땅에 안착시키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전쟁신이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신을 받드는 한 기독교인들은 반민족적이 될 수밖에 없다. 김용옥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시대 때의 신사참배나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야훼참배는 동일한 형태의 반민족적 행위인 것이다.

유교의 중화사상에 오염된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쓴 책을 보면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조선을 스스로 비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위대한 이퇴계, 이율곡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존유대주의에 오염된 기독교 사대주의자들이 쓴 책을 보면 성서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재단(裁斷)하고 있다. 현대의 함석헌, 김동길 같은 학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목사들에 이르기까지 단군신화 운운하며 스스로 ‘곰새끼’라고 외치고 있다.

성서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 했다고 자기민족의 시조 단군동상의 목을 자르고, 민족문화 유산인 장승, 불상 등을 마구 훼손하는 그들은 하드웨어는 국산(國産)인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유대産인 것이다.

어떻게 공자가 조선에 들어왔으면 조선의 공자가 되어야지 공자의 조선이 되며, 예수가 조선에 들어왔으면 조선의 예수가 되어야지 예수의 조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오랫동안 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민족의 운명이란 말인가?

민족의 문화를 부정하고,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러한 외래종교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또 그렇게 왜곡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역사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제공자는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밖에는 모른다. 우리나라의 다른 사서에는 고조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고 있으며, 중국의 사서들은 단군조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그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던 최태영 박사 같은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최태영박사가 말했듯이 “너무 무식”한 것이다. 자기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무식하고 유대역사에 대해서는 입에 침 튀겨 가면서 떠드는, 유식한 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3] 단군조선의 실체

 

그러면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단주류사학자들은 소위 실증사학의 탈을 쓴 식민사학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 학자들이 인정해주는 단군조선의 역사까지도 부정하고 애써 연대를 낮추고 짧게 만드는 자들인 것이다.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 중 맞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되지만 그들보다는 강단의 비주류 학파에 속해 있는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 교수의 주장이 가장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 무진년에 건국되었다.

(근거 :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해 (서기전 2333년, 무진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 -출전 : 삼국유사, 제왕운기 )

-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가(檀君世家:한단고기 중)에는 47명의 단군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단군조선은 초기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던 선진 법치 국가형태로 건국되었다.

* 근거

① 국가인가 아닌가 첫 번째 판단기준은 청동기

석기(돌)를 사용하던 시대에 청동기를 소유했다는 것은 2차 세계대전때 미국이 원자탄을 소유했던 것과 비슷한 위력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 지역에서는 보통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출현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에 청동기 유적지가 발굴되었다는 것(기원전 2500년 ~ 3000년)은 그 시기에 그 장소에 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

② 국가인가 아닌가 두번째 판단기준은 법률

옛날 중국(이라 알려진) 상(=은)나라 왕실의 후예인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그때 이미 고조선에는 팔조금법이란는 법이 있었다. (출전 : 중국 漢書 지리지-윤내현 著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기자의 고조선 망명기록 - 중국 상서대전, 사기에 나와있다.

기자(箕子)는 은왕실의 후예-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조국인 은나라가 주족(주나라)에게 멸망당하자,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한 것이다. 기자의 망명시기는 은나라 멸망 직후인 서기전 1100년 경인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결국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한 서기전 1100년 경에 이미 8조금법이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제정된 시기는 그보다 앞섰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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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의 강역은 (최소한) 한반도와 만주의 전지역이다.

서쪽은 중국 북경 근처의 난하, 북쪽은 어르구나하, 동북쪽은 흑룡강, 남쪽은 한반도 남부해안 경계였다.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2,300여년간 생활했다)

 

▷ 단군조선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문화 국가였다. 한반도와 만주지방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지는 서기전 2500년 경으로 확인되었다.

- 전남 영암군 장천리,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 방사성 탄소측정에 의해 서기 2500년전으로 확인되었음.

- 만주 : 하가점 하층문화는 서기전 2410년으로 확인되었음.

- 평양의 단군릉 유물은 서기전 3000년경의 금동유물이 출토된 유적지임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 문화개시 연대(서기전 2500년 ~ 3000년)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리 두 문화 : 서기전 2200년전), 시베리아 (최고 청동기 문화는 미누신스크 문화 : 서기전 1700년경), 중앙 아시아 (서기전 2200년 이하)보다 가장 앞선다.

