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之香 Atheism/안티바이블

안티바이블 17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9. 15:25

▶ 베드로와 바울의 교권 다툼

앞서 예수신화편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예수의 12 제자가 아닌 자들이 독립적으로 구약 성경을 통달한 영지주의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났고, 그들중에 주도권을 잡게된것은 바울이었다.

당시 바울은 쌍벽을 이루던 라이벌이었던 아볼로와 함께 수많은 사도들과 교세다툼을 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헬라어로 베드로)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 전서 1장 11~12절]

 

개역한글판의 해석이 희미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1~12절 / 공동번역판]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아볼로파, 베드로파, 바울파로 나뉘어진 교인들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전서 3장 4절]

 

역시 번역이 애매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로파다 라느니 나는 아폴로파다 라느니 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3장 4절 / 공동번역판]

 

베드로, 아볼로등의 사도들은 모두 바울의 라이벌이었던 것일까?

나그하마디문서를 비롯한 금 세기 발굴들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초기 기독교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게 된 오늘 날, 모든 학자들이 한 가지로 공통되게 찬성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초기 기독교의 극심한 다양성일 것이다.

오늘 날의 기독교는 이 초기의 다양성을 극복하고 훨씬 통합 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의 분열상은 적어도 현대의 기독교계의 분열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분열상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현재는 그래도 정립된 유사한 범주의 정경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독교 초기 시절의 다양한 분파의 난립 와중에, 바울 분파(Pauline Faction)과 베드로 분파(Petrine Faction)간의 대립과 갈등의 흔적이 보여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울은 할례파 사람들에게 굴복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위선자라고 비난한적도 있었다.

 

고린도 후서 10~12장에 나오는 바울의 라이벌 사도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 13~14절에서 그들에 대해서, 거짓 사도, 가면 쓴 자들로, 천사의 탈을쓴 사탄으로 매도한다.

특히 고린도후서 11~12장 전체는 주목해 볼만하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을 비방하면서도, 바울 자신이 저들보다 내가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고후 11:5), 다른교회에서 돈을 받아 고린도 교회에 봉사했으므로 고린도교회에는 피해가 아니라 득을 주었다고(고후 11:8) 항변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21~30절에서 바울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히브리인이며, 모진 핍박과 힘든일을 당한 사람이라고 동정을 호소하고 있으며, 12장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그리스도로부터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2장 17절에는 자기가 어느 누구를 착취한적이 있냐고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서신이 쓰일당시 고린도에서 바울의 권위가 상당히 위태로웠다는 것을 추측해 볼수가 있다. 12장 16절에는 고린도교회의 어느 사도가 바울을 해꼬지 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바울을 위기에 빠뜨린 그 사도들은 누구인가?

여기에 하나의 단서가 있다. 아래의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서신에 대해서 언급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15~16절]

 

베드로는, 바울도 그리스도에게 지혜를 받은 한 형제지만, 그의 서신은 내용이 어려워서 무식한자들이 잘못 해석하면 멸망에 이른다고 한다.

얼핏보면, 바울서신을 함부로 해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같지만,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숨은 의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베드로는 복음서의 베드로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종말론에 치중해서 수많은 묵시문학이 등장했으며, 구약의 예언서들에 심취하는자들이 많았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상징들로 가득찬 묵시록을 함부로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베드로가 경고를 했다면 당연히 이해가 가지만, 도데체 바울서신이 어떤면에서 내용이 난해하다는 것인가? 바울서신에서 내용이 난해하다고 할 만한 내용이 있는가?

아마도 베드로는 위의 고린도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 바울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 것 같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할례파에게 굴복한 베드로와 바나바를 위선자라고 한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비난하는 다른 사도란 베드로, 혹은 베드로의 추종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로마서에서부터 히브리서 까지 바울 서신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불평은 바로 사도권에 관한 것이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전서 9장 1~2절]

 

이러한 베드로분파와 바울분파의 마찰은 외경속에서도 드러난다.

초대교부(apostolic fathers)인 저스틴은 기독교의 사조 바울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으며, 바울의 서신들에 대해서도 침묵 한다.

사도 행전도, 바울의 행적이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할 성질의 글이 었으나 그의 순교하기 까지의 기록은 싣고 있지 않다.

바울이 나사렛 예수에 대해 침묵 했듯이 베드로 분파의 바울에 대한 침묵이라는 현상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바울에 관한 침묵 내지는 암시적 공격의 극치를 보여 주는 문서를 보자.

초기 교부인 클레멘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알려진 구교의 중요한 인물이다. 이 클레멘트의 이름을 저자로 빌린 유사 클레멘트 문서, 설교(Homily : 설교, 훈계)가 우리의 관심 거리이다. 이 문서는 클레멘트가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의 이름만을 빌린 위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허멀리I(Homily I)에서 저자는, 클레멘트 본인이 쓴 형식을 취해, 클레멘트의 어린 시절 영혼의 구원 문제에 고심한 것, 유대 지방에 신의 왕국을 선포하는 한 목소리가 전파 되기 시작한 것, 로마에 기쁜 소식(gospel)이 전 해진 것, 본인이 이를 듣고 로마를 떠나 유대로 가던 중 풍랑으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 하는 것, 그 곳에서 바나바의 노상 전도 설교를 듣게 되는 이야기, 이후 유대로 도착 해서 먼저 떠났던 바나바에 의해 베드로에게 소개되는 경위, 베드로 가르침에 심복하여 이후 그와 동행하며 베드로의 행적을 기록하게 되는 경위를 쓰고 있다. 작자는 미상이고 2 세기 중반 내지 3 세기 중반의 문서로 추정 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얘기가 아닌 가상의 드라마 임이 분명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문서인 것 이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제목과 내용에서도 얼른 알 수 있는 것이 이것은 베드로 분파의 작품 이라는 것이다.

