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적멸도량에 계시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이루셨을 때, 대지는 청정해지고 갖가지 보화와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 흘렀다.
또 화환은 부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위에 금, 은, 유리, 수정, 산호, 마노 등의 진귀한 보석들이 뿌려졌다. 그리고 수많은 나무들은 잎과 가지에서 빛을 발하면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진리가 모두 평등함을 깨달았고, 그 지혜의 광명은 모든 사람의 몸 속까지 비추었으며, 미묘한 깨달음의 음성은 세계의 끝까지 들렸다. 그것은 마치 허공을 질러 가듯이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았다.
부처님은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계시며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알고 계셨다. 그 지혜의 빛은 모든 어둠을 없앴을 뿐 아니라 무수한 부처님의 나라[佛國土]를 나타내었으며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부처님은 보현(普賢)보살과 보덕지광(普德智光)보살 등 무수한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이 보살들은 모두 옛날에 함께 수행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벗들이며 뛰어난 덕을 완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보살의 수행을 마쳤을 뿐 아니라 지혜의 눈이 밝아 과거, 현재, 미래를 통찰하고 있었다. 또한 마음은 고요히 통일되어 있었으며 한 번 진리를 설하기 시작하면 광대한 바다와 같이 끝이 없었다.
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있어서 그에 따라 괴로움을 없애주었으며, 어떠한 일이든 그 안에 뛰어들어 능히 이를 경험한 후, 버릴 것은 버리고 지닐 것은 취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있으면서 정토(淨土)를 건설하고자 하는 원(願)을 일으켰으며, 무수한 부처님을 예배, 공양하며 자신의 몸은 부처님의 공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밖에도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들과 도량을 지키는 신들, 대지와 수목의 신들, 하천과 바다의 신들, 혹은 아수라(阿修羅), 라후라(羅喉羅), 긴나라(緊那羅) 등의 신들과 삼십삼천왕(三十三天王)과 야마천왕(夜摩天王), 도솔천왕(兜率天王), 화락천왕(化樂天王),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 등의 무수한 천신 천왕들도 부처님의 곁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었으며, 여러가지 방편으로 모든 사람을 교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 수많은 천신과 천왕, 그리고 여러 보살들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깨달은 세계를 찬탄하였다.
그 가운데 낙업광명천왕(樂業光明天王)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매우 깊어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신다. 모든 사물의 진실한 모습은 번뇌의 어지러움을 떠나서 고요히 통일되어 있으며,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장애를 받지 않으신다.
또한 여래는 신통력으로써 비록 한 개의 털구멍과 같은 작은 세계에서도 중생을 위하여 위없는 진리를 설하여 주신다.
여래는 진리의 깊은 의미를 통찰하고 중생들 각각의 능력에 따라 불멸의 가르침을 비와 같이 내리시며, 그로 인해 많은 진리의 문이 열려 고요히 통일되어 있는 평등하고 진실한 세계로 중생을 이끌어 들이신다."
또 시기대범왕(尸棄大梵王)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몸은 언제나 맑고 고요하다. 가령 시방의 세계를 두루 비추어도 부처님의 몸은 모습이 없고 형태를 나타내는 일이 없으며, 흡사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같다.
이같이 부처님의 몸은 적정하여 통일의 경계에 있으므로 어떠한 중생도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여래는 진리의 대해(大海)를 단지 한 소리로써 설하시니 거기에는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여래의 미묘한 음성은 깊고 충만하며, 중생은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서 얻은 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보살행(菩薩行)은 모든 여래의 몸 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래는 그것을 조금도 꾸미지 않으신다. 부처님의 몸은 흡사 허공과 같아서 다하여 그치는 일이 없다. 부처님의 몸은 모습이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것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또 일광천자(日光天子)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한량없는 시방의 국토를 비추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눈앞에서 바로 부처님을 보고 믿고 받들게 한다. 중생의 세계는 큰 바다와 같이 넓지만 부처님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이끌어 지혜의 바다에 들게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시어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비춘다. 부처님의 영원불변한 법신(法身)은 어떠한 것에도 비교할 수가 없으며 위없는 지혜로써 진리를 설하신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생활 속에 뛰어들어 같이 고난을 겪는 것은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오묘하신 몸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보름달과 같고 허공에 맑은 빛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어두운 중생은 앞을 못 보는 장님과 같다. 부처님은 그러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밝은 눈을 열어 주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 청정한 몸을 중생들 앞에 나타내신다."
또 비사문야차왕(毘沙門夜叉王)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중생의 죄는 깊고 무겁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부처님을 만날 수가 없다. 또 미혹의 세계를 끊임없이 윤회하며 끝없는 괴로움을 받는다.
부처님은 이들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부처님은 시방의 모든 중생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여러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뽑아버린다. 부처님은 방편을 써서 중생의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를 없애고 중생을 바른 진리 속에 머물게 하신다.
부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수행하고 있을 때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찬탄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높고 위대한 부처님의 이름이 시방의 모든 나라에 전해졌다.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과 같이 끝이 없으며, 영원불멸한 진실의 모습인 법신은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많은 천신(天神)과 보살들이 차례로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부처님의 세계를 찬탄하였다. 그때, 연화장 장엄세계(蓮華藏莊嚴世界)는 열 여덟 가지의 모습으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모든 세계의 왕들은 불가사의한 공양(供養)의 구름을 나타내어 부처님의 적멸도량 위에 비를 내렸다.
그 하나하나의 세계 안에 부처님의 도량이 있었으며 또 부처님은 그 각각의 도량에 앉아 계셨다.
모든 세계의 왕들은 그들의 세계에 있는 부처님을 믿고 마음을 통일하였으며, 불도를 행하고 깨달음을 열었다. 시방의 모든 세계도 이와 같았다.
제 2장 노사나품(盧舍那品)
그때 많은 천신들과 천왕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켰다.
"도대체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헹과 부처님의 힘과 부처님의 선정(禪定),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또 부처님의 명호(名號)의 바다, 부처님의 생명의 바다, 중생의 바다, 방편의 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모든 보살들이 실천하고 있는 행의 바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원하옵건대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의 마음을 열어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밝게 알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어서 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래는 한없는 긴 세월 동안 수행을 성취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열으셨습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묻지 않고 몸을 나타내시어 중생을 교화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피어올라 허공에 충만하는 것과 같아서 중생의 의심을 낱낱이 제거하여 커다란 믿음을 일으켰으며 세간의 한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안락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무수한 보살들은 일심으로 합장하고 한결같이 여래를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보살의 원에 따라 뛰어난 가르침을 설하여 의혹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부처님의 경계와 부처님의 지혜와 힘은 어떠한 것입니까. 바라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가르쳐 주소서. 수많은 부처님의 삼매(三昧)와 청정한 수행과 깊고 오묘한 법과 신통력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커다란 가르침의 구름을 피어오르게 하여 중생들의 머리 위에 단비를 뿌려 주시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많은 보살들의 소원을 아시고 입 속의 치아 사이로부터 무수한 광명을 발하셨다.
그 하나하나의 광명으로부터 다시 무수한 광명이 퍼져 나와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나라를 비추었다.
수많은 보살들은 이 광명에 의하여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엄세계의 바다를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한없는 긴세월 동안 공덕을 닦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중생들을 교화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광명을 발하여 시방세계를 비추며, 하나하나의 털구멍으로부터 화신(化身)의 구름을 일으켜서 중생의 능력에 따라 교화 방편의 길을 얻으셨다.
여러 훌흉한 불자들이여, 부처님께 공양하라. 그리고 다만 일심으로 공경, 예배하며 부처님을 받들어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는 그 한 말씀 안에도 무한한 경전의 바다가 있고, 일체 중생에게 감로(甘露)의 비를 뿌려준다.
여래의 커다란 지혜의 바다는 아무리 깊은 곳도 그 광명으로 비추시며, 진리를 향한 모든 길이 충만하여 있는 것이다."
이같은 연화장엄세계의 동쪽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안에 부처님 나라가 있으며 그 부처님을 중심으로 무수한 보살들이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었다.
또 남쪽에도, 북쪽에도, 서쪽에도, 또 동남, 서남, 서북, 상, 하 어디에도 저마다의 세계가 있어서 그 안에는 부처님의 나라가 있고, 그 부처님을 중심으로 무수한 보살들이 결가부좌하고 있었다.
이들 무수한 보살들은 자기 몸의 모든 털구멍 하나하나로부터 구름과 같은 빛을 뿜어 내고 그 하나하나의 빛 속에 다시 무수한 보살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은 이들 모든 보살들에게 부처님의 무량무변한 세계와 자유자재한 진리의 세계와 자유자재한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눈썹[眉間]의 백호(白毫)로부터 광명을 발하였다.
그 빛은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남김없이 비추고 보현보살을 빛 속에 나타나게 하였다. 그리고 보현보살을 대중에게 보인 다음에야 부처님의 족하상륜(足下相輪)안에 갈무리하였다.
보현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연화장(蓮華藏)의 사자좌(師子座)에 앉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삼매에 들었다. 이것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삼매'이다. 그러자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 보현보살을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그대는 능히 이 삼매에 들었나니 이것은 한결같이 비로자나불의 본원력(本願力)에 따르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그대가 모든 부처님의 서원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를 넓히기 위함이며, 또 일체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청정한 길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또 모든 부처님의 경계에 자유자재하게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때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보현보살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주었고, 또 저마다 오른팔을 뻗어 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지혜는 무량무변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지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얻으셨던 경계에 이르는 지혜, 그리고 무량한 중생의 세계에 드는 지혜, 일체 중생에게 다함 없는 말씀의 바다에서 진리를 설하여 주는 지혜들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모든 보살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보현보살을 향하여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청정한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그때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바다와 같이 넓은 중생의 세계[衆生海]와 바다와 같이 깊은 업의 세계[業海],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의 세계[三世諸佛海]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보살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모든 부처님의 바다와 같은 지혜는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는 없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지하여 말하려 합니다. 이는 다만 일체 중생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보현보살은 삼매로부터 일어섰다.
그러자 모든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모든 중생은 평화로워졌으며,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모든 여래의 바다에는 열 가지 보배의 비가 내렸다.
그때 보현보살은 무수한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불자들이여, 첫째, 모든 세계의 바다[世界海]는 한없는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이미 성립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성립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미래에도 성립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즉 여래의 신통력입니다. 그것은 사물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존재인 진여(眞如)인 것입니다. 또 중생의 행위나 숙업(宿業)인 것입니다.
모든 보살은 궁극의 꺠달음을 얻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이 부처님의 나라를 청정하게 하는 일이 자유자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바다에 있어서의 인연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경계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자나 부처님은 무량무변한 모든 세계의 바다를 청정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하나의 세계해는 여러 가지 인연에 의지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하나의 세계해는 부처님의 힘을 입어 성립되어 있고, 혹은 허공에 의지하여 성립되어 있으며, 혹은 부처님의 광명에 의지하여 성립되어 있고, 혹은 꼭두각시와 같은 업력(業力)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으며, 혹은 보현보살의 원력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여러 부처님과 여러 보살들의 신통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도 부처님의 나라가 있어 안정되어 있고, 하나하나의 티끌 속으로부터 부처님의 구름이 피어올라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섭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항상 염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도 부처님의 자재력(自在力)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밖의 모든 티끌 속에서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세계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혹은 둥들고, 혹은 네모지며, 혹은 세모지고, 혹은 팔각(八角)이며, 혹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것과 같고, 혹은 꽃 모양과 같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마음의 업에 의하여 일어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힘에 의하여 장엄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저마다 자유자재하며 무량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 있는가 하면 더럽혀진 것도 있고, 괴로운 것이 있으면 즐거움도 있으며, 사물이 항상 유전(流轉)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그 모양도 변하여 갑니다. 일체의 업은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털구멍 안에도 무량한 부처님의 나라가 장엄되어 있으며 평화롭게 안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계에는 여러 가지 형상이 있고, 어떤 형상의 세계속에서도 가장 높은 불법이 설하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설법인 것입니다. 이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본원력이며 초인적인 힘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흡사 꼭두각시와 같고, 또 허공과 같고, 온갖 마음의 업에 의하여 장엄되어 있습니다.
넷째, 일체의 세계해에는 여러 가지 몸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보배로 장엄되어 있는 몸, 혹은 하나의 보배로 장엄되어 있는 몸, 혹은 금강(金剛)과 같이 견고한 대지(大址)의 몸 등이 그것입니다.
세계해는 때로는 많은 보배로 성립되어 있고 견고하여 결코 부서지는 일이 없습니다. 혹은 광명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으며, 광명의 구름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습니다. 혹은 번개와 같아서,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보배로 이루어진 나라에 있으며, 깨달음의 구름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부처님은 자유자재합니다. 또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 이는 모든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은 것입니다.
