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之香 Atheism/바이블의 진실

바이블의 진실-이상훈 편저 12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9. 14:16

▣ 자연(自然) 파괴의 주범(主犯), 기독교

 

 

황필호 교수와 김상일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면 기독교가 자연파괴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유독 인간을 만들 때에만 김을 불어 넣으셨는데, 우리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는 온 누리의 온 밑까지 모두 김을 불어 넣으셨다고 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숨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함으로써 인간이 계속 특권 행사를 하고, 그러다 보니 지금 기독교 서방 세계는 자연 파괴, 환경 오염, 식량난의 심각한 생태학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반면에 동양의 종교들은 모든 산천과 생물을 신격화함으로써 자연 정복을 하지 못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고 신관의 문제이다. 헤브라이즘․기독교는 인격신관을 강조하여 인간중심적 사고 방식이 발전했고, 동양에서는 자연신관을 강조하여 자연중심적 사고 방식이 발전되어 내려 왔다. 여기에 양자는 모두 극단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일신고」에 나타난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인격신적이면서도 자기의 숨김을 모든 누리 속에 불어 넣으셨다고 함으로써 자연신적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지으면서도 자연 속에 내재해 계신 분이다. 만약 기독교의 야훼 하나님이 자기의 숨김을 만물 속에 불어 넣으셨다는 구절이 창세기에 한 번만 있었더라면 인류역사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숨김이 온 누리 속에 밑바닥에까지 퍼져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인도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엄두도 못낼 신관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인격신적 성격과 자연신적 성격을 종합하여 양극성적 유신론 혹은 범재신론으로 정의한 바 있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생태계문제에 무관심한 정도를 지나서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선 교리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다음에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했으며, 또한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세기 1:28~29)고 약속했다. 이런 축복과 약속은, 여기에 나오는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단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생태계 파괴의 권리를 인간에게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리안화이트는 이미 1967년에 발표한 「생태위기의 뿌리」라는 글에서 기독교의 반생태적 태도를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문순홍은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중심으로 위계질서화하는 이원론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애니미즘의 거부다. 애니미즘이란 환경의 모든 부분들이-살아있는 존재이건 살아있지 않은 존재이건-영 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모든 살아있는 실체의 존재권리를 인정한다. 기독교는 이를 부인하여 인간이외의 세상에 영이 살아 숨쉴 수 없도록 하였다. 화이트에 따르면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유대-기독교 전통은 신, 세계, 인간, 자연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시켰다고 한다. 화이트이 이런 주장은 앞에 인용한 창세기의 구절뿐만 아니라 노아홍수 이후에도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 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손에 붙이어졌음이라”(창세기 9:2)는 구절에서 여전히 신빙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볼 때도, 기독교윤리에 바탕을 둔 서양의 자본주의는 동양에 비해 훨씬 정교한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켜서 생태계 파괴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많은 학자가 동양종교들이 서양종교들보다 훨씬 더 생태감수성과 생태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환경친화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예수가 그의 가르침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느님이 창조한 자연을 인용할 정도로 열렬한 자연숭배자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한가지 논의가 환경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에서 환경 파괴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자연을 숭배하였다고 하나 앞에서 버트란트 러셀이 언급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예수가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열리지 않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한 것은, 아무리 제자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니 상징이니 변명해도 성인(聖人)의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신화학(比較神話學)의 석학인 캠벨도 성서(聖書)의 신화학(神話學)은 사람과 자연을 분리하고, 자연을 쫓아내는 사회지향적 신화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 신화학(神話學)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 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신화학 체계이다. 반면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민족의 신화학인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성서적(聖書的)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난다.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지게 된다.“

 

기독교의 이원론적 자연관과 물질중심의 이원론적 과학만능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파괴를 거리낌없이 자행하도록 방치하고 있으며,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주전체를 살아있는 생명으로 파악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스티븐호킹도 말한 바 있듯이 우주가 우주의 창조력 자체를 가지고 있다는 이 생각, 천지자체가 천지의 생성의 동력자체를 소유한 천지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서구문명이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세계관인 것이다. 이 우주는 창조 그 자체이다. 이와같이 우주가 우주의 창조력 자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즉 우주가 형상과 질료 그리고 동력 등의 모든 것을 자체로 구유하고 있다는 생각의 체계를 우리는 보통 유기체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은 서양철학사에서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하여 베르그송을 거쳐 화이트헤드로 집대성되었으며 지금 양자론 이후의 새로운 서양과학 물결을 지지하는 새로운 철학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알고보면 이 유기체적 세계관은 17세기에 동양에 왔던 선교사들을 통하여 동양으로부터 역수입된 사상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로 밝혀졌다.

 

▣ 죽어서 가는 천국 - 인간의 공포(지옥)와 탐욕(천국)을 먹고사는 종교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는 관념은 사람들에게 ‘공포’(지옥)와 ‘탐욕’(천국)을 일으킨다.

“주를 경외하고 주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으라”

그들은 한편으론 주의 용서와 자비, 사랑에 대해서 계속 말하면서 이 구절에서는 “주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을 겁주고 두려움에 떨게 하여 인간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시대에 교묘한 술수를 쓴 기독교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영원한 불지옥의 공포스런 장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을 끊임없이 고문하는 악마의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설교대 위에 놓인 성서를 꽝꽝 치며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들은 그런 설교로 여성들 사이에 공포를 자아낸다. 그들 설교의 성공여부는 오직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무의식, 즉 혼수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 설교장면 전체는 너무나 잔혹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여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남자를 사랑했다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들이 다른 남자들까지 탐했다면 어떻게 될까?

성서에는 “당신의 꿈까지도 기록될 것이다”라고 씌어있다. 만약 그대가 꿈 속에서라도 이웃의 부인과 사랑을 나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보는 완벽한 감시자이다. 하나님은 그대의 꿈까지 들여다 보고 계신다. 그대는 꿈조차 자유롭게 꿀 수 없다.