초기 이방 선교 상황을 묘사 하는 문서인데 바울에 대해 일체 침묵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위에서 언급한 다른사도들과 관련된 외경에서도 나타난다. 독일 튜빙겐 학파의 바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문서는 베드로 분파의 바울 분파에 대한 공격을 암시 하고 있다고 해석 한다. 즉 글 중에 나오는 베드로의 적 이자 경쟁자 시몬은 사실 바울을 빗댄 인물 이라는 것이다.

글중, 줄기차게 베드로 따라 다니며 공격하고 비판하는 시몬, 그는 누구인가?

사도 행전 8장 9절 이하에도 나타나는 시몬은 마술사이며 동 구절이 성경 상에 보여지는 그에 관한 정보의 전부이다.

저스틴 교부(First Apolog., xxvi)에 의하면, 시몬은 사마리아의 깃타 지역 출신으로,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왔을 때, 그들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진짜 목적은 그의 마술의 힘을 키우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을 때 그들의 능력을 보고 돈으로 사고자 했음은 사도 행전에 기록 되어 있다.

잘못을 빌고 베드로의 축도 받기를 원했으나 그 후에도 그의 행실은 여전했으며, 최초의 이단자 또는 이단의 아버지라 명명 되었다고 한다.

 

허멀리XVI(Homily XVI)에서 시몬은 줄기차게 베드로에게 언쟁을 걸어온다.

베드로가 시몬에 빗대서 바울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무슨 공격이 가장 필요 했을까? 성경속에서는 사도직의 권위 다툼 와중에서도, 어떤 측에서도 나사렛 예수의 친제자임을 들어 기득권을 쟁취 하려 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있다. 즉, 베드로를 포함한 어느 사도도 예수를 옆에서 목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화파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서신과 복음서들이 쓰여진 지 적어도 100년 뒤에 허멀리(Homily)의 저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100 년 전의 침묵에 대해 보완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를 옆에서 목도한 사도이니 만큼 환상을 통해 예수를 만난 사도보다 우월한 사도임을 설파하는 것, 바로 그 것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한 경험을 토대로 한 자가 선생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시몬을 공격 하기 시작 한다.

허멀리XVII(Homily XVII)에서 베드로는, 육체적 감각 기관으로 체험한 것이 초 자연적 환상의 경험보다 더 확실 하다고 주장 한다.

 

"여호아가 진노중 아론과 미리암에게 하신 말을 보라. '선지자가 너희 중에 일어 나면, 내가 그에게 꿈과 환상들로 나타내 보이겠으나 모세에게는 그러히 아니 하리니, 모세에게는 내가 친히 내 모습을 보이리라. 꿈이 아닌 마치 친구에게 얘기하듯....(중략).... '진노 중 에는 환상과 꿈으로 보이시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나 친구에게는 얼굴 마주 대 하듯이 하시느니라. 적에게는 꿈과 환상을 통 하지만........"

 

즉, 주의 진정한 종에게는 육체적으로 만나 주지만 꿈과 환상을 통해 본자는 필경 주의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라는 이야기이다. 허멀리XIX(Homily XIX)에도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만약 예수께서 너에게 환상을 통해 나타나서 말씀 하셨으면, 그는 필시 너를 적대하여 분노 중에 나타내 보이셨음이라.....(중략).....몽환 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자격을 갖춘 자가 어디 있는가?....(중략).....만약에 그럴 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중략)....왜 예수께서 우리와 친히 섞이셔서 일 년을 지내시며 가르치셨는가?...(중략)....너희가 진짜로 환상을 통해, 한 순간 만 이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그와 현실에서 동행까지 했던 나를 적대하지 말라. 너희가 교회의 반석을 적대하게 됨이라."

 

이 문서에서 베드로는 환상적인 메시아를 접한 시몬을 적 그리스도로 묘사 되고 있는 데, 다메섹으로 가던중 예수의 환상과 접하게 된 바울을 비아냥 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것은 왜일까?

바울의 가르침은 복음서 보다 앞서 이미 유행 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역사적 예수를 목격하지 못했다.

Homily에는 다음과 같은 암시가 있다.

베드로는 거짓 선지(적 그리스도)가 나와 거짓 복음을 먼저 전파 하리라 하고 예수가 설파했다고 주장하며, 진짜 복음은 이단(적 그리스도)의 방해를 피해 숨겨져 있었다고 설명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바우어등의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베드로 분파(Petrine faction) 와 바울 분파(Pauline factions)의 대립의 증거로 비추어 지고 있는 것이며, 이 두 양대 산맥의 통합이 오늘 날의 구교, 더 나아가 기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주장 하게 되는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했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 간에 투쟁은 할례라는 유대 율법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바울서신들이란,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의 측에 서서 바울을 배척하자, 위기에 직면한 바울은 서신들을 통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바울의 노력이 갈라디아교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가 바울이었음을 오늘날의 신약에서 당연히 알수가 있다.

오늘날의 신약의 4/1을 차지하는 바울서신들로인해 진정한 최고의 사도는 바울처럼 비춰진다.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예수의 나머지 12사도들은 어떻게 된것인지 행적도 제대로 알수가 없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외경을 다룬책인 숨겨진성서(THE OTHER BIBLE)에서 다른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외경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베드로 복음, 베드로계시록,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도마행전, 안드레아행전, 에비온복음(12사도의 선택),등등이다. 이것들이 버림을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바울분파가 득세하면서 많은 것들이 정경으로 채택되지 목하고 버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정통적인 베드로 분파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추인 되었고 천국의 수문장으로 숭상되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바울분파였다.

갈라디아서2장에서 베드로는 히브리민족에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직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곳은 유대땅이 아닌 로마제국이었다.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바울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 분파는 로마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바울분파가 정통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교황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핍박받던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수없이 변질되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들 그리스프스와 장인 미키시미안을 살해하였고 그의 처 파우스트를 끓는 열탕 속에 쳐 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결정이다."고 세상에 선포한 공적이 있다하여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서한것 뿐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6명이나 되었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시민)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 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기 까지 했다.

