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창조론은 이단이다>
뉴튼의 만유인력법칙과 운동방정식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전면적으로 수정되었고 양자역학에 의해 대격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뉴튼의 업적이 잘못된 이론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평평한 지구론자들을 제외하고) 진화는 사실이며, 진화론은 진화를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입니다. 다윈 이후의 생물학의 발전과 발견들은 수많은 이론적 수정에도 불구하고 이런 믿음들을 더욱 굳게 만들어 왔습니다.
미국인구의 23%는 카톨릭이고 2%는 정교회, 38%는 개신교이며 28%는 근본주의자 입니다. (개신교는 근본주의를 포함한 수치임) 한국 기독교의 99%는 근본주의이고 미국과 한국의 근본주의자들만이 창조론이나 평평한 지구론의 신봉자들입니다. 다른 국가들에게서는 크리스트교라 하더라도 이런 비이성적인 이론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단적으로 창조론과 평평한 지구론이 갖는 사이비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신학적인 정의를 들먹일 것도 없이 잘못된 이론을 도구로 포교의 수단으로 삼는 종교는 명백히 이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입장에서 보아도 이단이며, 사회적 입장에서 보아도 이단이자 사회악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명백히 잘못된 이론을 주장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이름에 맹세코 죄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은 결코 성서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성서의 모든 내용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이단 행위에 불과합니다.
원숭이 재판을 통해서 우리는 철저히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창조론에 얽매여 이성이 마비된 근본주의자들은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진정한 크리스트교의 신자로서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8:32] ≫
6) 우리나라는 왜 근본주의자들의 천국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하는 사람들>이라는 인터넷사이트를 운영하는 기독교인 김남중씨가 게시판에 올린 아래의 글에 해답이 있다.
《1. 무엇이 문제인가?
R형, '잘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 성경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로서, 그것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
둘째,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로서 그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셋째,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로서 세상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선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
넷째,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학만이 유일한 진리로서 종래까지의 신학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더욱 의미있게 재구성하려는 노력, 특히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 같은 것은 모두 거들떠볼 것도
없이 '인본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라 규정하는 것 등입니다.
성경만, 예수만, 기독교만, 우리 신학 만이라고 하는 "만만주의"의 대명사인 셈입니다. 영어로 one and only syndrom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좀 세분해서 전통적인 신학 용어로 나열하면 1. 성경 무오설, 2. 동정녀 탄생, 3. 기적, 4. 육체 부활, 5. 인간의 죄성, 6. 대속, 7.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인정하고 의심 없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고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이 '근본적인 믿음'을 잃어버리면 기독교도 기독교인도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만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장들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싶지만,
사실 누가 말했듯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들"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입니다.
현재 미국에는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숫자가,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략 전체 기독교인들의 20 내지 4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됩니다. 미국이나 한국 TV에 나오는 소위 '전자전도자들'은 거의 이런 근본주의자들이라 해서 틀릴 것이 없습니다.
R형, 여기서 약간 까다로운 문제 한가지를 말씀드리고 지나가야 할 것같습니다. 영어로 '신앙' 혹은 '믿음'을 뜻하는 말로 'faith' 라는 말과 'beliefs'라는 말이 있는데, 이 두 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faith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을 깨닫고 이를 초극하려는 마음가짐이나 결의 같은 것이라 한다면, beliefs는 이런 faith를 우리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과 지적 능력에 따라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한 일종의 특수 설명체계 내지 신념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꽤 추상적인 말이 되었습니다만, 이런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faith를 우리말로 믿음 혹은 신앙이라 한다면 beliefs는 '믿고 있는 것들' 이라 하면 어떨까요.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절대적 사랑과 신뢰가 faith입니다. 그런 사랑과 신뢰를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거나 설명해 놓은 것이 beliefs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다 같이 아버지에 대해 faith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가진 beliefs는 각자의 나이나 기타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쪽의 특수 beliefs를 받아들여야 faith가 있고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faith가 없다고 하는 것은 faith와 beliefs의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억지 주장입니다.
