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之香 Atheism/바이블의 진실

바이블의 진실-이상훈 편저 7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0. 3. 19. 14:33

▣ 카인과 아벨 이야기 -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투쟁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당시 사회 상황은 농부와 목자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는 점이다. 농부와 목자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에 자주 나온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몇세기에 걸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투쟁이 그 배경이 되고 있는데 이 형제 살인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오리엔트 메소포타미아의 목축신 두무지(다므스스)와 농경신 엔키무드의 투쟁 이야기이다.

성서에 보면 농부(카인)와 양치기(아벨)가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당하는 것은 농부이다. 이것은 농경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민족, 혹은 유목민족의 신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즉, 히브리인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왜 카인이 여호와에게 선택을 받지 못하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 오늘날 가나안 민족이 히브리인들을 몰아내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면 이 유대의 민족신 ‘여호와신’ 대신에 가나안 민족신인 ‘바알신’이 자리할 것이고 농부가 양치기를 밀어내고 선택받는 스토리가 채택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야말로 역사의 거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이러한 갈등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Bible을 읽는 다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얼마나 심한 육체적 고통과 수련이 따르는가를 ―. 인류에게 있어서 “농경”이란 “현재적 고통”을 “미래적 쾌락”을 위해서 참는 “이성의 발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열심히 한눈 팔지 않고 모든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면서 가을의 수확의 기쁨을 위하여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또 수확을 저장하여 겨울을 넘기는 준비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 따른 주도면밀한 사고력이 없이는 농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중함”이란 곧 인간의 “이성”의 발전의 원초적 양태이며 곧 “농경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질서 속에서만, 그러한 농경의 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이러한 이성적 질서로부터 어떠한 “비이성적 해방”을 추구하게 된다. 농경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해방의 최초의 문명적 산물은 바로 “술”이었다 그리고 또 “色”이 있었다. 우리말에 항상 “酒色”이라는 말이 쌍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가 인류문화에 가장 원초적인 해방을 나타내는 보편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酒色”에서 “酒”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희랍의 농경민족에게서 발전된 바카스예배(Bacchilc Cult)이며, “色”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가나안 농경민족의 바알의 축제 즉 혼음의 축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카스 예배와 바알 예배가 우리민족에서는「東夷傳」의 영고(迎鼓)나 동맹(東盟), 그리고 솟터의 제사 속에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東夷傳」의 기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월과 시월에 國中大會하여 飮酒歌舞하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제의 모습이며, 「東夷傳」의 기자들은 “其俗淫”이라 하여 그 풍속이 음란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고도의 제국문명의 유교독존의 세뇌를 받은 중국의 지성의 눈에는 한민족(韓民族)의 모습이 매우 “음난”하게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사사들이 가나안의 바알축제를 그렇게 본 것처럼....... 그러나 이것을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구조의 틀 속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酒와 色의 축제는 희랍의 바카스축제(Bacchic cult), 가나안농경민족의 바알축제, 중국의 『시경(詩經)』, 우리나라의 견우,직녀의 신화 등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농경문화의 매우 중요한 전인류적 보편종교양식이다.

『구약』의 「사사기(士師記)」는 한마디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대립․마찰․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실존의 현장이며,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는 농경생활의 안락이나 그에 뿌리박고 있는 고도의 문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문화의 접촉에서 오는 초기현상적 칼춰쇼크(culture-shock)가 反文化的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사사들의 임무는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갈등, 즉 고도로 성숙한 가나안문화의 유혹과, 또 문명에 대한 저주와 방황하는 자유로 얼룩진 유목생활에 대한 참신한 동경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민족적 갈등으로부터 구출하고 야훼의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었다. 즉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새롭게 접촉한 바알신앙문화는 또한 참신한 유혹이었으며, 특히 농경의 생산예찬과 그로 인한 성적 해방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유혹은 하나의 타락이며, 야훼에 대한 배반이며, 계약의 위약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야훼자신이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야훼께서는 몹시 화가 나셔서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을 때 명령한 대로 이 백성은 살지 않는다. 통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사사기 2:20~23 공동번역판)

 

이것은 야훼가 결코 몰아내지 못한 갈등이다. 그리고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이란 현존재의 시험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는 바보새끼들은 더 이상 역사를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에게 하느님이 있었다면, 「동이전(東夷傳)」에도 하느님이 있고 『시경(詩經)』에도 하느님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에게 나타났던 갈등은 어떠한 문명에서든지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의 갈등의 이스라엘적 표현에 불과하다.