결국 시이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존엄한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을 자주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 군인 황제시대인 AD 6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 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중 6명의 황제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Mulvian)다리에서 전투를 하기전 꿈속에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꿈에서 본대로 군사들의 방패에 기독교의 상징을 표기한 XP를 표시하도록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승리한후 그동안 핍박받았던 기독교를 AD 312년 공인 하였다고 하며, 그의 사후 AD 392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즉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에서의 로마의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승리의 태양,로마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했으며,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다고한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후, 즉 사망하기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티누스가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의 원조를 원했고, 따라서 권력을 놓고 다투던 여러명의 황제들중에 어느누군가와 결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 비지니스에 불과하다.

키(A. Kee)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을 믿으면서 민주주의적으로 자유분방한 로마인들(그래서 황제가 여러명이나 등장할 수가 있었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안으로 일리리안(Illyrian)은 태양 숭배를 생각했는데, 콘스탄틴도 처음에는 그와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즉, 그의 태양신숭배는 유일신 사상으로 로마인들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A. Kee / Constantine versus Christ / London / 1982.]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무적 태양을 숭배하였다....(중략)....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중략)....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중략)....그리스트교 교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Henry Chadwick / 초대교회사(The Early Church) / 서영일 역 / 종교개혁사]

 

 

▶ 종교회의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이 문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투표로 결정나기 전까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켰으며 그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의 정통적 교의가 확립될 때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1) 제1차 종교회의(니케아)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이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 기존의 상당수의 기독교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점은 9장의 삼위일체설의 허구성에서 신약의 저자들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와 여호와를 동등하지 않게 기록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초대교회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중에 으뜸가는 존재요, 모든 선지자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에 놓인 중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차츰 미트라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미트라의 성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된다.

미트라의 숭배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면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려고 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도 받지않은 상태로 종교회의를 사회하면서 공포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주도해갔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인 사람중 몇명을 추방하고 종교회의의 다수 규칙을 따르지 않는자는 누구나 죽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의 불일치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연합하지 않는자는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 회의장은 그야말로 공포의 분위기 였다고 한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을 감독들(교부)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각자 장로 두 명과 수행원 셋을 거느리고 니케아에 모였다. 감독들중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인물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295~373)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신(神)이 무(無)에서 창조한 존재로,인간의 영(靈) 대신에 로고스가 들어간 존재라고 말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전의 영원에서 신(神)이 창조한 존재로 본질은 신(神)이 아니나, 신과 비슷한(homoi) 존재라고 주장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 1992]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신경(信經)은 폐기되고,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어 니케아신경(Nicaenum)이 공포되었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이 회의에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인간에서 신이 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때의 투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중략)....공의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공식 문을 직접 제안하였다....(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명만 제외하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Encyclopaedia Britannica]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이교도적인 종교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우선, 주목할만한 것은 부활절의 시기였는데, 당시 지중해 국가에서 봄의 여신축제(동시에 미트라의 부활절)시기를 부활절로 결정지었다.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까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되었다.

 

(2)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작은 종교회의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는 모두 150명이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했으며,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했다.

첫 번째 회의에서 예수가 신과 동등해진후, 2차회의에서는 여기에 성령이 끼워져서 삼위일체가 결정된 것이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되었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따라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 했는데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아리우스파 Arianism항목]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 서로마제국의 정제(正帝) 그라티아누스에 의하여 동로마의 정제로 선임되어 사르마티아인과 서고트족을 토벌했다.

서제(西帝)가 살해된 후 서방의 군대 실력자와 제위참칭자(帝位僭稱者)들을 쳐부수고 전제국을 수중에 넣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분할 통치되고 있던 제국을 394년 재통일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계승시켰으며, 380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파 신앙으로 정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아서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나, 실상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뺨치는 폭군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에게 명하여 이방종교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전령(神殿領)을 몰수시키면서 이교도를 압박했다. 394년에는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켰다. 또, 빈민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으며, 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390년에는 데살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이 대학살 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황제 모두 내노라하는 폭군이었던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두 번째 종교회의가 끝난후에도 간헐적으로, 401년 카르타고 종교회의(The Council of Carthago), 415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415년 누미디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umidia)등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작은 종교회의에서는 유아세례(幼兒洗禮)가 공인되었다.

 

카톨릭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한 어거스틴의 작품이었다.

216년, 터툴리안은 성인들만 침례에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고, 96년경에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Clement)는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고, 그가 침례를 받을 만한지 심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스우스(Dionysius)역시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침례를 베풀었다.

쁘와띠에의 힐라리(Hilary), 아타나시우스, 달마티아의 제롬, 가이사랴의 바실도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 크리소스톰, 나지안젠의 그레고리, 밀란의 암브로스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가들은 90~300년 사이에는 아무도 유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보는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이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친 점이 주목된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오리겐에게 유아세례를 인정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오차아드(Orchard)는 유아세례가 카톨릭 교리로 처음 나타난 것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글에서라고 하는데, 그는 오리겐 처럼 외경을 담은 70인역이 영감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누미디아 종교회의에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저주했다.

그 이유는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이 성인에게 다시 침례(재침례)를 베풀 때 그들은 처음의 세례(유아세례)가 의미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성인침례는 유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단적이라고 주장을 펴나갔다.

418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종교회의는 어거스틴을 지지하여 그의 주장을 정통 교리로 인정했다.

후에 416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789년 샤를마뉴(Charlemagne)는 유아세례를 국법에 규정하기조차 하였다.

 

유아세례라는 것 자체가 모슨일 수밖에 없다. 많은 수의 '신자들'이 아기를 교회에 데려오지 않으면 파문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데려와야 했으며, 물을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기독교인으로 못을 박아버리는 것이었다.

 

(3)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AD 431년에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로, 예수의 품격(品格)과 마리아 숭배를 둘러싼 논란이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이회의에는 250명이 참석했는데,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였으며, 지금도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했다.