위에 열거한 근본주의자들의 교리는 일종의 특수 beliefs입니다. 이런 특수 교리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믿음이 나 신앙이 없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그런 교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틀려먹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지난 2000년 가까이 이런 교리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 흔들림이 없이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에서 형성된 이런 특수 교리들을
진리 자체라 여기고, 여건이 완전히 바뀐 오늘에도 이런 특수 교리들을 문자대로 붙들고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R형,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근본주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대로 '자유주의자들'(Liberals)의 입장을 백퍼센트 옹호하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들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차이점이라면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그것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그것을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근본주의던 자유주의던 성경을 문자대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문자주의'(literalism)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살짜리 철수에게는 '우리 아빠 최고'라고 하는 '믿음의 내용' 혹은 '신념체계(belief-system)'가 그의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인류 전체의 정신발달사로 보거나 개개인의 신앙 성장사로 보아 초기 단계에 서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철수가 머리가 커가고, 어른이 되었어도 끝까지 "우리 아빠 최고"를 문자적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철수'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야 말로 '철'이 덜 든 인간입니다 더구나 자기 누나나 형들이 "그래, 철수야, 우리 아빠 정말 최고야. 그러나 철수 네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문자적으로 최고는 아니야. 아빠가 훌륭하시다는 것은 그런 문자적 의미 이상인 거야"하고 일러주면, 그런 누나나 형들의 태도야말로 '신신학'에 물이 들어 가문의 전통을 배신하고 아빠를 모욕하는 처사라고 그들을 정죄합니다.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근본적인 것'을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심지어 산 넘고 물 건너까지 가서, 자기 누나나 형들의 말은 우리 집안을 대표하는 정통적인 말이 아니니까 절대로 듣지 말라고 외칩니다. 철이 덜 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철딱서니가 없는' 짓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끼는 철수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도 이런 단계의 믿음에서 자라나 성숙한 인간, 장성한 사람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영위하자는 것입니다. 아직 다섯 살 철수임을 자처하고 싶으면 그런 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평생을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아무리 연령적으로 오래 산다 하더라도 정신연령 내지 종교 연령(?)으로는 영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마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비극적 종언입니다. "이런 비극적 종언을 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2. 허스키와 진도개 - 내 종교만 종교인가?
서부 캐나다 북쪽 어디에 외딴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개라면 눈썰매를 끄는 허스키라는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희색 털, 반미터 정도의 키, 우뚝 솟은 귀,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 늑대 같은 짖음 등입니다. 그들의 경우 개라면 무조건 허스키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바뀌어 이 마을에서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나 다른 주로 나들이를 나갈 뿐 아니라 멀리 다른 나라에까지 여행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어디로 멀리 여행을 갔다 오는 사람이 중국산인가 하는 시츠(Shih Tzu)라는 개 한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갈색인데다가,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몸집, 귀는 척 늘어졌고, 긴 털이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고, 입은 몽땅하고, 짓는 것도 캥캥하는 소리뿐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개를 놓고 이것이 개냐 아니냐 하고 토의하기 시작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허스키와 기본적으로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요상하게 생긴 짐승을 개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사랑하던 허스키에 대한 모독으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사람들의 여행이 더욱 잦아지고, 이에 따라 이 마을에도 쉐퍼드,도벌만, 라바돌 리트리버, 토이 푸들, 테리어, 치와와, 진도개 등등의 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많은 마을 사람들이 개라는 것도 한두 가지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기호에 따라 이런 저런 개를 사서 키우며 자기들의 '개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아직도 허스키만 개라는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개를 개로 여기는 사람들의 '타락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 더러는 적극적으로 딴 모든 개를 개로 인정하려는 사람들 의 오류와 그런 오류를 퍼뜨리려는 사람들의 기도를 박멸하는 것이 허스키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를 좀 계속해 봅시다. 이런 극진한 허스키 충성파 사람 중 몇몇이 한국에 와서 그들의 생각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똥개들이 개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돗개 같이 허스키 비슷하게 생긴 개도 진짜 개가 아니라고 합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지나자 어처구니없게도 그 캐나다 서부 북쪽 마을 사람들 보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 허스키만이 개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허스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두 젊은이들이 그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겠다고 허스키의 본고장 캐나다 그 북쪽 마을로 유학을 갔습니다. 가서 보니 놀랍게도 그 마을에서는 이미 허스키만 개라는 생각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습니다. 한 젊은이는 허스키만 개라고 믿었던 자기들의 믿음이 사실 근거도 없고 필요도 없는 믿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젊은이는 이 마을이 타락을 해서 아름다운 허스키 전통에서 멀어져도 한참 멀어졌구나 하고 개탄합니다. 둘이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서 각자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어처구니없게도 처음 젊은이는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이단이라 하여 강단에서 쫓겨나고 둘째 젊은이야말로 배울 것을 잘 배워왔다고 떠받들어집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허스키만, 그것도 특종 허스키만이 진짜 개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고 더욱 널리 퍼집니다. 가히 허스키의 종주국이라 할 만합니다.
