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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 다크나이트 라이즈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2. 7. 23. 00:25

현대 예술의 분기점은 어디인가?

 혹은 고전적의미의 예술은 언제가 종말을 고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 질 때 우리는 1960년대를

기록한다. 그 60년대에 엔디 워홀과 미국의 팝아트가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평함에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논함은 이 영화에서 예술 철학 흥행이라는

상호불가침의 영역들이 서로투쟁을 하는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정통 헐리웃의 흥행공식 및 장르를 답습한다는 점에서 오락매니아에게 기립박수를 유도할 것이고,

이 영화 기립박수의 대중들 중엔 기존의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엔 동의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 좌향좌를 통해 세상은 좋아질거라고 생각하는 중도우파가 다수일 것이다.

2편인 다크나이트 보다 못하다는 사람들은 예술과 철학을 생각하는 소위 매니아들일 것이다.

 

한낱 만화가 무슨 철학이 있을 것이며 예술의 도구가 될 수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하여 역발상을 한 이가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흥미위주의 만화에 숨은 비록 유치하지만 한 만화가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해 놀란 감독은 인문학적 사유를 한다.

만화에만 존재하는 사회 즉 고담시티가 뉴욕시티라는 건 영화를 본 누구나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최고 정점인 뉴욕을 배경으로 자본주의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소위

베트맨 비긴즈다. 도데체 어디정도까지의 폭력이 선이고 어느것 이상이 악인가?

그 문제에 대해 폭력미학의 한계를 탐구한 1편을 뒤로하고 놀란은 자신만의 배트맨 2편을 만들었다.

다크나이트이다. Dark Knight(암흑의 기사, 어둠의 기사) 라는 새로운 제목을 통해 악을 응징하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는 배트맨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폭력자체가 선일 수 없다면 그리고 악이 폭력을 통해서만

징벌 할 수 밖에 없다면, 최선이 아니라 차선 혹은 마지막 선택으로 악이 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현실 정치의 한 인물을 떠 올린다.

독재자의 딸이 5.16을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 여기서 독재자 집안의 인물이 가지는 고통이란게

결국 권력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란게 드러난다. 최악의 선택, 차선의 선택, 어쩔 수 없는 최후의 한 수였다면

배트맨과 같은 폭력미학이 되리라. 탱크로 민주주의와 내각제를 무너뜨린 폭력을 최선이라고 한다면 '알굴'이나 '베인'과 무엇이 다른가?

 

 

놀란이 보는 현재 자본주의의 최고 악당은 사실 금융자본이다. 증권이라는 가상세계를 통해 무한대로 서민의 돈을 잠식하는 거대공룡. 베인이 증권시장을 파괴 장악하면서 "너희들은 우리돈을 도둑질 한 놈들"이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듯이 현재 미국 서민의 고통과 아픔을 베인을 통해 말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선 저축은행이 이에 해당하겠지?.....조만간 우리도 미국처럼 금융자본에 황폐하겠지만....

베인이 먼저 무너뜨린 건 증권가 소위 월가이다. 그건 현재의 자본주의 타락의 주범이 증권 은행 즉

금융이라는 소신과 철학을 제시한다.

 

그러나 문제는 타락한 소돔을 없애려는  베인의 종말세계, 재림예수의 세계관이 이 영화에서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베인이 대변하는 세계는 기존의 타락한 세계를 불의 심판으로서 정화하고 새롭게 세우고자 함이다.

이는 사실 기독교의 종말론과 일치한다.  베인이 원하는 건 불의 심판이다. 그건 1편의 알굴이 추구하는 세계심판과 일치한다. 여기에 헐리웃 흥행의 현실 타협이 존재한다. 베인에게 기독교의 색을 입히면 흥행에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놀란의 배트맨을 통한 선악에 대한 인간 탐구도 왜곡된다.

 

다크나이트 즉 배트맨 2탄에서 조커와 배트맨이 사실 같은 종류의 악이라는 걸 부각시키며 놀란의

감독으로서의 역량과 철학적 탐구를 하는 오락 영화라는 영화사의 이정표를 세웠다.

다크나이트는 오락영화 및 만화라는 사소한 주제에 심각한 종교철학적 질문을 해서 만든 영화라는 평은

두고두고 후대의 평을 받을 것이다.

절대악인 조커의 폭력과 악을 징계하는 배트맨의 폭력에 대해 조커는 배트맨에게 말한다.

너의 실재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짙은 화장으로 가면쓴 나를 창조했고 그 창조된 조커가

악과 폭력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듯 너 역시 악을 징벌한다는 대의(大義)를 위해 가면을 쓰고 폭력을 행사한다.

가면과 폭력이라는 이름하에 너와 나는 같은 존재다. ...........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부시와 후세인이 오버랩이 되었다.