반면에,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 시리아의 주교들,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과,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적수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회의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의적으로 회의가 개회 되었으며, 여기에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이 회의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였지만, 두 황제는 모두 누이와 황후, 어머니들에 의하여 섭정이 이뤄졌던 허수아비왕으로 회의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방관아래 네스토리우스파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회의는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은 후에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기도 했다.

 

(4)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AD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제4차 종교회의로 참석자는 500~600명정도로 추측된다.

이 회의의 개최자는 형식상으로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의 주장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그녀가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재차 단죄되었고, 결국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한뒤 동방으로 건너가 경교가 되었다.

 

칼케돈에서 열린 4차회의에서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결정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니케아공의회(325) 및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결정된 후에도,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이 나게 된것이다.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믿었지만 단성설을 믿은 유티키아파가 단죄당했다.

그들이 주장했던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이란,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전히 결합 또는 융합하여 단일의 성(性)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론(論)이다. 즉 예수의 인성까지도 신성에 속한 것이라는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의 몸은 우리의 몸과 같지 않고 그의 육체도 신성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성설은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 이른바 알렉산드리아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설(說)이 배척된 뒤, 에우티케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는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이러한 단성설을 부정하고, 성육신의 그리스도는 신인양성 일인격(神人兩性一人格)이라는 양성설(兩性說)을 교의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의 인성과 육신까지 신이었다는 단성설이 배척되었지만, 복음서의 마지막에는 부활한 예수가 육신채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단성설도 타당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 회의에서 로마 교황의 탄생되었으며, 교황에 의해서 교리가 통일될수 있게 되었다.

 

(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553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소집한 회의로, 156명의 동방정교회의 주교(主敎)들만 참석하였다.

당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의 공동통치자인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되었다.

그녀는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황제자리를 되찾아 주었던 공로자 였다.

이 회의에서는 유스티아누스가 이미 교서, 법률로 먼저 공포해 놓았던 것이 의제로 채택되어 회의는 형식적인것일 뿐이엇다.

따라서 5차종교회의는 갈채 회의라는 이름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4차회의에서 예수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지만,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단성설 지지자가 아직도 많았다.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신학과, 그리스도의 양성설과의 조화를 찾고자 로마측에 양보를 강요했으나, 팽팽히 대립함으로써 결국은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이 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하였던 어거스틴이라는 자는 로마정부에 대단한 아첨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세례를 주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을 태아나자마자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에 충성케하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것(=기독교국가, 즉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것)이 천국이 이땅에 실현되는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그는 대단한 아첨꾼이자 수완가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교리적인 사안이 논의되었다. 인류의 타락이 누구의 죄인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어째서 전능하신 신은 타락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그것에 대해서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관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창세기인 하가다서에서도 알수가 있다. 하가다서에서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였다고 한다. 천사들은 아담을 불로 죽이고 싶었지만, 여호와가 그것을 막아 주었다. 그중에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였다고 한다.(다른 천사들은 날개가 6장이었음) 천사 미카엘은 신의 형상을 한 아담에게 경배하였으나, 사탄은 그것을 거부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위와같이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적인 사상이 이 회의에서 그대로 주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무한과,영생,행복이 가득한 완전함과 전지전능함 세계인 천국의 천사가 창조자인 신에게 거역했다는 것 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결국 천국이나, 천사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겟는가?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은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었다.

즉, 예수가 피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입다의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사사기 11장)정도의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미개한 의식을 아름답게 치장한것에 불과하다.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의 감독파 교구의 독립 주교인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은 자신의 저서인 '어째서 기독교가 변하거나 죽어야만 하는가'(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소멸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가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열 두 주제들 을 제안했다. 여섯 번째 것은 이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할, 원시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하느님에 대한 야만적 사고이다."

인간 탐구(Human Quest)의 보다 최근 기사에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항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로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요구했다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고대적으로 해석하는 야만적인 성질을 노출시키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적인 잔악한 행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인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바라는 하나님을 매력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 나부터도 더 이상 이 오래된 믿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대는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생각은 공격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나 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새롭고 강력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들을 점검하고 재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믿는다."["Reforming Christology: He Did Not Die for My Sins!" 1999년 11/12월, P.7]

 

어쨌든 이 종교회의 이후에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에게 이단 소탕 법령를 내린다.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을 찍어 사형을 행했으며,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유스티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서 강제적으로 세례를 받게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성인 품에 올려져 있다.

 

(6) 제6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680∼681년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배척하고 로마카톨릭 교회와 화해했으며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단성설은 완전히 배척받게 되었다.

 

(7) 제7차 공의회(니케아)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로,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을 헌당할 수 없게 함), 성자숭배,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가 공인,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8) 제8차 공의회(콘스탄티노플)

869∼870년 이콘(聖畵像) 논쟁을 둘러싼 동,서 교회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공의회이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는 동,서 양교회 분리의 요인을 조성한 포티우스 주교를 파문했다.

또한 불가리아인에 대한 동로마제국의 권리를 배격하고, 로마가톨릭 교회로의 귀속을 확인하였다.

교회합동을 재현한 공의회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 십자군에 의해 벌어진 동방교회의 비극

삼위일체설을 부인했던 아리우스(Arius 250?~336?)는 리비아 출생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분열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된후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한 일로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피신했다. 그 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후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로마황제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여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아래서는 전 로마 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361년 황제의 죽음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른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후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한뒤,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인 그들은 두 번다시 아리우스의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이론으로 못을 박아 로마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오히려 아리우스파에 비하여 로마의 기독교가 정통성과 권위가 아리우스파에 미치지 못했으며, 아리우스파는 동로마교회와 게르만족의 땅 서고트족이나,반달족등에서 득세하였고, 예루살렘과 레바논까지 세력을 펼친 강력한 세력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 성지 탈환 때문이었다고 오늘날 알려져 있는데, 십자군 전쟁에 원인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선 십자군전쟁은 교황의 권위와 왕들이 왕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이라는 점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그리스정교회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원래 로마 카톨릭은 동로마 교회에 비해서 권위가 많이 부족했고 세력을 얻지 못했다.