 

▣ 노아의 홍수

구약성경의 노아의 홍수는 유태교나 기독교의 성서가 씌어지기 2,000~3,000년 전에 씌어진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따 온 것이다. 구약성서의 저자가 살던 땅은 폭풍우나 홍수가 없는 지방이다.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가 성경을 편집한 헤브루인들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영국 국립박물관의 조지 스미스에 의해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길가메시>의 열 한 번째 점토판이 발견되고 판독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대홍수 신화도 사실은 수메르(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홍수 신화의 점토판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신 여호와가 인류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내린 노아의 대홍수가, 사실은 타민족(수메르) 신화의 복사판이라고 해서는 모세의 십계가 강조하고 있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세와 연관된 것에까지 표절의 냄새가 풍기자 로마 교황청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로마교황청은 어떤 곳인가? 교황을 필두로 한 수많은 성직자들이 완고함으로 무장한 보수의 발원지가 아니던가? 예컨대 멀리로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몰아 투옥하였으며(1633년), 근세에는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분개한 나머지 졸도한 성직자가 나올 정도였다. 교황청의 입장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인간은 아담을 시조로 하여 창조된 것이며 결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를 이단 심문에 회부한 것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잘못한 처사’라고 사과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갈릴레이의 명예 회복은 350년만에 된 셈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6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공언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 아니라 역시 원숭이였다.” 교황청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런데 조지 스미스가 발견하고 해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의 서사시」라 불리는 것으로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놀라운 모험담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서사시에는 홍수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여기서는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가 ‘에아’로, ‘노아’가 ‘우트나피시팀’이라는 이름으로, ‘40일 낮 40일 밤’이 ‘7일 낮 7일 밤’으로, ‘방주는 7월 17일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방주는 니실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로 되어 있을 뿐 기본 골격은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 보내서 육지를 확인하는 내용까지도 똑같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바빌론신화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중국, 한국, 오스티악족, 캄차달족 등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신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중국의 요, 순과 고조선의 단군이 ‘9년 홍수’를 맞아 치수사업을 벌이는 이야기가 한․중 고대사서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최근 4천년 전의 중국 하나라 수도 유적 발굴에서 홍수로 파괴된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중국 고고학 잡지 「문물」) 그 당시 홍수는 세계 도처에서 발생했으며, 유대민족은 이 홍수이야기를 바빌론 포로시절에 듣고서는 마치 자신들만이 겪은 것처럼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수메르의 홍수신화(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의 모방인 바빌론의 홍수신화(길가메쉬 서사시)로부터 차용해서 신(神)의 섭리를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의 원형 - 아카드서사시와 케레트서사시

 

1929년 셰프로를 단장으로 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우가리트에서 발굴한 점토판에서 아카드와 케레트의 서사시가 나왔다. 아카드서사시에는 다니엘과 그의 처 사이에는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이 없다. 다니엘은 시녀 사이에 아들을 낳는다. 그후 부인 사이에 아들을 낳으면 희생물로 바치겠다고 신에게 약속하고 아들을 얻는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이삭의 이야기의 원형이다. 케레트 서사시는 왕비 프로티를 다른 왕에게 빼앗긴 케레트왕이 그녀를 되찾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도 아브람함 이야기와 같다. 구약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이며 우가리트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1400년이다.

▣ 모세 율법

 

모세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경 자체의 문헌 비판에서 명백해지는데 아마도 BC 5․6세기경 바빌로니아 유치시대에 기록되고 경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오경을 모세가 전한 율법이라 하여[신명 31:9] 신약에서도 보통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수메르의 「슈루파크의 가르침」은 히브리 성서 십계명의 5~10조항의 원형이 되었으며 “도둑질, 살인, 간음, 헛된 명세, 말다툼,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 중 6~10계명과 같은 맥락이며, 또한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과 순서는 「출애굽기」21장 12절부터 23장 8절까지 기록된 모세법의 기본 골자와 같다. 이 가르침의 전통에서 후대의 법전들이 편찬되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법전은 BC 2100년경에 공포된 『우르남무 법전』이며, 이보다 350년 후에 만들어진 고대 바빌론 왕조의 『함무라비 법전』의 모체가 되었다. 이 법전은 히브리 성서에 전해진 모세 계약법이나 십계명과 「잠언」 등에서 그 전통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인류의 법전 발달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뿌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경구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이 「출애굽기」21장에 “상해가 생겼을 경우에,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나 「레위기」의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그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구절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민희식교수는 모세와 여호와신의 이야기는 애급의 아톤신앙(一神敎)과 모세의 관계를 새롭게 편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수메르 점토판의 사르곤전설에서도 모세이야기의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아카드왕조를 세운 왕이 바로 사르곤1세이며, 이 사르곤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여자였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르곤을 바구니에 담아 유프라테스 강에 흘러 보냈다. 그 때 마침 물을 길러 나왔던 아츠키라는 여자가 이를 발견하고 물에서 건져 올렸다. 대지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아이의 가호를 빌자 여신이 직접 맡아 길렀다. 후일 사르곤이 성인이 되자 애인으로 삼음과 동시에 제사장(임금)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조지 스미스가 발견한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이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사르곤의 어머니는 이슈타르 신전의 무녀(무녀)였으나 잘못하여 임신을 했고, 신의 벌이 두려워 낳은 아이를 유프라테스강에 버렸다고 한다. 이 전설 역시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이 아이를 구하여 키운 것으로 되어 있다.