곧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국가형태로 단군조선은 시작되었다.

 

*개선점

지금까지는 국사교과서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서기전 300년에서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단군조선이 개국되었다는 기원전 2333년은 당연히 신석기 시대였다고 믿어졌고, 그 시대가 신석기 시대라면 그 사회는 국가로 볼 수 없으며, 그래서 단군조선은 국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교과서의 이 부분은 바뀌어 기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중국의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에서 청동기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청동기 유물의 발굴과 그 연대 측정은 오히려 거꾸로 고조선의 강역인 한반도와 만주에서부터 황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단군조선으로부터 중국의 황하나 아시아로 문화가 전파되었음이 또 한가지 증명된 것이다.

 

▷ 고조선의 신분제도

단군조선의 중앙에는 단군의 직할국이 있었다.

*신시(神市)

단군조선의 중앙에 있는 종교적 성지로 정신적 중심지, 선인들이 거주 단군이 주재하는 종교의식이 행해졌음.

*아사달(阿斯達)

단군조선 전체의 통치자인 단군이 거주하는 수도.

*국읍(國邑)

거수국의 거수(일종의 제후)가 거주하는 도읍.

거수국에도 하느님에 대한 의식을 주관하는 천군(천군)이란 종교 지도자가 있었고, 소도(소도)라는 종교성지가 있었다.

*단군은 최고의 종교지도자 겸 정치지도자(제정일치 시대, 신권정치 시대) 일반 읍, 소읍 : 피 지배계층

*신시의 거주민, 단군씨족, 거수 씨족은 지배계층이었고, 일반 읍의 거주민들은 피지배 씨족이었다.

*고조선 유적지 :

서포항, 초도, 오동, 범의구석, 미송리, 입석리, 승리산, 양두와, 망해둔, 서산단, 소영자 등

 

▷ 일곱째, 고조선의 경제제도

 

① 고조선의 조세제도는 20분의 1세법이다.

(근거 : 고조선에는 2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맹자(孟子)-고자(告子)편, 윤내현)

맹자는 단군조선에서 이렇게 낮은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도 나라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 규모가 큰 사원이나 궁궐, 능묘등을 건조하지 않고, 관직도 많이 설치하지 않았으면, 지배귀족이 검소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홍익인간 이념)

 

②고조선에 대한 경제기록

*고조서에서는 성을 쌓고, 해자를 팠으며,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 (시경(詩經) 한혁(韓奕)편, 윤내현)

*벼농사 : 경기도 일산, 김포 유적지에서 서기전 3000 ~ 2000년경의 볍씨가 출토 (고조선 건국이전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

*삼베 : 삼베실(평남 궁산리), 삼베 조각 출토(자강도 토성리 유적)

*고조선의 수공업 : 청동기와 철기

- 단군조선의 대표적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

(중국 요령성 여대시 강상 무덤(874점 : 특히 청동실로 만든 장식품은 탁월한 금속 가공기술을 보여줌 = 직경 0.25밀리미터의 가는 구리실로 짠 것 = 오늘날의 기술로도 쉽지 않다고 함 = 단국대 윤내현 교수)), 누상무덤(288점)

- 아시아 최고의 청동기 철기 문화

* 단군조선의 무역

- 요령성 여대시 강상 유적 -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배조개 출토됨

(의미 : 남중국 혹은 그 이남지역까지 교역했음 - 윤내현 교수)

- (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숙신의 사신들이 여러차례 (순임금 ~ 서주시대)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호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 돌화살촉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중국 기록인 죽서 기년(竹書紀年), 사기(史記))

- 주의 무왕이 은나라와 싸워 승리를 하고, 서주를 건국하자 숙신의 사신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활, 화살, 돌화살촉을 예물로 가지고 갔는데, 무왕은 이때 받은 화살에 ?숙신이 가져온 화살?이란 글귀를 새겨, 그의 큰딸인 태희(태희)가 결혼할 때 기념품으로 주어 가보로 보존하도록 하였다.(국어(國魚)중 노어(魯漁), 윤내현 교수)

 