불자들이여, 다섯째로 모든 세계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장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중생의 숙업이 장엄되어 있고, 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원력이 장엄되어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시방의 세계해는 여러 가지로 장엄되어 있고, 광대무변합니다. 중생의 숙업의 바다는 넓고 끝이 없으며, 때와 상황에 따라서 변하여 갑니다. 그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까지도 부처님의 힘에 의하여 장엄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모든 세계해에는 여러 가지 청정한 방편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살은 많은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히 섬겨서 덕을 닦고 지혜를 닦으며, 또 여러 가지 뛰어난 경지를 관찰하고 그에 도달하며, 혹은 중생의 온갖 고뇌를 없애고자 염원합니다.
모든 부처님 나라의 장엄은 헤아릴 수 없는 원력의 바다로부터 생기며, 모든 부처님 나라의 청정한 빛은 보살의 깊은 업력(業力)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살은 멀고 먼 옛날로부터 선지식을 친근히 섬겨서 수행하고 그 자비심은 널리 퍼져 흘러서 중생에게 혜택을 줍니다. 그 때문에 보살은 세계해를 청정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깊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어떠한 난관을 당하여도 이를 인내합니다. 때문에 보살은 세계해를 청정하게 한다고 합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청정한 행(行)을 다하고 중생은 그에 의하여 무량한 복덕을 얻습니다. 때문에 세계해를 청정하게 한다고 합니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공덕의 바다에 들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의 근본을 알게 하고, 이리하여 광대한 부처님의 나라를 완성합니다. 때문에 보살은 세계해를 청정하게 한다고 합니다.
일곱째, 하나하나의 세계해에는 무수한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계십니다.
그 모습은 혹은 작고 혹은 크며, 그 수명은 혹은 짧고 혹은 길며, 단 하나의 부처님의 나라를 청정하게 했는가 하면, 무수한 부처님의 나라를 청정하게 하기도 하며, 단 하나의 법(法)을 가르쳤는가 하면, 불가사의한 많은 법을 설하기도 합니다. 또 중생의 일부를 교화하는가 하면 무량한 중생을 교화하기도 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수 없는 방편의 힘에 의하여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일으키고, 중생의 바라는 바에 따라 시바세계에 오셨습니다.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불가사의합니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아무것에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 형상을 나타내고 중생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혹은 하나의 털구멍으로부터 부처님의 화신(化身)이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고 시방세계에 충만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합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모든 세계에 남김없이 울려 퍼지고 중생의 바라는 바에 따라서 설법을 계속하며 한 순간도 끊이는 때가 없습니다.
불자들이여, 여덟째로 하나하나의 세계해에는 저마다 그 세계의 시간이 있습니다.
긴 시간을 가진 세계가 있는가 하면 짧은 시간을 가진 세계도 있고, 또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가진 세계도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무량한 방편과 원력에 의하여 이들 모든 시간 속에 자유자재하게 출입합니다.
아홉째로 모든 세계해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해는 자연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에 나타나고 이윽고 소멸합니다.
또 세계해는 번뇌를 가진 중생이 살고 있기 때문에 번뇌에 의하여 변화합니다.
또 세계해는 지혜를 갖춘 보살이 살고 있기 때문에 청정함과 오염에 의해서도 변화합니다.
또 세계해는 무수한 중생이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직 청정함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세계해는 모든 보살이 구름과 같이 모여 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대장엄(大壯嚴)에 의해서 변화합니다.
또 세계해는 여래의 신통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남김없이 청정한 모습 그대로 변화합니다.
이와 같이 시방의 모든 국토는 다만 업력에 따라 변화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여, 열째로 모든 세계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하나의 세계해 속에는 또 수많은 세계해가 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또 하나하나의 세계해에는 여러 부처님이 계시지만 그 위력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또 하나하나의 세계해 안에는 여러 부처님의 광명이 있어 남김없이 고루고루 비추기 때문에 차별이 없습니다.
또 하나하나의 세계해 안에는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기 때문에 차별이 없습니다.
또 하나하나의 세계해 안에는 하나하나의 작은 티끌까지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광대한 세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작은 티끌 안에까지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셔서 모든 국토해(國土海)에 충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방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보현보살은 다시 계속해서 설했다.
"불자들이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합니다. 이 연화장 세계해는 비로자나불이 멀고 먼 오랜 옛날, 보살의 수행을 닦을 때,여러 부처님 아래에서 보살의 큰 서원을 일으켜 장엄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과거의 무수한 부처님이 수행을 위하여 자기 몸을 수없이 버린 곳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더러움을 떠나서 남김없이 청정하게 된 세계해입니다.
대비(大悲)의 구름은 모든 중생의 위에 드리워지고 비로자나불의 광대한 서원은 모든 국토에 미치고 있습니다. 중생의 괴로움은 제거되고 궁극의 깨달음은 확정되어 있으며, 모든 세계해는 남김없이 광명으로 비추어져 있습니다.
이 연화장 세계해 안의 하나하나의 작은 티끌 안에서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남김없이 알고 있으며 무수한 방편의 가르침에 의하여 중생을 교화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른 자리에 되돌아가게 하여 언제나 고요히 안주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위대한 활동은 모든 세계를 청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또 그 세계는 넓어 끝이 없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와 같이 무수하고 무변한 세계해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시방세계해에 가득하며 스스로 무수한 화신불(化身佛)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화신불은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닙니다. 화신불은 다만 비로자나불의 본원력 때문에 우리들이 우러러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연화장 세계해안에서 무수한 불자들은 저마다 자기의 행을 닦고 있으니 그 수행은 본래의 불도(佛道)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자들에게는 이윽고 반드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는 수기(授記)가 주어져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끝으로 보장엄(普莊嚴)이라고 하는 소년의 보리심(菩提心)에 대해 설하였다.
"오랜 옛날 보장엄이라고 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부처님의 한없는 덕을 받들고 갖가지 삼매를 얻었습니다. 그때 소년은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도량에 앉아 계시며 청정한 대광명을 발하셨다. 그것은 흡사 천 개의 태양이 일시에 나와서 허공을 비추는 것과 같았다. 천만억 겁(劫)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이 이제 사바세계에 출현하셨다.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있다.
광명은 부처님 몸의 털구멍에서 나오고 마치 구름이 피어 오르는 것 같이 다함이 없어 시방세계에 가득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흡사 눈앞에서 보듯 광명을 볼 수 있다.
중생은 부처님의 빛에 닿으면 곧 괴로움을 떠나 마음이 고요해지며 평화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때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중해(大衆海)안에서 경을 설하였습니다. 소년은 이 경을 다 듣고 나서 여러 가지 삼매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숙세(宿世)의 인연에 의한 것입니다. 소년은 기쁜 나머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최고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려 모든 부처님께서 닦으신 공덕의 바다를 볼 수가 있다.
나는 생사의 바다 속에서 자기를 무수히 버리고 오직 보살의 행을 닦아 불국토를 장엄하였다. 귀를 버리고, 코를 버리고, 눈과 머리와 손발까지도, 그리고 궁전도, 왕의 자리도, 모두 버리고서 나라를 청정하게 하는 보살행만을 닦았다.
태양의 빛에 비치어 태양 그 자체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나는 부처님의 지혜의 빛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행하심을 모두 볼 수가 있다.
불국토에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한 기쁨이 충만하다. 나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또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나아가리라.'
소년이 이와 같이 말했을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이 모두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착하도다. 소년이여, 그대는 큰 용기로써 깨달음을 구하였다. 그대는 만중생의 의지할 바가 될 것이다. 또 장차 부처님의 다함 없는 활동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게으른 자는 깊은 방편의 바다를 깨달을 수가 없나니 정진의 힘이 완성됨으로써 부처님의 세계는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제 3장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의 적멸도량에서 설법을 마친 다음 보광법당에 있는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다.
부처님 주위에는 수많은 보살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들어서 중생의 본성을 통찰하는 뛰어난 보살들이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소원이 보살들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부처님이시여, 바라옵건대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번뇌를 끊고, 무명(無明)을 떠나고, 의혹의 그물을 찢고, 애욕의 탐심이 없어지는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또 부처님의 최고의 경지, 부처님의 생명, 부처님의 힘과 임무와 그리고 빛과 지혜와 선정(禪定)을 여기에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의 생각을 아시고, 신통력을 나타내셨다. 그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동방의 나라로부터 문수보살이 수많은 보살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을 찾아왔다.
문수보살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한 다음, 초인적인 힘으로 사자좌를 만들고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남방의 나라에서도 각수(覺首)보살이 무수한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공양한 다음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또한 서방과 북방, 동북방, 동남방, 서남방, 서북방, 상, 하의 나라에서도 보살들이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공양한 다음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그때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모인 보살들을 향하여 말했다.
"불자들이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나라는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의 생명과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소원이 각기 다른 것을 가름하시고 저마다의 소원에 알맞도록 법을 설하지만, 그 설법의 힘은 마치 허공을 자유자재하게 뛰어다니듯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여, 이 나라에서 여래는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만월(滿月), 사자후(獅子吼), 석가모니(釋迦牟尼), 신선(神仙), 대사문(大沙門), 최승(最勝) 등 그 수는 일만에 이릅니다.
또 동방의 나라에서도 여래는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금강(金剛), 존승(尊勝), 대지(大地), 불괴(不塊), 무쟁(無諍), 평등(平等), 환희(歡喜), 무비(無比), 묵연(黙然) 등이 있고 그 수는 일만에 달합니다.
또 남방의 나라에서도 이구(離坵), 조어(調御), 대음(大音), 무량(無量), 승혜(勝慧) 등이 있어 그 수는 일만에 이릅니다.
서방의 나라에서도 애현(愛現), 무상왕(無上王), 무외(無畏), 일체지(一切智), 선의(善意), 구경(究竟), 능인(能忍) 등이 있고 그 수는 일만에 이릅니다.
북방의 나라에서도 고행(苦行), 바가바(婆伽婆), 복전(福田), 일체지(一切智), 선의(善意), 청정(淸淨) 등이 있고 그 수는 일만에 이릅니다.
그리고 동북방 나라에도, 서남방 나라에도, 서북방 나라에도 위쪽 나라에도 아래쪽 나라에도, 각각 일만에 이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같이 사바세계에는 백억의 나라들이 있고 또 백억만에 달하는 여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의 동쪽에는 밀훈(密訓)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고, 그곳에도 평등(平等), 안위(安慰), 일체사(一切捨), 대초월(大超越), 무비지(無比智) 등 백억만에 달하는 여래의 이름이 있습니다.
불자들이여, 사바세계의 남, 서, 북 등 시방(十方)에도, 각각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마다 백억만에 달하는 여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여래의 이름이 있으며 시바의 중생은 모두 저마다 여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수한 이름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제 4장 사제품(四諦品)
문수보살은 또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불자들이여, 사바세계에서는 괴로움, 즉 고제(苦諦)를 가르켜 재해(災害)와 죄업, 핍박, 무지(無知) 그리고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괴로움 등이라고 합니다.
또 그러한 괴로움이 모인 것[集諦]을 불[火], 속박, 애착, 망념, 그릇된 생각 등이라 하며, 그 괴로움이 이윽고 없어지는 것[滅諦]을 장애가 없고, 번뇌로부터 떠나며, 적정(寂靜)하고, 불사(不死)하며, 진실하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道諦]을 일승(一乘)으로 나아감, 변하지 않음, 인도(引導), 평등(平等), 선인행(仙人行) 등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네 가지 진리[四諦]에 관한 이름이 이 사바세계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 명칭들은 모두가 중생의 행위와 마음에 따라 적절히 가르치고 이끌기 위하여 무수한 이름이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바세계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있는 밀훈세계(密訓世界)에서도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이름은 무수합니다. 이처럼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이름이 무수한 까닭은 중생의 마음과 행위에 따라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여, 이와 같이 사바세계의 남방, 서방, 북방, 동북방, 동남방, 서남방, 서북방, 상, 하의 모든 세계에도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이름은 무수히 설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바세계를 비롯한 시방의 모든 세계와 같이 동방의 백천억에 이르는 수없는 세계에서도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이름은 무수히 설해지고 있으며, 남방, 서방, 북방, 동북방, 동남방, 서남방, 서북방, 상, 하의 세계도 그와 같습니다.
이는 모두가 중생의 마음과 행위에 따라 가르치고 이끌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5장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
그때 부처님의 두 발로부터 무수한 광명이 비쳐 나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것을 비추었다.
부처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시자 문수보살을 비롯한 많은 보살들이 저마다 자기의 동료들을 데리고 부처님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을 향해 찬탄하였다.
"여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꼭두각시[幻]와 같고 허공과 같다고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은 청정하여 걸림이 없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 모습은 황금의 산과 같이 눈부시고 보름달과 같이 밝게 빛났습니다. 태어나시자 곧 일곱 걸음을 걸으셨고,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무량한 공덕을 지녔으며, 지혜와 선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밝고 맑은 눈으로 시방세계를 두루 살폈습니다. 그리고 중생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또 사자와 같이 위엄을 갖춘 음성으로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외치셨습니다.
가비라성을 나와 출가할 때는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고 모든 부처님들이 닦은 대로 수행 정진하여 항상 번뇌의 불이 꺼진 조용한 마음의 상태[寂滅]를 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이르러 미혹과 번뇌의 소멸을 체험하셨습니다.