사르곤의 전설은 선지자 모세가 나일 강에 버려졌던 아이였으며 이집트 파라오(왕)의 딸이 건져서 궁전에서 길렀다는 전승으로 바뀌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리아의 처녀 회임설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정녀 출산설화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잉태 - 즉 남녀간의 ‘정자․난자의 결합’이 아닌 방법 - 에 의한 임신이라는 부조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정녀출산’이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가 창설한 ‘파르시교’의 교리에 따르면 - 그들의 아베스타 경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도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 사오슈안트는 처녀출산으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이다.

신비적인 출생이 거론되는 사람 가운데는 고대 페르시아의 왕 큐로스 2세가 있다 그는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을 공략하여 ‘바빌론의 포로(유대인)’을 석방시킨 사람이다.

전설적인 로마 건설자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테베강에서 건져내어 늑대젖으로 키웠다고 한다. 로마 건설은 기원전 753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 기원(紀元)은 이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많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의 친아들이 아니라 제우스의 번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웅이 된 자는 그의 부친이 왕족이거나 귀족 출신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아버지를 부인하거나 ‘전설’을 만들어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전도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양부’요셉은 이미 죽고 없었다. 때문에 예수는 ‘과부의 아들’로 불렸다.

시조(始祖)탄생설화에 있어서는 대강 그 시조 이전의 부계(父系)를 설정해 놓으면서도, 그 시조의 탄생 그 자체는 그 부계와 무관하다는 구조로 나타난다. 처녀생자(處女生子), 감천생자(感天生子), 그리고 난생(卵生)의 설화 등등은 모두 이러한 부계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것이다. 중국의 시조나 성인은 모두 이러한 탄생설화를 빌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주몽탄생설화나 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 등등도 그렇다. 마태복음에 보면 “A는 B를 낳고”로 죽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는 마치 A가 B를 생산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A이고 B이고 다 남자이다. 희랍어성서나 영어성서는 모두 “A는 B의 아버지이며”의 문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계보가 우선 철저하게 부계상속의 부권사회구조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감천생자(感天生子)탄생이나 은(殷)나라의 契나 주(周)나라의 后稷의 감천생자(感天生子)탄생이나 동명왕 주몽의 감천생자탄생은 이 모두가 부계혈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종적(縱的)인 부계사회의 권력의 절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강구된, 즉 부계를 강화하기 위한 부계의 부정의 논리로 은폐된 시조(始祖)신화의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세속적인 계보의 혈통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시조(始祖)의 시조적 절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처녀 수태설은 당시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과부의 아들'이란 당시 활약했던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자격조건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라이벌이었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도 어머니가 신의 아이를 처녀 수태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바에는 아버지란 존재는 오히려 장애요인일 뿐이다. 예수의 경우에도 시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좀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다.

당시 유태인들은 자신들 나름의 전통을 가진 이교도들의 방대한 세계에 둘러싸여져 있었다. 이교도들의 전설에서는, 위대한 영웅, 즉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 상당히 관례적이고 통상적인 사항이었다(사실상, 거의 필요조건이다시피 했다). 처녀는 마법적인 방법으로 신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될 수 있었다―이것은 그리스 전통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그렇듯, 유태인들은 유태교의 사고가 편협하고 보수적이었던 유대 지방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영향이 강했던 알렉산드리아나 기타 지방에도 살았다. 그리스판 성경은 이사야의 인용구에서 "처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마태오는 처녀 출생을 뒷받침하기 위해 히브리어판이 아닌 그리스어판을 따랐던 것이다. 만일 처녀 출산이 로마와 같은 이방인의 도시를 설립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왕국을 설립하는 사람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정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출생에 관해 두 가지 전통, 즉 다윗의 후손이라는 엄격한 유대의 전통과 처녀 출산이라는 주변 민족의 전통을 둘 다 - 서로 배타적이긴 하지만 -를 수용했던 것이다.