서로마의 경우, 그들의 민족 자체가 초기의 로마인들이 아닌 게르만 민족으로 대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왕이 로마 교회와 계약을 맺고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로마교회는 유럽지역에 세력을 넓혀 갔다. 클로비스왕은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받았고,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세력을 널리 전파할수 있다는 점에서 클로비스왕의 개종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야만적이었던 당시 게르만 민족은 형이상학적인 이해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로마교황청에서는 무수한 왜곡이 필요했다. 우상과 징표를 섬겨서는 안되면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들과 건축물, 성상 들을 만들어야 했고, 당시 보편적인 대모신을 섬기던 민족이었기에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당연히 동로마 교회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멈출 수 없었다. 정통 기독교 특히, 당시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까지 교세를 갖고 있었던 '아리우스파 수도회'의 비난은 절정에 이르렀었다.

아리우스 수도회는 로마에서 축출당한후 이슬람의 영향력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이후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동방정교회의 영향으로 이슬람의 코란에 예수가 선지자로 등장한다. 당시 로마 교회 경쟁 상대였던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의 3대 본산(本山)교회에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 마저 위협받게 되었으며, 오래 동안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콘스탄틴노플의 동방교회와는 성만찬에 쓰는 빵에 누룩 넣는 여부를 놓고 맞부딪쳐 1054년 서로를 파문(破門)함으로써 회랍정교(Greek Orthodox Church)로 알려진 동방교회가 분리되기에 이른다.

 

1095년,드디어 로마 교황청은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하에 유럽의 왕들과 이해관계를 만들게 되고, 십자군 전쟁은 터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무역을 중시하는 아랍인들은 왕래를 통제하거나 박해한적도 없었으며, 어떤 종교에도 신이 있고, 어떤종교를 믿어도 올바르게 살아간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무슬램들은 기독교인에게 관대했다. 또한 기독교의 예수를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도 선지자로 받아 들였다.

당시 십자군은 절대로 종교적 이념을 갖는 전사가 아니라 약탈자였고 학살자 였다. 그들은 이슬람인들에 대해 어린이들과 여자들까지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무슬램 만큼이나 아리우스 수도회를 따르는 기독교도들과 동방교회 신자들이 이단이라는 명목하에 대학살 되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도 대학살을 당했다.

13세기(1204년) 또 다시 발생된 십자군 원정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침략하여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렇게 해서 동방교회는 카톨릭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방신의 숭배자였던 폭군에게 공인받고, 그에 못지 않은 다른 폭군에 의해서 국교로 공포되고, 성경의 내용과는 어긋나는 삼위일체등이 투표로 결정나고,로마제국의 아첨꾼이었던 자가 원죄론을 정립했고, 이방신의 축제가 섞여버리고, 성경에 충실하던 교파가 같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대량학살당해서 사라져버리는.......이것이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어 갔던 숨기고 싶은 역사적 사실들이다.

물론, 마리아숭배, 유아세례, 성화숭배등은 카톨릭에만 국한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사항들은 오늘날의 개신교가 버리지 못한 주요한 교리들인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제11장/ 묵시문학의 정체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장르가 묵시문학이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한다.

묵시는 무엇보다 문학장르이다. 묵시가 문학장르라는 것은 일정한 문학형식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묵시가 특정한 형태를 갖춘 문학작업, 즉 특수한 글쓰기 작업임을 뜻한다. 따라서 문학작업으로서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은 그 내용과 형식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이라 불리는 문서군(文書群)은 그 양식이 일정치 않고 다양하다.(환상의 보고,예언,권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각 문서 사이에는 사상?내용에 차이나 엇갈림이 있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범위에 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험하고 신비한 문서가 절대 아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저자의 불순한 의도가 숨겨진 거짓 예언서 이다. 과거의 유명한 선지자들의 이름을 빌려 지나간 사실을 예언인것처럼 기록하거나, 또는 기존의 문서에 누군가가 내용을 덧붙여서 지나간 사건을 예언인것처럼 꾸며 새로 등장할 왕조를 찬양하는등의 행위를 보여준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불순하기 그지없는 문서들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요한계시록 만큼은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미래에 일어날일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으로 혹세무민하는 거짓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못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이후의 역사는 계시록과는 어긋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의 묵시문학에서 상징과 숫자들을 차용했다. 구약의 상징과 숫자들은 구체적인 역사를 예언한 것인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수비학적인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없이 마구 사용했다. 이제 말많고 탈많은 그 묵시문학의 정체를 파헤쳐 보자.

 

 

▶ 묵시문학의 태동

조로아스터교에 의하면 지금의 세계는 짜라투스트라 이후 3000년에 엄청난 세계화재 속에서 멸망할 것이고, 이 세계심판은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자를 통해 일어난다. 그런 후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의로운 자들은 고통없이 불바다를 통과하지만, 불신자들은 정화되거나 불에 타 없어진다. 의로운 자들과 정화된 자들은 세계화재 이후에 정화된 새 땅에서 살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두 세계의 이원론과 함께 몸과 영혼,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도 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지금의 세계에 속해 있고, 영혼으로서 다가올 세계에 속한다. 자연은 사라질 지금의 세계의 형태이다.