- 막대한 외화 보유국

연나라의 명도전이 5000점(자강도 운송리 유적), 4280점(평남 청송로 동자구 유적), 4000점(자강도 길다동 유적) 그 외 수백 ~ 3000점등의 명도전 출토되었다. 명도전 이외 포전, 반량전 등 중국화폐가 많이 출토되었다. (의미 : 엄청난 양의 중국화폐 출토량은 당시 단군조선이 국제무역을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알제 해주는 것 : 윤내현 교수 , 단군조선은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나라였다는 반증)

 

- 전국시대 연 나라가 고조선 지역과 교역을 하여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사기, 화식 열전(貨殖列傳)

(의미 : 고조선에 물산이 풍부했다는 방증 - 윤내현)

 

③ (진제국의 뒤를 이어 건국된)서한은 고조선과의 국경이 너무 멀어 지키지 어렵게 되자 국경을 서한 쪽으로 이동시켰다 - 사기, 조선열전

(의미 : 한나라가 고조선과의 국경을 지키기 어려워 서한 쪽으로 국경을 이동할 정도로 고조선의 국력은 매운 강한 나라였다. - 윤내현 , 이때는 위만조선 시대)

 

▷ 중국인들의 고조선 이주 기록

 

진 제국 말기부터 한나라 건국때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고조선의 서부 변경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많다.

-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오丸鮮卑 東夷傳) -

(의미 : 고조선의 경제와 사회가 낙후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불편하였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해 오지 않았을 것. 즉 고조선 사회의 경제와 사회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는 방증 = 윤내현)

 

▷ 고조선의 의복

 

- 예 사람들은 남녀 모두가 깃이 둥근 옷을 입고 은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을 하였다.

- 고구려 사람들은 공공모임에 참석할 때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만든 치레거리를 사용했다.(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예전)

-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는 흰색의 옷을 숭상하여 흰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의미 : 예, 고구려, 부여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 국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풍속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한 것으로 고조선의 경제생활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 옷감 : 삼베, 모직, 명주의 생산

- 고조선에서 명주(비단 = 실크)가 생산되었다.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을 했다. 서기전 1100년경=고조선 중기, 그 이전부터 누에치고 명주 생산했음, 다량의 가락바퀴와 바늘 출토).

 

▷ 고조선의 음식문화

 

- 나무 그릇 사용

-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때, 그 지역의 농민들은 변(邊: 대나무로 만든 그릇)과 두(豆: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

(한서지리지, 윤내현 = 매우 위생적인 생활을 했다는 의미)

-부여 사람들은 조와 두라는 그릇을 사용하였고, 예 사람들은 변과 두라는 그릇을 사용하여 먹고 마셨다.

( -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전 , 예전 -)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을 말한 것, 예 부여는 고조선의 거수국, 그러한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졌던 것 - 윤내현)

- 숟가락 유물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 청동 수저 2점, 범의구석 유적 뼈 수저 2점, 초도 고조선 문화층 뼈 수저 1점 출토 = 일찍부터 위생적인 음식문화를 이룩했다는 의미)

- 시루 유물

(초도 유적과 범의 구석 유적의 질시루 유물, 정백동 8호 무덤의 청동시루 = 익히고 끓인 것 뿐 아니라 쪄서 먹기도 했음 = 떡 = 수준 높은 음식 문화생활의 의미)

- 소금생산 (동옥저 - 후한서 동옥저전)

▷ 단군조선의 주거생활

①건물은 반지하, 장방형

(긴변과 짧은 변의 비율은 1 : 1.4의 황금비율)

②지붕은 짚, 풀, 진흙(자연친화 재료)

③온돌 사용

 

▷ 단군조선의 풍속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때, 당시 고조선의 풍속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고조선의 부인들은 행실이 단정하고 신의가 있으며, 음탕하지 않다?

-한서지리지-

*고조선 사회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 세가지 (최치운의 난랑비문)

하나, 집안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유가)

둘 , 처신을 하는데 일을 억질 만들어 하지 않고, 행동을 하되 말을 앞세우지 않으며(=도가)

셋, ,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불가)

 

유가, 도가, 불가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민족의 기본사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에 유가, 도가, 불가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불,도교의 사상들의 원형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윤내현)

풍류도에는 유, 불, 선 삼교가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최치원 난랑비 서문)

 

*8조금법

하나,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둘,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써 보상한다.