 

▣「욥기」

 

히브리 성서에 전해진 「욥기」와 매우 흡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이 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이 글이 쓰여진 연대는 BC 17~18세기로 보인다.

 

▣ 관습의 전승

 

수메르의 관습은 유대의 관습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예를 한 개만들자면 구약성서에 있는, 상대방의 음부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하는 관습도 수메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의 손을 아브라함의 음부에 대고 그의 아들의 아내로 가나안 여자를 택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창세기 24장 1-9절), 또는 요셉이 그의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이집트에서 옮겨와 그들의 조상의 땅에 묻겠다고 약속할 때도 요셉이 그의 아버지 음부에 손을 대고 맹세했다(창세기 47장 29-31절)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인간창조, 에덴동산,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모세율법, 욥기 등 많은 내용이 다른 민족의 신화의 내용을 차용하여 주인공만 바꾸어 편집한 허구의 신화이다. 즉 유대인들은 이집트 노예시절, 바빌론 포로시절을 거치며 민족 단결의 필요성을 느꼈고 민족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자기 민족만이 선택받은 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주변의 페르시아신화, 이집트신화, 수메르신화 등을 편집한 것이다.(기독교에 영향을 미친 여러 주변민족의 신화, 종교에 대해서는 뒤의 “기독교는 혼합종교”편을 참조) 그러므로 이렇게 가공해 낸 신화를 기반으로 한 원죄론 등의 교리는 허구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신약성서는 창작인가? 표절인가?

일본의 호리(堀堅土)교수는 그의 저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①탄생설화 ②신앙을 씨앗에 비유한 것 ③빛의 비유 ④구하면 주어라 하는 설교 ⑤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는 대목 ⑥죽은 자에게 구애받지 말라는 대목 ⑦물 위를 걷는 기적 ⑧음식의 기적 ⑨병을 고치는 기적 ⑩나는 왕이라고 한 대목 ⑪무덤의 기적과 부활의 기적 등을 위시한 “많은 부분의 성경 내용의 원형이 불경에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이렇게 해서 ‘탄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전생애에 걸친 수수께끼가 바로 불교경전에 의해 해명될 뿐 아니라, 『미린다 왕문경』이라는 불경에는 그 뒤에 일어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의 원형이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자료까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 불교의 불경(佛經)과 기독교의 성경(聖經)을 대조하여 장소나 인물만 다를 뿐 그 상황설정이나 이야기 전개, 가르치고자 한 교훈 등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상세하게 증명한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윤청광 著) 』의 내용을 요약, 대조해 보기로 한다. 불경과 성경의 말씀들을 일일히 비교, 대조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본서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 하늘에서 내려온 두 성자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아름다운 하늘나라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있다.[ 불경 『자타카(본생경)멀지 않은 인연 이야기』『불소행찬 탄생품』]

우선 불경과 성경은 똑같은 출발점, ‘하늘’에서 시작하고 있다.

▣ 너무 비슷한 탄생 이야기

 

▶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태몽을 통해서, 남녀의 동침 없이 잉태된다는 점이다. 마야부인이 여덟가지 계행을 지키느라고 그의 남편과 동침하지 않고 있었는데, 석가모니가 흰코끼리가 되어 어머니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치고 그 태(胎)안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된 것으로 불경『본생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 또한 요셉의 태몽에 주(主)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성령이 임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됨을 알린 이후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아시타 선인(仙人)이 왕궁에 나타났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이와 비슷하게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동방박사가 마굿간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시타 선인이 왕궁에 서린 서광(瑞光)을 보고 찾아왔듯이 동방박사는 별빛의 인도를 받아 찾아왔다.

▶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보고 아시타 선인이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했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아기 예수를 본 예언자 시메온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불경『현우경비파리품』에는 미륵의 탄생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 왕이 미륵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없애고자 하였으나 도피하여 생명을 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예수의 탄생과 헤롯왕의 이야기로 변형되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불경의 『불소행찬』에는 노부인이 어린 석가모니를 보고 찬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에도 노부인이 아기예수를 보고 예수를 찬탄하는 대목이 똑같이 실려 있다.

