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잘못된 태도
왜 영어성서 번역자들은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 등을 믿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네 가지 태도를 알아야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아래의 네 가지 태도에 대한 글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글을 참조했음)
A) 자유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사람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이적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동정녀 탄생과 피의 속죄, 부활 등의 근본적인 믿음 자체도 수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정도로 여긴 슈바이처나 도올 김용옥 등이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단지 세상의 고대 문서와 같이, 또는 조금은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정도로 판단한다.
B) 신정통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문제를 제외한 역사적, 과학적 진술은 오류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구체적인 사실 진술에 있어서도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성경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하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C)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역사적,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록에 있어서도 절대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경이 축자적으로, 즉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에 기록된 원본만이 온전한 성경이고 필사본이나 번역본은 온전한 성경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어서 최초의 원본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처음과 같은 권위를 지닌 성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역본들에는 삭제되고 첨가된 단어들과 구절들이 들어 있음은 물론 오역된 곳이 여러 곳 있다. 현재 사용되는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신구약 전체에서 각 성경들은 약 30,000군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역 한글판 성경>과 <표준새번역>은 둘 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했지만 교리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가르치는 차이를 많은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으며, 똑같은 <개역 한글판 성경>에도 일반용과 침례교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D) 극단적 보수주의에 속한 자들로서 현재의 성경 즉, 필사본이나 번역본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온전한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네 가지 태도 중에서 유럽이나 미국에는 A나 B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위의 영어성서 번역자들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C나 D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비판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구약성서의 형성사에 대한 박창환 교수나 박종수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 수 있듯이 성서에는 분명 똑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틀리게 얘기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서에는 서로 모순이 일어나기도 하는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 사료층, E문서-엘로힘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성결법전, P문서-사제 사료층 등)의 이야기들이 혼합되어 있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를 보는 태도는 A나 B와 같은 태도가 오히려 정당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앞의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은 신학대학에서 분명히 배우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을 책에도 쓰고 있고 인터넷에도 올려 놓은 것이다. 학자들은 그래도 솔직한 편인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목사가 된 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성서는 신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신도들에게 맹신을 강요하고 있다. 한 마디로 비양심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순진한(?) 신도들은 목사의 말만 믿고 성서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인데도 성서 내용하고 틀리니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안 틀린다는 미신을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 것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들"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일부에 불과하지만 우리 나라는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미신에 감염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목사의 얘기 외에는 눈도 감고 귀도 막는다. 가수 조영남(미국에서 목사 자격증 획득)이 최근에 쓴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에서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고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얘기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절 사실 그대로라고 승인되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왜 꼬집었겠는가? 부시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대하는 태도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마디로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현대를 사는 부시맨의 후예들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기독교인들의 복음서 변조
기독교인들의 복음서 변조 내용 중에는 ‘경건한 사기’ (Pious Fraud), '분서갱유‘ 등 형태가 다양한데 가필(interpolation)의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볼까 한다.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서에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동굴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 즉 16장 8절에서 끝을 맺고 있다. 그 뒤에 16장 9절부터 20절까지의 구절들은 나중에 첨가된 대목이다. 카톨릭 성경은 주석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수정을 본 것이 두 종류가 있는 데 짧은 것, 긴 것 두 개를 다 소개하며 고본에는 없었다고 색인 난에서 밝히고 있다. 신교의 성경에는 주로 긴 것을 쓰고 있는데 이 점을 주석 난에 "어떤 사본에는 9-20 절까지 없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첨가된 문구 중 논란이 많은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지상 명령 구절(16장 15절)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분명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5~7]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 [마태 15:24]
그리고 예수는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人子)가 오리라(마태 10:23)“고 하였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 9:1)“고 하며 자신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신도들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었다고 앞에서도 얘기한 바 있다. 이렇게 급박하게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땅 끝까지 선교하라고 한다?
어느 구절이 예수의 진짜 말씀일까?
