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우침의 경지와 하나님의 나라
불경의 ‘해탈’의 경지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대답은 똑같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불경『원각경 보안보살장』을 보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 있다’ 즉 ‘心卽是佛’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누가복음 17:20~21』에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 예수의 가르침이나 ‘네 마음이 곧 부처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 진정한 보물
불경『소송경(小誦經)』『잡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6:19~20』『요한복음 17:14~16』에서 세속적인 재물은 참다운 보물이 아니며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다운 보물은 자비, 경건, 절제, 침착함’이라고 가르친 석가모니의 말씀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은 똑같으며 그 다음에 계속되는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고 도둑이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을 가지고 떠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똑같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엄청나게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은 서로가 서로의 경전을 옮겨놓은 듯이 똑같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대단한 ‘경전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평등한 사랑
불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석가모니의 길고 긴 설법 내용 가운데서 그 핵심부분만을 간단히 추려내어 다이제스트처럼 축약시켜 놓은 대목이 성경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성경『마태복음 5:39~47』의 경우도 이와같은 예(例)라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떤 차별도 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의 비를 내린다고 했듯이 예수 또한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하나님이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 서로 돕고 존중하라
불경『백유경(百喩經)』과 성경『고린도전서 12:14~31』에서는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석가모니는 뱀의 머리와 꼬리를 비유해서 설법했고, 바울은 같은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몸과 지체(肢體)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불경과 성경이 똑같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교단의 화합과 결집이었다. 머리라고 해서 귀중하고 꼬리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자기만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다가는 뱀의 몸통은 물론 머리와 꼬리 전체가 다 죽는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석가모니의 수명과 예수의 수명
불경『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는 낳고 죽는 일에서 벗어난 분이요,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까지도 그 수명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머무르며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깨우치고 지켜주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져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영원히 살아 있으되, 중생들의 깨우침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잠시 보였을 뿐이라고 불경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24:13~53』『마가복음 16:1~20』『마태복음 28:5~20』에서 예수도 이와 똑같이 세상 끝날이 있음을 알려 주고 그들을 구원에 들게 하기 위하여 잠시 그 모습을 이 세상에 보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 갔을 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깨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도 그 수명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無量壽)니 영생(永生)이요, 예수도 영생(永生)이라, 불경과 성경은 교조(敎祖)의 죽음 그 이후까지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 무덤에서 일어나는 기적
불경에는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성경『마가복음 16:1~6』『누가복음 24:1~6』『마태복음 28:1~4』『요한복음 20:1~14』에서는 ‘불경의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시켜 놓고 있다.
『미린다 왕문경』에서 나아가세나 존자가 ‘향이나 화환이나 의복 중 한 가지를 탑, 묘에 바치면 죽은 자를 묻은 탑이나 묘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으며 무덤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은 이미 불경의 『미린다 왕문경』에 이론과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 이른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기타
석가는 49일 단식했을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파견했다.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했다.
석가는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건넜다.
석가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했다.
불경과 신약성서가 왜 이렇게 같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인도에서의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와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계 등을 알면 자동적으로 풀리는 문제이다.
영지주의가 활짝 꽃 피었을 당시는(서기 80년 ~200년) 그리이스-로마 세계와 극동 지역간의 무역로가 열리고 있었던 중이었고, 불교 포교사들은 여러세대에 걸쳐 알레산드리아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이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225년경)가 인도의 브라만교도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전승을 이단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불교나 힌두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영지주의 복음서인 『도마복음서』에 있었던 말씀 중에 ‘하느님은 너희들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다 『도마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을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하다.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사상이 실크로드를 거쳐 이스라엘에까지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예수 자신이 인도와 간다라, 티벳트에서 배워 왔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불교적인 색채들이 비단 영지주의 복음서뿐 아니라 필자가 앞에서 Bible과 불경을 비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소위 ‘정경(正經)’으로 분류해 놓은 복음서에서조차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불교적인 요소들을 빼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예수가 영적인 스승이었다기보다는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종말을 예언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뿐이다. 다음의 비교표 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
관련된 불경의 내용 | ||
2:8 ~14 |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
본생경 |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
21~24 |
할례와 이름짓기 |
|
이름 지어주기 의식 |