 

▣ 소년시절의 성인될 징조

 

석가모니와 예수 둘 다 어렸을 때 스승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하였고, 이미 성인(聖人)이 될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불경『과거현재인과경』『불교성전 불전(佛典)』 성경『누가복음 2장 41~50』]

 

▣ 책봉식과 세례식

 

불경『과거현재인과경』에는 석가모니의 태자책봉식 때 강가에서 왕은 손으로 태자의 이마에 물을 끼얹고 ‘그대는 나의 후계자니라’하고 선언하자 하늘에서 ‘좋도다!좋도다!’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로부터 청작(靑雀) 5백 마리가 날아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요단강에서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할 때 하늘에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과 불경 모두 의식(儀式)이 ‘강가’에서 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 카아샤파와 요한 - 선지자

 

불경『과거현재인과경』『우리말 팔만대장경』과 성경『마가복음 1:4~10』『마태복음 3:11~14』을 보면 불경의 ‘카아샤파’와 성경의 ‘요한’이라는 선지자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가 더 큰 성인인 ‘석가모니’와 ‘예수’가 나타나자 선지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바로 이 분이 성인(聖人)이시라고 만인에게 선언하고 있다.

미리 준비된 선지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성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는 선언, 장소와 이름만 다를 뿐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성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 고향에서의 푸대접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자 처음에 석가족들은 석가모니를 부처님으로 얼른 인정하려 들지 않은 채 ‘저 싯달타 태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조카뻘이다,손자뻘이다,동생뻘이다’하면서 경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석가모니의 신통력에 친족들이 모두 인정하고 경배하게 된다.[ 불경『본생경』]

마찬가지로 예수가 고향에 돌아 간 후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려들지 않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업신여기자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하고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고 한다.[ 『누가복음 4:20~24』『마태복음 13:53~58』]

▣ 마아탕가와 사마리아 여인

불경『마등가녀경』에서 아난다가 우물가에서 여자를 만나 물을 청한 것이나 성경『요한복음 4:3~15』예수가 우물가에 앉아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한 것이나 그 장소 설정과 주고받는 이야기까지도 똑같다. 마아탕가 처녀가 출가사문과는 감히 상종도 할 수 없는 천민의 딸임을 이유로 내세워 물을 떠바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사마리아 여자가 유대인과는 상종치 못하는 사마리아 여자임을 내세워 물을 떠바치기를 사양하는 것이나 똑같다.

또한 아난다가 출가 사문이므로 나의 마음에는 빈부귀천 상하의 차별이 없으니 물을 달라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네게 물을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 대답한 것은 예수도 사람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나중에 석가모니가 직접 마아탕가 처녀를 만나 설법을 통해 전법에 성공한 점과, 예수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는 데 성공한 점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같은 점은 석가모니가 ‘애욕의 갈증으로 인하여 모든 생명은 영원히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욕심을 멀리하여 애욕의 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난다’고 설법한 내용이나, 예수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설교한 내용은 똑같이 ‘영원히 잘 사는 길’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경의 마아탕가 이야기와 성경의 사마리아여자 이야기는 지명과 인명만 다를 뿐 설정된 무대와 등장인물,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 가르침까지도 똑같다.

 

▣ 가난한 여인의 공양과 헌금

 

불경『근본설일체유부』『현우경빈녀난타품』『본생경』『잡보장경』의 ‘가난한 여자걸인’이야기와 성경『마가복음 12:41~44』의 ‘가난한 과부’이야기는 헌금에 하는 데 있어서 그 액수의 많음을 칭찬하지 않고 액수가 적더라도 그 정성과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누가 보아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죄짓기보다는 육신을 절단하라

 

불경『아함경』에는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는 불을 껴안는 게 나으며, 살이 찢기고 살가죽이 벗겨지고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꺾어지고, 이글이글 불에 단 쇳덩이를 삼키고, 불에 단 철침상에 눕는 편이 낫다’고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마가복음 9:42~47』에는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 죄짓게 하거든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거든 발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거든 눈을 빼버리라’고 예수가 설교하는 장면이 있다.