그 후 중생들을 위해서 진리의 바퀴[法輪]를 굴리어 대비심(大悲心)으로써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한 후에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도 더욱더 다함 없는 힘으로 자유자재한 진리를 설하고 계십니다."
그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무수한 세계를 비추자 세계안에 있는 온갖 것이 드러났다. 이 세계는 부처님이 연화장의 사자좌에 앉아 시방세계의 무수한 보살들에게 싸여 있는 것과 같았고 또 하나하나의 세계에서도 그와 같았다.
문수보살은 또 다음과 같이 설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는 매우 깊어서 빛깔도 모양도 없습니다. 그 세계는 모든 번뇌를 뛰어넘었으며 모든 아집(我執)을 떠났으며, 때문에 공적(空寂)하며 청정합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넓고 광대무변하여 그 안의 온갖 존재는 서로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는 해탈해있고, 본래가 항상 공적하여 모든 속박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또 문수보살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보살들의 실천에 대해 설법하였다.
"첫째는 인간의 세계나 천신(天神)의 세계에 있어서 추구하는 모든 쾌락을 떠나 항상 커다란 자비심을 행하고 모든 중생을 구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으뜸가는 실천입니다.
둘째는, 깊이 부처님을 믿고 그 마음이 퇴보하지 않도록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마음 속에 지녀야 합니다.
셋째는, 영원히 생사의 바다를 떠나 불법(佛法)의 흐름을 따라 맑고 깨끗한 지혜에 안주해야 합니다.
넷째는, 일상생활 속에서 늘 부처님의 깊은 공덕을 생각하고 낮이나 밤이나 이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과거, 현재, 미래가 무량한 것을 알아 태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구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자기 자신의 실상을 관찰하고 모든 것이 적멸(寂滅)함을 알고 아(我)와 무아(無我)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합니다.
일곱째는, 중생의 마음을 관찰하여 미혹의 망상을 떠나고 진실의 경계를 완성해야 합니다.
여덟째는, 끝없는 세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득하게 하고 모든 진리의 대해(大海)를 남김없이 마시는 초인적인 지혜를 완성해야 합니다.
아홉째는, 모든 부처님 나라 안에 존재하는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째는,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부처님 나라에 있는 한 알의 티끌까지도 하나의 부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자비 광명으로 무수한 세계를 비추시니 그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남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수보살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또 설법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굳게 지키고 행하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않으며, 항상 정진하면서도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장 험난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의 큰 바다를 넘어 '나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남김없이 생사의 바다를 넘게 하리라'고 크게 말씀하십니다.
중생들은 생사의 흐름 속에 헤매면서 애욕의 바다에 잠기고, 무지(無知)와 미망(迷妄)이 열 겹 스무 겹으로 마음을 덮고,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중생은 번뇌가 가르키는 대로 행하며 다섯 가지 욕심[五欲]에 취하고 망상을 일으켜서 영구한 세월 동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세계의 온갖 고뇌를 낱낱이 끊고 해탈하신 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비(大悲)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생사의 근본인 아집을 끊었지만, 중생들은 아직 이러한 아집에 의하여 생사의 세계를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중생을 적멸의 세계로 이끌어들이기 위하여 최고의 진리를 설하십니다. 이것이 대비의 세계입니다.
중생은 고독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탐욕하고 성내며 미망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중생이 항상 이와 같이 번뇌의 불길에 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이 고뇌로부터 중생을 구하리라
서원(誓願)하십니다. 이것이 대비의 세계입니다.
중생은 나고 죽은 윤회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바른 길을 잃고 나쁘고 고통스러운 길에 들어서서 어둠 속에 떨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여 주리라 생각하여 마침내 부처님 스스로가 그 등불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대비의 세계입니다.
생사의 바다는 깊고 또 넓어 끝이 없습니다. 중생은 여기에 빠져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커 다란 배를 만들어 남김없이 중생을 태우고 생사의 바다를 건네 주십니다. 이것이 대비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의심치 않게 하며, 적멸의 세계를 관찰하되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게 하며, 어떠한 근기의 중생과도 동화(同和)하여 적절한 방편으로써 해탈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람[人]과 하늘[天]의 스승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한 생각[一念] 사이에서 관찰하여 보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으며, 현재도 또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따라서 잘 관별하고 그것을 알며 궁극의 모습을 체득하면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힘을 얻어 시방의 모든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것을 잘 참아내는 지혜를 닦고, 깊은 선정(禪定)에 들고, 진실한 가르침을 관찰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가르침을 행하면, 보살은 최고의 깨달음에 빨리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가르침을 묻고 받들어 그 믿는 마음이 물이 가득 찬 것과 같이 항상 움직이지 않아 물러서지 않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갖추고, 모든 사물은 있는[有] 것도 아니고 없는[無]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체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면 보살은 진실하게 부처님을 받들어 모실 수가 있습니다."
제 6장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
문수보살은 첫번째로 각수(覺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마음의 본성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까.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사람이 있고, 사지가 완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구자도 있으며, 용모가 단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세계를 반성하여 보면 업(業)은 마음을 알 수 없고 마음은 업을 알지 못합니다. 감각은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며 결과는 감각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은 감각을 알지 못하며 감각은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인(因)은 연(緣)을 알지 못하며, 연은 인을 알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각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대는 이 문제를 잘 물어주었습니다. 나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설하고자 합니다. 잘 듣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은 자성(自性)을 갖지 아니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다 하여도 체득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라도 서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냇물은 흐르고 흘러서 끝이 없으나 그 물 한 방울, 한 방울은 서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모든 것도 그러합니다.
또 큰 불은 타올라 잠시도 쉬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불꽃들은 서로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혀와 몸과 마음 등은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괴로움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또 사물 그 자체는 항상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나타나고 있는 쪽에서 보면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에도 아무런 자성은 없습니다.
또 바르게 사유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모든 것에 자성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눈은 청정하고 불가사의 합니다. 그러므로 허망이라고도 말하고, 또 허망이 아니라고도 말하며, 진실이라고도 말하며 진실이 아니라고도 말하는 것 등은 모두가 꾸며진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수보살이 두 번째로 재수(財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여래가 중생을 교화하는 경우, 어떠한 까닭으로해서 여래는 중생의 시간, 수명, 일체의 행위, 견해 등에 따라서 교화하는 것입니까."
그때 재수보살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혜가 밝은 사람은 항상 적멸의 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그대에게 설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신체를 안으로부터 관찰하여 보면, 도대체 나의 몸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가. 이와 같이 정확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자아(自我)가 있고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의 상태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아니합니다.
이와 같이 신체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깨닫고, 모든 것으로부터 공(空)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아 다시는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와 정신이 서로 관계하고 있고, 관련을 가지면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은 흡사 타오르고 있는 불의 바퀴와 같아서 어느 것이 앞이고 어느 것이 뒤인지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업은 비유컨대 꿈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 또한 모두가 적멸한 것입니다.
또 모든 세상의 일은 다만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기호에 의하여 판단을 내리는 자는 그 견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또 생멸(生滅)하고 유전(流轉)하는 일체의 세계는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일어나고 순간순간마다 소멸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며, 빠르게 변해가며 공(空)하여 진실한 자기[自我]는 없다고 관찰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떠납니다."
문수보살은 세 번째로 보수(寶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중생의 몸은 모두가 흙,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 진정한 나[自我]라고 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또 모든 사물의 본성은 선(善)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까닭으로 중생에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고 선과 악이 있으며, 모습이 단정한 자와 추악한 자가 있습니다."
그때 보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저마다 행하는 업에 따라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며, 그 행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밝은 거울에 비치고 있는 영상이 어려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습니다.
혹은 식물의 종자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는 것과 같이, 업의 본성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많은 새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업의 본성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지옥에서 받는 괴로움은 밖에서 별도로 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업의 본성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문수보살은 네 번째로 덕수(德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다만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까닭으로 부처님은 무량한 법(法)을 설하고 무량한 소리를 내며, 무량한 몸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또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변(異變)을 무량하게 보여서 무량한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까. 더우기 법성(法性) 안에서 이와 같은 차별을 구한다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덕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불자여, 그대의 질문은 실로 의미가 깊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이 이것을 깨닫는다면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지(大址)의 본성은 하나이면서도 모든 중생을 저마다 안주시키고 있고, 그러면서도 대지 자신은 아무런 분별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또 불[火]의 본성은 하나이면서도 모든 것을 태워 없애지만 불 자신에게는 아무런 분별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큰 바다에는 무수한 강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지만 그 맛에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바람의 본성은 하나이면서도 일체의 것을 날려 보냅니다. 그러나 바람 그 자체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태양은 시방의 모든 것을 비추지만 그 빛에 차별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 또한 차별이 없습니다.
또 하늘의 밝은 달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우러러봅니다. 하지만 달은 어느 한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그러합니다."
다섯 번째로 문수보살은 목수(目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여래의 복전(福田)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중생이 받는 과보는 각기 다릅니까.
중생에게는 모습이 아름다운 자도 있고 추한 자도 있으며, 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고, 지혜가 많은 자가 있는가 하면 적은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평등하여 친하고 친하지 않음의 분별이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때 목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예를 들면, 대지는 하나입니다. 친하고 친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식물의 싹을 트게 하는 것과 같이 복전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같은 물이지만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지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복전도 중생에 의하여 달라집니다.
또 변재천(辯才天)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복전도 또한 중생을 즐겁게 합니다.
또 밝은 거울이 여러 가지 영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복전도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비춥니다."
문수보살은 여섯 번째로 진수(進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이면서도 가르침을 들은 중생은 어찌하여 똑같이 번뇌를 끊을 수가 없습니까." 그때 진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잘 들으시오. 나는 진실한 가르침을 설하고자 합니다. 중생에게는 신속하게 해탈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만약 미혹을 없애고 해탈에 도달하고자 생각한다면 항상 마음을 굳게 갖고 커다란 정진을 일으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젖은 나무에는 불이 잘 피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불법 안에서 게으른 자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한편, 불을 피울 때에도 자주자주 쉬게 되면 불길은 약해지고 이윽고는 꺼져버립니다. 게으른 자도 이와 같습니다.
결국, 게으른 자가 불법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눈을 감고 빛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수보살은 일곱 번째로 법수(法首)보살에게 몰었다.
"불자여, 중생 가운데는 불법을 듣기만 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불법을 들으면서도 탐욕을 일으키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며,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어떠한 까닭입니까."
그때 법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다만 듣기만 하여서는 불법을 체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구도의 진실한 모습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다 해도 입으로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과 같이 다만 듣기만 하는 자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온갖 약을 알고 있는 훌륭한 의사일지라도 스스로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다만 듣기만 하는 자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또 가난한 사람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남의 보물을 세어도 스스로는 반 푼조차도 갖지 못하는 것과 같아 다만 듣기만 하는 자도 그와 같습니다.
또 장님이 그림을 그려서 남에게 보여 준다 해도 스스로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다만 듣기만 하는 자도 그와 같습니다.
도 물 속에 떠다니면서도 물을 마시지 못하고 드디어는 목말라 죽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듣기만 하는 자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문수보살은 여덟 번째로 지수(智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불법 중에서는 지혜를 제일로 삼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까닭으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을 찬탄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법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지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잘 들으십시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은 다만 한 법으로는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래는 중생의 성질을 잘 알아서 그때마다 적절한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탐욕하는 중생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중생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며, 성 잘 내는 중생에게는 인욕(忍辱)을 가르치고, 게으른 중생에게는 정진(精進)을 가르치며, 마음이 혼란하기 쉬운 중생에게는 선정(禪定)을 가르치고,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지혜를 가르치며, 사랑이 없는 중생에게는 자애(慈愛)를 가르치고, 사람을 상해(傷害)하는 중생에게는 자비를 가르치며, 마음이 괴로운 중생에게는 기쁨을 가르치고, 애욕이 강한 중생에게는 버리는 마음[捨]를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실천을 계속해 간다면 이윽고는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홉 번째로 문수보살은 현수(賢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모든 부처님은 다만 일승(一乘)에 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모든 불국토(佛國土)를 관찰하여 보면 사정이 각각 다릅니다. 즉 세계, 중생, 설법(說法), 초월(超越), 수명(壽命), 광명(光明), 신력(神力)등 모든 조건이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불법을 갖추지 않고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현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수보살이여! 불법은 변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한 법[一法]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한 길[一道]에 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몸은 다만 하나의 법신(法身)이며, 또 그 마음이나 지혜도 일심(一心)이며,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설법과 교화도 달라집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평등하게 장엄되어 있지만, 중생들이 쌓아온 업[宿業]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눈에 비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힘은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중생의 숙업이나 과보에 따라서 진실한 세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 모든 보살들은 문수보살을 향하여 물었다.