서양에서는 천 몇 백년 동안 거의 아무런 외부적 도전이 없이 기독교만종교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종교'라 하면 의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상의 특성들만을 생각했습니다.
저위에 계시는 초월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신이 인간으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천당 지옥 등 내세를 말해야 한다, 계시의 교리가 있어야 한다, 부활을 믿어야 한다 하는 등의 기독교적 범주를 설정하고, 이 범주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종교는 모두 종교가 아니라고 하든가, 종교라도 기독교와 유를 달리하는 유사종교 내지는 '그릇된 종교(religiofalsa)'라 생각해 왔습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히 스위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딴 종교들은 모두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이 되어 남의 종교도 함께 비교 연구하는 '종교학
(Religionswissenschaft)'이라는 학문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창시자
막스 뮬러는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는 전제
아래 여러 종교들을 비교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이런 종교학자들의 공헌에 힘입어 서양에서도 타종교의 존재와 그들의 가르침이 대략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이런 심도 있는 연구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타종교와 나의 종교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점점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타종교가 얼른 보아 나의 종교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도 결국 인간의 "궁극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궁극관심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를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잡아 나가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기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개라면 반드시 허스키여야만 한다는 생각에 변화가 온 셈입니다.
R형, 우리 중에 아직도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윤리체계 내지는 조상 숭배다" 한다든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 혹은 우상숭배다" 하는 등 내가 믿는 종교만 종교이고 남의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미국이고 그 미국으로부터 근본주의를 수입하여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면 기독교인도 아니라는 생각에 찌들어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성직자들은 미국의 망해가는 교회를 사들이고 있는 웃지 못할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선진국들이 거대한 미신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려가고 있을 때 우리민족은 거대한 미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90% 이상을 넘는 나라는 지구상(일부 후진국을 제외)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허스키와 진돗개의 비유는 정말 절묘한 비유이며, 근본주의(허스키)만이 기독교(개)이고 근본주의를 제외한 다른 종파(진도개,세퍼드...)는 기독교(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정작 한국에서 허스키(근본주의)만이 개(기독교)라는 세뇌교육을 성공시킨 미국에서는 허스키(근본주의)도 개(기독교)의 다수가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고 다른 개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더군다나 개들 중에서도 아주 틀리다고 생각하는 개들(불교, 유교 등)조차도 개(기독교)와 같은 종류(종교)라고 인정되고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자기 종파만이 참기독교이고, 자기 종교만이 참종교라고 생각하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인류평화를 도모하는 길이요, 유치한 어린 아이(철수)의 생각에서 벗어나 21세기에 걸맞는 성숙한 어른(철수의 형과 누나)이 되는 길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누구나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포했으며, “너희 인간들은 신”이라고까지 선언한다. 과연 예수는 지금의 기독교인들처럼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거나 예수를 닮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예수)만 믿고 의지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기독교인을 좋아할까? 아니면 그런 의타적이고 유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를 닮으려는 노력과 실천을 통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가는 인간을 좋아할까?