셋,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거두어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각자 50만전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사 죄를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었더라도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혼인의 대상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군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대문이나 방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 (한서지리지, 윤내현)

 

▷ 단군조선의 민주성

 

①?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예에는 무천, 한에는 5월제, 10월제 등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때에는 나라안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밤낮없이 음식을 먹고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부여, 고구려, 예, 한은 모두 단군조선의 거수국 = 단군조선의 계승문화 일 것)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곧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두 초월하여 천제후 축제를 즐겼음)

반면,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신분이 다르면 관, 혼, 상, 제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차별되는 규정이 있어 이를 지켜야 했다.

 

②한(韓)사람들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기를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일이 있어 군(郡)에 갈 적에는 모두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한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韓전? - 윤내현)

(하호는 우리 나라 고대사회에서 노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귀족에게 종속되어 농사를 짓던 종속 농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군에 일이 있어 갈 적에는,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들이 빌려 입은 옷은 이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것이었을 것이다. 하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착용하는 옷과 모자를 하호들이 빌려서 착용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매우 적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상상 할수도 없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韓의 풍속을 말한 것이다. 한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단군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차별이 적었을 것이다. 고대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사회에는 신분의 분화가 심해졌겠지만, 가능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회전반에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이 사회주도 사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내현)

 

▷ 단군조선의 실제적 힘 - 청동기와 철기

① 청동기

청동의 발명과 사용은 인류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것이다. (황금색 찬란함과 강도 = 핵무기 처음 개발 때의 위력을 연상시킴)

- 중국의 황하보다 수백년 앞선 서기 2500년경의 청동기 문화 (단군릉 유물은 서기 3500년)

- 초기국가인 단군조선이난 은나라가 그렇게 넓은 강역을 확보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배층이 소유하고 있던 청동기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 구리의 용해점은 1083도 : 무르다 -> 강한 금속을 얻기 위해 합금 기술 발명

- 청동은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고 그 밖의 몇 가지 원소를 합금한 것이다.

- 청동의 합리적 비율은 구리 80 ~ 90 %와 주석 10 ~ 20 %

-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에 따라 청동의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단군조선에서는 용도에 따라 합금비율을 달리 하였다.

- 청동에 아연을 적당히 배합하면 합금의 색깔과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다. 아연을 의도적으로 주입하여 청동기를 주조한 것은 한국 청동기의 특징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단군조선의 청동주조 기술이 매우 높았던 증거

(일반적으로 청동은 구리의 함량이 높으면 경도는 낮아지는 반면 기포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청동의 비율이 높은 단검의 경우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단검의 경우 현미경 관찰에서 기포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입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단군조선의 구리광 유적-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임서현 대정에서는 서기전 1200년경의 동광이 발견되었다.

 

②철기

- 단군조선 후기에 철기 출현(서기 전 8세기)

(단군릉의 경우 서기전 3천년전, 치우천황의 동두철액, 에밀레종, 철자의 고문자)

- 순철의 용해점은 섭씨 1539도,

자연계에 있는 일반의 산화철은 섭씨 700 ~ 800도에서 환원 시작

(산화철의 환원으로 얻어지는 철=연철=두드려 이물질 제거, 단조하여 철기를 만들어야 함)

1200도에서 액체가 됨(선철=주철)

연철+탄소 추가, 선철-탄소 일부 제거, 강철을 얻는 발전된 방법은 선철을 보다 높은 온도(섭씨 1350도 이상 섭씨 1500도 정도)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으로 제련하는 것이다.

- 단군조선 유적지 철기유물 시험분석 결과 - 연철, 선철, 강철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강철은 강도에 따라 연강(손칼), 반연강(창), 반경강(노동도끼),

극경강(무기도끼)까지 다양하였다.

- 단군조선에서는 강철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미 열처리 기술을 활용하였다.

(현미경 관찰에 의한 분자구성 : 세죽리 유물은 두번 열처리 기술)

- 철생산, 가공 위해서는 좋은 제철로와 송풍장치가 있어야 한다.

하나, 제철로 유적지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서기전 2세기의 제철로 발견) : 같은 시기의 서구 제철로 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더 잘 만들어진 것이었다.