"불자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저마다 설하였습니다. 아무쪼록 다음에는 그대가 그 깊은 지혜에 의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그 원인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하면 그 세계를 알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래의 깊은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이 광대합니다. 설사 중생이 거기에 들어간다 해도 진실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의 원인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고 있으며, 가령 부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설법하신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할 때에는 중생의 마음이나 지혜에 따라서 불법을 설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설하여도 불법은 다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중생의 능력에 따라서 자유자재하게 설하여 무수한 중생의 세계에 들어가시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항상 맑고 고요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의 세계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림이 없으며 그 세계는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업(業)도 아니고 번뇌고 아니며 적멸(寂滅)도 아닙니다. 또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평등하게 중생의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 안에 있고, 부처님은 단 한 생각[一念]만으로 중생의 마음을 낱낱이 분명하게 압니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설했을 때,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이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숙업과 신체, 능력, 지계(持戒) 등의 각기 다른 상태가 나타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방의 무량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의 차별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제 7장 정행품(淨行品)
그때 지수(智首)보살이 문수보살을 향하여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은 어떻게 하면 청정해지며, 사물[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청정한 몸[身]과 말[口] 뜻[義]의 삼업(三業)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 보살은 어떻게 하면 지혜를 완성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을 가져 구도의 결의를 굳게 할 수가 있습니까.
또 보살의 가장 뛰어난 지혜와, 불가사의(不可思毅), 불가칭(不可稱), 불가설(不可設)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방편의 힘과 선정(禪定)의 힘을 갖출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또 공의 삼매[空三昧]와 모양이 없는 삼매[無相三昧]를 행할 수가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지혜를 완전하게 하는 여섯 가지 수행[六波羅蜜]과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모든 천왕(天王), 용왕(龍王), 귀신왕(鬼神王), 범천왕(梵天王) 등에 의해서 수호되고, 또 공경을 받을 수 있게 됩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중생을 위한 안락의 집이 되고 구호하는 손이 되며, 등불이 되고 교화하는 손이 될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하면 일체 중생의 안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때 문수보살은 지수보살에게 대답하였다.
"불자여, 그대의 물음은 매우 훌륭합니다.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그대는 매우 훌륭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불자여, 만약 보살이 청정하여 사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身]과 말[口]과 뜻[意]의 삼업(三業)을 성취하면 보살은 뛰어난 덕을 얻을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과 마음이 일치할 것이며, 부처님께서 가르친 최고의 깨달음을 스스로 나타낼 수 있으며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분명하게 모든 사물의 실상(實相)에 도달하여 모든 악을 없애고 모든 선을 갖추어, 일체의 모든 사물에 자유자재하게 될 것입니다.
불자여, 보살이 청정하여 사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과 말과 뜻의 삼업을 성취하여 모든 것에 뛰어난 덕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원을 세워야 합니다.
즉 보살이 집에 있을 때에는 집에서의 온갖 고난을 버리고 인연의 공(空)함을 체득해야 합니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양친께서 커다란 안심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처자와 권속이 모였을 때는 원수든 아니든 모두 평등하게 대하며, 애욕의 탐착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다섯 가지 욕망[五慾]을 만났을 때에도 탐욕과 미혹을 버리고 덕이 갖추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음악이나 춤을 감상할 때는 최고의 진리에 접한 기쁨을 얻어 모든 것은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침실에 있을 때에는 애욕을 떠나서 맑은 경지에 나아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을 때에는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진실한 세계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높은 것에 올랐을 때에는 불법의 높은 곳에 오른다고 하는 생각으로서 모든 것을 보아야 합니다.
타인에게 보시할 때에는 모든 집착을 버리고 밝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법회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깨달음을 성취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재난(災難)을 만났을 때는 자유자재하게 마음을 작용하여 그 재난이 마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살이 신심을 일으켜 집을 버릴 때에는 일체의 세상 일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승방(僧房)에 있을 때에는 모든 출가자가 서로 화합하여 마음에 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출가할 때에는 일단 얻은 공덕을 다시는 잃지 않는 경지[不退轉地]를 목표하고 마음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속복(俗服)을 버릴 때에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덕을 닦되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삭발할 때에는 번뇌도 함께 깎아버리고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승복을 입을 때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떠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젖는 기쁨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출가하였을 때에는 부처님과 같이 집을 나와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에는 진실한 길을 체득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였을 때에는 깊이 부처님의 경전을 배워서 큰 바다와 같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받들어 행하는 승단(僧團)에 귀의하였을 때에는 모든 대중을 받들어 화합하게 하여야 합니다.
몸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앉을 때에는 어떠한 망상에도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결가부좌하고 앉았을 때에는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아 깨달음의 경지를 얻어야 합니다.
마음을 조용하게 통일한 상태[三昧]에 들었을 때에는 그것을 철저히 하여 무심한 경지[禪定]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에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보되 장애나 거리가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의복을 입을 때에는 모든 공덕을 입는다는 생각으로 항상 참회하여야 합니다.
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를 적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진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손에 양치질하는 도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었으니 자연히 청정하게 되어야 합니다.
대소변을 볼 때에는 모든 더러움을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버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물로 손을 씻을 때에는 그 깨끗한 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말할 때에는 청정한 가르침을 향하여 해탈을 완성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길을 갈 때에는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밟고 나아가 마음의 장애인 번뇌를 없애야 합니다.
올라가는 길을 보고 있을 때에는 드높은 경지에 올라가 삼계(三界)를 초월하고자 해야 합니다.
내려가는 길을 보았을 때에는 부처님의 법 저 깊숙이 내려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험한 길을 보고서는 인생의 악도(惡道)를 버리고 사견(邪見)으로부터 떠나도록 해야 합니다.
바른 길을 보았을 때에는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 거짓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커다란 나무를 보았을 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분노나 원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높은 산을 보고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향하여 불법의 뿌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가시밭을 보았을 때에는 삼독의 가시를 빼어버리고 상처입은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부드러운 과일을 보았을 때에는 불도(佛道)의 큰 실천을 일으켜 위없는 결과를 거두도록 하여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보았을 때에는 정법(正法)의 흐름을 타고 부처님 나라의 대해(大海)에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물을 보았을 때에는 다함 없는 가르침[法水]을 마시고, 위없는 덕을 갈무리하여야 합니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고서는 먼지와 때를 씻고 맑은 마음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다리를 보았을 때는 불법의 다리를 만들어 쉼 없이 사람들을 깨달음의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게 하여야 합니다.
즐거운 사람을 보았을 때는 청정한 가르침을 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기뻐해야 합니다.
또 굶주린 자를 보았을 때에는 미혹을 떠나는 마음을 일으키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야 하며, 건강한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금강(金剛)과 같이 부서지지 않는 법신(法身)에 이르고, 병든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몸이 본래 공(空)한 것임을 알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야 합니다.
은혜를 갚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항상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의 은덕을 생각하고, 출가한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청정한 불법을 얻어 모든 악을 떠나야 합니다.
고행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몸과 마음을 굳게 갖고 불도에 정진하여야 합니다.
밥을 얻었을 때는 밥을 먹고 얻은 그 힘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뜻을 두고 정진해야 하며 밥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도 모든 악행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절도를 지키고 욕심을 줄이고 그에 집착하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맛없는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모든 것은 허공과 같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삼매에 사무쳐야 합니다.
음식을 삼킬 때에는 선정(禪定)의 기쁨을 삼킨다는 마음을 갖고,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공덕이 몸에 충만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완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래를 보았을 때에는 모두가 부처님 눈을 얻고 여래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여래의 실상을 보았을 때에는 모든 시방을 보더라도 단정하기가 부처님과 같아야 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모든 번거로움을 그치고 마음의 혼란을 떠나야 하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모든 마음을 기울여 시방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제 8장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
문수보살은 불법의 깊은 의미를 체득하고 있는 현수(賢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나는 이미 보살의 청정한 행에 관해서 설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대는 보살의 광대무변한 공덕의 의미를 설하여 주시옵소서."
현수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잘 들으시오. 보살의 공덕은 광대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의 힘에 의하여 그 중 일부의 공덕을 설하고자 합니다. 내가 설하는 것은 마치 큰 바다 속의 한 방울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堤心]을 낸 보살은 오로지 꾸준하게 깨달음을 구하여 동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일념(一念)의 공덕을 여래가 설한다 해도 그 일념의 공덕을 설하여 마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보살이 여러 가지 행을 닦은 공덕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설한다고 하여도 다 설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나는 공덕의 일부를 설하지만 그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품는 것과 같고 또 대지(大地)의 한 티끌과 같습니다.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스님[三寶]에 대한 깊고 청정한 신심을 갖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감각에 따르는 욕망이나 재물을 구하지 않고 세간의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며, 중생의 고뇌를 없게 하여 맹세코 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배워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생각하고 모든 지혜를 닦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깊고 청정한 신심은 견고하여 부서지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정법과 스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신심은 불도의 근본으로서 모든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그것은 모든 선법(善法)을 증진하여 모든 의혹을 없애고 위없는 불도(佛道)를 열어 줍니다.
신심은 때가 없고 흐리지 않으며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근신하는 근본입니다.
신심은 최고의 보배창고[寶庫]이며, 청정한 손이 되어 온갖 행을 받아들입니다.
신심은 모든 집착을 떠나고 깊고 오묘한 불법을 깨달으며 모든 선을 행하고 드디어는 반드시 부처님의 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신심의 힘은 견고하여 부서지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악을 영구히 제거하고 일체의 마경(魔境)을 넘어서 위없는 해탈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진실한 불법을 믿는다면 항상 그것을 듣고자 원하며 권태를 느끼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권태를 느끼는 일이 없다면 마침내는 불가사의한 불법을 깨달을 것입니다.
만약 신심이 견고하여 동요하는 일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함께 밝고 모든 것이 청정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청정하게 되면 모든 악우(惡友)를 떠나서 선우(善友)와 가까이 지낼 것입니다.
선우와 가까이 하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을 닦을 것입니다. 공덕을 닦으면 온갖 인과(因果)를 배우고 그 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 도리를 깨달으면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지켜주며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菩堤心]을 일으킬 것입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태어나 일체의 집착을 떠날 것입니다.
일체의 집착을 떠날 수 있으면 깊고 청정한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보살행을 실천하고 대승(大乘)의 법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대승의 법을 갖추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염불삼매(念佛三昧)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염불삼매를 체득하면 항상 시방의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의 세계에 항상 안주(安住)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세계에 안주하게 되면 스스로 불법을 체득하게 되어 한없는 변재(辯才)를 갖고 무량한 불법을 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량한 불법을 설할 수 있으면 모든 중생을 해탈시킬 수가 있고 대비심(大悲心)은 확립될 것입니다.
대비심이 확립되면 깊고 깊은 불법을 기뻐하고 교만심과 게으름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심과 게으름을 떠날 수 있으면 고뇌의 생사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근심하는 일이 없고 노력하고 정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정진할 수가 있으면 온갖 신통을 얻고 중생의 생활을 알 것입니다.
중생의 생활을 알면 중생에 대하여 법을 설하고 재물을 보시하며 사랑스러운 말로써 중생에게 기쁨을 주며 선행으로써 이끌며 함께 활동할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베풀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베풀게 되면 스스로는 위없는 진리에 안주하고 악마로 인하여 정복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악마로 인하여 정복되는 일이 없으면 부동지(不動地)에 도달하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하면 이윽고 성불하는 것이 약속되고 모든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깨닫고 모든 부처님이 항상 지켜줄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지키게 되면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이 몸에 넘치고 그 모습은 광명으로 빛날 것입니다.
광명을 받아 빛나면 그 광명으로부터 무량한 연꽃이 나타나 그 연꽃 하나하나의 꽃잎에 무량한 부처님이 나타나고 중생을 교화하여 해탈하게 할 것입니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무량한 자재력으로 적절한 곳에 모습을 나타내고, 일념 사이에 모든 중생의 마음을 낱낱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념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알면 고뇌의 생사는 영원히 종식되고 모든 번뇌는 적멸하며 법신의 지혜가 갖추어져 모든 사물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깨달으면 모든 자재력을 낱낱이 실현하여 뛰어난 해탈에 이르고 시방의 모든 보처(補處)로부터 성불의 약속을 받을 수 있으며, 감로의 법수(法水)가 이마에 부어질 것입니다.
감로의 법수가 이마에 부어지면 법신은 허공에 충만하고 시방세계에 안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보살의 큰 실천에 의하여 정법은 항상 안주하며 영원히 불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은 대해와 같이 광대하고 또 금강과 같이 견고합니다.
또 보살은 일념 사이에 시방세계에 나타나 시방세계에서 생각생각마다 불도를 실현하여 열반(涅槃)에 듭니다.
혹은 남녀의 모습으로, 혹은 천신이나 인간, 용(龍), 신(神)의 모습에 의하여 무량한 활동을 하고, 온갖 음성을 내어 불법을 설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이 시방세계에 나타나 가득 차는 것은 해인삼매(海印三昧)에 의한 것입니다.
또 보살은 일체의 모든 보살을 공양하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스스로 발한 광명은 불가사의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무량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에 자유자재하여 불가사의한 것은 화엄삼매(華嚴三昧)의 힘 때문입니다.