▣ 진리의 수호자인가? 거짓의 수호자인가?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고 말하나 진리는 수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리는 자명한(self-evident) 것이다. 거짓은 수호와 선전을 필요로 하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다. 진리는 일출처럼 그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진리를 수호해 온 예를 하나 들어 보자.
프랑스의 과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예수회신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북경에서 5만년 된 사람의 유골을 발견했다. 교황은 과학자들에게 그 사실을 발표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대가 발견한 어떤 것도 발간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진리의 수호라는 것이다.
샤르뎅의 사후에 발간된 그의 연구물들을 보면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겨우 6천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경인에 의하면 인간조차도 적어도 5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국경에 있는 히말라야의 눈에 의해 북경인은 죽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 발견은, 세계가 6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적인 믿음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데이야르 드 샤르뎅의 입은 굳게 봉합되었다. 그는 어떤 기독교 대학에서도 강의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 진리의 수호인가? 샤르뎅이 교황청의 바보 같은 짓거리에 동조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순종이 가장 위대한 덕이라고 계속 가르친다. 바로 샤르뎅은 유아기 때부터 순종하도록 길들여졌던 것이다. 불순종은 원죄이다. 비록 그는 과학자였지만 어릴 때부터 계속 길들여진 교육과 조건화 때문에 겁쟁이, 노예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는 천재의 머리를 가졌지만, 그 조건화가 그의 무의식 깊숙이 침투하여 교황청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샤르뎅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연구에 임했지만 그의 생애 동안 어떤 논문도, 그 사실을 담은 어떤 책도 발간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그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 위대한 천재가 전생애 동안 교회에 의해 억압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의 책을 보고는 눈물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샤르뎅은 그 자신의 연구물이 발간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기독교회 전체는 비정상적인 두려움 속에서 항상 떨고 있다. 누군가 어떤 진리를 발견하면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댈 것인가?
샤르뎅은 교황에게 말했다.“왜 저의 저작물 출간을 허락해주지 않습니까? 저의 저술은 과학적인 원리에 근거한 것이며 현대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많은 오류들을 명백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논문 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샤르뎅은 말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종교적인 정신분열증은 지금부터 심각해질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자란 모든 과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을 앓게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분열된 인격을 갖게 될 것이다. 한쪽으로는 그 불합리성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과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교황의 무오성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과학과 기독교에서는 각각 상반된 말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그 둘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 그들은 두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즉 과학연구소에서는 과학자가 되고 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이 된다. 정신분열증은 인격을 둘로 쪼갠다. 바로 인류 전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조류에 발맞추지 못하는 이런 가르침들 때문에 온갖 종류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
기독교는 진리를 수호한다고들 하는데........
기독교가 수호하고 있는 것은 온통 온갖 종류의 거짓들 뿐이다!
동정녀 잉태설 - 이것은 진실인가?
동정녀 잉태를 다소 합리화하려고 하다가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남성과 성적 접촉 없이도 잉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급기야 그들은 성령잉태의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동정녀 잉태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성령(Holy Ghost)은 더 이상 성스럽지 않게 된다. 성령은 불쌍한 처녀를 강제로 잉태시킨, 세상에서 가장 저속한 유령이 되고만 것이다. 성령잉태설의 불합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령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성령은 하나님의 일부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어느 부분인가? - 손인가, 머리인가? 그대는 손으로 여자를 건드릴 수는 있지만 그녀를 잉태시킬 수는 없다. 머리로도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나님의 어느 부위인가는 절대적으로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성기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평범한 성기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성기이다. 하나님은 천국에 남아있고, 이동가능한 성기만 하늘에서 내려와 불쌍한 마리아를 잉태시킨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수호하고 있다는 진리란 말인가? 사실 이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아마 역대의 교황들 중에서 오직 한 교황만이 정직했다. 이 교황은 16세기의 레오10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태껏 기독교 신화가 우리의 배를 채워 주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정직한 교황의 말이다. 확실히 기독교 덕택으로 성직자들은 배부르게 살아올 수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진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엄청난 일들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모든 복음서들을 변조해 왔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의도에 맞지 않는 부분은 모조리 편집에서 삭제해 버렸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 판본을 보면 그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다가 예수의 형제들 중 한 사람이라고 씌어있다. 예수에게는 두 형제와 두 남매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죄없는 동정녀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그 나머지 딸과 아들들을 기록에서 완전해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성령을 5번이나 끌어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는 성령을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또 기록을 조작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마리아가 법적인 남편 요셉을 통해 잉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비합법적인 존재가 되고 예수는 사생아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형제들과 남매들이 있다는 견해를 복음서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들은 마리아를 죄가 없는 순결한 여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을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99% 날조된 신화이다. 기독교는 거대한 선전기구, 수백만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예수 사후 300년 뒤, 기독교 성직자들이 예수의 신성(神性)을 인정한 것은 바로 투표를 통해서였다. 투표를 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신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다. 붓다가 깨달은 자로서 대중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는가?