둘, 송풍장치(경기도 가평군 마장리 유적지: 야철용 송풍토관의 파편출토)

- 서구에서 선철을 얻는 발전된 제련방법을 사용한 것도 서기 14세기부터 였다.

그 전에 사용했던 강철은 연철을 단조하여 얻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민족은 이보다 훨씬 빠른 고조선 시대에 이미 연철과 선철을 제련하였으며, 진보된 방법으로 강철도 제련하여 사용하였다.

(단군조선의 철에 대한 지식과 가공, 기술문화가 매우 이르고 높았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 돌을 이용한 침술은 동방에서 기원했다. - 산해경 , 윤내현 -

(서포항, 오동 등 단군조선 유적지에서 뼈로 만든 침 출토,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청동침의 주물 틀이 소장되어 있다)

- 주나라 말기 선왕때,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왕실을 방문하여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이때 단군은 서주 선왕의 생질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시경(詩經), 한혁 편 -

- 단군 조선시기에 중원에서는 요, 순, 하, 은, 주, 춘추, 전국, 진 제국, 한나라 초에 명멸했다.

 

[4] 중국사서에 있는 동이족의 역사는 왜 우리민족의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가?

 

1. 중국인들은 동이족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지나족(중국인)들은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불렀다.

우리민족에게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14세 치우천황 때부터라 할 수 있다. 치우 천황때 황제 헌원과 탁록을 두고 동이족과 화하족(지나족)이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중국의 <사기>와 우리나라의 <신시본기>에 나와 있는데 치우천황이 법력이 너무도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짓고 큰 활을 잘 쏘므로 중국인들이 두려워 하였고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을 夷(大와 弓의 合子)라고 불렀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쓸 때 이(夷)를 융(戎)적(狄)과 함께 써서 오랑캐로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 옥편에는 모두 ‘오랑캐 이’라고 되어 있음) 공자 자신도 동이가 군자(君子)의 대국(大國)임을 언급하고 자신도 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기 왕제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동방을 夷라 한다. 夷를 뿌리라 한다. 뿌리는 어질어서 생명을 사랑하여 만물이 사는 땅을 근본으로 산출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연고로 夷(단군조선족)는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기 쉬우며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도 있다. 따라서 공자가 9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이(九夷)의 지역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

* 「전한서」: “조선의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남만, 북적, 서융과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가 도가 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바다를 건너서 구이(九夷)나라에 살고자 하였다. 공자가 도(道)가 펴지지 않는 노나라를 버리고 뗏목을 타고 동이 나라에 가고자 함은 이 나라에는 어진 교화가 있어서 가히 도를 펼 수 있는 까닭이다.”

* 「산해경」 : “동이는 군자나라요, 오래 살아 안죽는 사람들이 아울러 동방에 있다.”

* 진(晋)의 시인 곽박 : “동방 어진 나라에 군자훈화가 있으니 예절로 늘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예는 이치로써 따진다.”

* 후한의 학자 허신 「설문」: “오직 동이는 대(大)를 좇으니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이 어지니 어진 이는 오래 산다. 군자가 죽지않는 나라가 있다하니 공자와 같은 성인도 뗏목을 타고 가고 싶어 했다.”

* 한무제 때 동방삭의 「신이경(神異經)」:“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서로 기리고 헐뜯지 않았다.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줘 선인(善人)이라 이름했다”

* 「이아(爾雅)」: “구이(九夷)는 동방에 있는데 태평의 사람이라 칭한다. 그들은 인(仁)하여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하는 인(仁)은 지기(地氣)에서 나왔다.”

 

한(漢)나라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夷는 동방사람인데 大와 弓의 두 글자로 된 글자다”라고 되어 있고 <설문통훈정성>에는 “仁은 夷의 옛글자”라고 하였으니 “夷”字에는 용기와 어짐의 두 뜻을 아울러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시전에 보면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떳떳하다, 편안하다' 라고 풀이하였고, 사기에는 '상하다, 죽이다' 등으로 쓰였다.