25~35 |
시므온의 예언 |
|
아시타의 예언 |
4:1 ~13 |
유혹, 금식, 사탄과의 대화 |
불본행집경 |
고오타마의 금식과 악마 마라와의 대화 |
6:20~22 |
팔복의 가르침 |
간법165~68 |
진정한 행복 |
27~36 |
분노하지 말라 |
280~81 |
분노하지 말라 |
37~38 |
판단하지 말라 |
271~72 |
판단하지 말라 |
39 |
장님의 인도와 개천에 빠짐 |
무문 9.7 |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짐 |
43~45 |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
간법 258 |
어리석은 자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
46~49 |
잘 지어진 집과 나쁘게 지어진 집 |
간법 219~220 |
지붕이 잘된 집과 좋지 못한 집 |
7:36~38 |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여인 |
불본행집행 |
고오타마의 발 아래에 엎드린 여인 |
9:28~29 |
모습의 변화와 얼굴의 빛남 |
장아함경 16 |
고오타마의 피부가 밝게 빛나다 |
57~62 |
집 없이 사는 것이 좋다 |
법구경 91~2 |
집없이 사는 생활 |
10:1 |
칠십 명의 선교 사업 |
율장 |
육십 명의 사명 |
11:34 |
눈은 등불이다 |
무문 22.5 |
등불을 든 현명한 사람 |
37~39 |
내면의 사악함 |
간법 2 |
내면의 사악함 |
12:16~21 |
하늘의 보물을 갖지 못하다가 갑자기 죽은 부자 |
무문 1.20~22 |
하늘에 보물을 간직하지 못한 부유한 바보는 죽을 수밖에 없다 |
22~31 |
걱정하지 말라 |
법구경 92~3 |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 |
33 |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하늘의 보물 |
무문 10.11 |
도둑으로부터 안전한 하늘의 보물 |
15:11~32 |
탕자의 비유 |
법화경4 |
탕자의 비유 |
16:13 |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
무문 13.5 |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
* 간법: 간다라어 법구경, 무문:무문자설경 |
[4부] 종교회의
제1차 종교회의 (니케아) : 하느님이 되어 버린 예수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삼위일체를 결의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 마리아를 하나님(신)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 예수의 이중성(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에 대한 신조 도입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 인류의 타락 누구의 죄인가?
▷ 천국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루시퍼)이 일으킨 쿠데타
▷ 자신(하나님)의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
▷ 삼위일체 - 애당초부터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
1. 제1차 종교회의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①회의를 사회했고 ②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과 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그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미트라 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후술할 것임)
그러나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이태리,루마니아,독일,헝가리,불가리아,터기,페르시아,아르메니아,시리아,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즉,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월 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바꾸었다. 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
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 크리스마스
12월 25일(크리스마스)은 예수가 태어난 날로서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며 이제는 전 세계 인류가 함께 축하하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인가?
실상은 정확한 예수의 탄생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12월25일은 조로아스터교와 로마인들의 태양신을 맞이하는 축제일이며, 유대인들의 참다운 메시아를 기다리는 염원을 담은 날로 크리스마스 즉 메시아절은 구약성서 시대부터 지켜 오던 유대인의 절기인 것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미사,축제일)의 두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Christ는 Christos(크리스토스)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 그리스어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의 메시아(Messiah)와 같은 것이다.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메시아 제전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크리스마스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메시아의 날이 예수의 생일날로 둔갑해 있는 것이다. 과연 그가 메시아인가?
이에 우리는 메시아절의 참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절의 주인공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경축해온 메시아절, 이날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짧아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속한다. 농경 생활을 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태양은 곧 절대자의 상징이었고 태양이 다시 그 힘을 회복하여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이날은 춘일의 도래와 함께 생명의 소생을 예고하는 날로서 고대인들이 메시아 신앙으로 미래를 소망하던 날이었으며,12월 25일은 바로 조로아스터교 태양신의 생일이며, 동시에 로마에서는 동지에 태양신(미트라)의 복귀를 축하하면서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는 축제로서 로마의 농민제(사트르날리아 축제)라고도 불렸으며,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예수 탄생일로 결정함으로써 손쉽게 이방인들을 교화시킬 수가 있었다. 즉, 이방인의 축제일과 그리스도의 성탄일을 오버랩시켜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 축제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권위나 친화감을 그대로 물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교묘한 문화 제국주의적 전략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유지한 채 그 민족의 풍습을 무시하지 않고 자연히 기독교의 문화가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복음서에 기록이 없어 초기 교회에서는 성탄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동방교회에서는 1월 6일로 사용하여 왔으나 서방교회에 서는 4세기에 와서 주리안 달력으로 12월 25일이 동지(冬至, 양력 12월 22일)였기 때문에 태양 탄생일인 동지일을 예수탄생일로 정하여 동서교회가 함께 12월25일로 일치되었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사실 1월6일로 알려져 있었으나 335년 로마 교회는 12월 25일을 성탄절, 곧 예수의 생일로 결정함으로써 이후 기독교에서는 12월 25일을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가 태어나기 전 이 땅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있던 한겨울의 축제들은 이 세상을 화평의 세상으로 건설할 메시아와 그의 날을 기리는 인간들의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보편적으로 메시아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태양이 쇠잔해지다가 다시 그 빛을 회복하는 기간에 대대적으로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2. 제2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2차 종교회의를 소집한 주역은 교회가 대제(大帝)의 칭호를 봉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이 황제는 도덕적 소질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들볶는 악취미가 있어 하류층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중세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한으로 만약 누가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던 폭군이었다.