만약 그 투표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쪽으로 결론이 맺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종교가 정치적인 술수라도 된단 말인가? 신성을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 사후 300년 뒤에 그의 신성을 투표로 결정했다. 바로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 결론을 내렸다. 예수가 지닌 신성의 본질 또한 투표로 결정했다. 이는 그대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어떻게 신성의 본질을 투표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진리에는 투표가 필요없다.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즉 자명한 것이다. ......... 예수는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독교는 허구이다. 예수는 기독교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대들의 마지막 예언자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렇다면 누가 기독교를 창시했는가?
그대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불교를 찾을 수 있다. 붓다가 바로 불교의 창시자이다. 그대는 마하비라가 자이나교의 창시자라는 사실을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노자가 도교의 창시자라는 사실을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는 매우 이상하다. 그 창시자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1) 삼위일체설의 역사적 실체
삼위일체설...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기 위해서, 우선 그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생전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삼위일체설이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날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때엔 당시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라 지칭하는 사람이 6명이나 되었다고하는,혼란의 시기 였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시민)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공화파에게 로마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암살 당하는기까지 했으며, 그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자)라는 명칭을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군인황제시대 서기6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6명의 황제 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쓰러 뜨린 후 유일한 황제가 되긴 했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경쟁자가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우선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그 동안 핍박했던 크리스트교를 서기312년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후임황제에게 유언으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명했고 392년에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는 박해를 받았던 서기 320년무렵까지는 예수의 신성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인성을 위주로 예수를 파악하는 초대교회가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 세쿰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로마제국에 투쟁했었다.
삼위일체설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확립하기위해 서기325년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니케아]종교회의(=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라는 자가 최초로 주장하였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아첨하여 그를 신과 인간의 사이를 중개하는 교황이라 추대하여 아첨을 떨었던 것이다.
신성을 여호와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이 이론은, 교황으로서의 로마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받고 무오류(로마황제의 행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별의별 아첨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 법칙도 이때 확립되었다.
삼위일체설은 당시 정통의 아리우스파들조차도 부정했는데,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늘 말했으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와 하나님이 일치한다는 말이 없었다. 즉, 예수=하나님=성령이라는 공식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당시 그들의 반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들의 삼위일체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극소수 예수제자들의 이론을 마치 예수 자신의 입장인 것처럼 떠벌렸다. 결국 삼위일체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로 결정났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투표'로 정해진 것이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그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이 두 번 다시 아리우스의 정통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파라고 못을 박아버렸고 이 는 아리우스파를 결국 박해와 순교에 소멸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크리스트교 공인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삼위일체설, 그것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고도의 정치전략 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정통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의[우리식 사회주의]처럼, [삼위일체설]도 당시의 기독교인들로부터도 외면받은 정치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2) 삼위일체 교리의 기원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그에 해당하는 명백한 교리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구약에 나오는 쉬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주이시니라'(신명 6:4)는 말과 모순되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 그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된 것이다. ... 4세기 말에 이르러 ... 삼위일체 교리가 구체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그 후 그대로 유지되었다." - (1976년판), 마이크로패디아, 제 10권, 126면.