하늘이 열린 이래 장구한 세월을 동이족의 지배를 받아 온 중화족은 동이를 대인으로 우러러 보면서도 계속되는 정복 정치에 시달려, 나중에는 동이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캐로 바꾸어 해석하더니, 나중에는 도둑의 뜻으로까지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차츰 우리민족의 힘이 약해져 사대주의로 치닫다 보니 ‘오랑캐 이’로 굳어져 버린 것인데 아직도 우리는 스스로를 “오랑캐”라고 부르고 있는 셈이다.

2. 중국의 삼황오제국은 환웅시대와 단군시대 우리나라의 제후국

 

「제왕세기」 : 태호복희가 동방(震) 출신이되 왕위를 취한 바 없을 때의 벼슬(位)은 동방에 있다.

「후한서」<동이열전> : “東方曰夷(동방을 일컬어 夷라 한다)”

「사기」<정의> :“배송지가 평하기를 3황 5제를 天子라 칭한 본기는 제후로서의 世家라야 한다”

「초사」: “東皇太一(동방의 황제가 최상 최고의 임금이다)”

이상에서 중국에는 황제국이 없었으며 제후국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대 교수 전해종은 중국에서 帝 또는 天의 관념을 사용할 수 있는 제국으로서의 기록은 은(殷)나라 말기부터라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환인천제의 桓國 때부터 天帝칭호를 사용했다.

중국학자 원가는 3황 5제 중 요임금이 부사년 등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의 전설적 天帝로 인정하고 있는 ‘제준’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내용을 그의 저서 <중국 고대신화>에 적고 있다. <태평어람><산해경>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순임금 또한 제후에 불과했다. 『서경』 「순전」에 나오는 “東巡望秩 肆覲東后(동순망질 사근동후)“ 즉 동쪽으로 순행해서 망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동방의 임금님을 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뵙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이 높은 사람을 만날 때 쓰며, ?근(覲)? 자를 쓴다. ? 따라서 이 구절은 순임금이 동방의 임금 즉 단군을 찾아 뵈었다는 것이다.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 .... 遂見東方君長(수견동방군장)”이라 하여 (순임금이 요임금으로부터 통치권의 법통을 계승한 첫 2월에) 동방의 군장께 인사드리러 왔음을 다른 정사의 기록과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요, 순임금 모두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3. 동이족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중국을 높이고 외국을 깎아 내린다는 춘추필법에 의한 중국의 사서에서도 숱하게 등장하는 동이족의 역사가 왜 우리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식민사학자들이 동이족을 우리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이족의 한 지류에 불과한 예맥족을 우리 민족의 정통적인 선조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어떻게 해서든 일본의 역사 상한 역대인 700년 경의 신무왕(실제 연대와 수 백년의 차이가 나는 조작된 연대의 일본 초대 천황)연대보다 낮추려고 획책한 일본 식민사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은 물론 <수서(隨書)> <구당서(舊唐書)><통전> 등 대부분의 중국 역사서들도 우리 민족을 동이족으로 보고 있지 예맥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 특히 <동이전>이 아니라 조선전에서 우리 역사를 다룬 반고의 한서(漢書)도 조선족을 동이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사기 한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고조선의 제후국인 예맥국의 군장 남녀를 동이족으로 기록했다.

중국의 역사학자 문숭일도 그의 논문 <예맥문화급기사료(濊貊文化及其史料)>에서 “예맥은 동이민족의 한 갈래로서 소호금천씨의 민(民)에 속하며, 순, 은과 더불어 혈통상 관계가 매우 깊다”고 적고 있을 정도이다.

순임금이나 은나라가 소호금천의 후예이며 동이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중국역사학계의 통설이기도 하다. 또한 1975년 4월에 자유중국의 희늑격씨는 자신이 저술한 <중국사승중미상제국고증(권7)> 군자국 고증에서 “고대중국역사에 기록한 군자국은 어느 나라인지 미상이었다. 그런데 중국 <천문지>와 <상서우공(尙書禹貢)> 등 문헌을 고찰하면 그 군자국은 바로 한국이다”라고 하였다. <상서우공(尙書禹貢)>은 4천년 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중국인이 4천여년 전에 한국을 군자국이라 칭한 사실을 알 수 있다.

 

4. 결론

 

몇해 전, 조선일보에서 미국의 지방지 편집장인 재미교포 2세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주어진 질문은 "당신은 한국과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였었다.