 

포로기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여호와의 해방의 도구, 메시야로 환영받을 때(사 45:4), 이런 사상세계가 바빌론 으로 끌려간 유대인 유형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 페르시아인과 유대인간에 상호적인 동정이 생겼을 때였다.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양자는 정치적으로 바빌론에 적대하고 있었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전통적인 죽은 자 예식과 풍산(출산) 제의를 배격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포칼립스(Apocalypse :묵시) 로 알려진 문학형식이 유대인들에게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특히 제 2,3 이사야서부터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드러난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사야 43장 18~19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이라." [이사야 65장 17절]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된 묵시문학은 유대교에도 전파되어 신구약의 중간기에 해당하는 BC 2세기~AD 1세기에 유대인들도 묵시문학을 기록하게 된다. 그 문서들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된 영지주의 사상처럼 하나의 강력한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곧, 선과 악, 신과 사탄, 빛과 어두움은 서로 충돌하고 있어 도무지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은 교정이 불가능한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미련이 거의 없으며, 이러한 면에서 비관주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신의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신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을 방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정상적인 방법보다는 신의 나라의 수직적인 도래를 통한 역사의 파국을 희망한다.

이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모세오경에서는 찾기 힘든 점이다. 오경속의 여호와는 유대민족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이방인들을 멸한다.

특히, 유대인의 묵시문학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이라고 인정하는 최초의 독립문서(獨立文書)는 다니엘서(BC 2세기 중엽)이지만 훨씬 이전에 비교적 짧은 같은 종류의 문서가 구약의 다른 부분에 포함되었다.

이사야서,스가랴서등이 그것인데, 최근에는 제3이사야 55∼66장의 주요 부분을 초기 묵시문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여러명으로 후대에 많은 내용이 덧붙여 졌다)

이 소 문서들은 대부분이 상징적인 서술로 일관되어 있고 한편 BC 5∼BC 3세기의 유대역사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연결시키는 실마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나, 현실에 순응하는 예루살렘 귀족 또는 제사장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 점은 다니엘서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데, 일반신자들에게 다니엘서는 BC 6세기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BC 2세기경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탄압과정에서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새로 등장할 마카비 왕조를 찬양하기 위해 쓰여졌다.

당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가와 알렉산더 치하의 통치는 시간이 갈수록 제국주의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그것은 정복한 백성들을 완전히 헬라화하려는 의지를 관철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종교적,사회적,민족적 전통을 폭력으로 해체시키려는 시도도 이에 이러나게 된다. 이로 인해 유대땅에서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페르시아에도 동일한 묵시문학적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디아스포라화 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도 헬라화의 과정에서 일어났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묵시적 희망표상을 가진 두 종류의 집단이 두드려졌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성스러운 사람들'을 뜻하는 하시딤(Hasidim or Chasidim)운동자들로 자신을 '경건한 자'로 의식 하여 헬레니즘의 사상을 배격하고 유대인의 옛 전통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했다. 예루살렘의 성소 제사장 무리들 중에는 그들을 강력히 추종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바리새인'이 파생되어 나왔다.

바리새인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같은 묵시문학적 사상체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다른 묵시적 저항가들은 마카비인들(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에 의해 주도된 무리들로서 폭력혁명으로 억압적인 헬라화 정치에 대항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대교내에 영지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쿰란의 에세네파는 예루살렘의 성전제의를 거부하며 이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관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등장한 신구약의 중간기에 등장한 묵시문학들은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종말이 온다는 철저하게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나중에 기독교가 등장한뒤 이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가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에 불과하고, 예수만이 참하나님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현재의 기독교가 아무리 영지주의를 배격한다고 해도 기독교안에 잠재된 종말론 그 자체가 강력한 이원론이다. 이 세계는 구제불능의 세계이니 필연코 멸망해 버릴것이라는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이다.

 

러셀의 설명에 의하면 묵시문학은 삶이 평안하고 정상적일 때에는 결코 번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핸슨(Paul D. Hanson)의 설명에 의하면 묵시가들은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이 집단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국 분열, 외세의 침공, 남북왕조의 멸망, 이스라엘인들의 헬라화등의 고난을 겪었던 유대민족에게 종말론적인 묵시문학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상의 위대한 일들은 미래에 있을 종말의 시기(세상 끝날)에 재현되리라는 묵시문학적 희망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희망은 이 세계와 역사가 일단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 새 기원을 전제로 하고 기대한다.

여호와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이 세계가 탈역사화하여 초월적 실제로서 나타난다는 기대로 바뀌어졌다. 이처럼 종말론적, 초월적 희망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구약성경의 다니엘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정경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 묵시문학으로서 에티오피아 에녹서(1-107장, 혹은 에녹 1서), 슬라브 에녹서(1-73장, 혹은 에녹 2서), 히브리 에녹서(1-48장, 혹은 제 3에녹서,세가지 종류의 에녹서는 쓰여진 언어를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저작 연대 역시 크게 차이가 난다), 에스라 제4서, 시리아어 바룩 계시록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 후대에 조작된 구약의 예언

구약의 묵시문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에스라,다니엘과 같은)의 이름을 빌려서 위명(爲名:Pseudonym)으로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미래시제로 조작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을 인터폴레이션(Interpolation :수정 어귀를 가미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오래된 예언서들이 이러한 형태를 띄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스트라 다무스의 모든세기라는 예언서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상당히 상징적으로 암시되어 있어서 해석하기가 난해한데, 그중에서 현대인이 읽어보아도 금방 알아낼수 있는 예언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대혁명의 예언이다. 1999년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구절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스럽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예언은 아주 자세하게(왕이 사로잡히는 내용까지) 서술되어 있다.

오늘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중, 히틀러의 등장, 프랑스 대혁명등의 예언이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혹세무민하는 사람이 있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많은 부분이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 진것이라는데 합의를 보고 있다.

 

구약의 예언들 역시 이러한 인터폴레이션 현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구약의 예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라고 기록해 놓았지만,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과거의 일이된다.