경건한 종교회의가 있은 지 10년 뒤, 즉 기원 390년에는 데사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을 참살시키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때는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라는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의 기도가 도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오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는 암브로시우스로 하여금 타종교의 성소(聖所)들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게 하였다.
이 소행은 실제로 이단심문(異端審問)의 시조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종교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신학전문가들로부터 <산송장 회의(殘骸 會議)>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 모임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차대한 신앙조항이 교회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삼위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위일체설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주식(主食)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3. 제3차 종교 회의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3세였다. 두 황제 모두가 종교는 고사하고 정치마저도 아예 관심이 없었던 플레이보이들로서 회의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 그는 도락에만 철저했던 무기력자로 방탕생활에 돈이 많이 들게 되다 보니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인정사정 없이 세금을 갈퀴질해 냈다. 권력욕에 탐닉되어 있던 음모덩어리인 누나 부르케리아에게 완전히 잡혀 휘둘려지고 있었던 것도 지당했던 일로서 그녀는 잠깐 섭정으로 앉기도 했었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비웃어댔지만 처녀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종교에만은 열심이었던 관계로 성녀 품에 오르기에 이르렀고, 동생이 죽은 뒤 그 유능한 라이벌인 크류소프스를 살해하고서도 태연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는 모친인 태후 프라키디아가 섭정을 맡았었고, 발렌티아누스는 권신인 아에티우스를 미워하여 살해하려다가 황후 에우독시아를 탐낸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럼 에페소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회의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었다. 순번(順番)식이 된 셈이다. 언제나 거기에는 성령이 따라 붙고 있었다.
4. 제4차 종교회의
칼케돈에서의 제4차 종교회의. 정식으로는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흑막은 역시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처녀(?) 부르케리아였다. 주교 축들보다도 자신의 목적을 잘 분별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는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자신 스스로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럼 칼케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케돈에서는 교리 통일의 호지(護持)가 교황의 개입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확정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의 탄생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전개될 기초가 여기에서 문서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바티칸은 빈말로라도 부르케리아가 음모를 꾸며 칼케돈의 종교회의를 열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
5. 제5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5차 종교회의. 주최자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였다. 황제는 쟁쟁한 독재자의 처이며 공동 통치자인 테오도라가 시키는 대로 처신하였다.
테오도라는 서커스 매니저의 딸 출신이었다.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옥좌자리를 되찾아 주면서 황제를 남편으로 소유해 버렸던 것이다. 이 공적이 있은 뒤부터 그녀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이교의 잔여세력들을 뿌리뽑아 없애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쾌거야말로 종교회의의 높은 양반들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걸했던 것이었다. 제5차 종교회의의 주교들은 이 처사에 대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종교회의에서 의도했던 것을 유스티아누스는 벌써 황제로서의 교서, 법률로 공포해 놓았던 것이다. 이 모임이 역사에서 <갈채 회의>로 규정짓고 있는 데에는 일말의 비웃음이 아니었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다 하겠다.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뒷날 교황의 무류성을 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로 보이는 배역)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 들였다.
비기리우스나 주교들이나 무두가 뒤에 가차없는 이단 소탕 법령때문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황제의 파워폴리틱스적 관심에 꼬리를 치며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도그머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죽음의 벌로 다스려졌고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내 끌어 모아다가는 유스티아누스의 어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했었다.
비잔틴의 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 반다르고트를 상대해서 유스티아누스의 전쟁사실을 기록했고, 또 유스티아누스의 소피아 교회의 건설사업까지도 문서로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유스티아누스와 그 처 테오도라를 비난하는 전단을 초안해 내기도 했었다. 유스티아누스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던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교만하고 성인인 체하고 방자하고 음험스럽고 잔인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 계통 사학자들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대할 때 돌아 앉아 버리고 싶어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유스티아누스도 성인 품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회의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 것일까?
▣ 인류의 타락 누구의 죄인가?