 

 

폭력과 오락을 통한 인간존재의 탐구. 그 완결판인 어둠의 기사 일어나다(Dark Knight Rise)라는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둠의 기사 몰락하다(Dark Knight Fallen)라고 부르게 된다.

미국시사회에서 미국인의 기립박수을 받았다는 건 아무리 타락해도 혁명이나 구테타는 답이 아니라는

그들의 가치관이 결론이기 때문이다. 틀은 바꾸지 말고 자본주의를 수정하자.

악법도 법이라는 그들의 가치관을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현재 미국의 현실에 다크나이트를 필요로 하는 그들의 열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예술로 본다는 매니아들의 입장에선 결국 상업영화로 빠진 놀란의 타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1917년 마르셀 뒤상은 소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하고 "샘(fountain)"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전위예술 운동에 불을 붙이며 모든 예술가들은 철학적 질문을 한다.

도데체 예술이란게 무엇이가? 어떻게 저런게 예술이냐?

 

그들의 질문에 대한 가장 진솔한 답이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가 한 다음의 말이다. 그의 사후 1970년에

출판된 "미학이론"에서 아도르노는 「예술에 관한 한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다.」라고

선언 했다. 그러나 1964년 미국의 예술가 '엔디워홀'은 예술사에 최고의 파격을 선보인다.

소위 브릴로상자이다. 우리로 치면 라면박스나 일반 음식료품 박스 상자를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이것이 예술이라고 선언했다. 일상 생활 어디에서나 만나는 평범한 물건도 예술이 될 수있다는 주장이다.

워홀의 작품을 60년대 예술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온갖 혹평을 했건만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작품이 되었다.

 

 

 

 

비유하면 내가 마트에서 버리는 라면상자를 시립미술관에 전시하였고, 그 폐품이 20-30년후 몇 십 억에 팔리는 것이다. 그게 엔디 워홀이라는 인물이 해낸일이다.

 

 

 

1970년 후반 소위 브릴로상자 전시 10여년 후 미국의 철학자 아서 단톤은 예술이 종말을 고했다라고 말한다.

브릴로상자가 예술에 종말을 고했다. 이제 예술은 철학자의 답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도 30-50년대 프랑스 해체주의철학 및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비트겐쉬타인은 철학은 단지 말장난일 뿐이라고 말한다. 해체주의자는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정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2천년 이상을 지배해온 이성으로서의 철학은 이미 사형을 언도받았다.

 

 

 

 

브릴로상자 이후 예술이 종말을 딛고 철학으로 나아가는 시기라면 분석철학과 해체주의철학을 통해 종말을 맞이한 철학은 예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재림예수를 기다리는 시기인가?...

이미 태어나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데.....???

 

이것은 흥행이라는 자본의 힘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달린 처절한 싸움이다.

한 때 크리스토퍼 놀란에게서 뭔가를 찾으려했다면, 그의 인간적 한계를 느낄뿐이다.

내가 볼 때는 그가 다루는 주제에 비해 그가 파악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철학이 여전히 미비하다.

그의 영화에서 선악의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질문하고 답한 작품이 뭐냐고 묻는다면 다시말해 가장 철학적이며

영화적 재미까지 더한 작품을 묻는다면 '다크나이트'이다. 이 이상의 작품은 그에게서 나오지 않을거라고

느낀다면 나의 오버센스인가?.....

 

상업화된 영화세계이지만, 그속에서 철학과 의미를 찾고 탐구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거장들도 돈과 흥행을 쫓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돈과 흥행 속에서도 철학과 예술의 의미를 구현하고 탐구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시대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예술하고 철학하는 미켈란젤로를 만나는 시기이다.

혹 김홍도도 만나지 않을 까?

이미 우리는 엔디 워홀을 만났다. 최고의 지성인들도 워홀이 브릴로상자를 전시했을 때 그가 누군지 그 작품이

뭔지를 몰랐다. 10년이 지나면서 평가가 달라졌고 지금은 세계최고가의 작품이 되었다.

쓰레기라고 평가를 받았는데......

언젠가 영화계에서도 워홀을 만날까?....실제로 워홀은 영화에 손을 데던중 매춘부이자 작가인 발레리 솔라니스

의 대본을 돌려주지 않았다. 1968년 격분한 그녀의 총에 맞아 사망위기까지 갔으나 살아남았고 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던중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108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영화를 보지 못한 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일 것이다.

1편부터 쭉 이어지는 주제에 해당하는 대사 한마디를 끝으로 이글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추락하는 것은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크나이트는 라이즈(Rise) 한 것이 아니라 폴른(Fallen)한 것이다.

 

 

 

 

 

2012년 7월 22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