두 성인 모두 육체의 고통을 참을지언정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서 죄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 물위를 걸어가는 이적(異蹟)

 

불경『불전(佛典)』『아함경』『본생경 무쌍품』에는 석가모니와 그 제자가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으며, 성경『마태복음 14:22~29』에는 예수와 그 제자(베드로)가 역시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다. 두 제자 모두 강한 신앙심으로 물을 건넜다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신앙의 힘으로 잠재운 폭풍

 

불경『자타카(본생경)』에는 배를 타고 떠난 신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깊은 신앙심으로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고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믿고 염하면 어떤 태풍이나 환난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마가복음 4:36~41』『누가복음 8:22~25』『마태복음 14:29~33』에도 예수가 바다에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잠재우는 대목이 있다.

불경과 성경 모두 한결같이 믿음이 강하면 거센 파도와 폭풍도 잠재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의식주를 걱정 말라

 

불경『슛타니파아타 여덟 편의 시(詩)』에서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을 하지 말고 다섯 가지 욕심에서 벗어나 해탈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2:22~23』『마태복음 6:24~33』에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먹고, 입고, 마시는 걱정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의식주를 걱정 말고 궁극의 목표를 추구하라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곡식의 비유

 

불경『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3:11~12』『마태복음 13:24~30』에는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짚이나 쭉정이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라는 석가모니의 비유와 가르침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쭉정이와 가라지가 되면 불에 태움을 당하리라는 예수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똑같은 발상, 똑같은 표현, 똑같은 결론 유도‘라고 볼 수 있다.

 

▣ 너희에게 이르노니

불경『율장(프리아티모옥샤)』을 보면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두 벌 옷이나 밥그릇마저도 두 벌을 가지지 못하게 했고, 법을 전파하고 나서 금이나 은이나 돈을 받지 말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 번 먹고 자기로 한 집에서 한 번 이상 더 묵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부부의 눈치가 다른 줄 알면서 억지로 앉아 있지 말라고 다짐했다.

성경『마가복음 6:7~13』『누가복음 9:1~6』을 보면 예수 역시 제자들에게 두 벌 옷을 입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동을 받지 말라고 다짐하는 데까지는 석가모니의 다짐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들어간 집에서 영접하지 아니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

석가모니는 ‘부부(夫婦)중 어느 한쪽이라도 싫은 기색을 내거든 더 이상 폐를 끼치지 말고 나오라’고 당부한 데 반해, 예수는 ‘영접치 아니하거든 그 성을 나올 때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대접 못받은 분풀이로 발을 굴러 흙을 털어 버리고 ‘너희가 우리를 괄시했다’ 하는 점을 증거하여 훗날 심판대에 혼날 것임을 암시하라 했던 것이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비슷하지만 그 심성(心性)만큼은 똑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가짜 성인이 나타날 것이다.

 

불경『율장(律藏)』과 성경『마가복음 13:21~23』『마태복음 24:3~14』에는 각각 가짜 부처님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지만 끝까지 제대로 견디는 자는 각각 성불(成佛)할 수 있고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성불(成佛)이나 구원은 각각의 종교에 있어 최고의 이상이므로 이 두 이야기는 똑같은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모든 죄악은 마음에서

불경『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법구경』에는 ‘악(惡)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다시 사람의 몸을 망친다’라고 비유했듯이 성경『마가복음 7:20~23』에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함으로써 같은 어법을 쓰고 있으며 악한 행위의 나열에 있어서도 살인,음란,도둑질,탐욕,속임수,성냄 등 거의가 다 똑같은 것이다. 결국 석가와 예수는 모든 죄악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와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망친다는 경고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 장자 궁자와 돌아온 탕자

 

성경『누가복음 15:11~32』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한 번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반성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한 ‘장자 궁자(長子 窮子)’의 이야기가 불경『법화경 신해품』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서 ‘돌아온 탕자’는 곧 이 세상의 죄지은 사람들로 비유되고 있고 죄를 용서해준 탕자의 아버지는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상징하고 있으며, 불경의 ‘장자 궁자’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부처님의 제자들로 비유되고 돌아온 가난한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보배까지 안겨주는 ‘장자’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상징되고 있다.

‘돌아온 탕자’나 ‘장자 궁자’의 이야기는 모두 ‘죄있는 자’,‘허물있는 자’도 반성하고 믿고 따르면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

 

불경『제법집요경 보시품』『방등경』『잡보장경』에서 석가모니는 재물이나 착한 일을 베풀 때, 그 재물이나 도움을 받는 특정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의 모든 중생이 다 구제받게 되기를 원하라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에게 보시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 당신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고 당부했다.