기독교 전체는 공포와 탐욕으로 먹고 산다. 공포와 탐욕은 인간의 약점이다. 인간은 죽음과 죽음 후의 일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면 그들은 무릎을 꿇고 입에 거품을 물고 하나님께 두 손 모아 빌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주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잠자고 있는 탐욕을 일깨운다; “만약 그대가 죄를 짓지 않는다면, 또 그대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대가 꿈꿀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과대망상병의 하나는 공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지옥을 위한 것이고, 탐욕은 천국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죽음 저 너머에 매달려 있는 당근을 주어보자. 그러면 그들은 계속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아무도 그 당근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누구도 천국에서 되돌아와 그대에게 사실 여부를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에서 되돌아온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두 개념은 아무 증거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더 큰 공포와 탐욕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대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도덕이 될 수 없고 노예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 그대는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고 그들의 아름다움과 기쁨, 그리고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거기에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독들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인류 전체를 거의 독으로 물들여 놓았다.

 

▣ 죄인 대량 생산공장 - 교회

 

교회는 죄인을 만드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前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조찬선 목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교회는 이처럼 모범적인 신도가 어떤 이유로 십일조 헌금을 한 번쯤 바치지 못하였거나 혹은 옛 친구를 만나 맥주라도 한 잔하면 무슨 비난이나 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불안을 느끼고 죄의식을 가짐으로써 저자세가 되게 하는 교육에 주력해 온 것 같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얻기보다는 도리어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 같다. 많은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화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x집사는 옛친구를 만나 맥주파티를 하다가 같은 교회 y장로에게 우연히 발각되었다. 그 장로는 교회에서 암암리에 x집사를 가짜집사라고 비난하였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갔다. 그리하여 그 집사는 맥주 한 잔으로 평생 가짜 신자로 몰려 장로 진급의 길도 막히고 또 위선자로 낙인 찍혀서 가는 곳마다 암암리에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장로는 하루도 술 없이는 살지 못하는 고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숨어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로라는 신분 때문에 위선과 기만을 계속해야만 했다. 문제는 맥주와 술이 아니다. 위선과 기만이 교회라는 구조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집사, 장로 그리고 목사도 교회라는 틀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위선과 기만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 집사와 장로가 교회 밖에서 살았다면 그들의 음주는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교회 안에 살기 위해서 신도들은 스스로를 위선의 죄인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 그것은 통성 기도 시간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도할 때는 대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이나 혹은 ‘부족한 종, 이 죄인’ 등으로 시작한다. 신도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 즉 노예로 격하시킨다.

이는 사랑과 자비의 우리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 예수님을 ‘노예 소유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요 15:15)라고 하였다. ‥‥‥ 부흥회가 열리면 그때는 교회가 애매한 신도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드는 ‘즉석 죄인 대량 생산공장’으로 변한다. ‥‥‥ 결과적으로 교회는 죄를 사하는 곳이 아니라 죄인을 만드는 곳으로 변모했다. 이것이 교회의 정당한 모습일까? ‥‥‥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모든 신도들은 교회가 떠나갈 듯한 통곡의 기도를 올린다. ‥‥‥ 그런데 집사쯤 되고 보면 체면상으로라도 일반 교인들보다는 좀 더 두드러진 고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집사가 그렇게 톤을 올리게 되면 옆자리에 있던 권사는 체면상 집사보다는 더 높은 고음을 발하며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쇼를 보일 만도 하다. 또 그들에게 비하면 장로는 말할 것도 없다. 안 나오는 눈물도 뿌려야 하고 콧물, 눈물로 뒤범벅 된 얼굴을 보여 주어야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연습을 거듭하는 동안에 그런 위선과 기만이 몸에 배여 생활화되고 부지중에 성격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통성 기도 후에 강사는 때를 놓칠 세라 계획했던 헌금을 강요하는 때도 있는데, 신도들은 마치 교도관 앞에 선 죄인의 심정으로 강사가 불러대는 액수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감사헌금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금이다. 그리고 그들은 의무감과 죄의식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는 의견도 있다.“

 

▣ 위선과 가식을 조장하는 종교

교회가 신도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위선’과 ‘기만’을 조장한다는 조찬선 목사의 주장은 라즈니쉬의 다음의 말을 통해서도 더욱 확실히 증명되고 있다.

“기독교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삶을 즐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지 말고 그대의 웃음과 즐거움, 유쾌함을 자제하도록 하라고 한다. (주변에 고통받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대는 웃고 춤추고 노래해서야 되겠는가? 웃지도 말고 아무 것도 즐기지 말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전체를 비참하게 만들어 왔다.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대의 행복을 그들과 나누고 그들 역시 웃을 수 있도록, 그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를 잘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욱 인간적인 행위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맛있게 먹는 것조차 죄가 된다. 그대는 미각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혀의 미각세포를 수술로 제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미각세포는 그대의 통제범위를 넘어선 기능이다. 자연적으로 단 것은 달게 느껴지고 쓴 것은 쓰게 느껴진다. 맛을 못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그런 척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람들을 위선에 빠뜨리고 가식적으로 만들고 있다. 맛도 느껴서는 안되고 사랑에 빠져서도 안되며, 웃어도 안되고 삶을 즐겨도 안된다.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 육체를 적으로 다루고 혹독하게 고문까지 가해야 한다. 고문이 미덕으로 통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사랑, 미각, 웃음 등을 선사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과연 누가 범죄자란 말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성기(性器)와 미각세포를 제거했어야 했다. 범죄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하나님일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죄의식만을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다.