신은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려 하셨다는 사실을 신학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고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유혹>이니 <시험>이니 그건 하느님답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시니 테스트 결과쯤이야 미리 알고도 남을 일이 아니었겠는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자유의사가 있었을 것이므로 지혜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되느냐의 여부를 자기 스스로가 판단했었던 것이라고 하는 답변 또한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것 역시도 하느님께서는 미리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두 내외가 자유의사로 낙원동산의 사과를 씹지 않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아담과 하와는 지금껏 낙원동산에서 발가벗고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 사과를 따 먹지 않은 두 남녀, 발가벗은 히피 스타일로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생식가능성도 모르는 고자에 고녀, 이 꼴이 되어 버렸더라면 도대체 세상은 어찌 되었을 것인가?
신은 그럼 컨베이어 벨트로 실어 나르듯 계속적으로 인간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안될 뻔하지 않았는가? 신의 금지령에 고분고분하기 때문에 자유의사로 지혜를 구해볼 생각조차를 가져볼 줄 모르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볼 때 전능하신 신은 타락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도 아닐 경우 설마 오늘날, 이 나라 저 나라 모두가 인구과잉으로 터질 지경까지 이르게는 만들어 놓지 않았을 게 아니겠는가?
▣ 천국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루시퍼)이 일으킨 쿠데타
그럼 어떤 사정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가지로부터 사과를 따먹은 것일까?
거기에는 유혹자인 사탄인가 뱀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느님이 만드셨다고 우리는 배우고 있다. 사탄 또는 뱀은 지선(至善)하신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기만 한 인간 두 사람, 그것도 이 세상에 오직 그들만이 존재하는 선남선녀를 속였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느님은 어찌 되었길래 사과 한쪽 베어 먹은 데에 모욕을 느껴 가지고 그 세계에 구세주가 나타나기까지의 원죄 뿌리를 못박아 주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인가? 어떻게 될 것쯤이야 미리 아시고 계셨을 터인데도 말이다. 이쯤된다면 신학자들은 내 입을 틀어 막으려 들 것이다. “그게 아니오. 악마 루시퍼는 하느님 나라에서 반역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오?”라고 말이다. 아니 하느님 나라에서 반역을 일으켰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천국>이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있는 것처럼 <행복>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진 곳이라면, 그런 곳에 어떻게 쿠데타 음모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일까?
하느님의 나라, 그 지복(지복)의 세계과 이상적인 완전 행복을 보증한다고 할 때, 루시퍼도 하느님에게 대항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에게 감히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항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와 반대로 천국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없다고 할 경우 결국 하느님은 완전한 전능이 못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이 대목 역시 신학논쟁의 아픈 부위로 하느님과 루시퍼의 싸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그럴 듯한 해석을 붙이지도 못할 뿐더러 논리적인 동기의 구실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루시퍼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러 오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그 계략이 성공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사>라고 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루시퍼니 사탄이니를 등장시켜 보았던들 기분내키는 대로의 해결, 그런 방법 이외로는 달리 논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루시퍼, 아담과 하와, 또는 뱀까지도 전지(全知)하신 하느님의 의사로 행동했던 것이기에 말이다.
▣ 자신의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
교육받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느님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천국에 살고 계시며, 거기에는 음모세력도 있었다. 루시퍼는 그 짓을 저지르기 위하여 에덴동산에 나타났고 아담과 하와는 그 꼬임에 빠져 하느님이 예측한 그대로 죄를 범하게 된다. 이 부분이 비논리성의 극치적 장면이라 하겠는데, 이에 전능하신 하느님은 진노하여 최초의 부부자손들을 세세영겁으로 저주, <원죄>라고 하는 낙인을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 인류를 사랑하사 스스로 독생자를 희생시키셨다고 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원죄탓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형제자매들을 구제해 주기 위한 일념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 하느님의 진노가 풀리셨다고 한다.
미리 알고 계셨던 전지(全知)의 하느님은 방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도록 방치했고, 또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했다? 이건 도대체 어느 고장 풍습이란 말인가? 진노한 신의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피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식의 잔인스러운 결말로 사실상 이 세상으로부터 원죄가 추방되었다는 이야기지만 그건 지금껏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 삼위일체 - 애당초부터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
재치 풍부하고 말재주 좋은 신학자들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아드님을 희생시킬 정도로 인류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고, 도리어 예수가 자유의사로 인류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향 전환 역시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한쪽이 무엇을 하고 다른 쪽이 무엇을 한다고 하는 차이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하튼 희생이란 넌센스다. 아버지와 아들은 현행 교리(三位一體)로 볼 때 애당초부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론에 맞지 않으니까 신학자들은 다른 최후의 해석을 착상해 내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아버지격인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를 몸소 인류에게 보여주려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거야 원위치, 제로점으로 돌아가는 셈이 아닌가? 온 인류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꼭 그래야만 될 것이라면,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의사와 명령에 의해 원죄라는 과정 없이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며 그런 능력쯤이야 있었을 것이 아닌가?