또 보살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자 생각하였을 때 무량한 삼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온갖 춤과 음악과 노래와 시(詩)로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 음성이 시방세계에 충만하여도 이것은 모두가 보살의 손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삼매에 들어서 광명을 발하고 이 광명에 의하여 중생을 해탈시킵니다.
예를 들면 '선현(善現)'이라는 광명은 중생에게 한없이 좋은 과보를 받고 드디어 위없는 진리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 빛에 의하여 불, 법, 승의 삼보가 나타나고 탑과 불상이 세워집니다.
또 '제애(除愛)'라고 하는 광명은 모든 중생을 눈뜨게 하고, 온갖 애욕을 버리고 해탈의 감로수를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해탈의 감로의 비가 모든 중생 위에 뿌려질 것입니다.
또 '환희'라고 하는 광명 역시 모든 중생을 눈뜨게 하고, 기쁨에 가득 차서 깨달음을 구하게 하며, 위없는 진리의 보배를 원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대자비상이 건립되고 온갖 공덕은 찬탄을 받고 그로 인하여 환희의 광명은 완성됩니다.
또 '애락(愛樂)'이라고 하는 광명 역시 모든 중생을 눈뜨게 하고, 마음은 항상 모든 여래와 위없는 불법과 청정한 승단(僧團)을 기쁘게 합니다.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 앞에 나와서 위없는 불법을 이해하게 되며 중생을 교화하며 깨달음을 구하는 방편을 개발하며 그로 인하여 애락의 광명이 완성됩니다.
또 '혜등(慧燈)'이라고 하는 광명 역시 모든 중생을 눈뜨게 하는데, 모든 사물은 공적(空寂)하여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으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해탈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아지랑이나 물에 비친 달 그림자, 또는 꼭두각시나 꿈, 혹은 거울 속의 영상과 같이 모든 사물은 실재가 없으며 모두가 공적함을 알게 됩니다. 이 때문에 혜등의 광명은 완성됩니다.
또 '무간'이라고 하는 광명은 모든 중생으로부터 탐심을 없애고 재보(財寶)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여, 모든 집착을 떠나게 합니다. 억제할 수 없는 탐욕을 잘 통제하고 재보는 꿈과 같고 뜬구름과 같다고 깨닫게 하여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보시하게 합니다. 이로 인하여 무간의 광명은 완성됩니다.
또 '인장엄(忍莊嚴)'이라고 하는 광명은 분노한 사람을 눈뜨게 하여 분노를 버리고 항상 온화한 마음으로 인욕하는 부처님의 법을 원하게 합니다. 성품이 포악하여 참지 못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참게 하고, 불도를 구하며, 항상 인욕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칭찬하게 하여, 그로 인하여 인장엄의 광명은 완성됩니다.
또 '적정(寂靜)'이라고 하는 광명은 마음이 혼란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을 떠나서 깊고 깊은 삼매에 안주하게 합니다. 악인이나 착하지 못한 일에서 멀어지게 하고, 거짓과 옳지 않은 말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좌선하는 것을 기뻐하게 하며, 그 때문에 적정의 광명이 완성됩니다.
또 '견불(見佛)'이라고 하는 광명은 죽음에 이른 사람을 눈뜨게 하여, 염불삼매의 힘으로 반드시 부처님을 보게 하며, 목숨이 다할 때에는 부처님 앞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 임종을 보고서는 염불을 권하고 불상을 예배하게 하며, 그 때문에 견불의 광명은 완성됩니다.
또 '법청정(法淸淨)'이라고 하는 광명이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털구멍 안에서 무량한 모든 부처님은 저마다 불가사의한 불법을 설하고 있으며, 중생을 환희하게 합니다. 즉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은 실체가 아니며, 여래의 법신 또한 무상한 신체가 아닌 부동(不動)으로서 영원하며 그 영원함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설합니다. 이 때문에 법청정의 광명이 완성됩니다.
이와 같은 광명은 저마다 무량하고 무변하며 또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낱낱이 보살의 털구멍에서 나왔고 하나하나의 털구멍에서 나온 광명은 무변무량하며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털구멍에서 나온 광명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보살의 삼매에 있어서의 자재력 때문입니다.
만약 무량한 공덕을 닦고, 무수한 부처님을 공양하고, 마음이 항상 위없는 불도를 구하는 자는 이와 같은 광명을 만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님이 해를 볼 수 없는 것은 해가 지상에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눈을 가진 자만이 모든 것을 보고 일에 따라서 성과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광명도 그와 같아서 보는 자도 있고 보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릇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하나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능히 볼 수 있습니다.
또 보살은 시방의 세계에 인연이 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오고 가며 출입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때로는 삼매에 들고, 때로는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혹은 동방에서 삼매에 들고 서방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며, 혹은 서방에서 삼매에 들고 동방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삼매에 출입하여 시방에 충만하는 것은 보살에게 있는 삼매의 자재력 때문입니다.
시각(視覺)으로써 삼매에 들고 색채(色彩)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며, 색채의 불가사의함을 봅니다. 색채로써 삼매에 들고, 시각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도 마음은 혼란하지 않습니다. 시각은 생하는 일도 없고, 자성도 없으며, 오직 적멸할 뿐이라고 설합니다.
청각(聽覺)으로써 삼매에 들고 음성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며, 온갖 음성을 듣고 판별합니다. 음성으로써 삼매에 들고 청각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도 마음은 혼란하지 않습니다. 청각은 생하는 일도 없으며 자성도 없고, 오직 적멸할 뿐이라고 설합니다.
이와 같이 취각, 미각, 촉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써 삼매에 들고 대상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며, 온갖 대상을 식별합니다. 대상으로써 삼매에 들고 마음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도 마음은 생하는 일도 없고 자성(自性)도 없으며 오직 적멸하다고 설합니다.
소년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장년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서며, 장년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노년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노년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선한 여인으로써 삼매에서 일어서며, 선한 여인으로서 삼매에 들고 선한 남자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선한 남자로서 삼매에 들고 비구니의 몸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비구니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비구의 몸을 가지고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비구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성문(聲聞)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서며, 성문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연각(緣覺)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연각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여래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서며, 여래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모든 하늘[天神]의 몸으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모든 하늘의 몸으로 삼매에 들고 모든 귀신의 몸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서며, 모든 귀신의 몸으로서 삼매에 들고 하나의 털구멍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하나의 털구멍으로서 삼매에 들고 모든 털구멍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서며, 모든 털구멍으로서 삼매에 들고, 하나의 털끝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하나의 털끝으로서 삼매에 들고, 모든 털끝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서며, 모든 털끝으로서 삼매에 들고, 하나의 작은 티끌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하나의 작은 티끌로서 삼매에 들고, 모든 작은 티끌로서 삼매에서 일어서며 모든 작은 티끌로서 삼매에 들고, 모든 부처님의 광명으로서 삼매에서 일어섭니다.
모든 부처님의 광명으로서 삼매에 들고, 큰 바다의 물로서 삼매에서 일어서며, 큰 바다의 물로서 삼매에 들고 허공으로서 삼매로부터 일어섭니다.
이같이 무량한 공덕이 있는 사람은 그 삼매가 자유자재하여 불가사의합니다. 설사 시방의 모든 여래가 그 삼매를 설한다 하여도 모두 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이를 찬탄하며 중생의 과거는 불가사의하다고 합니다.
그때 자연히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체의 오욕은 모두가 무상하다. 허망하고 물거품과 같으며 꼭두각시나 아지랑이와 같으며 물 속에 뜬 달과 같고 뜬 구름과 같다.
오욕은 모든 공덕을 장애하는 것이다. 그대는 항상 진실하고 청정한 보살행을 구하라.'
모든 세계의 중생 가운데 성문(聲聞)의 길을 바라고 구하고자 하는 자는 적으며, 연각(緣覺)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보다 적으며, 대승(大乘)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더욱 적습니다.
그러나 대승을 구하는 것은 또 쉬우나 대승의 법을 믿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이 법을 잘 수지(受持)하고 바르게 기억하며 가르침 그대로 행하고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머리에 이고 일 겁(一劫)사이를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대승의 법을 믿는 것은 오히려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세계의 중생이 일 겁 동안 공양한다 해도 그 공덕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승의 법을 믿는 공덕은 보다 뛰어납니다.
손바닥 안에 열 개의 부처님 나라를 갖고 일 겁 사이 허공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승법을 믿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열 개의 부처님 나라에 사는 중생에게 일 겁 동안을 공양한다 해도 그 공덕은 그다지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승의 법을 믿는 공덕은 보다 뒤어납니다. 하물며 이 경전을 수지하고 있는 공덕은 더욱더 뛰어날 것입니다."
현수보살이 이 장(章)을 설하여 마쳤을 때 시방의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모든 악마의 궁전은 흡사 칠흑과 같이 어두웠으나 부처님의 광명은 시방을 두루 비추어 모든 악도를 낱낱이 제거하였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현수보살 앞에 나타나 저마다 오른손을 뻗쳐서 그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때문에 보살의 자비는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된 빛을 발했다. 모든 여래는 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진 다음에 칭찬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
"착하고 착하도다. 진실한 불자여, 그대는 대승의 법을 분명하게 설하여 마치었다. 나는 그대와 함께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리라."
제 9장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
세존께서는 위신력으로써 이 깨달음의 자리를 떠나서 수미산(須彌山)의 정상(頂上)에 올라 도리천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으로 향하셨다.
그때 제석천은 저 멀리로부터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많은 보배를 뿌린 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또 보배로 된 자리를 몇 겹으로 폈다. 그리고 제석천은 부처님 앞에 합장예배하고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무쪼록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궁전에 머물러 주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이 원을 받아들여 궁전으로 올라갔다. 그때 제석천의 궁전에서 흘러 나오는 무량한 음악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인하여 조용해졌다. 제석천은 과거세에 부처님을 모시고 진리를 지키는 구도자의 고행을 닦던 일을 생각해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섭불(迦葉佛)은 대자비를 갖추어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은 전에 여기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 땅은 보다 더 축복되었습니다.
구나함모니불(苟那含牟尼佛)의 지혜는 장애가 없고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셨습니다. 때문에 이 땅은 보다 더 축복되고 있습니다.
구류손불(拘留孫佛)의 몸은 흡사 황금의 산과 같고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 땅은 보다 축복되고 있습니다.
비사부불(毘舍浮佛)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을 떠나서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은 보다 더 축복되고 있습니다.
시기불(尸棄佛)은 항상 적연(寂然)하고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신 일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은 더 축복되고 있습니다.
비바시불(毘婆尸佛)은 흡사 보름달과 같으며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땅은 보다 더 축복되고 있습니다.
연등불(燃燈佛)은 세계를 밝게 비추며 복덕이 원만합니다. 그 부처님도 전에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은 보다 더 축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석천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십만의 제석천도 또한 저마다 전에 수행하였던 곳에 있는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사자좌에 올라 결가부좌하였다. 그러자 궁전은 곧 순식간에 넓혀지고 도리천도 같은 넓이가 되었다. 십만의 궁전도 또한 그와 같이 넓혀졌다.
제 10장 보살운집묘승전상설게품(菩薩雲集妙勝殿上說偈品)
그때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보살들은 저마다 수많은 보살들을 이끌고 부처님을 찾아와 합장하고 예배하였다. 이 세계의 정상 수미산 위에는 보살들이 운집하여 흡사 시방세계와 같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두 발의 발가락에서 아름답고 무수한 광명을 발하여 시방세계의 궁전을 비추었다. 그리하여 거기에 모인 보살들의 광명 속에 떠올랐다.
그때 법혜(法慧)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게송(偈頌)을 읊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의 묘승전(竗勝殿)에 나타나셨습니다. 부처님을 받드는 이 무수한 보살들은 시방으로부터 찾아와 결가부좌하였습니다."
그리고 법혜보살은 대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모든 보살들이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합니다. 여래의 위신력에 의하여 모든 세계, 모든 사람 앞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께서 제석천의 묘승전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시방세계의 묘승전도 또한 같습니다. 이는 한결같이 여래의 자재력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세계 안에서 뜻을 세우고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자는 먼저 청정한 서원을 일으켜 보살행을 닦아야 합니다.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을 수행하고, 가르침을 펴는 데에도 장애가 없으며, 시방을 비추어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제거하고 있으니 그 힘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일체혜(一切慧)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항상 부처님을 뵈올 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바른 가르침 안에서도 아직도 진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망상에 얽매이고 생사에 윤회하며 마음의 눈은 감겨서 부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모든 사물을 관찰하지만 아직도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생멸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 관념에 얽매여 있습니다.
만약 일체의 사물은 생하는 일이 없고 멸하는 일도 없음을 깨달을 수가 있으면 모든 부처님은 항상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본래가 집착도 없고, 변하지 않는 주체[我見]가 있는 것도 아니며, 공적(空寂)하여 진실 그 자체까지도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본래 공하여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을 헤아려 알 수가 없다고 깨닫는 자는 어떠한 번뇌 속에 있어서도 그 마음이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공덕혜(功德慧)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시방세게를 남김없이 관찰한 후 게송을 읊었다.