예수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의 승천후 사도들은 이를 실천했는가하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구름에 가리워 승천한 후,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이 마지막 지상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땅 끝까지 선교하러 나가는 대신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마지막 지상 명령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것같이 행동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이방인 "고넬리오"의 초청을 받고 거부감을 표한 것을 보라. 완강히 거절하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따리 환상을 통하여 이방 선교에 마지못해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0 장 참조) 나머지 제자들도 초반에는 베드로의 이방 선교를 비난한다. 올리브 산에서 동시에 예수의 지상 명령을 들은 사람들의 행동치고는 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상 명령이 포함된 구절들이 4 세기경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후세 사람들에 의해 가필이 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예수 사후 행동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구교 백과사전」의 내용도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 마지막 16:9-20 의 12절은 그 진위에 문제가 있다. 마가는 그 끝맺음에 3가지가 있는데 8절에서 끝나는 짧은 version, 9-20 절을 포함한 긴 version, 그리고 중간 길이의 version..... 이 셋 중 중간 길이의 것은 쉽게 제거되는 바 .... 아무도 이 중간 것을 진본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이 진본인가 보면 .....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긴 것은 모든 고본에 없었다고 되어 있는바........ 모든 마가 고본이 8절에서 끝나고 있다고 이 역사가는 서술하고 있으며....... 성 '제롬'도 서술하기를 거의 모든 그리스 고본에 9-20절 구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으며.......... 3 세기, 4 세기의 교부들도 이 구절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보아 동 구절을 모르고 있었던지, 또는 제외시킨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
결국 예수의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러 왔다’고 한 말과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서로 모순된 까닭은 예수의 처음 생각과 나중 생각이 틀려진 것이라기보다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을 후세 사람들이 가필하여 문서를 변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긴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계속 부도수표 처리되었고 결국 예수를 믿음으로서 이미 구원받았다는 식의 교회론이 등장하고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기존의 수많은 사본들 중 정경과 외경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필, 삭제, 분서갱유 등이 자행된 것이다.
이제 왜 모순된 두 종류의 말씀이 함께 Bible에 있는가 하는 것은, 원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대화하다가 불리하면 너무나 명백한 구절조차도 ‘비유’니 ‘상징’이니 운운하다가 결국 막판에 가서는 다음의 구절을 주로 인용한다.
+ 나아마 사람 소바르가 말을 받았다. ‥‥‥ 행여나 하느님께서 자네를 깨우치시려고 입을 열어 답변해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욥기 11:1~8]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하나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말씀을 하신 것이 Bible에 있고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면 인간의 언어구조에 의해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Bible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쓰여진 말씀 그대로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주 고차원적인 비유나 상징이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인용하는 구절들의 거의 대부분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읽으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이고, 그 해석 또한 다른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다. 이런 것들까지 네까짓게 인간인 주제에 감히 신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반박한다면 그들 스스로가 Bible의 존재를 쓸모 없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성서의 원전(原典)에 대한 결론
♣ 원전(原典)은 없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모순 투성이의 복사본 성경이 있을 뿐이다.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한마디로 말해 Bible의 원전(原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한 존재다. 그럼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모두가 기원 4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생겨난, 무수한 카피(copy-模寫本)들인 것이다. 5천 5백 종류를 헤아리는 모사본들은 역시 모사를 거듭한 모사본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형편인 것이다. <원전>이란 것들 중에는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 페이지란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다. 손으로 베껴 쓸 때마다, 내용이 달리 파악되었고, 그때 그때의 요청에 의해서 고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원전>에는 얼른 지적할 수 있는 틀린 부분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원전인 <시나이 사본>이 역시 바티칸 사본과 마찬가지로 기원후 4세기경에 씌어졌다는 것으로 1844년에 시나이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1만 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의 손에 의한 것들로 세 번 수정되고 네 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 낸 일류 전문가 프리드리히 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 3천 군데나 베낄 때 잘못 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교회 장로들도 <원전>이 날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 범인에 대한 견해만은 구구했었지만 벌써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 성경의 원전에 대해 삽입, 모독, 파기, 개량, 말소 등 이런 말들을 공공연히 입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원전>에 있어서의 날조에 대한 화제가 나오게 될 때 좋은 표정들을 짓지 않는다. 날조자들을 감싸고 나온다거나, 의식적인 변경이니 뭐니 늘어 놓으면서 이들은 신의 진리를 표현시키는 언어, 문장을 만들려는 관심 하에 그렇게 고쳤었다는 등으로 주장으로 버틴다.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케일 박사의 저서를 넘겨본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 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은 경우도 있다. 이건 그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變改)다. 하였든간에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제네바의 산 피엘 주교좌 성당에서 오랜 동안 성직을 맡고 있었던 쟌죠라 신부는 “성경이 전면적으로 영감에 의해 씌어졌고, 하나님이 직접 저술했다고 하는 테제(these)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로버트케일 박사는 그의 저서 『현대인의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 줄로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 겨레는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서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 2, 3세기경에 마무리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기술은 아주 천천히 씌어지기 시작했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이 신약문서를 성경으로 쳐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와 더불어 이 문서를 신자 단체 내부에서 낭독하는 습관이 생겨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도 그것을 성스러운 책이라 해서 구약과 같이 대우해 주려는 생각은 갖지 않았었다. 기독교 여러 종파들이 싸움질을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것들을 서로 손잡게 만들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을 즈음에야 비로소 성서로 격상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 사후 2백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그 문서를 성서로 간주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즉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조작인 것이다.