☞ 성경은 앞에서 이미 원전(原典)에 대해 논한 바 있지만, 하느님(신)의 말씀일 수가 없다.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수차례의 종교회의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다수 교회장로들과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라고는 없는 황제의 정치적 이해가 얽혀 도그마화 된 교리들을 만들고, 이단자 심문의 고문과 살인을 허용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종교재판이라는 잔악스런 의식까지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교리는 수많은 오류와 문제점[6부]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5부] 여호와神과 예수
1. 여호와는 어떤 신(神)인가
1)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라 많은 신(神)들 중 단지 이스라엘민족의 신일 뿐이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 1:26]
+ 주 하느님이 가라사대, “보라, 그가 (아담의 타락을 지적) 이제 우리들 가운데 하나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창세 3:22]
+ 야훼여, 神들 중에 당신같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애굽 15:11]
+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여 만군의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 할 것입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굽 20:2-3]
+ 너희는 그들의 神들 앞에 엎드려 그들을 섬기지 말며 ........... [출애굽 23:24]
+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창세 17:7~8]
+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도 섬겼고 에집트에서도 섬겼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남의 나라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 야훼께 마음을 바치시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다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규정과 법을 주었다. [여호수아 24장] ---> 남의 나라 신(神)들과 이스라엘신(神)의 대등한 대조를 보면 여호와의 신계(神界)에서의 지위는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신일 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의 백성이 내 앞에서 축제를 올리도록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굽 5:1-2]
+ 파라오는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들어 에집트를 호되게 쳐서 나의 군대,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에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리라[출애굽 7:4]
+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판관 21:3]
+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가면 안된다. 너희 하느님께서 화를 내시어 너희를 땅 위에서 쓸어 버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계시는 너희 하느님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시다.[신명 6:14-15]
+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 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엽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아라.[신명 7:16]
+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출애굽 12:12]
☞『Bible』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민족신들 중에서 ‘유대민족의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신이 이스라엘에 관심을 쏟을 때 또 다른 나라에는 그네들의 민족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신이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민족이 다른 나라 신을 따라 가면 여호와신이 질투한다지 않는가? 그리고 여호와신이 관심을 가지는 건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뿐이다. 다른 민족을 조금이라도 챙기는 장면이 있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죽여야 할 대상, 전멸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다른 민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여호와는 세계신이 아니라 민족신임을 확연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일신’의 잘못된 교리를 고집하는 것은 창조주(一)와 피조물(多)이라는 ‘이원론’으로 우주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일(一)과 다(多)의 둘 중에서 ‘일’(一)만을 강조한 것이며, 하늘(一)과 땅(多) 중에서 하늘만 높인 결과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차이를 확연히 알아야 풀리는 문제이다.
▣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우리는 여기에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가 생겨 나온 토양이 다른 까닭에 서로 다른 신관,우주관,인간관,자연관,역사관,남녀평등에 대한 인식 등이 생겨 나오기 때문이다.
유목문화에서는 필연적으로 “하늘의 숭배”가 발달되고 농경문화에서는 “땅의 숭배”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대 문화에 있어서 하늘은 남성이고 땅은 여성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충분히 거론된 것이고 땅에 해당되는 독일어 에르데(Erde)도 불어 떼르(Terre)도 여성이다. 서양문명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이루는 유목문화에서는 여자의 위치는 매우 빈약하고 대접 못받는 예속적이고 소외된 존재다. 그러나 농경문화에서의 여자의 위치는 그들이 유목문화에서처럼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노동이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존재의 독립적 기반을 갖는다. 『브리태니커』에 “여자”라는 글을 기고한 비올라 클라인(Viola Klein, Senior Lecturer in Sociology, University of Reading, England)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최근까지의 매우 발달된 학문적 성과의 풍부한 정보를 동원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수렵유목이나 초원유목을 하는 민족의 사회에 있어서는 여자의 위치는 대부분 비천한데 반하여 농경에 생활의 기반을 둔 옛사회일수록 여자의 위치는 대체로 고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농경사회에 있어서는 여자는 인간 생명의 창조자로서 간주될 뿐 아니라, 음식의 제공자로서, 또 남자의 반려로서, 또 생산성의 상징으로서 간주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여자는 높은 특권을 누렸으며 때때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항상 무제한적이며 광막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은 어디서 보든지 그 모습이 같다. 서울에서 보는 땅과 목포에서 보는 땅과 부산에서 보는 땅은 모든 다른 땅들(many)이지만, 하늘은 서울에서 보든지 목포에서 보든지 부산에서 보든지 다 동일한 것(one)이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하늘은 일(一)을 상징하고 땅은 다(多)를 상징한다. 하늘은 추상성․보편성․절대성의 상징이고 땅은 구체성․국부성․상대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하늘의 숭배는 유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universalization) 반하여, 땅의 숭배는 그 숭배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국부화될(localization) 수밖에 없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는 땅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항상 이동을 하기 때문에 정착된 땅에 자기들의 존재의 근원을 삼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막에 있어서는 이동을 할 때에도 여행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하늘이지 땅이 아니다.