기독교는 자살 외에는 대안을 남겨놓지 않고 있다. 서구 철학자들이 자살이 유일한 출구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의 핵심에 도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존주의의 밑바닥에는 세계전체를 비참하게 만들어 내일 아침에 다시 깨어날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기독교가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계속 살아가는가? 단지 이런 비참함을 계속 맛보기 위해...?

또 기독교는 천국에서 모든 쾌락을 즐길 수 있다면서 이 땅에서는 모든 쾌락을 저주하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로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다.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들은 그대가 천국에서 크나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덕을 행한 모든 성인들에게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땅에서는 독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천국에서는 독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확실한 모순이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천국에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자들을 준다면...... 이슬람교의 천국에서는 심지어 아름다운 소년들이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제공된다. 대부분의 성자들은 동성연애자들이요 성도착자들이다. 그들을 위해 천국에서도 어떤 준비가 돼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자들은 <호우리스(houris)>라고 불리우고, 동성연애자용 소년들 - 그들은 언제나 젊고 수염도 없어, 성자들이 그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성욕을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 그들은 <길메(gilme)>라고 불리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성을 저주하고, 천국에서는 이성연애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도 가능하니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는 순수한 프랑스 포도주가 흐르는 강도 있다. 술에 빠져 취하고, 거기에서 수영과 목욕을 해도 된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종교는 모든 쾌락을 저주한다. 여기에서 그대는 자기학대자가 되어야만 한다

교회에서는 의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란 말인가? 그대가 주위를 아무리 둘러본다 하더라도 죄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좋아하는, 신나고 유쾌한 모든 것들은 죄로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꿈 속에서조차도 어떠한 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사랑스런 눈초리로 여성을 쳐다 본 적이 없으며, 결코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 전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교황조차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누가 의로운 사람이란 말인가? 그대는 결코 의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그대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그대들은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짊어지고 다닌다. 예수를 제외하고 누구도 죄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도 죄없이 태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수의 탄생시에는 하나님까지 죄인이 되었다. 그들은, 성령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불쌍한 마리아를 잉태시킨 장본인은 바로 성령이다. 하나님은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나도록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유부녀를 그녀의 동의없이 범했으므로 예수는 단지 사생아일 뿐이며,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태초부터 죄인이 되었다. 먼저 하나님은 릴리스를 살해했고, 그 다음 유부녀인 마리아를 범했다. 하나님조차도 심판의 날에 떳떳이 설 자격이 없다. 오직 의인만이 심판할 수 있다. 누가 의인이란 말인가?“

 

▣ 변화와 개혁을 반대하는 종교

1)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인내하라

성서에는 “세상 끝날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는 빌미가 되어왔다.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천국을 보장받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생은 그가 죽고난 후에 얻게 될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다. 고통역시 마찬가지이다. 고통은 잠시잠깐의 문제에 불과하다. 70년의 생애는 존재의 영원성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내로써 고통을 감당하라.

인내는 기독교를 지탱하는 기둥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인내는 모든 반란과 혁명, 변화에 반하는 것이다. 인내는 민중을 깊은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아편이다. 민중들은 로봇과 같이 움직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창조했기 때문에 그대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쓰고 있다. 이런 언급이 바로 가난한 상태, 병든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혁명과 변화, 진화를 절대적으로 막고 있다.

 

2) 믿음과 소망의 종교

 

기독교가 세상에 믿음과 소망과 자비를 베풀어 왔다고 말한다.

예수는 “나를 믿어라”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칼 막스는 소망을 다른 말로 민중의 아편이라고 불렀다. 그는 옳았다.

누가 소망을 필요로 하는가? 부자는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 가난한 자, 병자, 죽어가는 자, 굶주리는 자, 구걸인이 소망을 필요로 한다. 무엇을 위한 소망인가? 다름아닌 내생에 엄청나게 보상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슬럼가로 변하면 매우 기뻐할 것 같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갖고, 순종하며, 교회에 다닐 것이므로 하나님은 무한히 기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다면 누가 하나님을 거들떠나 보겠는가? 그대는 점점 그대 자신의 신성에 다가갈 것이다. 내면에 있는 그대 자신의 제단을 발견할 때 바깥의 하나님은 허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하고 진실은 언제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소망은 그대로부터 현재를 빼앗아간다. 현재야말로 그대가 그대의 진실과 아름다움, 진리와 신성을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소망은 매우 교활한 전략이다.

소망은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망은 진보를 가로막았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몽상을 믿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진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즉 비참함 말고는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은 모든 제도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소망이 있으면 됐지 무슨 변화를 꿈꾸겠는가?

혁명이 일어나면 그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혁명에 휩쓸리면 그대는 기도할 수 없고 교회에 갈 수도 없으며, 안정된 신앙을 가지기 힘들지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신실한 신앙심을 지녔다면 이 사회와 이러한 구조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고, 끝까지 참아내야 할 것이다. 그대의 가난과 질병, 죽음과 그 밖의 모든 것은 그대를 연단시키기 위한 불같은 시험이다. 단지 조용히 입다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

 

기독교가 과연 세상의 도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버트란트 러셀의 얘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수많은 윤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하기로는 이 세상은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하였다고 한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예견했다. 그러므로 신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이 죄악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첫째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즉 강물이 범람하여 둑을 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은 죄악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만일 살인광(殺人狂)이 될 아이인 줄 알면서도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의 죄에 대해서는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한 신이 인간이 죄를 저지를 줄 미리 알았다면, 그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결정할 때부터 이런 죄악의 모든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명백하다. 대체로 기독교 이론은, 이 세상의 고통은 죄악을 씻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잘된 일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말할 것도 없이 자학(自虐)의 이론화에 지나지 않으며 대단히 졸렬한 이론이다. 나는 기독교도인 한 사람을 병원의 아동 병실로 초대하여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눈으로 보게 한 후, 이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버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한 번 주장해 보라고 하고 싶다. 이런 말을 하자면 그는 자기 마음 속의 모든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믿는 신과 마찬가지로 잔인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독단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더 나빴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히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에의 고문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불행한 여성이 수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고, 종교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가지 잔인한 일이 다 가해졌습니다. 세상을 돌이켜 볼 때, 여러분은 털끝만한 인간의 감정의 발전도, 형법상의 모든 개선도, 전쟁을 없앨 모든 방안도, 유색인종의 대우개선을 위한 모든 대책도, 또는 모든 노예제도의 완화나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진보도 세계의 조직화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반대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 역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한 일들을 보면 민족의 도덕적 진보나 인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3선 개헌 지지 운동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목사 등 교역자 242명은 1969년 9 월4일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고 3선 개헌을 「대통령의 용단」이라며 지지하고 나섰다.