♣ 바이블은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
도올의 바이블에 대한 고견을 들어보자.
“바이블(Bible)이란 파피루스, 페이퍼와 통하는 말로서 종이쪽, 문헌이란 뜻이다. 바이블의 구성은 편지와 전기(biography)밖에 없는데, 예수의 전기를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가정되는 네 사람이 쓴 것이 “복음서”이고 거기에 「사도행전」이라는 역사기록과 초기에 활약한 사람들의 편지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것들 역시 모두 필사본이며 사도 바울의 편지도 모두 필사본입니다. 예를들어 「에베소서」의 성립과정을 따로 든다면,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라는 데에 가서 교회를 만든 다음 떠나가면서 이제는 너희들끼리 예수찬양하고 살아라 하고 떠나가겠죠. 그런데 바울이 거기에 있을 당시에는 교회가 잘 운영되었지만, 바울이 떠나고 한참 지나니까 개판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닙니까? 몇 달만에 만든 교회니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나자렛에서 나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알게 뭐야? 그래서 에베소교회에서는 서로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쌈박질을 벌이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메신저가 헬레벌떡 바울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갑니다. 그러나 교통이 좋지 않은 당시에 바울이 다시 돌아가서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탄의 꾀에 빠지지 마라.........” 등등의 내용을 써서 그 메신저에게 건네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 에 있는 「에베소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니, 「고린도 후서」니, 「로마서」니 전부 이런 식으로 성립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사람이 당시 바울이 직접 쓴 그 편지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떼돈을 벌테지만 어떤게 사본이고 어떤게 원본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초기에는 사도들의 이름을 가장한 온갖 위조편지가 많았어요. 그런 편지들의 온갖 사본들을 모아서 A.D. 4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데에서 편찬한 것이 바로 『바이블』이에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293~373)가 한 짓이죠. 그러므로 유실되지 않고 성경27편에 들어간 글들은 아주 재수가 좋은 것이죠.“
♣ 성경은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해도 그것은 분명 인간의 말(언어)을 빌린 것입니다. 인간의 말인 이상, 그것은 인간의 말의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기독교성서의 원본(지구상의 최초의 기록)은 희랍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랍어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희랍어 원본이야말로 예수님말씀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 이것은 매우 무식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수는 희랍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는 지금은 死語가 되어 버린 아람어라는 토착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원본(희랍어)도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단지 예수님 말씀일 것이라고 떠도는 말들을 예수님이 죽은지 4~50년 경 후에, 그것도 아람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하여 적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몰랐던 희랍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성서는 이러한 최초의 기록에서 수십차의 개정(가감)과 번역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엉터리 번역이 빚어낸 성서의 문제들은 싸구려 엉터리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의 번역판들이 빚어내는 문제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있는 성서에도 보통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글개역판이고 하나는 공동번역판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판의 성경이 똑같은 장 똑같은 절의 기술에 있어서, 문장의 표현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게 맞습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 하나님 말씀입니까?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한 자 한 획도 어김없이 모두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라면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성경에는 예수의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도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러 나라 말 번역이 있을 뿐입니다.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니까요. ”
♣ 정경(正經)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경(正經)을 성립시켰다.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경 대 외경의 구분이 부재했었다. ........ 그들(초대교회의 신도)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파루시아 즉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다.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 생전에 예수가 호령을 치면서 천사들의 소리와 신의 나팔소리를 반주로 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확신했고 그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고 자기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공중에서 예수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데전 5:16~18). 그리고 이 미래사실이야말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최대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의 상징적, 은유적, 추상적 이해가 아니다. 예수의 재림이란 그러한 사실의 모습으로 이 시간 이 공간 속에서 현실화되어 일어난다고 확신했고, 후년에 그는 재림 전에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빌 1:20~25)[류형기 <성서주해> Ⅳ:561] ......대체적으로 초대교인들은 최저한 AD150년경까지는 긴박한 파루시아의 기대 속에서 살았다. 즉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현세는 단순한 준비과정에 불과했으므로 현세 속에서, 즉 역사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든지 역사 속에서 무엇을 성취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경전이 일차적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물론 파루시아는 계속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영화는 상연되지 않고 계속 연기공고만 나붙은 것이다. 이러한 지연 속에서 초기 기독교는 파루시아를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비종말화는 점차적으로 역사의식의 증대를 가져오고 그러한 역사의식은 교회론으로 종결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는 조직으로서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다. 교회야말로 천국의 지상에 있어서의 역사적 표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의 사상적 물줄기의 완성을 바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카톨릭 교회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초대기독교 문헌의 정경화는 이러한 교회론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해 내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A.D. 150년 경까지만 해도 예수사도나 기존경전의 인물이름을 빌어 무명으로 혹은 가명으로 경을 쓰는 일은 전혀 위작의 나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되었다. ........... 우리는 케리그마, 즉 예수의 수난,죽음,부활,승천의 보고, 그리고 그의 행위와 말의 수집이 원래 구전의 전통(oral tradition)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구전은 예수의 언어였던 아람어가 주축이었고 이 구전 자체가 희랍어로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희랍어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다 죽고 난 후에는 이 구전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게 된다. 복음서의 최초의 제작은 이러한 구전의 보존을 위하여 이루어졌고, 또 구전간의 상이에서 오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파벌들이 자기들의 구전을 기록하게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립은 교회의 예배와 의례(liturgy)를 위한 기록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제1세기 말경에는 상당수의 복음서들이 제작된다. 어떤 복음서들은 사도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부활한 예수의 직언이라고 하여 그 권위의 우위성을 보장받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여겨진 복음서에 대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여기는 복음서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정통성의 근거는 사도 저작성(apostolicity)이었다.