「신 가톨릭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제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체계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온전하게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계화된 바로 이 교리가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사도 교부들 간에는 그러한 경향이나 사조에 조금이라도 닮은 것조차 전혀 없었다." - (1967년 판), 제 14권, 299면.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유대교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엄격히 (하느님은 한분의 인격체라고 믿는) 유일신파였다. 예루살렘에서 니케아에 이른 길은 거의 곧은 길이 아니었다. 제 4세기의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 (1956년 판)), 제 27권, 294면 좌단.
「신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플라톤의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좀 더 고대 사람들의 시대에 속하는 더 오래된 삼위일체 사상들을 정립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합리적인 철학적 삼위일체로서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가르치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 희랍 철학자[플라톤, 기원전 4세기]의 개념을 ... 고대의 모든 [이교] 종교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M. 라샤트르 편, (파리, 1865-1870년), 제 2권, 1467면.
예수회의 죤 L. 맥킨지는 그의 편저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위격들의 본성이 하나인 삼위일체는 희랍 철학 용어인 '위'와 '본성'이란 용어로 정의된다. 사실상 그 용어들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정의는 일부 신학자들이 그러한 용어들과 '본질' 및 '품성'과 같은 다른 용어들을 하느님께 그릇되게 적용한 오랜 논쟁의 결과로 생겨났다." - (뉴욕, 1965년 판), 899면.
삼위일체론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삼위일체"라는 말이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이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교리에 들어있는 개념을 성서의 말씀으로부터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예수는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보다 능력이나 위격에서 낮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말씀이 한 두 개 있다면 삼위일체에 반대되는 말씀은 백 개쯤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원죄론에 대하여
1) 원죄론의 허구성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야훼신이 인간을 창조하고는 그 태초의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과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창세기 2장 16-17절) 이 당시의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았어도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세기 2장 25절) 이러한 사람들 앞에 뱀이 나타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리라.”하면서 그들을 꾀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 유혹을 견디어 내지 못한 그들은 선악과 열매를 따 먹게 되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비로소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그들은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고 한다.(창세기 3장 1-7절) 이 내용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사탄(뱀)의 말을 믿고 따랐으므로 죄를 지은 것이 되었고 이 죄는 대대손손으로 유전되고 있으니 이 유전되는 죄를 바로 원죄(原罪)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이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천치가 되길 바랬다는 말인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수치를 알게 되었다면 아프리카, 아마존 원주민들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아서 지금도 벌거벗고 다니는 것일까?
前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조찬선 목사조차도 원죄론을 주장하며 인류를 종신토록 죄로 구속하는 것은 기독교가 인류에게 범하고 있는 죄악 가운데 하나라고 얘기하고 있다. 원죄론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조목 조목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제2계명에 의하면 아비의 죄는 아들 3, 4대까지만 이른다고 하였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죄라도 아들 3, 4대까지만 이르고 그 후에는 그 아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제2계명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죄를 원죄라는 명목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수천 대 후손에까지 유전되고 있다는 궤변이 성립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이 계명보다 더 우월하고 강력한가? 칼뱅의 주장이 계명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둘째, 원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원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2,000년 전에 벌써 무효화되지 않았는가? 보혈로 씻기지 못하는 죄가 있겠는가? 2,000년 전에 없어진 죄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주장은 보혈을 모독하고 무효화시키려는 죄가 아닌가? 천주교에서 원죄는 세례를 받을 때 사함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세례는 보혈보다 더 강력한 것인가? 세례가 원죄를 사함 받는 상징은 될 수 있어도 사할 수는 없다. 오직 보혈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또 원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 원죄는 노아 때 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창세기 6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크고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그리고 노아의 식구 8명의 의인들만 남겨놓고 전 인류를 홍수로 멸망시키고 그 후에 노아의 자손들을 통해서 인간 재창조를 단행하셨다. 인간 재창조과정에서 원죄가 적용되는 인간을 또 창조하셨겠는가? 노아 홍수 전에 혹 죄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홍수 이후에는 원죄가 말소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넷째, 원죄를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터툴리안이다. 그리고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도 가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보다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원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사도 물론 그랬다. 그들이 원죄를 알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도 물론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보혈의 공로를 입지 못하고 죽었으니 모두 멸망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만일 원죄가 존재한다면 조물주는 태초에 인간 창조 때부터 원죄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사랑의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류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셨을까? 십자가 보혈이 있기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류가 원죄 때문에 멸망하였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창조주께서 그러한 모순의 세계를 창조하셨단 말인가?