성경『마태복음 25:35~46』에서 예수 또한 보잘 것 없는,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이 곧 예수 당신을 대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교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곧 성자인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설법이나 예수의 설교는 결국 똑같은 내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불경『방등경』『법구경』과 성경『마태복음 7:15~20』『마태복음 12:33~35』『누가복음 6:43~45』에는 사람이 행하는 선(善)과 악(惡)을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가 말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는 곧 석가모니가 ‘착한 인(因)을 심지 않고 어찌 좋은 열매(果報)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가르침과 같으며, 그 비유 또한 좋은 나무는 ‘착한 일을 하는 것’ 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고 열매는 그 행(行)에서 얻어지는 과보를 상징하고 있으며 석가모니가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 강조한 것이나 예수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한 것은 똑같은 경고라고 할 수 있다.

 

▣ ‘내가 법이요’와 ‘내가 진리이다’

 

불경『열반경』『아함경』과 성경『요한복음 14:5~12』에서 석가모니는 ‘법을 보는 자를 곧 나를 보는 자’라고 설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를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본 자’로 말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가 ‘나는 곧 법이니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나의 가르침대로’ 법에 의해 등불을 삼고 살아가라고 당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 행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불경『법구경』과 성경『마태복음 7:21~27』에서 ‘제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성인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나, ‘제 아무리 주여 주여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가까이 지냈음을 강조하더라도 행하지 않은 자는 모르는 자니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똑같이 실천 없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비록 원수일지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불경에 수록되어 있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있다.

불경『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부모를 죽인 원수도 갚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마주 때리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을 받는다. 또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6:27~35』『마태복음 5:38~46』에서 예수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 살인마와 길 잃은 양

 

불경『아함경』에는 ‘99명을 살해한 아힝사카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통해 악인도 바른 마음을 깨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5:3~10』『마태복음 18:12~16』에도 ‘99마리의 양과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이야기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비유해서 죄지은 자를 구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불경은 ‘99명의 피살자와 한 명의 죄인’을 들어 죄 지은 자를 구제하고 있는데, 가르치고자 한 점은 다 똑같이 악(惡)을 선(善)으로 구해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 경전비방과 성령모독

 

성경『누가복음 12:4~10』『마태복음 23:23~29』에는 예수의 설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라고 극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의 용서를 못받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송한 제자들을 박대한 자들도 폐망하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경『법화경 비유품』에도 경전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믿는 자를 미워하고 천대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법화경 법사품』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한 겁 동안을 부처님을 항상 훼방하고 꾸짖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벼우려니와 어떤 사람이 한마디 나쁜 말로써 집에 있는 이나 집을 떠난 이가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비방하고 방해한다면 그 죄는 매우 무거우니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도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나 예수를 비방하는 것보다 경전을 비방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 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불경『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과 성경 『마가복음 3:2~9』『마가복음 3:14~20』『마태복음 13:31~32』『마태복음 13:36~40』에서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비유하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고 설법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씨뿌리는 인자라 비유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수가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돌밭에 뿌려진 씨앗’‘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든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들어 잘못된 신앙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불경과 성경이 똑같은 비유,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가 씨를 뿌려서 얻는 수확은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니 곧 불교의 이상이자 목표인 ‘해탈’에 이르는 것이요, 예수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추수 때인 종말의 때’에 천사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으니 석가모니와 예수가 씨뿌리는 목적 또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말법시대와 말세

 

불경『아함경』과 성경『마가복음 13:4~13』『마태복음 24:6~22』에는 불경의 말법시대와 성경의 말세에는 똑같은, 비참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미혹하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 죽이며,

둘째, 기근과 재앙이,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며,

셋째,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게 되고,

넷째,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활과 칼로 죽이려 싸우게 되고.

다섯째, 불법이 횡행하게 되며,

여섯째, 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을 싫어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깨달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다시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다는 점에서 불경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법시대와 말세는 똑같이 묘사되고 있다.

 

▣ 이 세상의 빛

 

불경『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과 성경『누가복음 2:30~32』『누가복음 11:33~36』『마태복음 5:14~16』『요한복음 1:4~11』『요한복음 8:12』를 보면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자신도 빛이요, 횃불이요, 광명이며, 이 성자들의 가르침도 빛이요, 등불이요, 광명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 악마와 마귀

 

성경『마태복음 4:1~11』『마가복음 1:12~13』『누가복음 4:1~13』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악마의 시련을 받는 이야기가 『본생경』『아함경』『불소행찬』『불본행경』『잡아함경』등 불경에도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려 한 것까지도 불경과 성경이 서로 똑같은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금식시켜 주리게 해놓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나, 석가모니에게 걸식을 못하도록 해서 주리게 해놓고 다시 걸식하게 권해서 ‘식욕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나, 마귀와 악마가 한 짓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향해 던진 미끼였다.