▷ 유신헌법 지지 성명

1972년 「대한기독 교연합회」 등에서 유신헌법을 지지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기독교계는 정부가 내건 「구국의 유신이다 새 역사 창조하자」 등의 표어를 적극 홍보했다.

▷ 전두환 상임위원 장을 위한 조찬기도회

1980년 8월6일 롯데호텔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가 열렸다. 사회에 문만필 목사, 설교에 한경직 목사, 기도에 정진경 조향록 김지길 목사와 김인득 장로가 맡았다. 정진경 목사는 전 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해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기도했다. 이 기도회 는 KBS와 MBC를 통해 현장중계와 다음날 두 번에 걸쳐 녹화 중계 됐으며, 신군부 집권의 서막을 열어준 집회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 김 준곤 신현균 김신명 김창인 지원상 이봉성 유흥묵 장성칠 박정근 김용도 김종식 목사와 최태섭 장로 등이 참석했다.

 

가난을 먹고사는 종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그것은 크나큰 미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 가난한 사람들이 있게 되었는가? 한 편에서 그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그들을 카톨릭교도로 개종시킨다. 그 봉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봉사는 카톨릭교회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그대는 계속 고아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개종시킨다. 어떻게 카톨릭을 6억까지 늘일 수 있었는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때문이다. 그 봉사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대가 진정 가난을 없애는 데 관심이 있다면 가난의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대는 증상만을 치료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어떻게 그러한 것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을 최소한의 생존 수준에 붙들어 둘 뿐이요, 그들을 착취하는 지배세력을 계속 허용하는 것이다. 그대는 이 악순환을 아는가?

자본가는 계속 교회에 기부한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돕는다. 왜냐하면 노동자와 노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예조차도 그들의 주인에게서 먹을 것을 얻는다.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만약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거나,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많은 돈을 잃을 것이다.

자본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사라질 것이다. 누가 자본가를 위해 일할 것인가? 자본가가 누구를 착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봉사는 매우 교활한 게임이다. 부자는 계속 그의 착취물의 일부를 조금 떼어서 교회에 기부한다. 교회는 계속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원시인들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양육한다. 그들은 살아있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없이는 사회의 착취구조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 자본가는 계속 돈을 자선금으로 내 놓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그는 계속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성직자는 그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그는 중개인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게 살고 있다. 수백만의 선교사가 세상에 나가 있지만 그들은 봉사라는 미명하에 착취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예수에게서 봉사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

그런데 왜 봉사해야 하는가? 사실, 논리적으로 예수는 말했다. “가난한 자들은 축복받을지니, 그들은 천국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라. 부자는 천국으로 갈 수 없다. 낙타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으나, 부자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가? 봉사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부자이다. 부자의 돈을 훔치고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라. 그러면 그들도 신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다. 가난은 예수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이다. 예수에 따르면 가난한 것은 위대한 것이다. 나는 가난을 증오한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부자들을 옹호하는, 그러한 말을 한 예수를 증오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또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는가?

기독교 국가에서조차도 엄청난 가난이 있다.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서조차 3백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추운 겨울에 그들은 죽어간다. 기독교가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이미 기독교인들이므로 돕건 돕지 않건 간에 신의 왕국을 물려받을 것이다.

미국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세계에 선교사들을 계속 파견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자국의 빈자들을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봉사의 기준이 명백해졌다. 봉사는 가난한 이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은 매우 중요한 말을 한 바 있다.

“가난이 사라진다면 종교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겠는가?”

만약 죽음이 없다면 모든 교회들과 종교들은 완전히 쓸모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들은 빈곤과 죽음, 질병과 고아들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산아제한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산아제한은 모든 빈곤을 몰아낼 수 있고 고아들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수 있다.

그럼 불쌍한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그녀에게 노벨상을 주겠는가? 고아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는 사라질 것이다. 가난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끊임없이 모든 산아제한법에 반대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종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이나 학교를 열면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비심으로 무언가를 주고 어떤 덕을 행하는 것이 가치있는 행위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 반민족적 종교 - 기독교

 

부모형제까지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한 예수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에게는 국가나 민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神)이고 예수이다. 그러한 반민족적인 요소로 인해 터진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한때 천주교인이었으나, 천주교도를 처형시키게 된 동기는 황사영이 쓴 편지를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가 발각된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 백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다.

① 서양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금의 요구

②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조선에 보낼 것

조선을 청국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을 감독케 할 것.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척과 강한 병사 5, 6만명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선교를 쉽도록 할 것.