이상의 내용이 조찬선 목사가 원죄론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도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볼 때 아주 독실한 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원죄론이 엉터리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야훼신은 최초의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너희들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다.(창세기 2장 17절) 그래서 원래는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아담이 죽음을 맞이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는 것인데 그 수명이 930세였다고 한다.
아담의 10대손까지 인간이 누린 수명 |
1.셋:912세 2.에노스:905세 3.계난:910세 4.마할랄렐:895세 5.야렛:962세 6.에녹:365세 7.므드셀라:969세 8.라멕:777세 9.노아:950세 10.셈:600세 |
* 6대손인 에녹의 수명이 짧은 것은 하나님의 기밀을 누설 시켰다 하여 야훼신이 불 뿜는 마차로 데려 갔기 때문임 |
그런데 웃기는 것은 오늘날의 인간의 수명이 기껏 70-80세를 헤아리고 최고로 장수했다고 토픽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고작 120-130세에 불과한 데 정작 선악과를 따먹은 대역죄를 범한 아담과 그 후손들이 평균 917.5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원래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한 영향이 몇 대에 걸쳐 내려갈 수 있으나 몇 십대 또는 몇 백대에 걸친 자손은 조상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게 마련이고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하더라도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구원(舊怨)의 관계가 희석되어 까마득히 잊혀지고 마는 것인데 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 후손은 오래 오래 살고,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태어난 현대인들은 그 죄값을 받아서 빨리 죽는다고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교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원죄론을 주장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음의 라즈니쉬의 주장처럼 저능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2) 원죄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라즈니쉬는 원죄가 아담과 이브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하지만 원죄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그 많은 나무 중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는 이 두 그루의 나무열매를 먹어서는 안된다.” 한 나무는 지식의 나무였고, 다른 한 나무는 영원한 생명나무였다.
어떤 아버지이길래 자신의 자식들이 현명하고 영리해지는 것을 가로막으며, 그들이 삶과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가? 그는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나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악마가 이브를 고무시키지 않았다면 당신을 비롯해 세상의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심지어 예수, 모세 등 그 모두가 에덴동산에서 풀을 뜯고 있을 것이다. 마치 들소처럼 완전히 만족한 상태에서 말이다. 껌조차도 아니고, 단지 목초만이 당신들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리학의 기초조차도 알지 못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에덴동산은 너무 커서 우리는 지금까지 어느 것이 그 나무들인지 발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아이에게 “절대 방안을 들여다보지 마라!”라고 말해보라. 그러면 영리한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뒤떨어진 아이조차 방안을 들여다보려고 할 것이다. 그는 기를 쓰며 방안을 들여다 볼 방도를 찾을 것이다. “무슨 일이지? 왜 방안을 들여다보면 안되지?”
누구든지 금지령을 받으면 오히려 호기심을 느낀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를 인용할 필요 없이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심리학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그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금지시킬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금지 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바보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에 대해 조금도 몰랐고, 게다가 남성우월주의자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딸(릴리스)을 죽였으니 살인자다. 그리고 생명과일을 먹을까봐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쫓았다.