예를들어, 안티오코스4세라는 시리아의 왕이 유대땅을 약탈하며 유대교를 탄압 했다가, 반란이 일어나 그를 축출하고 다시 유대인이 왕권을 잡게되었다고 하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새로 들어선 마카비 왕조의 왕권확립을 위해, 왕을 지지하는 세력의 누군가가 그 모든 것이 이미 오래전에 예언되어있던 일이었다고 거짓문서를 작성한다. 그는 시중에 존경 받는 다니엘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킨다. 책의 저자도 다니엘로 발표 한다. 그런데 다니엘은 BC 600년경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전설적 인물이다. 따라서 책은 BC 600년경에 기록된것으로 간주 된다.

다니엘로 위장한 익명의 저자는 책 속에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경고 한다. 하지만, 익명의 저자에게는 바빌론제국의 몰락과 유대인의 귀환, 헬라제국의 분열, 안티오코스의 유대교박해와 몰락에 대한 사건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니엘의 이름을 빌린 저자는 그것이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인것처럼 기록한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할지 못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사실이다.

다니엘서에는 후기의 헬라어 단어가 3개(3장에 악기들의 명칭으로 등장)나 들어 있으며, 후기의 페르시아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다니엘이 바빌론에 끌려간 BC 6세기에 씌여졌다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쓰여진 문체, 언어, 문법역시 그 시대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또한 BC 190~180년에 쓰인 집회서의 이스라엘 예언자 명단(집회 48,22; 49,7-8.10)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후의 BC 134년과 BC 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다니엘서를 언급한다(1마카 1,54 = 다니 9,27과 11,37). 그리고 70역의 다니엘서는 BC 145~140년경의 로마 신탁집에서도 이용된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 /임승필번역 / 구약성서새번역17-다니엘,토비트,유딧,지혜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주석中 다니엘서 입문]

 

또한 다니엘서의 역사적 출처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

현재의 다니엘서를 바탕으로 다니엘 예언자의 전기(傳記)를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니엘이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본디 서로 관련이 없었다.

다니엘서의 최종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전통적 방식에 따라 느부갓네살(1~ 4장), 그의 아들 벨사살(5장과 7~8장),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와(6장과 9장)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10~12장) 등 여러 임금의 통치 시대에 배치시켰다.

다니엘서는 BC 606년에 유배를 간 한 젊은 유대인이 세 동료와 함께 선택을 받아 왕궁의 시종이 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1장). 이 젊은이는 해몽을 잘 함으로써 벼슬에 오르게 된다(2장). 그 뒤에 그와 세 동료는 일시적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3,6.14), 페르시아 제국이 시작될 때까지 출세 길을 달린다.

유배 간 유대인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정승(6장) 또는 지방 장관, 그리고 현인들의 총감독관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2,48-49; 4,6; 5,11), 저자는 그 가능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그의 의도가 역사적 설화와는 다른 차원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새번역성서 주석中 다니엘서 입문.1992.분도출판사]

따라서 다니엘서는 안티오코스의 유대교 박해와 마케베오시대에 제작된것이다.

 

다니엘서는 그 책이 왜 씌여 졌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다니엘이 바빌론왕들의 꿈을 해몽해주는 앞부분 이야기를 제외하고, 후반부의 예언들은 거의다 안티오코스4세의 몰락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안티오코스에대한 예언은 날짜와 시기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또,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끝날은 종말이 아니라 안티오코스가 몰락하는 그날이다.

이런점들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BC 2세기경의 안티오코스와 마카베왕조의 시기에 기록된것이라는 것은 이미 학자들은 잘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바빌론에 끌려 간 다니엘이 바벨론의 몰락과 새로 등장할 왕조를 예언했다고 하지만, 안티오코스 시대에서는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이름을 알수없는 다니엘서의 위명의 저자는 이미 지나간 사실을, 미래에 일어날 일처럼 서술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역시 다니엘서에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성립연대는 BC 6세기에 다니엘이 바빌론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했으나 오늘날에는 BC 2세기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박해 당시 다니엘의 이름을 빌려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 된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다니엘서 Book of Daniel항목]

 

카톨릭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시록적인 집필의 구성을 마카비왕조 기간동안의 미지의 저자의 일로 여기고, 정확하게 안티오코스4세(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년)라고 지목한다."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IV / Book of Daniel 항목]

 

'숨겨진 성서'의 저자 윌리스 반스토운은 외경인 이사야의 승천을 설명하면서 성경의 묵시문학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그 환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묵시록의 저술자는 사도나 구약의 선조등 성서상의 저명한 인물들을 그 저술자로 내세운다. 또한 예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 내용을 일반적으로 과거에서 끌어낸다. 미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 적중한다. 묵시록의 내용은 이미 과거에 발생한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3권 / 이동진역 / 문학수첩 P.22]

 

다니엘서의 저자와 기록연대에 대하여 최초로 비평을 가한것은 AD 3세기 시리아 사람으로 헬라 철학자인 포르피리(Porphyry)였다. 그는 AD 233년 시리아의 두로에서 태어나 잠시 가이사라에서 오리겐(Origen)교부(敎父)문하에서 공부한후, 로마에 가서 신플라톤주의 대표 철학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항하여'(Against the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5권의 책을 썼는데, 그는 그의 책 제 12권에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의해 기록된것이 아니라 BC 2세기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시대에 유대땅에 살던 어떤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장차 올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미래 시제(時制)를 써서 예언인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며 저자가 알 수 없는 장래 일을 추측으로 그럴싸하게 기록한것 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8,19세기를 직후해서 유럽에서 중세기적 신학을 배격하고 합리주의적인 새로운 신학의 조류에 의한 고등비평이 일어나면서 다시 이사야서와 다니엘서와 같은 문헌들이 비평의 도마위에 올려졌고 그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구약의 예언서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한 권의 문서 뒤에 자신의 책을 붙여서, 전체가 연결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한명이 아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오늘날에는 이사야서를 제3의이사야까지 분리해놓고 있는 상태이다.

두산세계대백과 역시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제각기 복잡한 절차를 거쳐 형성되었는데,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등은 후대에 많은 가필이 이루어졌음이 인정되고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예언서 豫言書 prophets항목]

 

특히 모세 오경과 달리 예언서의 가필이 심했던 것은 그 책의 공인과정에서도 알수가 있다.