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들 삶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는 자연대상은 동물(양떼)이고,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대상은 주로 식물(벼․보리․감자․채소 등)이 된다. 유목의 대상이 되는 양떼는 항상 일정한 곳에 있지 않으며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牧者, shepherd)의 명령이다. 경험있고 현명한 한 사람에게의 다수의 무조건의 복종이 그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에라가 적은 것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심리를 소위 명령심리(command-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러한 심리는 유목과 유사한 이동집단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산악등반대의 캡틴이나 배의 선장에게도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된다. 매우 비민주적이고 종적인 상하굴종관계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캡틴이 실수하면 최악의 경우 다같이 죽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에라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하나님이나 주예수는 이러한 유목민족의 매우 비민주적 명령심리를 투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목사(paster)라는 말자체가 “양떼지기”라는 뜻이다. 영어의 패스터(paster)는 원래 “초원에서 먹이는 자”란 어원을 갖고 있다. 목사(牧師)의 師는 스승사 자가 아니다. 師는 지금 우리가 군대용어로 사단(師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문의 원뜻은 군대의 단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민족의 농부와 식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심리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식물은 자기가 뿌리박고 있는 땅의 自然(스스로 그러함)의 논리에 의하여 성장할 뿐이며, 간섭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휘모는 논리를 거부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은 항상 늑대나 이리, 그리고 가뭄의 사망의 골짜기에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의 행태와는 다른 행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처럼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부정의 논리(logic of negation)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발달되어 있는 것은 화해의 논리이며 공존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적”“원수”“죄악”“사망” 등의 『성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러한 극렬한 어휘가 우리 고전(古典)에는 매우 적다. 농사를 짓는 지혜는 대부분의 농부들이 골고루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한명의 장로(長老)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민주적 협동이며, 지혜로운 한사람에게로의 다수의 복속이 아니다.
목동은 양떼를 간섭하고 명령하고 인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시로 이리떼들로부터 막아야 하고 항상 그들이 길잃은 양이 되지 않도록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농부와 식물의 관계는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되고 간섭하지 말아야 되고 인도하지 말아야 한다. 식물이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기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양떼도 없고 따라서 양떼를 지켜주는 목자도 필요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둘이 있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은 이미 야훼자신이 자기의 유일성(하나인 님)을 거부하고 있다. 즉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이미 존재론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일성이란 남을 윽박지르고 후두려 패는 배타성일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같이, 노경이 간신히 얻은 아들 하나를 태워 죽여 피를 보기까지 해서 그 복종을 시험하고 강요하는(아브라함-이삭의 경우) 그러한 야훼하나님,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을 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협박의 하나님”[God of intimidation]은 내 말이 아닌 신학용어임) 그러한 하나님은,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깡패하나님”은 이스라엘인에게 너무도 정답고 친숙하고 또 든든하게 느껴지는, 즉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유목기질(nomadic temperament)에 너무도 적합한 신앙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고요한 새벽의 나라 조선에 조용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다.
▣ 그 종족(種族)의 지리학(地理學)이 신의 이미지를 빚는다.
사막에서 보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나이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이 있기는 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다. 유일신 관념이 생길 리 없다. 사람들은 신에 관한 관념을 세상으로 투사하게 된다. 즉, 어떤 종족의 지리학이 신의 이미지를 빚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이미지를 밖으로 투사시키고 이것을 하느님이라 부른다.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른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들여와도 신(神)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할 뿐이다. 사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에게는 유대민족의 유일신 신앙과 전혀 다른 성격의 하늘, 하느님신앙이 있었으나, 이 땅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앞에서 언급한 유대민족 유일신의 진정한 실체를 모른 채 우리 민족의 하느님과 오버랩되어 버린 것이다.
멕시코시티는 스페인 사람들이 난장판으로 만들기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태양신전에 있던 그 자리에 카톨릭교회를 갑자기 세운 것이다. 이게 바로 신전이 있던 자리에 자기네 신전을 세움으로써 똑같은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기독교의 수법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맨 처음으로 이 아메리카 대륙에 온 식민지 건설대는 기왕에 있던 지명에다 성서적인 이름을 붙여 버리는 식이다. 오버랩함으로써 오버랩되어진 것이 가지고 있던 권위, 친화감을 그대로 삼켜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가나안의 신 ‘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나안의 신 ‘엘’은 신들중 최고의 신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평화의 신이어서 유대민족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신과 충돌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부족은 가나안 땅의 원래 최고신이던 ‘엘’과 조화를 잘 이루었다.