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 기독교도들에게는 국가와 민족보다도 전도(傳導)가 더 중요했던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전도를 위하여 우리 나라를 청국에 부속시키고, 외국군에게 우리 나라에 쳐들어오라는 것은 이완용보다 더 큰 망국행위가 틀림없다. 이러한 망국행위를 역사교과서에 상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동조자들이 많은 까닭일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과 한국이 전쟁을 한다면 이들은 이스라엘편을 들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지금도 황사영의 후예인 이들은 단군성전 건립을 반대하며, 단군역사의 사실성을 부인하고 왜곡하며 전설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 일본사람(식민사관)보다 더하다 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도의 문제점은 존유태적(尊猶太的) 선민의식에 입각한 구약성서의 민족주의적 독소를 전혀 여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명확하게 간파한 사람이 바로 김용옥 교수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인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이지 유대교인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인이 유대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유대교라는 것은 반드시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혈통성(the Jews) 위에서 성립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기독교인일 수 있고 유대교인일 수 없는 것은, 기독교가 유대교가 갖는 혈통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상대성을 보편화시킨데서 기독교는 성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종교적 의미는 철저히 보편적이고 철저히 추상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이라 함은 유대민족이 갖는 민족 문화적 성격이 역사적 이해의 방편으로는 고려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곧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는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는 유대인의 테두리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곧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 민족의 신도(shintoism)의 테두리에 머물러야 하는 것과 같다. 신사참배(神社參拜)에 굴욕을 느꼈던 사람들이 왜 야훼참배에는 그렇게 일고의 반성도 없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보는 눈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야훼는 어디까지나 유대민족의 신(神)이다. 야훼는 분명히 기독교의 신과는 동일해서는 안된다. 한국인은 야훼에게 객관적 종교사적 의미를 먼저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난 후에 기껏해야 그 물음이 나에게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 이상을 취해서는 안된다. 내가 한국기독교인들이 막연하게 구약에 대해 갖고 있는 경학관(經學觀)을 살펴볼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유대인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기독교 경학관은 전통적 유교 경학관의 오류의 답습이라는 연속성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한국의 기독교신학이 하여야 할 첫 사명은 기독교의 이해 자체에서 야훼 존재상의 문화적 성격을 철저히 탈색해 내버리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나 생활규범 속에서 구약의 명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절대적 진리로서 강요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암암리 자신을 유대인, 그것도 맹목적 유대인으로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조선왕조실록』은 한 장도 거들떠보지 않은 사람들이 남의 민족의 역사책은 왜 무오류적(無誤謬的)으로 맹신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유대민족의 역사기록이다. 단지 그 역사의 성격이 야훼의 구속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구약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유대민족은 자기들의 문화를 우리 조선민족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나라 지성인들이 자기네들의 『이조실록』(즉 여기서는 『구약』을 가리킴)을 가지고 운운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유대 문명론은 유대인 자신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유대인들의 멘탈리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유대인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아닌 바로 서구문명의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다! 이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는 럿셀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로마제국의 환영의 잔재일 뿐이다. 정치적 제국주의는 현실적으로 사라져도 문화적 제국주의는 오래 살아 남는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찾은 글인데 어느 정직한 성서학자의 고백이다.

“ 한국을 보면 미국보다도 유대인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면 여호와란 말을 쓰는데 성경을 보면 예수나 그 제자들도 여호와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건 이미 과거의 유물이니까. 제가 구약학자지만 말합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온 것은 연속이 아닌데 마치 우리가 유대인인 양 여호와를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구약이라는 것을 예수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시각이 곧 기독교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시각을 거치지 않고 구약에 있는 것을 그대로 직수입해서 쓰는 것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유대인이 크리스챤이 아닌 것처럼! 샌더슨인가 하는 유대인 신학자가 기독교와 대화를 해서 쓴 책에 보면, 예컨대 예수에 대한 정보가 뭐냐고 물어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흔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로 제시하지요. 그러면 샌더슨이 하는 말이 그 네 자료가 다 중복됐으니 중복 안 된 것만 합하라고 하겠죠. 그래서 중복된 것을 빼고 합해 봤더니 한 세 페이지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너희가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알아? 이러는 거지요. 사실 맞는 말이지요. 이 말은 유대인이 우리를 놀리려고 한 말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30세까지의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은 그대로 인정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마치 한국 사람인 것처럼, 예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양 생각하는 자세는 고쳐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을 가만히 뜯어 보면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상하게 낳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거지요. 여기엔 낳고 죽는 것만 있지 33년의 삶이 쏙 빠져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호와神’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서는 자신을 섬기는 유대민족을 위해 다른 민족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신이 우리민족의 민족신인 환인,환웅,단군을 몰아내고 이 땅의 하느님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신들이 여호와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의지할 곳이 없을 정도로 된 것은, 우리민족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민족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벌판을 역사무대에서 상실하고 한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이며, 이후로 수백 번의 외침을 받으며, 민족의 뿌리에 해당하는 역사를 상실하면서 민족정신과 더불어 민족의 신(神)도 같이 잊혀져 간 것이다. 이른바 중독(中毒, 중화사상의 유교史觀), 일독(日毒,내선일체의 식민사관(植民史觀)), 양독(洋毒,기독교史觀)에 차례로 감염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무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햇빛만 중요한 줄 알고 그 뿌리를 부정하고 단절한다면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하느님신앙만 중요한 줄 알고, 자신의 조상들을 부정하면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에 ‘너의 생명은 오직 부모로부터요, 부모는 하늘(하느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오직 너희 조상을 잘 섬긴 연후에야 하느님을 경배할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는 걸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만 믿고, 조상들의 영혼을 마귀, 사탄으로 몰아 박대하고 있다. 하긴 하나님과 같이 있던 천사들도 타락하고, 하나님 최초의 걸작품인 아담과 이브도 타락했다고 성경에 쓰여 있으니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유일신뿐이리라.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도 믿을 만한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황사영의 후예들,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추악한 반민족적 행위를 저질렀는지도 한 번 살펴보자.

▷ 신사참배 결의

* 1936년 1월29일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총독부에서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6월에는 신사참배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이 신사참배 결의

* 1938년 9월 장로교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기 목사)에서 평양노회장 박응월 목사가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 가결.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결의 성명을 발 표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 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함』

▷ 기독교지도자들의 친일행각

*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목사등이 1937년 각도 순회시국강 연에 나서서, 황국신민으로 부일협력할 것을 주장.