이 때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식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대답하였고, 석가모니 또한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것이다.

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석가모니에게 ‘나라 전체를 직접 통치’하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살 것이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요, 석가모니가 ‘물욕을 따르는 자 물욕에 결박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 결박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진리, 곧 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돌에 부딪혀 죽게 하려 한 것이나 데바닷타가 높은 산에서 돌을 던져 그 돌에 맞아 석가모니가 죽게 하려고 한 점이나 ‘돌’로 해치려고 한 점에서는 그 발상이 같다.

 

▣ 한 명의 배신과 도망친 제자들 이야기

 

불경『아함경』과 성경『누가복음 22:20~21』『마태복음 26:20~25』『마태복음 26:31~35』『마태복음 26:45~56』을 보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데바달타가 자기를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점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이 모조리 다 도망갔듯이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코끼리의 위해(危害)에 처했을 때 5백 명이 모두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악은 악으로 망하는 법’이라고 경고한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야기는 불경『본생경 길상초품』『본생경 바수나품』『아함경 카필라성의 비극』『유마경 향적불품』등과 성경『마가복음 6:35~45』의 ‘오병이어(五餠二魚)’ 『마가복음 8:1~9』『마태복음 15:32~39』의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불경의 유마힐과 성경의 예수가 똑같이 수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없던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킨 사실이 똑같다는 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상황, 기적을 일으키는 유마힐과 예수, 배불리 먹는 신자들, 그러고도 남는 여유있는 음식, 이 얼마나 똑같은 구성과 전개이며, 이 얼마나 똑같은 공식에 의해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가?

 

▣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

 

불경『방등경』『법사경』과 성경『마가복음 10:21~30』『누가복음 18:22~30』에서는 석가모니가 재물을 버리고 법을 따르라고 한 것이나 예수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한 것이나 그 가르침은 똑같다. 또 석가모니는 재물에 집착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고, 예수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이다.

 

▣ 네 자신을 뒤돌아 보라

 

성경『요한복음 8:1~11』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이 는 ‘너 자신부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되돌아 보라’는 이야기이고 여자를 잡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도망쳐 나간 것이다. 불경『불전(佛典)』에도 석가모니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창녀를 잡으려고 찾아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급하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자와 값진 물건을 훔쳐 도망쳐버린 창녀, 그리고 그 여자를 벌주기 위해 끌고온 사람들과 도망친 창녀를 붙잡기 위해 찾아다니던 젊은이들, 그들에게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라고 요구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 남을 비방하기 전에

 

불경『사십이장경』『법구경』에서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등겨나 쭉정이처럼 까불어 날리지만 자기잘못은 교활한 도박꾼이 제게 불리한 주사위 눈을 숨기듯 한다’고 한 것이나 성경『마태복음 7:1~5』의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한 것은 똑같은 내용의 비유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나 불경에서 ‘남 듣기 싫은 성낸 말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니’라고 한 말이나 그 표현은 똑같은 것이다.

▣ 신통술과 기적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대목이 곳곳에 수없이 나오고 있다. 장님을 눈뜨게 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4천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벼라별 기적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도 ‘병자를 고치면서’ 복음을 펴고 다녔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행하고 다녔다는 기적들의 유형은 이미 불경의『본생경』에 거의 다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는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독룡(毒龍)을 잡아 밥그릇 속에 담기도 했고, 허공 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도 했고, 용왕의 세계에 나타나기도 했고, 병자를 고쳤으며, 전염병을 물리치고 홍수를 물리쳤으며, 하늘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가 하늘 나라 향적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 음식을 얻어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고,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왕으로 하여금 하늘밥, 하늘옷을 내리게도 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제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은 형용할 수 없이 먼 거리도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신통자재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의 원형은 수많은 불경 여기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불경의 기적들이 조금씩 변형되어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불경『방등경』『유마경』『미린다 왕문경』에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병든 환자로 비유하고 있으며 ‘병든 자에게만 의사와 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와 약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성경『누가복음 5:30~32』『마가복음 2:16~17』에도 예수가‘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는 중생을 병자로 비유한 불경이나 죄인을 곧 병자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성경이나 똑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을 의사로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나 예수가 자신을 의원에 비유한 것도 똑같은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