구약에 나오는 여러가지 하나님의 호칭들,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창세17:1, 28:3, 35:11, 43:14, 48:3, 출애굽기 6:3, 에스겔서11:5], 엘.요르욘(높으신 하나님)[창세 14:18~24], 엘오람(영원하신 하나님)[창세 21장 33절), 엘.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창세 16:13], 엘.베델(베델의 하나님)[창세 31:13, 35:7],엘.베르테(계약의 하나님)[판관기 9:46] 등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이 ‘엘’이라는 어간은 원래 가나안의 지고신인 ‘엘‘(고유명사)이 야훼를 수호신으로 섬기던 히브리인들에게 동화되어 점차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전화되어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조물주, 왕, 신들과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 ‘엘’은 폭풍의 신 바알에 의하여 가나안의 만신전의 왕좌를 빼앗기고 추방되게 된다. 최고의 신이 ‘엘’에서 호전적인 전쟁신‘바알’로 바뀌면서 같은 류의 전쟁신이었던 ‘여호와’와는 적대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구약’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평화의 신이었던 ‘엘’신은 보통 명사화되어 ‘하나님’이란 뜻으로 차용되었고 ‘야웨’와 적대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신 ’주‘, ’주인‘,’남편‘이란 뜻의 ‘바알’은 일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융화를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끝내 설 자리를 잃어 버리게 된다.
결국 보다 추상적이었던 신 ‘엘’의 명칭은 차용하고 구체적이었던 ‘바알’은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우리 민족이 추상적으로 사용했던 ‘하느님’, ‘하나님’의 권위와 친근감은 기독교에 의해 차용되었으며 보다 구체적인 우리 민족의 신 ‘환인’,‘환웅’.‘단군’은 배척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민족이 불러 왔던 ‘하느님’, ‘하나님’은 이미 기독교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천제(天祭)를 지내며 섬겨왔던 하느님, 하나님은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민족의 하나님은 지성을 비는 자에게 감동하여 은혜를 내린다거나 죄 지은 자에게 벼락을 때리거나 벌을 내린 적은 있지만 여호와신처럼 다른 민족이라 하여 몰살시키는 일도 없었고, 다른 신을 믿는다고 질투하거나 저주하거나 죽이는 일도 없었으며,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홍수를 내린다든지 싸그리 불태워 죽인다든지 전염병을 내려 몰살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느님, 하나님이라 부르면 당연히 여호와신이라고 세뇌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 서양의 신관(神觀)과 한국의 신관(神觀)
Bible의 神은 분명히 남신이며, 인간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도 남성을 우선하였다. 왜 그랬을까?
BC2,000~3,000년경 서구의 신화에서는 한결같이 남성신들이 여성신들을 죽이고 등장한다. 기원전 2~3천년 그 전후에 근동아시아 일대에는 숱한 남성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바빌론의 남성신인 말둑(Marduk)은 여성신 티아맛(Tiamat)을 죽이고 등장한다. 희랍의 제우스는 대지의 신 타이폰(Typhon)을 죽이고 등장한다. 히브리의 엘로힘은 레비아단을 치고 등장한다. 창세기의 혼돈은 원어로 「테홈(Tehom)」이고 이 말은 티아맛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엘로힘의 천지창조는 여성신(혼돈)을 쳐 거기서 천지가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다. 인도의 남성신 인드라(Indra)는 여성신이요, 동시에 뱀의 몸을 한 브리트라(Vritra)를 이기고 승리함으로써 등장한다. 그 밖에 세계도처에서 기원전 2천년을 전후하여 남성신이 내려온다. 단군신화의 경우에는 서양신화들과 달리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신이 땅의 태모를 살해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굴 속에 넣어 고통을 주고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에서는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에 큰 균열이 생기지만 한국에서는 그 균열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신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이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차별적인 이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한국의 신관은 이러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인간과 신의 관계, 성(性)을 바라보는 태도, 남녀차별의 문제, 자연 파괴 등과 직결됨으로써 지구촌의 미래가 걸려 있는 대단히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신관(神觀)에 대한 비교 차원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前감리교 신학대 교수였으며, 現한신대 철학교수인 김상일은 과정철학자 찰스 하트숀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one)와 “많음”(many)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전개된 신관(神觀)을 과정 철학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은 단일극성적 유신론(monopolar theism)이라고 했다. 즉 “하나”에 치우칠 때는 이신론(theism)이 되고, “많음”에 치우칠 때에는 범신론(pantheism)이 된다. 그리고 전자는 절대주의 (absolutivism)에 빠지고, 후자는 상대주의(relativism)에 빠지게 된다. “하나”와 “많음”, 이신론과 범신론,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통전시켜 어느 한쪽 극도 질적으로 비하시키지 않는 신관을 하트숀은 양극성적 유신론(dipolar theism)이라고 했다. 하트숀에 의하면, 서양의 전통적 신관은 다음의 다섯가지 요소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①신은 자기의식(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는가?(C요소) ②신은 이 세계를 알고(knowing) 있는가?(K 요소) ③신은 이 세계(world)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가?(W 요소) ④신은 영원한가?(eternal)(E 요소) ⑤신은 변하는 시간(time)에 의해 제약을 받는가?(T 요소)
이 다섯 개의 ETCKW 요소들의 결합관계에 따라서 하트숀은 아홉 개의 전통신관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ETCKW : 범재신론(panentheism)(쉘링과 화이트헤드)