* 박희도 목사는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한 명으로,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발간했다. 부일협력을 촉구하는 논설 등을 실었다.

* 신흥우 목사는 당시 YMCA 총무로 재직중이었다. 신목사는 「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조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 이라고 주장했다.

* 김활란(이화여대 초대총장) 모윤숙(시인) 유각경(YMCA 초대 회장) 장정심(기독교여자절제 회 총무) 고황경 서은숙(배화여고 교장) 등 여성지도자 들은 신사참배 내선 일체를 강조하는 강연회 강사로 나섰고 정신대 참여를 호소하기까지 했다.

▷ 장로교와 고려파의 분열

1945년 해방후, 신사참배를 순응했던 그룹과 이를 거부하고 순교 투옥 등 고난의 길을 걸었던 그룹과의 분열. 굴종자들은 「교회를 지켜내지 않았느냐」는 논리로 해명과 회개를 거부했다.

 

최근 발간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친일문제와 관련 이제까지 성역으로 남겨진 부분 가운데 하나였던 기독교 분야에 대해 구체적 사건을 분석하며 다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말 기독교의 친일행위를 참회하고 무너진 양심을 회복하는 한편, 실추된 위상을 다시 세워야한다고 주장한다.

또 분열한 개신교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과거사 청산과 공적인 참회를 통한 고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인 최덕성 고신대 교수는 책에서 "한국기독교가 신인공로(神人共怒)할 과거사를 가졌으면서도 이를 공적으로 청산한 바 없다. 교회는 단지 침략의 피해자로만 여겨왔고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반인도적 범죄를 각자 하느님과 해결해야할 문제로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약간의 타협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왔다. 교권주의 이중성을 골격으로 한 불순한 친일파 전통이 교회의 건전한 좌표설정과 개혁을 가로막아 한국교회를 불신임하게 한다"고 덧붙인다.

책에 따르면 장로교 통합측 교단이 1997년 행한 주기철 목사의 복권을 둘러싼 일련의 교계 주변 일들이 친일파 전통의 극명한 표현이다. 주 목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39년 종교재판에 회부돼 목사직을 면직당한 뒤 감옥에서 숨진 인물.

저자는 그를 복권하는 마당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기본적 시각이 '죄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참회가 전제되지 않은 채 과거 결정의 유효성을 유지하고 목사 복권이라는 해프닝을 연출했다는 평가다. 역시 우상숭배 반대로 제명당한 한부선 목사 해벌사건(1950) 신사참배 취소성명서 사건(1954)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출판금지 사건(1958) 한신대 역사날조(1990) 착종논리(1993) 등 사례로 들며 친일파 전통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기독교가 광복후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는 민족사적인 면에서도 비판적으로 논의돼야할 주제"라며 인사들과 더불어 신사참배 거부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차분한 마음으로 과거사를 검토할 때"라고 말한다.

교권이 우여곡절 끝에 이어지고 있지만 시간적 거리감으로 솔직한 공개 논의를 통한 비판적 자기반성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아가 일본교회가 1995년 참회고백 성명서를 통해 *천황숭배 참회 *전쟁협조 참회 *신사참배 강요 참회 *한국에 대한 죄 참회의 뜻을 밝힌 점을 들어 한국교회의 양심선언과 고백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과 더불어 친일파가 오히려 득세했듯이 기독교의 교회사 역시 부일 협력자들과 그 후손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문화제국주의

 

러셀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환영’이라고 보았다. 왜 그랬을까?

제국주의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에 있다. 용산에 미군부대가 없어져도 미국이라는 문화의 지배는 이 땅에 오래 살아 남는다. 당(唐)나라 문명이 통일신라문명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했듯이‥‥‥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은 사라져도 로마제국의 환영(幻影), 기독교 문화제국주의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어떤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의 도올 김용옥선생의 글을 읽으면 문화제국주의의 본질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쉽게 국제적 여론을 피해가며 그 나라를 장악하는 길은 우선 그 나라에 우리나라 말을 잘하고 우리나라 풍속과 종교를 잘 알고 우리나라 풍속과 종교를 잘 알고 우리나라 문명의 모든 것을 숭상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확보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우리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언어의 공통분모를 가진 그들을 대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숫자를 될 수 있는 대로 늘이기 위하여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명분아래 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들을 서울대, 연대, 고대, 이화대 등 명문의 학교에 유학시켜 프라이드를 줄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한복을 입게되고 한옥에 살게되며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를 모시는 단군교를 믿게 된다(우리나라의 모습이 한복-한옥-단군교-된장-꼬치장-김치밖에는 없다는 가설아래서 상기의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르트나 커피나 양고기요리보단 된장이나 꼬치장이나 김치 야채요리를 더 좋아하게 된다. 이들은 귀국하여 그 나라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선각자로서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종교적,정치적,문화적 리더로서 모든 러더쉽을 장악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단군교를 퍼뜨리고 단군교와 같이 퍼져들어갈 많은 문화적 소산과 생활습관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런 유학생들 작전외로도 한국의 단군교선교사를 그 나라에 파견할 것이다. 이 단군 선교사는 한국의 거대한 강남교회들의 연보돈의 지원을 받아(한국의 교회들이 모두 단군교교회라는 가설에서) 그 현지에 가서 단군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중동나라사람들이 알라신을 버리고 우리나라 단군할아버지을 경배하며, 길가 방방 곳곳에 우리나라 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같은 목장승, 석장승이 우뚝우뚝 서고 그들은 출근길에도 거기 서서 절을 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단군선교사들은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가르쳐서 사상의학대학을 세우고, 그들이 모두 한국약초풀뿌리에 의하여 병을 치료하도록 한다. 그들은 점점 한국보약과 침,뜸에 길들여져서 그들의 고유한 의학과 삶의 지혜를 망각해버릴 것이다. 그리곤 점점 그들의 가옥형태를 아름다운 한옥체제로 바꾸며 대통령의 관저까지 우리나라 99칸짜리 개와집처럼 만든다. 그들은 된장과 꼬치장과 김치를 먹고 고름 댕기달린 한복을 입는다. 이런 모든 생활습관에 길들여지면 그들은 그들의 사막문화에서 특이하게 발생했던 배두인족의 강인한 문명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고 점점 사막에서는 살기 싫게 되고 사계절 온대농경문화인 한국의 온화하고 온후한 생활습관을 더 고등한 문명의 체계(higher civilization)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전면적으로 진행되게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그 나라에게 이권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무엇이든지 한국적인 것이 없으면 도무지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국의 물자와 문명의 무형의 모든 것까지 계속 팔아먹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형국을 그 문명에 내재하는 내장장치로서 확보하게 된다. 웬만큼 한국군대나 외교관이 철수를 해도 그 나라의 지배는 낙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명의 환골탈태현상이 우리나라사람들에 의하여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시동만 걸었다) 그 중동나라 자국민들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열심히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일 때, 그것보다 더 달갑고 고마운 일은 없는 것이다. 이런 매우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가설의 체계는 결코 가설이 아니라 해방후 40년간 한국과 미국사이에서 이루어진 정확한 현실이다. ‥‥‥