토라(Torah), 즉 모세 오경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하나로 묶어졌고 가장 빨리 경전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예언서인 네비임(Nebiim)과 성문서(聖文書)인 케투빔(Kethubim)은 마카비 혁명시대(BC 2세기)와 예루살렘 멸망(AD 70년경)시기에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되었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예언서의 내용들이 바빌론유수 이후에 등장해서,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 전까지 계속해서 수많은 내용이 덧붙여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예언서의 내용이 기가막히게 맞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특히, 구약의 예언들은 마카비 혁명이전의 사건에 대해서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예언을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적사건, 즉 헤롯대왕과 로마의 등장, 예수의 등장, 유대인들이 유대땅에서 추방되는 사실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서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카비 혁명 이전에는 위명의 저자가 예언서를 마음대로 조작 할 수가 있었지만, 유대교의 경전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함부로 손을 대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일것이다.

혹시, 예수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있다고 주장하실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7장의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에서 신약의 기자들이 아무런 상관없는 구약의 구절을, 고의적으로 예수의 생애에 끼워맞추기 했다는 것을 밝혀둔바 있다.

 

 

▶ 이사야서의 저자는 3명 이상이다

이사야는 유다의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 왕이 재임하던 BC 742년경부터 40여 년간 활동했다는 전설적인 예언가이다.

이사야서는 그 문학양식이나 기술된 내용의 역사적 상황, 문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위명의 저자가 내용을 덧붙여 가기 시작해 BC 4~3세기 쯤에 하나로 묶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의 200년간의 이사야 연구들로 인해 이제는 이사야서의 저자가 한사람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외국에서는 일반평신도들도 잘 알고있는 이 사실을 한국의 목회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12세기에 에즈라(Ibn Ezra)가 이사야서의 통일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었으며,[M. Friedlaender, The commentary of [Abraham ben Meir] Ibn Ezra on Isaiah, London 1873; A. Geiger, Wissenschaftliche Zeitschrift fur judische Theologie 2 (1836), 553~557], 아이히호른이 처음으로 이사야서의 39장과 40장을 나누어서 40장 이하를 '제2이사야 Deuterojesaja'라 불렀다.[J.G. Eichhorn,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Leipzig 1780~1783, Gottingen 41823/25, 83~97].

 

그후, 1892년에 베른하르트 둠은 그의 이사야서 주석(B. Duhm, Das Buch Jesaja, HAT III, 1892; 41922, nachdruck 1968)을 내면서, 40~55장의 제2이사야서 연대는 540년경이며, 13,2-22; 14,4b-21.22f.; 21,1-15는 제2이사야와 동시대인 다른 이의 저작이며, '야훼의 종 노래' (42,1-4; 49,1-6; 50,4-9; 52,13-53,12)는 포로기 이후 유대 공동체내 한 사람의 작품, 그리고 56~66장은 이와는 또 다른 사람으로써 그를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느헤미야 등장 바로 이전의 '제3이사야 Tritojesaja' 라 이름 지었다.

 

즉, 1~39장까지를 제1이사야서, 40~66장까지를 제2이사야서로 구분지은이래, 다시 제2의 이사야서 역시 저자가 두명 이상이라는 논의가 제시되어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을 제2 이사야서, 56~66장까지를 제3 이사야서로 구분짓게 된것이다.

둠의 제3이사야서설이 나온후, 수많은 연구와 논문이 쏟아졌다. 제3의 이사야서 부분은 아직도 이견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 하나로 합쳐져있을 뿐, 제3이사야서의 문학양식이나 기술된 내용의 역사적 상황, 문체가 너무도 틀리기에, 폴쯔(P. Volz, Jesaja II, KAT Bd. IX, Leipzig 1932)는 다수제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체인(Cheyne)은 이사야서 주석 (T.K. Cheyne, Introduction to the Book of Isaiah, London 1895)에서 제2이사야에게서 영향을 받은 제2이사야 학파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새번역성서 주석中 이사야서 입문에서는 제3이사야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사야서 40~55장에서 56~66장으로 넘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사고와 어휘의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조와 새로운 표현들의 차이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부분 안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 구약성서새번역5-이사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떤 이들은 이사야서 56~66장을 일종의 편집물, 곧 저자나 생성 연대와 관련해서 각기 다양한 단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여긴다. 이러한 설명은 이 작은 책에 들어있는 시들 사이에 일정한 부조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사실 모든 것을 동일한 한 저자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다른 이들은 56~66장 역시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재입주하는 문제에 봉착한 제2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예언자 스스로 자기만의 고유한 표현들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표절할 가능성이 별로 없고(40,3과 57,14; 52,12와 58,8; 49,23과 60,16 등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유사점들보 다 더 중요하게 드러남을 부정할 수도 없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11개 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제2이사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유배가 끝난 뒤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한 동일한 한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새번역성서 주석中/ 위의 책]

 

제3의 이사야서에 대한 논란은 논의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 논의는 제3의 이사야서를 찬성하는 학자와 부정하는 학자간의 논란은 아니다.

이사야서가 세부분으로 나눠진다는데에는 동의하지만, 제3의 이사야서를 어떻게 규정짓느냐하는 논의가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제3의 이사야서설은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사야서의 저자가 여러명이라는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설이다.

이사야서의 예언 역시 후대에 덧붙여지고 가필이 심하게 이루어진 조작의 예언이다.

특히, 앞서서 언급했던 배타적인 유대인의 민족신 여호와는, 제 2의 이사야서 부터 보편성이 나타나기 시작 한다.

'無神之香 Atheism > 안티바이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티바이블 15  (0) 2010.03.19
안티바이블 16  (0) 2010.03.19
안티바이블 18  (0) 2010.03.19
안티바이블 19  (0) 2010.03.19
안티바이블 20  (0) 2010.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