EC :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관
E : 유출신관(플로티누스)
ECKW : 전통 범신론(pantheism)(스피노자)
ECK : 전통 이신론(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ETCK(W) : 반범재신론(제임스)
T(C)(K) : 알렉산더의 신관
T : 와이먼의 신관
물론 하트숀은 서양사상에 나타난 신관들을 중심하여 분류하였다. 하트숀은 과정철학적 신관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 하면서, 위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모두 이 신관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적어도 「규원사화」나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종합시켜 볼 때 한국의 “하나님”은 이 다섯 요소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 분이다. 하트숀은 이들 다섯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빠진 신관을 “절단된 신관”이라고 했다. 적어도 환인, 환웅, 환검의 셋을 종합시켜 보면 하트숀의 다섯 요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하나님 사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신관을 구태여 정의한다면 범재신론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하트숀에 의하면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절단된 신관’이고 “하나”(one)와 “많음”(many) 가운데 “하나”(one)에 치우쳐 전개된 신관(神觀) 즉, 단일극성적 유신론(monopolar theism)인 것이다.
<세계관과 영적전쟁(죠이선교회, 1995)>의 저자(著者) 안점식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예수의 유일성을 변증하기 위해 동서양의 모든 종교, 철학, 사상들을 성서의 말씀을 잣대삼아 비판하면서 기독교가 제일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한 마디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그가 그렇게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성서의 무오류성, 신의 성령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대전제 자체가 이미 오류다. 원전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성서’의 텍스트로서의 문제점과 종교회의를 통한 진리왜곡, 교리상 많은 문제가 있으며, 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창작’(創作)이 아니라 ‘모방작’(模倣作)이다. 한 마디로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전제가 진리라면 안점식의 주장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의 수많은 노력은 모두 헛공사인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노자의 하나님
앞에서 유대의 신관과 한국의 신관을 비교했는데 이번에는 도올 김용옥선생의 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노자의 하나님을 비교해 보자.
“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하다. 인간의 믿음과 소망에 답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생각해 보라 올 여름, 임진강 둑이 터질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뻥뚫린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던 문산, 파주, 연천의 사람들을! 천지는 잔인하다! 노자의 사상에는 가벼운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천지는 잔인하기에 위대한 것이다. 잔인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그래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만물은 스스로 서로 다스리며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자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인자하게 되면 반드시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고(造立施化) 하는 따위의 장난이 개입된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다 함이 생기고 함이 있게 된다.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면(造立施化), 사물은 그 본래의 진실한 모습을 잃어버린다. 은혜를 베풀고 함이 있게 되면, 사물은 온전하게 존속될 수가 없다. 사물이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온전하게 생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한다. 그래서 애굽인들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킨다. 야훼는 은총을 베푼다. 은혜를 베푼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우리를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빼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당신만을 섬기겠나이다! 옳다! 그렇다! 너희들이 그 약속을 어길 때 나는 너희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리라!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굽34:14]
노자의 하나님은 이러한 계약을 거부한다. 인간적인 “조립시화”(造立施化)의 투영을 거부한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기만을 섬기라는 요구도 없다. 노자의 하나님은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그들에게 요구함이 없다. 공을 이루면서도 그 속에 거함이 없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말할 뿐이다. 만물이여! 그대들은 나없이 스스로 그러할지니!
조선의 백성들이여! 21세기의 개화된 민주의 백성들, 과학의 백성들이여!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을 믿겠는가? 소리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을 믿겠는가?
노자는 또 말한다. 천지가 불인(不仁)한 것처럼 성인(聖人) 또한 불인(不仁)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政敵)이라 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치 않고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天地不仁! 聖人不仁!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반어(反語)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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