"모든 것은 꼭두각시와 같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집착하여 항상 생사에 윤회하고 있습니다.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여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도리에 어긋난 견해로 인하여 여러 가지 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공함을 보지 못하고 항상 무량한 고뇌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정한 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체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눈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실한 부처님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을 보고서 자기의 마음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모든 것의 진실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실로 이 진실한 가르침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다."
또한 선혜(善慧)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게송을 읊었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한량없는 부처님들은 해심(害心)을 떠나 스스로 생사를 넘고, 해탈하여 중생들도 눈을 뜨게 합니다.
세간의 모든 모습은 모두가 공하여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모든 것에는 그 자체의 본성은 없으며, 이 본성이 없는 것으로 성품을 삼아 그 성질이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만약 이러한 모양을 설한다 하여도 설하여 다 마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 있는 자는 이것을 다함이 없다고 설하지만, 그것 또한 다 설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의 본성이 허공과 같아 다함이 없기 때문에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진혜(眞慧)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어 시방세계를 납김없이 관찰하고 게송을 읊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모든 고뇌를 받고 생사 속에 유전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부처님은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과거, 미래의 부처님도 또한 그러합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차별을 초월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 성품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모든 것의 깊은 뜻을 관찰하면 무량한 부처님의 영원불멸한 진실의 모습 그 자체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알며,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지 아니하다고 아는 이것이 최후의 가장 뛰어난 깨달음이며,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으면서도 한 가지의 법도 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에 의하여 많음을 알고, 많음에 의하여 하나를 압니다. 또 모든 것은 의지하는 곳이 없이 다만 인연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활동의 주체도, 활동 그 자체도 함께 얻는 바가 없으며, 이것을 구하여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 얻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이 의지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의지하는 바가 따로 없고 깨달은 이에게는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많은 보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게송을 읊었다.
제 11장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
그때 법혜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보살의 무량한 방편의 삼매에 들었다. 법혜보살이 삼매에 들자,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 나라와 그 밖의 무수한 부처님들이 삼매의 힘으로 나타났다. 이 부처님들의 이름은 모두가 법혜(法慧)였다.
그때 모든 부처님은 법혜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는 능히 보살의 무량한 방편의 삼매에 들었도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 삼매에 든 것은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이 그대에게 신통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 일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서원의 힘과 선근력(善根力)에 의한 것이다. 또 그대로 하여금 넓은 가르침을 설하게 하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가르침의 지혜를 키우고 진리의 세계를 열며, 중생의 세계를 분별하게 하고 장애를 없게 하여 장애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남자여, 참으로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오묘한 진리[法]을 설하여야 한다."
그때 모든 부처님은 저마다 오른쪽 팔을 뻗쳐 법혜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법혜보살은 삼매로부터 일어나 모든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본성은 광대하고 깊어 흡사 허공과 같습니다. 일체의 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의 본성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십주(十住)의 행(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십주(十住)라고 합니까. 그것은 초발심주(初發心住), 치지주(治地住), 수행주(修行住), 생귀주(生貴住),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 정심주(正心住), 불퇴주(不退住), 동진주(童眞住), 법왕자주(法王子住), 관정주(灌頂住)를 말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이 머무는 열 가지 장소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첫째 보살이 머무는 초발심주(初發心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부처님의 위덕을 잘 드러내는 원만한 상호를 지니신 부처님을 보며, 혹은 부처님의 신통을 보고, 설법을 들으며, 또 일체 중생의 무량한 고통을 보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되 결코 퇴보하지 않습니다.
이 보살은 초발심에 의하여 열 가지 힘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을 분별하는 지혜이며, 업보로 인하여 주어진 생의 번뇌와 청정을 아는 지혜이며, 과거의 생애를 아는 지혜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를 볼 수 있는 지혜이며, 모든 번뇌와 그 남은 악업이 없어지는 것을 아는 지혜 등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이 보살들은 열 가지 덕목을 배워야 합니다.
즉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모든 보살을 찬탄하며, 중생의 마음을 지키며, 현명한 자를 가까이하며,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공덕을 닦으며, 모든 부처님의 앞에 태어난 것을 찬탄하며, 방편에 의하여 삼매를 익히며, 생사의 윤회를 떠나기를 바라며, 괴로움에 젖은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귀의하는 곳이 되도록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보다 더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위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성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리를 들을 수 있으면 스스로 이것을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보다 더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위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성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리를 들을 수 있으면 스스로 이것을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두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치지주(治址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일체의 중생에 대하여 열 가지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 열 가지 마음이란 즉, 대비심(大悲心)과 대자심(大慈心), 안락심(安樂心), 안주심(安住心), 연민심(憐愍心), 섭수심(攝受心), 수호심(受護心), 동기심(同己心), 사심(師心), 여래심(如來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이 보살들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자주 가르침을 듣기를 원하며, 탐욕을 떠나 삼매를 닦으며, 선지식을 가까이하여야 합니다. 또 그 가르침에 따라서 말할 때에는 적절한 때를 선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으며, 진리의 깊은 뜻을 깨닫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요달하여 진리 그대로를 행하며, 마음의 어리석음을 떠나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 안주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하여야만 일체 중생에 대하여 대자비를 증진하고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들을 수 있는 불법이 있다면 스스로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세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수행주(修行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모든 존재를 관찰하는 열 가지 길을 닦습니다. 즉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며, 괴로움[苦]이며, 공(空)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체는 없다는[無我] 것과 모든 존재는 즐거워할 것이 아니며, 모이고 흩어지는 일도 없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물은 허망하고, 거기에는 견고함이 없다고 관찰합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모든 중생의 세계, 진리의 세계, 땅[址]의 세계, 물[水], 불[火], 바람[風]의 세계, 욕망의 세계, 형상이 있는 세계, 형상이 없는 세계를 알도록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하여야만 보살은 모든 사물에 대해서 맑고 밝은 지혜를 증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들을 수 있는 진리가 있으면 스스로 이를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네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생귀주(生貴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거룩한 가르침 안에서 태어나 열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즉 부처님을 믿고, 진리를 실현하며, 선정(禪定)에 들고, 또 중생과 부처님의 나라와 세계와 모든 업과 과보와 생사의 열반 등을 아는 것입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과거, 현재, 미래의 가르침을 수행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진리를 몸에 갖추고,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것을 관찰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밝게 요달하고 마음의 평등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는 진리가 있으면 스스로 이를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해서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불자들이여, 다섯 번째로 보살의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살은 열 가지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야 합니다.
즉, 보살이 수행하는 공덕으로써 일체 중생을 구호하고, 일체 중생에게 연민하며, 일체 중생의 인격을 완성하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떠나게 하고, 일체 중생을 생사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을 기쁘게 하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극복하게 하며, 모두가 열반을 얻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중생은 무변하고 무량하며, 무수하고 불가사의하며, 여러 가지 형태를 갖고 있으며, 무상하고 자재하지 못하며, 진실하지 못하며, 의지할 곳이 없고, 자성(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자기의 마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는 불법이 있으면 이를 듣고 이해하고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여섯 번째로 보살의 바른 믿음[正心住]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살은 열 가지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결정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決定心]을 얻습니다.
만약 부처님을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진리를 찬탄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보살을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보살의 행하는 진리를 찬탄하고 비방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생의 수는 유한하거나 혹은 무한하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생은 더럽혀져 있다든가 혹은 더럽혀져 있지 않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생은 구원하기 쉽다. 혹은 구원하기 어렵다고 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유한하다거나 혹은 무한하다고 하여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계는 생성(生成)되어 있거나 혹은 파괴되어가고 있다고 하여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계는 실재한다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마음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안정되어 있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습이 없는 것이며, 본성이 없고, 수행할 수도 없으며, 실체가 아니며, 진실하지도 않고, 자성도 없으며, 흡사 허공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일단 얻은 공덕을 다시는 잃지 않는 경지[不退轉]에서 불생불멸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은 평온함[無生法忍]을 체득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불법은 스스로 이를 듣고 이해할 것이지 결코 타인을 의지하여 깨닫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자들이여, 일곱 번째로, 깨달음을 확약받은 보살이 머무는 경지[不退住]는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열 가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그 마음은 견고하여 흔들리지를 않습니다.
즉, 부처님은 존재한다고 하든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진리가 있다고 하든 혹은 없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의 행(行)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의 행이 미혹을 초월한다고 하든 초월하지 않는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과거의 부처님과 미래의 부처님과 현재의 부처님이 각각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여신 부처님의 지혜가 다함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하든 동일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습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하나[一]는 많은 것[多]이며, 많은 것[多]은 하나[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非存在)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사물에 있어서 방편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는 불법이 있으면 스스로 이를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여덟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동진주(童眞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살은 열 가지 사물에 있어서 마음을 안정할 수 있습니다. 즉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청정하게 되고, 뜻대로 생을 받으며, 중생의 마음과 바라는 것과 본성과 업을 알고,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알며, 초인적인 힘은 자유자재하여 장애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알고, 관찰하고, 진동(震動)하며, 지속하고, 또 모든 부처님의 나라와 그 밖의 모든 세계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는 진리를 문답하고,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온갖 모습을 나타내며, 무량한 음성을 이해하고 한 생각 안에 무수한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익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여러 가지 방편에 의하여 모든 법(法)을 완성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듣고 이해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아홉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열 가지 사물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생의 나라들, 모든 번뇌,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 헤아릴 수 없는 진리, 방편, 모든 예의와 작법(作法), 모든 세계의 실정,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흐름, 세간의 도리와 궁극의 진리 등입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개의 덕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법왕(法王)이 머무는 곳과 법왕의 작법, 법왕이 있는 곳에 안주하는 것, 법왕이 있는 곳에 절묘히 들어가는 것, 법왕이 있는 곳을 분별하는 것, 법왕의 진리를 오래도록 지속하는 것, 법왕의 진리를 칭찬하는 것, 법왕이 완전하게 진리를 실현하는 것, 두려워하지 않는 법왕의 진리, 집착을 떠난 법왕의 진리 등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사물에 있어서 장애를 받지 않는 지혜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면 스스로 이를 이해하고 결코 타인을 의지해서 깨닫지 않습니다.
불자들이여, 열 번째로 보살이 머무는 관정주(觀頂住)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열 가지 지혜를 완성합니다. 즉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진동하고, 비추며, 지속하고, 청정하게 맑히고 또한 그 세계에 들며, 또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마음과 행위와 감관의 작용을 알고 온갖 방편에 의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의 실체는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그가 선정에 드는 것이나, 초인적인 힘이 자유자재한 것이나,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혜와 모든 부처님의 모든 나라를 밝히는 지혜와, 그의 마음을 경계 등을 낱낱이 알 수가 없습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은 열 가지 지혜를 익혀야 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혜, 최고의 깨달음을 여는 부처님의 지혜, 진리의 세계는 장애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지혜, 진리의 세계는 무량무변이라고 하는 지혜, 모든 세계를 비추고 지속하며 충실하게 하는 지혜, 모든 중생을 분별하는 지혜, 최고의 깨달음을 여는 무량무변한 부처님의 지혜 등을 익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종류의 지혜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을 수 있으면 스스로 이를 듣고 이해하여야 하며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여 깨닫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시방의 무량한 부처님 나라는 온갖 모양으로 진동하고 하늘의 꽃과 꽃다발과 하늘옷이 비오듯이 뿌려지고 하늘의 음악은 스스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제 12장 범행품(梵行品)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청정한 범행(梵行)을 실천하게 되며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법혜보살이 정념천자에게 답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身業]과 말과 말의 업[語業]과 생각으로 갖는 업[意業]과,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단과 계율입니다.
그러므로 마당히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 합니다.