한국 최근세사의 문화사의 최대의 비극,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장기 지속되고 있는 조선문화 황폐화, 말살화정책인 대처-비구싸움 및 그로 인한 종단내분은 바로 이러한 미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의 일환의 음모로서 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노망끼 늙은이 이승만이 벌린 정치조작극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대처-비구싸움을 붙인 “불교정화유시”는 사사오입개헌의 준비를 위하여 국민의 반독재적 관심을 호도시키고 혼란위기의식을 조장시키기 위한 위장술책이었으나 불교계에선 이러한 음모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 싸움의 기만술책에 휘말려 들어가 버릴 뿐이었고 한국불교는 이로써 종단의 자주성을 상실하는 “관권불교”와 “폭력불교”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 미제국주의와 그 앞잽이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연결되는 군사독재정권은 처절하게 조직적으로 한국민족세력 혹은 내가 말하는 반미(反美)아닌 비미(非美)적 문화(인식)의 가능성인 불교세력을 탄압, 분쇄시켰다. 그러한 조직적 탄압의 확증은 첫째, 대처-비구의 싸움조장이며 둘째는, 철저하게도 승려의 교육의 기회를 조직적으로 봉쇄시켰으며 셋째로는, 우리나라에서 고려대학과 더불어 유일한 민족재단학원인 동국대학교의 탄압과 관권화이다. ‥‥‥

미군놈들이 한국에 와서 상대하고 대접해준 한국사람들, 즉 그 당시 미국놈들하고 짝짝궁이 맞아서 출세한 놈들, 그 때 한국을 대변하여 향후 한국을 지배하는 어떤 틀을 농간한 인물들의 공통분모는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친미기독교도들이야말로 현대 한국의 상류사회를 독점한 인물들이었다. ‥‥‥ 한국기독교세력의 팽창시기는 정확하게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시기와 일치한다. 기독교가 군사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이란 우익팟쇼정권이다. 파시스트의 특징은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를 그 종교로 삼는다는데 있다. 2차대전 이후의 세계냉전체제에 있어서 반공이란 친미를 의미한다. 친미의 종교적 표현이란 곧 기독교다!

그렇다면 기독교세력의 팽창시기와 우익독재정권의 강화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 군사독재와 가장 강렬하게 대항한 세력이 바로 기독교세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제제국주주의의 브레인드레인 정책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박애주의적인 개방교육의 탈을 쓰기 때문에, 그 제국주의의 주체에 대하여 찬동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동시에 키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브레인드레인의 특색은 친제국과 반제국을 동시에 양육한다는데 그 뿌리깊은 반동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해방후 모든 반미제국주의의 사상형태는 바로 그것이 미국유학생들에 의해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지 쏘련과 중공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미국은 미제국의 유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반미(反美)를 가르친다. 미국은 반미 그 자체를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들이 콘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설정한다. ‥‥‥ 김지하를 죽였던 것도 미국이고 김지하를 살려낸 것도 미국이다. 김대중을 조선민중의 우상으로 만들어준 것도 미국이고 그를 조선민중의 똥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미국이다. 문익환을 교육시키느라고 돈댄 것도 미국이고 문익환을 반미투쟁의 기수로 키우느라고 돈댄 것도 미국이다. 한국의 모든 반미독재투쟁의 돈은 가난한 김일성 형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유럽의 기독교문화권에서 온다. 나 도올 김용옥도 이런 미제국주의의 자본으로 키워진 놈이다. 심지어 민중불교운동자금까지 유럽기독교재단에서 들어왔다고 한다면 또 말해 무엇하리요?“

 

☞ 국수주의, 민족주의, 세계주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민족주의이다. 이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와 구분하지 못하고 세계주의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세계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주의는 언뜻 보기에 약소민족이나 강한 민족이나 자유와 평등을 가지는 좋은 사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한 나라가 세계주의를 부르짖음은, 약소민족을 침략하자는 술책이요, 또 약한 나라가 세계주의를 부르짖음은 다른 나라의 종놈이 되자는 것이라고 안호상 박사는 역설한다.

“서기 19세기에 스페인이 아르헨티나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19세기에 서양민족들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호주 등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 때, 예수교를 앞세우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교는 한 때 서양 사람들이 식민지 만드는 앞잡이요 주동자라는 말까지 들었던 것이다.”

