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길
이 문서 <있는 그대로를 봄>은 마하무드라(大印) 체계의 철학에 관한 일종의 요약이다. 마하무드라는 티벳 불교 닝마파(派)에서 최고의 수행 단계로 여기고 있는 탄트라로써, <중간계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의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문서는 이미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다시 번역해서 싣는 것은, 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명상을 통한 자유> 문헌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서의 장점은 내용은 지극히 심오하지만 일반 독자들도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관점에 접근하기가 용이하게, 이해하기가 쉽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간계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이 경험적인 글이라면, 이 문서는 철학적인 글이다. 이 가르침은 절대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실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철저한 비이원성(非二元性)과 궁극적인 실재의 ‘지금-여기’에서의 상태가 이미 자유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현재 상태가 이미 평화롭고 안전하며, 선과 희열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몇 몇 종교의 주장이나, 모든 것이 의미 없는 물질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세속주의자들의 견해를 치료해 줄 수 있다. 이 문서를 연구하면 <중간계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에 나오는 다른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서는 진정한 자유를 실현 가능케 하는 순수한 지혜를 전달해 준다.
투명한 지성을 갖춘, 세 몸으로 이루어진 붓다께 절하나이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을 통해 즉각 체험하다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개념을 통한 의식적인 사고 과정이나 선입관에 물들어 있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완전히 정지할 때 가능해 진다. 개념이나 선입관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의식이 곧 붓다이다.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강력한 힘인 각성, 사랑, 신뢰, 안정, 힘, 투명성, 선 등이 모두 우리들 자신의 순수한 의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의식을 덮고 있는 혼란스러운 개념과 왜곡된 선입관을 벗겨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존재의 가장 깊은 실체인 순수한 의식은 저절로 드러난다.
이것은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와 무시무시한 모습의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근본 가르침>에 포함된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 그대 자신의 지성을 관조하도록 하라. 오! 이 가르침을 만난 그대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사마야 갸 갸 갸아! SAMAYA GYA GYA GYAH!
이 만트라 속에는 이어지는 가르침이 신적인 존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서원과 맹세로 봉인된,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 가르침이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온 이유는,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의 배타적인 엘리트주의 때문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영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가르침을 일고 나서, 현재 상태가 자유인데 무슨 수행이 필요하냐고 오해하기가 쉽다. 그들은 윤리적인 훈련이나 덕성의 함양 같은 정신적인 진보를 우습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에고 의식에 사로잡힌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이 가르침을 읽고나서, 자신의 충동을 여과 없이 발산하며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미친다. 반면에 맹목적인 충동과 정욕을 제어하는 능력을 계발한 사람은, 반사적으로 발산하는 미움과 증오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태도와 상태에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상대적인 연관 관계 속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가르침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만이 이 가르침의 진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악이 만연돼 있는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가치가 없는 또는 가치 중립적인 세상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긍정적인 이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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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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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호-! EMA HOH!
경탄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삶과 해탈이 오직 한 마음 뿐이니라.
한 마음이 만물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구나.
한 마음이 스스로 밝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구나.
한 마음이 모든 곳에 늘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구나.
과거·현재·미래의 무수한 승리자 붓다들의
8만 4천 가르침(八萬四千法門)이 모두
한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구나.
경전이 하늘처럼 수북히 쌓여 있을지라도,
요점은 ‘이것이 그것이다’라는 세 낱말일 뿐.
승리자 붓다들의 관심은 오직 한 마음에 있나니,
이것이 번뇌를 여의고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니라.
“이것이 그것이다”라는 이 간단한 가르침이 모든 붓다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붓다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자질과 상황에 맞추어 다양한 가르침을 베푼다. 그러나 모든 가르침의 밑바닥에는 선과 지혜와 평화가 ‘지금-여기-만물 속에’ 현존하고 있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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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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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이 호! KYAI HO!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민감하게 깨어있을 것을 촉구하는 만트라이다.
행복한 수행자들여, 잘 들으라!
‘마음’은 이렇다느니 또 저렇다느니 말도 많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적구나.
잘못 알고 있든지,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는구나.
그들은 마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치 못한 연고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궤변을 늘어 놓고 있구나.
딴 곳에 정신을 팔면 마음을 깨닫지 못하나니,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섯 존재 차원의 미혹된 세계(三界六道)를
고통스럽게 방황하느니라.
마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느니라.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인생을 탕진한다. 생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구하며 고귀한 인생을 헛되이 보낸다. 그러나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수없는 삶을 반복하면서 계속 잃고 또 잃는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를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현실과 계속 싸우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최고의 깨달음 상태 즉 성취 가능한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성취된 상태로 늘 현존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싸우고 고통 받으며, 반대 방향을 향해 치달리는 것이다.
성문(聲聞)과 독각(獨覺)도 깨달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부분적일 뿐
한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자구(字句)와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투명한 빛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성문sravaka은 석가모니 붓다의 말을 직접 들은 제자 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수행자를 가리키고, 연각緣覺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독각pratyekabuddha은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수행하여 인연의 원리를 깨우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대에 대승 불교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譯者註) 성문과 독각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소승 불교의 2종류 수행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에고에 탐닉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벗어났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통찰도 상당히 깊다. 하지만 완전한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왜곡된 본능의 힘이 아직 남아 있고, 거친 차원의 육체와 미묘한 차원의 몸을 궁극적인 실재의 투명한 빛 속에 완전히 융합시키지 못했다.
성문과 독각은
주체와 대상의 분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중도주의자(中論學派)들은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극단주의에 갇혀 있고,
주술적 탄트라 수행자들은
제사 드리는 자와 제사 받는 자를 구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마하 탄트라와 아누 탄트라 수행자들은
깨달음의 세계와 자신의 마음을 따로 보는 이원론에 갇혀 있다.
이들은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본다.
모든 것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한다.
윤회와 해탈이 ‘한 마음’ 속에 있는데,
이들은 이 수레 저 수레 바꿔타면서
윤회의 세계를 부질없이 방황한다.
파드마 삼바바는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개인주의자(小乘)들을 비판한다. 그는 나가르주나(龍樹)가 토대를 세운 중론(中論) 철학을 신봉하는 보편주의자(大乘)들은, 상대적인 세계와 궁극적인 실재를 지나치게 구별한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는 또 주술적인 행위를 능사로 삼는 탄트라 수행자들은 수행자인 자신들과 제사와 수행의 대상인 신적인 존재를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보다 높은 차원의 요가 탄트라 수행자들도 비판한다. 그들에게도 위대한 만다라의 세계 또는 순수한 환경인 완전한 깨달음의 영역과 자신들의 마음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태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그치고,
그대 자신의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이 가르침을 받아 들여,
모든 것이 지금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깨달으라!
마하무드라(大印) 곧 위대한 완성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라!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서 모든 수행 체계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는 궁극적인 탄트라를 제시한다. 궁극적인 탄트라 수행자들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미묘한 차원을 수행을 한다. 이들은 이것 저것 갈라 봄이 없는, 모든 것이 녹아 하나로 융합된 비이원성을 성취하는 수행을 한다. 이것이 위대한 완성이라고 부르는 마하무드라(大印)의 가르침이다.
사마야 갸 갸 갸! SAMAYA GYA G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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