첫째, 만일 몸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선하지 않은 것이며, 진실하지 않으며, 탁한 것이며, 냄새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이며, 싫은 것이며, 어기는 것이며, 잡되고 물든 것이며, 송장이며 벌레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둘째, 만일 몸의 업[身業]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가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왼쪽으로 돌아보는 것, 오른쪽으로 돌아보는 것, 구부리는 것, 펴는 것, 숙이는 것, 우러르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셋째, 만일 말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음성이며, 말하는 것이며, 혀의 움직임이며, 이와 입술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넷째, 만일 말의 업[語業]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문안(問安)하고, 약설(略說)하고, 광설(廣說)하고, 비유로 말하고, 직설(直說)하고, 칭찬하고, 헐뜯고, 방편으로 말하고, 세속따라 말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다섯째, 만일 뜻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깨달음이며, 관찰이며, 분별이며, 기억함이며, 생각함이며, 요술이며, 꿈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여섯째, 만일 뜻의 업[意業]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추위이며, 더위이며, 주림이며, 목마름이며, 괴로움이며, 즐거움이며, 근심이며, 기쁨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일곱째, 만일 부처가 범행이라면 색온(色蘊)이 범행인가, 수온(受蘊)이 범행인가, 상온(想蘊)이 범행인가, 행온(行蘊)이 범행인가, 식온(識蘊)이 범행인가, 많은 것이 범행인가, 팔십종호(八十鍾好)와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범행인가, 신통이 범행인가, 과보가 범행인가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여덟째, 만일 부처님의 법이 범행이라면 적멸이 범행인가, 열반이 범행인가, 생기지 않음이 범행인가, 일어나지 않음이 범행인가, 말할 수 없음이 범행인가, 분별 없음이 범행인가, 행할 바 없음이 범행인가, 순종치 않음이 범행인가, 얻을 바 없음이 범행인가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아홉째, 만일 승(僧)이 범행이라면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 합니다.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수행이 범행인가, 또 세 가지 지혜[三明]와 여섯 가지 초인적인 능력[六神通]을 체득함이 범행인가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열째, 만일 계율이 범행이라면 계단(戒壇)이 계율인가, 청정한 계율이 범행인가, 계사(戒師)가 주는 계가 범행인가, 머리 깍은 것이 범행인가, 가사 입는 것이 범행인가, 걸식함이 범행인가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보살은 열 가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또한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고요하며 업을 짓는 주체도 없고 과보를 받는 주체도 없으며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법이 범행인가. 범행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누가 행하는 것이고, 자체는 무엇이며, 누구로 말미암아 지어졌는가. 이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색인지 색이 아닌지, 감각(受)인지 감각이 아닌지, 상(想)인지 상이 아닌지, 행(行)인지 행이 아닌지, 식(識)인지 식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것은 얻을 수 없는 까닭이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한 까닭이며, 뜻에 집착이 없는 까닭이며, 마음에 장애가 없는 까닭이며, 행할 바가 둘이 아닌 까닭이며, 방편이 자재한 까닭이며, 모양 없는 법을 받아들이는 까닭이며, 모양 없는 법을 관찰하는 까닭이며,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까닭이며, 온갖 부처님 법을 갖춘 까닭에 이것을 보살의 청정한 범행이라고 이름합니다.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열 가지 법입니까.
이른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아는 지혜, 지난 세상, 지금 세상, 오는 세상의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 모든 근기의 뛰어남과 저열함을 아는 지혜, 가지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 가지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 온갖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는 지혜, 천안통(天眼通)의 걸림 없는 지혜, 숙명통(宿命通)의 걸림 없는 지혜, 악업으로 인해 남은 습관을 영원히 끊는 지혜이니 여래의 열 가지 힘을 낱낱이 관찰하며 낱낱이 힘써 한량없는 뜻이 있는 것을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들은 뒤에는 크게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니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아니하며, 위없는 업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아니하며, 경계가 환상과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觀行)함으로 더불어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며, 온갖 부처님의 법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며, 처음 발심할 때에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얻을 것이며,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성품임을 알 것이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남에게 의지하여 깨닫지 아니할 것입니다."
제 13장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그때 제석천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초발심의 보살은 얼마만한 공덕을 완성하고 있습니까."
법혜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그 도리는 심원하여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고 또한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설하기도 어렵고 판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그대에게 설하고자 합니다.
불자여, 예를 들면 어던 사람이 동방의 무수한 세계의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고 그 뒤에 오계(五戒)를 행한다고 합시다. 또 동방의 세계에서와 같이 사방팔방, 시방의 세계의 중생에게도 그와 같이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한다면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제석천이 말했다.
"불자여, 모든 여래 이외에는 이 사람의 공덕과 비교될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이 제석천을 향하여 말했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이 아무리 많아도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비유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백천분의 일, 억분, 백억분, 천억분 내지 헤아릴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공덕은 다함이 없고, 설할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불자여, 또 어느 사람이 시방의 무수한 세계의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고 그 뒤에 십선(十善)을 행한다고 합시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중생에게 혜택을 베풀고자 하는 자비심으로 물질을 초월한 경계에 안정하도록 하며, 한 번 다시 태어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경계[一來]에 이르도록 하고, 미혹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계[不還]와 아라한(阿羅漢)의 경계에 이르도록 하며, 최후에는 연각(緣覺)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합니까."
제석천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 이외에는 이 사람의 공덕을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은 제석천을 향하여 말하였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지나지 않습니다.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설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불자여,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은 시방세계의 무수한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무수한 세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오계(五戒)와 십선(十善), 사선(四嬋),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색정(四無色定),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 연각(緣覺) 등의 길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보살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을 일으켰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모든 세계는 스스로 청정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모든 중생을 구하고 깨달음을 열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의 번뇌와 그 오염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 마음의 움직임을 알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태어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또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평등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또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 순간에 무량한 세계를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신통력을 가지고 그에 필적할 만한 긴 시간 동안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세계의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또 두 번째 사람이 앞 사람의 뒤를 이어서 다시 긴 시간동안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역시 세계의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제 삼, 제 사, 내지 제 십의 사람이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마찬가지로 그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또 이 동방의 경우와 같이 시방세계에 있어서도 모두 합쳐서 백 명의 사람이 저마다의 방향을 향하여 나아갈 때, 설사 시방의 세계의 끝에 이를 수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여도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의 양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을 한 보살은 한정된 세계의 중생만을 위하여 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방의 무변한 세계의 실정을 알고, 그 세계의 일체의 중생을 구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 작은 세계는 곧 커다란 세계라고 알고, 커다란 세계는 곧 작은 세계임을 알며, 넓은 세계는 곧 좁은 세계임을 알고, 좁은 세계는 곧 넓은 세계임을 알며, 하나의 세계는 곧 무량한 세계임을 알고, 무량한 세계는 곧 하나의 세계임을 알며, 무량한 세계는 곧 하나의 세계에 드는 것임을 알고, 하나의 세계는 곧 무량한 세계에 드는 것임을 압니다.
또 더럽혀진 세계는 곧 깨끗한 세계임을 알고, 깨끗한 세계는 곧 더럽혀진 세계임을 알며, 하나의 털구멍 속에 일체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일체의 세계 속에서 일체의 털구멍의 성질을 알며, 하나의 세계로부터 일체의 세계가 생하는 것을 알고, 일체의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음을 압니다. 또 일념 사이에 일체의 세계를 낱낱이 알고자 하기 때문에 보살은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블자여, 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신통력을 가지고는 한 순간에 무량한 세계에 사는 모든 중생의 소망을 알 수 있지만, 사람이 아득한 시간에 걸쳐 제 아무리 능력을 다해도 동방의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의 소망을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 이, 제 삼, 내지 제 십의 사람이 그 뒤를 이어서 시간을 다해도 동방세계에 사는 중생의 소망을 낱낱이 알 수는 없습니다. 또 시방세계의 중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령 시방의 무변한 세계에 사는 중생의 소망을 낱낱이 알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의 보살은 한정된 세계의 중생의 소망을 알기 위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 것은 일체 중생의 다함이 없는 소망의 대해(大海)를 알고자 하고, 중생의 욕망은 하나의 욕망이며, 하나의 욕망은 일체의 욕망임을 알고자 하며, 또 착함[善]과 착하지 않음[不善]에 대한 욕망, 세간 혹은 출세간(出世間}에 대한 욕망, 커다란 지혜의 욕망, 청정한 욕망, 장애가 없는 지혜의 욕망, 장애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춘 욕망 등을 낱낱이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혹은 또 중생의 감각기관, 희망, 방편, 마음, 움직임, 모든 업, 번뇌 등을 낱낱이 알고자 하는 것을 비유로 들 수 있습니다.
불자여! 혹은 또 다음과 같은 비유도 들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 찰나에 동방의 무변한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부처님과 그 일체의 중생을 공경하고 찬탄, 예배하며 존경하고, 또 온갖 공양을 다하고 장엄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 아득한 오랜 시간을 다한다고 하면, 이같이 하여 동방세계와 마찬가지로 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을 공양할 수 있다고 하면, 불자여,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합니까."
제석천은 이에 대답하였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사람의 공덕을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은 말했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을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따라서 설할 수도 없습니다.
초발심을 발한 보살이 보리심을 내면, 무한한 과거로부터 활동해 온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가 있으며, 무한한 미래를 향하여 활동하고자 하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믿을 수가 있으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는 지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믿고 가르침을 받으며 행하고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들의 공덕과 같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을 발한 보살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다음의 이유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보살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본질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세계의 중생을 구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중생의 오염이나 청정함이 생기는 실정을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중생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남은 업으로 인한 번뇌를 낱낱이 알기 때문이며, 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을 알고자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삼세의 부처님께서 가지신 힘을 이어받아 그 한없는 평등의 지혜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이 보살은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초발심을 발한 보살이야말로 실은 부처님인 것입니다. 이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한마음[一心]과 한량없는 마음[無量心]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세계를 비추고 모든 악도의 고통을 잠재우며, 모든 세계에서 성불하는 것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의 기쁨을 얻게 하고, 그 깊은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합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본성을 지키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을 얻고 있습니다.
초발심을 발한 보살은 항상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모든 보살 연각(緣覺)과 성문(聲聞) 내지 그 법(法),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법, 중생의 법 등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깨달음을 구하며 그 지혜는 장애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과 초발심을 발한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힘에 의하여 시방의 끝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꽃과 하늘의 향기와 하늘의 꽃다발과 하늘의 보배가 비처럼 뿌려져 미묘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때 끝없는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낱낱이 그 몸을 법혜보살의 앞에 나타내시었다. 그리고 법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불자여, 그대는 능히 초발심의 공덕을 설하였다.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도 또한 낱낱이 초발심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그대가 초발심 보살의 공덕을 설하였을 때, 시방의 중생은 모두 초발심 공덕을 얻고 무상한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제 중생들에게 약속하나니 그들은 미래세에 저마다 동시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니라. 우리들은 미래의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이 초발심의 법을 지키고 전하여야 한다."
법혜보살이 이와 같이 사바세계의 수미산 정상(頂上)에서 초발심의 법을 설하고 중생을 교화한 것과 같이, 시방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모든 세계 안에서도 초발심의 법을 설하고 중생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이 법을 설하는 자를 각각 법혜라고 이름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며,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하며, 지혜의 광명이 남김없이 비추는 것에 의하며, 제일의(第一義)를 깨닫는 것에 의하며, 모든 보살은 기쁨에 넘쳐 있음에 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 것에 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함을 아는 것에 의하며, 또 법계는 하나이며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때 법혜보살은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서, 중생의 미혹과 오염을 제거하고, 넓은 해탈을 얻게 하고자, 또 스스로의 깊고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초발심의 보살은 일체 중생 안에서 항상 분노를 떠나 대자비를 일으키며,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기릅니다. 그 자비의 빛은 시방세계를 비추어 중생을 위한 의지처가 되도록 하며, 모든 부처님은 이 보살을 지키고자 염원합니다.
그 어느 것도 이 보살의 신심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흡사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항상 모든 여래의 밑에서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합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완성하여 그 뜻에 막힘이 없습니다. 또 진실한 세계를 분명하게 깨달아 마음은 적멸하고 허망을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은 고요하고 평안하며 지혜의 힘은 청정합니다.
보살은 미래의 끝까지 다하여도 중생에게 힘을 바쳐 드디어는 해탈을 얻게 하고자 생각하며 다함 없는 생사 안에서 어떠한 지옥의 괴로움을 받아도 중생을 위하여 힘을 다합니다. 하나의 털구멍 안에서 시방의 세계를 보니, 그 세계는 미묘하게 장엄한 모습을 띠고 있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만약 시방세계 일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 받들고자 하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공덕을 얻고자 원하며, 혹은 또 일체 중생의 끊임없는 생사의 괴로움을 없애고자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서원을 세워서 곧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제 14장 명법품(明法品)
그때 정진혜(精進慧)보살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초발심을 발한 보살은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얻고, 그 모습은 위엄에 가득 차 있으며, 애욕의 밧줄에서 벗어나 모든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있으며, 그 뜻 하는 바는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보살은 어떠한 법을 행하여야 그 공덕은 보다 뛰어나고 모든 여래는 낱낱이 기뻐하며 그리하여 이 보살의 청정한 대행(大行)과 대원(大願)이 완성되겠습니까. 바라옵나니 불자여, 우리들을 위하여 이 불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기쁘게 듣고자 합니다.”
법혜보살은 정진혜보살을 향해 말했다.
“불자여, 그대는 이 문제를 잘 물었습니다. 이 불법은 중생을 안락케 하고 중생에게 커다란 이익을 주는 매우 깊은 보살의 대행입니다. 불자여, 그대는 진실한 지혜 안에 쉬고 있으며, 전심전력으로 대정진(大精進)을 행함으로써 드디어는 한 번 얻은 공덕을 다시는 잃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고, 속계(俗界)를 뛰어넘어 있습니다. 그대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여래의 세계입니다.
불자여, 잘 듣고 잘 생각하기 바랍니다. 나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그대를 위하여 설하고자 합니다.
불자여, 이 보살은 이미 초발심의 공덕을 얻고 있으므로 참으로 무지(無知)의 어두움을 떠나고 온갖 게으른 마음을 떠나야 합니다.