즉 침략한 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들은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네 민족 내 민족 따질 게 뭐가 있냐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까 ‘독립운동’같은 것은 다 쓸데없는 짓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다같이 섬기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다고 침략자들이 피지배민족을 노예취급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준 적이 역사상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 등에서 1억2천만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무차별 살상을 당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려 갔으며, 지금 그 후손들은 혼혈잡탕족이 되거나 그 사회의 최하층 빈민으로 대접받으며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음을 아는가? 그 넓은 땅덩어리의 원래 주인은 누구인가?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발견했는가? 그럼 콜럼버스가 그 땅에 들어 갔을 때 살던 원주민들은 인간도 아닌가? 지금 승리한 자들의 사관, 서구의 사관으로만 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콜럼버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원주민들을 배신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콜럼버스의 만행을 시작으로 기독교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그들의 땅을 모조리 차지했던 것이다. 조찬선 목사의 저서 <기독교 죄악사>를 보면 기독교 침략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한 짓을 저질렀는지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주민에게 콜럼버스는 ‘악마’ 그 자체였다. 역사의 진실을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는 원주민이며, 결국 그 땅의 주인은 원주민이며 따라서 지금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땅을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원주민들의 땅찾기 운동은 이미 시작되어 법정소송이 진행 중인 곳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기 민족만 잘 났다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노예로 만드는 것이 ‘국수주의’이며, 자기 민족의 전통과 장점을 잘 보존하고 남의 민족의 장점을 잘 받아 들이는 것이 ‘민족주의’이며, 다른 민족도 동등하게 하나의 민족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세계는 하나’를 주장하더라도 민족을 바탕으로 주장하여야 하는 것이지, 세계 민족들을 다 섞어 비빔밥을 만들겠다는 발상을 해서는 안된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주의를 지향하지 않고 민족주의 없는 세계주의만 주장하다가는 무족보적 혼혈잡탕주의의 도가니 속에 녹아 역사의 저 편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 각 나라마다 그들의 민족사 교육을 시키는가? 세계주의만 주장하려면 세계 각 나라들의 민족사 교육을 모두 반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만큼 희한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자기 나라의 엄연히 실존했던 조상을 ‘우상’이라고 하고, 세계주의란 미명아래 ‘민족’이란 단어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내세워 국수주의에 빠져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나 있는가? 오히려 지나치게 침략을 당해 왔고 그 결과로 유교의 ‘중국 사대주의’, 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일본 사대주의’, 해방후 ‘서양 사대주의’ 기독교의 ‘유대 사대주의’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지 않았는가? 한 번 돌이켜 보기를 바란다.

 

민족문화 파괴자

 

주강현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책 「21세기 우리문화」(한겨레신문사 간)를 통해 기독교 전래를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 으로 꼽으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나라의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자주정신을 훼손했는지 폭로하고 있다.

얼마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유교문화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듯이 `기독교가 죽어야(?) 민족문화가 산다 는 논지의 이 글은 기독교문화에 대한 일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성에 가려 본질이 희석된 데다 해방 후 숭미사상이 일반화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처럼 왜곡됐다"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주민란,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주강현 소장의 비판의 화살은 `교육가와 자선가로 위장한 초기 개신교 선교사에게 집중된다. 1884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알렌은 운산광산을 소개해 거금을 챙기고 전차 부설권을 얻어낸 사업가이며, 언더우드 역시 설탕과 석유 등을 수입해 많은 이득을 올린 `백만장자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또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은 "한인은 어린애와 같이 천진하기 때문에 독립할 처지가 못된다"고 친일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웰스는" 을사조약이 조인된 날은 후대에 한국의 독립기념일로 지켜지리라고 확신한다"며 일제의 침략을 미화했다.

게일도 당시의 의병활동을 가리켜 "거짓 애국의 미친듯한 광란"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존스와 스크랜튼은 이토 통감을 만난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통감의 시정에 동정을 갖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초연한 태도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주소장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거세게 불어닥친 대부흥운동의 열풍에 대해"신도들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어 일제의 교묘한 구조적 억압을 한국인들이 수용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난했으며 일제말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선교사들은 어느 경우에나 거짓 논리로 무장하고 순교를 각오한 철저한 투쟁을 거부했다"고 꼬집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파괴한 사례로는 마을굿이나 장승제 등 민간신앙을 억압한 것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란 이름으로 금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 민족문화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편견은 뿌리깊은 백인우월주의에서 비롯됐으며 외국의 문물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린20대 애숭이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주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썼다"고 심경을 털어놓은 뒤 "교회가 민족의 삶과 일치하는 문화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제안했다.

기독교인들의 민족문화 파괴행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서 민족문화와 관련된 행사를 할라치면 데모를 하고 반대를 하고 있고, 단군동상 파괴는 물론이고 민족문화재인 불상, 장승 등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 이 철부지들을 어이할꼬 ..........

 

▣ 반역사적(反歷史的) 종교 - 인류의 역사 6천년인가?

 

성경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태어난 이래 인류는 약 600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를 6000년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담이 130세 때에 아들인 “셋”을 낳았고 셋은 105세 때 “에노스”를 낳았으며 에노스는 92세때 “게난”을 낳고 하면서 22대째인 야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연대를 거론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41대의 족보를 열거하고 있으며 예수의 탄생(B.C. 4년)즈음부터 서력 기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6000의 기간이 추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6천년 전에 세상을 창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도에서 마샬(Marshall)이라는 기독교인이 모헨조다로(MohanjoDaro),하라파(Harappa) 등 봄베이에 비견되는 대도시를 발굴했는데 기독교인인 그조차도 다음과 같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도시의 역사를 7천년 이하로 잡을 수 없다. 그 역사를 7천년 이하로 보는 것은 이치에도 닿지 않을 뿐 아니라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그 도시의 역사를 6천년 미만으로 잡아야 하겠으나 과학자로서 나는 최소한 7천년 이상 잡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