그 지식인의 대답은 "중국 문화역사의 곁가지 문명에 불과한데, 한국의 문화와 역사라고 말할 게 뭐 있는가?" 였다.

국조단군과 단군조선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시대를 신화의 시대로 낙인찍어, 우리역사에서 제외해 버리면 우리한테 남는 것은 결국 치욕적인 수난의 역사, 배신의 역사, 외세의 힘에 의해 움직였던 작은 나라의 역사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그렇게 기를 쓰고 단군과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려 애썼던 까닭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이 원했던 바대로, 한국인의 반 이상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을 "꾸며낸 옛날 이야기 속의 인물 정도"로 알고 있으며, 한국은 수난의 역사만 간직한 답답하고 못난 나라의 모습만 남아 있다.

 

과연 그런가?

단군 47대 성조들의 역사기록을 보면 이 때는 동아 대륙을 위풍당당하게 통치하던 전성기로서 요,순, 하, 은, 주나라, 기자 조선 등에서 사절을 보내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온 사실(史實)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순임금 동방의 임금을 찾아 뵈었던 것이다.(史記, 書經)

환웅천황으로부터 배달의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의 건국은 단군왕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왕침의 「위서」에 적혀 있으며「국조실록」「산해경」「관자」「회남자」「성경통지(盛京統志)」같은 중외고금의 문서 역사에 밝혀져 있다. 이러한 여러 문서에서 단군과 조선의 이름이 나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한서(漢書)」에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殷道衰 箕子走之朝鮮)”고 했으니 이것은 은이 망하기 이전부터 조선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환단고기에는 왕검성이 창려(昌黎)라고 했고, 「명일통지(明一統志)」에도 “조선성이 영평부 즉 북평(북경)경내에 있다.(朝鮮城在永平府境內)”고 했으며, 현재의 중국지도에도 조선성이 북평북쪽에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중국의 사서를 통해서도 단군조선의 실존이 증명되어지지 않는가? 중국사서에서 찾아 뵈었다는 동방 임금도 없었던 인물이라 하고, 중국의 史書에 숱하게 등장하는 동이족의 나라도 사라지고 없고, 공자가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바다 건너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그 동이국도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의 나라 역사를 깎아 내리는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기록한 중국인의 기록에서도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흔적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강단 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사『25사(二十五史)』조차도 무시하고 우리나라에는 사료가 없다며, 고고학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강단 사학자들 중 중국의 정사『25사(二十五史)』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혹시 사실은 아닐까?

물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단기고사』등이 100% 사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 시대에 직접 살아서 그 사건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면 모를까,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글을 100%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몇몇 기록들은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상의 그런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그 책 전체를 부정하고, 그 책에서 기록한 모든 역사를 허위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사마천의 『사기』나 우리 나라의『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왕조실록』등이 전부 100% 진실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각각의 역사서에는 사실도 있을 것이나 기록한 사람의 사관 그리고 여기에 어느 정도의 가필도 섞여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적 여건에 따라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과 다르게 왜곡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만 하더라도 앞서 언급했듯이 왜곡이 심하지 않은가? 그러나 참고할 부분은 참고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본모습이지만 지금 눈앞에 과거가 있지 않기에 우리는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역사서에서 과거의 진면목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사서를 못믿겠다면 중국사서라도 연구해서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밝혀낼 생각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규원사화와 같은 우리민족의 사서들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거기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주로 재야사학자들의 몫이 되어 있고 강단의 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같은 것은 이러저러해서 위서니까 못믿겠고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역사도 못믿겠다고 한다. 이들이 얼마나 못미더우면 그렇게 많은 재야사학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해방 직후 서울대 사학과는 정원미달이어서 전부 실력없는 사람들만 들어갔고 그들이 현재 강단 주류학파의 거두들이라는 재야사학자들의 비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런 자들과 기독교의 맹신도들이 결합하여 우리 역사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서문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이다.?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인간의 혼과 같다는 말이다. 즉,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혼이 빠진 민족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자신의 역사는 모르면서 유대민족의 역사는 꿰고 있고, 단군상의 목을 무참히 절단하고 여호와를 외치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단군은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많아졌다고 한다. 기독교인들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들은 단군을 신화라 외칠 것이고, 일반국민들은 무관심할 것이니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