보살에게는 열 가지 법이 있어서 게으른 마음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즉 마음을 맑게 하고 계율을 지니며 어리석음을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밝게 하고, 거짓 마음을 버리고, 중생을 연민하며 선행에 전진하여 얻은 공덕을 다시는 잃지 않는 경지를 얻고, 항상 적연(寂然)하기를 원하여 재가나 출가의 모든 범부의 어리석음에서 떠나고, 세속의 즐거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한결같이 뛰어난 수행을 닦아 소승(小乘)의 가르침을 버리고, 보살의 길을 구하며, 항상 공덕을 잊지 않고 더럽히는 일이 없으며, 스스로 자기의 본분을 훌륭하게 깨닫습니다.
이것이 게으른 마음을 없애는 열 가지 방법입니다.
불자여, 보살은 더욱 나아가 다음의 열 가지 청정한 법을 행합니다.
즉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수행하고, 뜻하는 것이 지혜에 맞게 하며, 게으른 마음을 버리고서 깊은 불법 안에서 쉬며, 항상 불법의 완성을 원하고 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며, 마음에 들은 그대로 진실의 세계를 보고 훌륭한 지혜를 낳으며,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세계에 들고 마음은 항상 적연하여 산란하지 않으며, 설사 좋고 나쁜 일을 들어도 마치 대지와 같이 굳은 마음으로 동요하지 않고, 상, 중, 하의 중생을 보아도 모두가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스승과 선지식, 출가자, 보살들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한 생각 한 생각에 모든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한 법입니다.
불자여, 보살은 이와 같이 노력하여 생각 생각마다 지혜를 갖추고 방편을 버리지 않으며, 마음에 의지하는 바를 구하지 않고 다툼이 없는 세계에 들며 한량없는 불법을 낱낱이 분별하고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기쁘게 합니다.
불자여, 보살은 열 가지 법을 행하여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즐겁게 합니다.
즉 자기의 행하는 바에 힘써서 결코 물러남이 없고,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으며, 세속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일체의 불법을 수행하여 닦지만 흡사 허공과 같이 집착하지 않고, 방편의 지혜에 의하여 모든 것을 관찰하고, 법계와 일체가 되며, 일체를 분별하면서 생각에 의지함을 구하지 않고, 대원(大願)을 일으키고, 청정한 지혜의 빛을 완성하여 중생의 모든 이해 득실을 알아서 실천하는 불법은 낱낱이 청정합니다. 이것이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열 가지 법입니다.
불자여, 다음으로 보살은 열 가지 법을 실행하여 재빠르게 보살의 모든 경지를 완성합니다.
즉 마음은 항상 모든 공덕을 행하고자 원하며, 피안에 이르는 모든 길을 닦고, 지혜는 밝아서 헤매이지 않으며, 항상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항상 노력하여 물러남이 없으며, 부처님의 마음을 이어 받아서 모든 불법을 지니고, 모든 선을 행하여 마음의 근심이 없으며, 지혜의 빛은 일체의 사물을 남김없이 비추고, 모든 경지의 불법에 쉬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정법(正法)에 동화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모든 경지를 완성하는 열 가지 법입니다.
불자여, 이 보살은 저마다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얻은 깊은 지혜에 따르고, 스스로의 숙업(宿業), 경계(境界), 지위(地位)에 따르고, 일체의 뛰어난 불법을 낱낱이 판별하면서도 그 모든 사물에는 집착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마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도자가 이와 같이 명확하게 관찰하면 모든 보살의 경지를 나의 몸에 갖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은 항상 마음을 ‘나는 어서 빨리 모든 보살의 경지를 완성하여야 되겠다. 내가 그 경지에 있어서 가르침 그대로를 알 때, 무량한 공덕을 얻을 것이다. 무량한 공덕을 얻은 다음에는 차츰 부처님의 경계에 나아가리라. 부처님의 경계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하고자 하는 임무를 다하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항상 노력하여 불법을 행하며 방편을 버리지 않고 마음에 근심이 없으며 보살의 경지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불자여, 또한 보살은 열 가지 법을 행하여 보살의 행을 맑게 합니다.
즉 일체를 버리고 중생이 바라는 바를 채워 주며, 계율을 지니고 어기는 일이 없으며, 인내가 다하는 일이 없으며, 방편을 써서 물러서는 일이 없으며, 무지를 떠나서 모든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삼매에 들어 마음이 혼란하지 않고, 모든 사물을 분명하게 하며, 모든 행을 완성하고 공덕을 존경하는 마음은 흡사 산왕(山王)과 같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청량한 연못이 되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이 법에 동화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행을 맑게 하는 열 가지 방법입니다.
불자여, 보살에게는 열 가지 맑은 서원이 있습니다.
즉 중생의 덕을 완성하여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를 원하며, 선행을 오래도록 행하여 부처님의 나라를 청정하게 하는 것을 원하며, 모든 여래를 공경, 공양하기를 원하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정법(正法)을 지키기를 원하며, 여러 가지 지혜나 방편에 의하여 중생이 남김없이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며, 보살의 상대적인 차별을 초월한 절대 평등한 경지[不二法門]와 부처님의 한없는 진리에 들어 모든 사물을 밝게 알고자 원하며, 부처님을 만나 보고자 원하는 자로 하여금 남김없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다함없는 미래의 시간을 한 순간과 같이 느끼기를 원하며, 보현보살의 서원을 스스로 몸에 익히고자 원하며, 모든 종류의 지혜를 밝히고자 원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한 서원입니다.
불자여, 보살은 보다 나아가서 열 가지 법을 수행하여 모든 서원을 다합니다.
그 열 가지 법이란 마음의 피곤이나 염리(厭離)를 느끼지 않는 것이며, 마음에 근심도 외로움도 없으며, 모든 보살은 시방의 부처님 나라에 낱낱이 왕생하고자 원하고, 미래로 나아가 일체 중생의 덕을 완성하고자 생각하며,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 안에 안주하면서도 길다고 하는 느낌이 없으며, 어떠한 괴로움을 당하여도 괴로움을 기억하지 않고, 어떠한 즐거움을 당하여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비교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모든 서원을 실천하는 보살의 열 가지 방법입니다.
불자여, 보살은 어떻게 하면 그 구하고자 하는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 보살은 중생에게 필요 적절한 방편을 알고 있으며, 중생의 숙업의 인연을 알고 또 중생이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에 따라서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탐욕이 많은 자에게는 육신의 부정(不淨)을 생각하게 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생각하도록 가르치며,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있음을 알게 하고, 모든 것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일체는 공(空)임을 가르치며, 게으른 사람에게는 노력할 것을 권하고 아만(我慢)이 강한 사람에게는 일체는 평등함을 알게 하고, 자기의 마음을 굽혀서 남에게 아첨하는 사람에게는 보살의 마음은 정연하여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온갖 번뇌에 대해서 무량한 가르침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분별의 지혜를 잘 활용하여 가르침의 의미를 훌륭하게 설하고 전하여 주며, 사물의 질서를 문란하게 함이 없으며, 모든 사물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이면서도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는 소멸함이 없음을 가르치며, 중생의 의혹을 없애고 모든 진리를 기쁘게 하며, 그 능력에 따라서 모든 공덕을 가르치며, 드디어는 여래의 커다란 바다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그 마음이 정연하여 혼란함이 없고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수행의 완성[十波羅蜜]을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것을 베풀면서도 여기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보시의 완성[布施波羅蜜]입니다.
둘째, 모든 계율을 지니면서도 계율을 지녔다고 하는 의식이 없으므로 여기에 집착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계율의 완성[持戒波羅蜜]입니다.
셋째, 어떠한 고통에도 인내하며 좋고 나쁜 일을 들어도 평등하고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을 번성하게 하는 대지와 같습니다. 이것이 인욕의 완성[認辱波羅蜜]입니다.
넷째, 항상 노력,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결코 물러남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진의 완성[精進波羅蜜]입니다.
다섯째,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함이 없고 차례로 선정(禪定)에 들어 모든 번뇌를 끊고, 드디어 무량한 삼매에 나아가 커다란 신통을 갖추고, 더욱 초월하여 하나의 삼매 안에서 무량한 삼매에 들고, 모든 삼매의 경지를 알아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갖추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선의 완성[禪定波羅蜜]입니다.
여섯째, 모든 부처님 밑에서 가르침을 듣고 잘 받들며, 모든 선지식에게 친근하고 공경하며,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며, 모든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여 진실한 선정에 들며, 모든 편견을 떠나서 진리의 바다를 건너며, 아무런 바람도 없이 봉사[無功用]하는 여래의 길을 알아 모든 지혜를 갖추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반야의 완성[般若波羅蜜]입니다.
일곱째, 세간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가르쳐 중생을 교화하며, 그 마음가짐에 따라서 몸을 나타내고, 어떠한 작용에도 집착함이 없어, 혹은 범부의 몸이 되고 혹은 성인의 몸이 되며, 혹은 생사를 나타내고 혹은 열반을 나타내며, 모든 경지에 들어가 중생을 눈뜨게 합니다. 이것이 방편의 완성[方便波羅蜜]입니다.
여덟째, 모든 중생을 완성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장엄하며, 모든 여래를 공양하고, 모든 사물의 진실을 깨달으며 수행하여 법계(法界)의 지혜를 갖추고, 다른 부처님 나라를 알리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체득합니다. 이것이 서원의 완성[願波羅蜜]입니다.
아홉째,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에 의하여 모든 번뇌를 떠나고, 진리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어떤 고난에도 물러서지 아니하며, 남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커다란 연민에 의하여 피로를 모르며,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깊은 마음에 의하여 행하는 바가 모두 평등하고, 도리를 판별하는 능력에 의하여 모든 중생을 기쁘게 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모든 중생을 지킵니다. 이것이 힘의 완성[力波羅蜜]입니다.
열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이 강한 사람들을 알고, 한 생각 동안에 중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며, 모든 사물의 진실을 알고 모든 부처님의 깊은 지혜력에 도달하여 일체의 도리를 남김없이 압니다. 이것이 지혜의 완성[智波羅蜜]입니다.
불자여,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수행을 맑게 완성하며 중생의 취향에 따라서 가르침을 설합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는 탐욕을 떠나라고 가르치고, 성내는 사람에게는 평등한 관찰을 가르치고 소승(小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적정(寂靜)의 행을 가르치며, 대승(大乘)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불도의 장엄(莊嚴)을 가르칩니다.
그 옛날 보살도를 닦으시던 여래께서 처음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많은 중생이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중생이 앓는 마음의 병을 알고 그 병에 따라서 중생을 가르치며 드디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리라.’
보살은 이와 같이 지혜를 갖추어 무량한 중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불자여, 또 보살은 삼보(三寶)를 훌륭하게 일으키고 끊임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즉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이로 인하여 부처님[佛寶]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항상 뛰어난 법(法)을 열어서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法寶]은 끊이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항상 규법과 법도를 지키며 가르침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봉행하는 승단[僧寶]은 끊이는 일이 없습니다.
또 보살은 모든 대원(大願)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인연의 도리를 판별하고 이것을 설법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이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여섯 가지의 방편으로 화합하는 길[六和敬]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봉행하는 승단은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또 보살은 부처님이 될 씨앗[種子]을 중생의 밭에 뿌리고 깨달음의 싹을 트게 합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정법(正法)을 지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이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대중을 다스리고 싫어하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을 신봉하고 그 가르침을 봉행하는 승단은 끊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불자여, 보살은 지혜의 등불에 의하여 무지(無知)의 어두움을 없애고 자비의 힘에 의하여 모든 악마를 격퇴하며, 금강정(金剛定)에 들어서 모든 마음의 때와 번뇌를 없애며, 청정한 지혜를 완성하는 것에 의하여 모든 악도의 재난을 떠나며, 진리를 가르쳐 무량무변한 중생을 눈뜨게 합니다.
불자여, 보살은 이와 같이 무량한 법을 수행하여 차례로 몸에 익히고 드디어는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무량한 나라에서 정법을 지키고, 큰 스승이 되어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며, 대중 안에서 깊은 가르침을 설법하여 전하며, 용모는 단정하고 그 음성은 뛰어나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많은 중생을 기쁘게 하며, 적절하게 교화하고 마음의 눈을 크게 하여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많은 방편에 의하여 모든 중생을 위한 진리의 보물 창고를 엽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아직 한 번도 권태를 느낀 일이 없고 대중 속에 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누구도 보살의 지혜를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보살은 모든 사물의 실상을 차례로 식별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또 즐겁게 하며, 사자(獅子)의 자리에서는 뛰어난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깊은 진리를 설합니다.”
'정법안장正法眼藏 > 화엄지해 華嚴之海' 카테고리의 다른 글
60권 화엄경 31~34 完結 (0) | 2012.03.25 |
---|---|
60권 화엄경 23~30 (0) | 2012.03.25 |
60권 화엄경 19~22 (0) | 2012.03.25 |
60권 화엄경 15~18 (1) | 2012.03.25 |
화엄경 해설 (0) | 2012.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