▣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 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환생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이단으로 몰렸던 교파들의 신앙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잠깐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가 곧 잊혀진 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지학자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연구하여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과 조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의 성직자들 중에도 초기 기독교의 성인들처럼 윤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벨기에 가톨릭 교구의 메르시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윤회사상을 믿지는 않지만 윤회론이 가톨릭교회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했고, 영국 런던 성바울교회의 잉그 감독은 “윤회론과 근대 감리교 교리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말했으며, 감리교 목사인 레슬리 웨더헤드도 윤회론의 지지자였다. 서양의 대표적 지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윤회론을 믿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던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고대에는 그리스의 플라톤, 피타고라스, 플루타크 등과 로마의 대문호였던 버질, 에니우스를 비롯해 근세에는 쇼펜하우어, 헤겔, 볼테르, 에머슨, 발자크, 위고, 베토벤, 나폴레옹, 톨스토이, 블레이크, 브라우닝, 휘트먼, 벤저민 프랭클린, 헨리 포드 등이 윤회론을 믿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거대해진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황제이다“라고 까지 했을까?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는 진리를 왜곡한 대죄인이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진리가 오늘날 이토록 왜곡된 데 대해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비록 Bible의 내용 중 윤회, 전생에 관련된 구절을 다 삭제했다고 했으나 둘로스 데우․C(본명:천수남)의 저서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를 보면 아직도 삭제되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둘로스 데우․C는 그 자신이 기독교 보수신학을 나온 목회자라서 다른 목사들의 분노가 거셀 것이라 염려하면서도 하나님을 거룩한 진리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로 인하여 오염되거나 하나님의 참뜻이 왜곡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고 머리글에서 그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내용을 한 번 살펴 보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후세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과 내생이 있다는 것은 의심 없이 믿고 있으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모두 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만사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뿌리 없는 나무도 없듯이 전생이 있기 때문에 가는 곳이 있는 것이며 전생이 있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외면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회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전생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 보라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장 5~6절]
+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태복음 11장 13절~15절 ]
+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깨달았다[마태 17:11~14]
상기 말라기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너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리라한 즉,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가 요한의 몸으로 이미 너희 앞에 와 있다는 말씀이다.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못 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이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 11절~19절]
욥에게 시험과 고난이 닥치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장면이다. 욥은 어미의 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나왔다 해도 자기가 어미의 젖을 빨지 않았더라면(죽었다면) 지금 전생에서 평안히 누워자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 곳에 있는 임금들과 의사들과 편히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욥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와 같이 혹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빛도 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욥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은 악한 자들의 소요도 없고 곤비한 자도 평강을 얻으며 갇힌 자도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동일하며 종들도 상전에게 자유스러운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 1장 4절~5절]
상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아를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 중에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은 이미 예레미아의 생명이 잉태된 후이기 때문에 현생이라 할 수 있으나 어미의 복중에 짓기 전은 예레미야의 생명이 어미의 뱃 속에 잉태되지 전을 말하기 때문에 분명히 전생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함은 사람의 몸에 씨가 잉태하기 전이라는 말로서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뱃 속에 생명이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전생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으며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열방 중에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이다.
+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 4절, 9절 ~ 11절]
상기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전생과 윤회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윤회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돌고 있는데 이 세상을 떠났던 영혼이 다시 오는 것이며 다시 온 영혼이 떠나가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헌 옷을 갈아 입듯이 전생에 존재하고 있던 영혼이 몸만 바꿔 입고 이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는 영혼이 내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새 것이 하나도 없으며 이미 이전 세대, 즉 전생에 있던 것들이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다시 장래에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8:56~58]
엘리야(요한)같은 선지자도 영혼의 완성을 위해 환생해 오는 마당에 우리같은 범부가 단 한 번의 삶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교만함과 더불어 영적세계를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닌가? 석가모니도 여러 번 환생한 끝에 부처가 된 마당에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영혼이 어떻게 단 1회의 경험만으로 완전해질 수 있겠는가? 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주고서 그 시기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구원이 되고 안 믿은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보낸다는 게 합리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면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믿음의 기회조차 접하지 못한 채 훌륭한 삶을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 있단 말인가?
만약 인간에게 전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자마다 부귀빈천의 운명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평생 고난 속에 사는 사람들은 ‘욥’처럼 하느님이 시험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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