이 사도저작성이라는 기준자체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으로는 분쟁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고 2세기에는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소아세아를 중심으로한 동방교회 사이에 정경의 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2세기 말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3세기의 오리겐(Origen), 4세기초의 유세비우스(Eusevius)등에 의한 신학적 논란을 거쳐 조정과정을 거치는데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 애굽인 복음서(Gospel of the Egyptions), 바나바서(Letter of Barnabas), 12사도 교의서(Didache), 헤르마스의 목자서(Shepherd of Hermas), 바울행전(Acts of Paul),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요한행전(Acts of John), 그리고 도마복음서(Gospel of Thomas) 등등은 여러 분류방법에 의해 외전으로 탈락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의 27서가 정경으로 규정된 것은 아리아니즘(Arianism)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독교정통성의 옹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서였다. 라틴교회는 제롬(Jerome)의 영향 하에 아타나시우스의 결정을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27서 형태는 4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의 권위가 일시에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동서방교회에서는 기존의 성경을 썼다. 예를 들면 4세기 중엽의 시나이티쿠스 코우덱스판본(Codex Sinaiticlus)은 바나바서와 헤르마스서를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리아의 교회에서는 타티안이 편집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 5세기까지 쓰였고,....... 7세기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시리아에서는 27서짜리 경전이 쓰여지게 된다. 그 뒤로 1546년에 라틴 벌게이트(the Vulgate)가 인쇄되기까지 텍스트 그 자체는 계속 유동적었다. 마틴 루터는 경전성의 기준을 “사도성”과 “그리스도에게로 귀결되는 것”의 두 척도에 두었는데,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후자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으나 관습의 권위에 복종하여 이 네 편을 신약의 마지막에다가 포괄시켰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우리는 현존 텍스트 그 자체에 절대적 권위를 두고 일점일획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성찰되지 않은 통념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성경의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 신약성경의 원저자의 원사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인용된 성구들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국론>을 번역할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성경지식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우리의 성경지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 이와같이 성경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것이다. 오늘까지 존재하는 사본 중에서 신약 27서 전체를 보전하고 있는 판본은 50종에 불과하며,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그리고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고판본의 해독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구두점 없는 한문 고전이 갖는 문제점과 대동소이하다.“
▣ 성서(Bible)에 대한 결론
성서는 다음과 같은 왜곡의 과정을 거쳤다. 신약성서에 대해 한 번 살펴 보자.
1) 1단계 왜곡(구전): 예수의 육성음(아람어)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증발했으며, 예수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최소한 한 세대 (30년)이상 흐른 뒤 서서히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긴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2) 2단계 왜곡(번역): 예수가 구사했던 언어(아람어)는 최초로 희랍어(그리스어)로 쓰여지기 시작한다. 즉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번역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영어 번역판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 것은 이러한 왜곡을 적게 하려는 수많은 노력과 몸부림인 것이다.
3) 3단계 왜곡(필사): 이 희랍어로 쓰여진 것조차 원본은 없다.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 필사본들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으며, 필사의 과정에서 왜곡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4) 4단계 왜곡(취사 선택): 1~3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5,000종이 넘는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예수가 말한 바와 가까운가 하는 것을 원문비평을 통해서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한 약간의 왜곡이 발생한다.
5) 5단계 왜곡(번역):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평판 그리스어 성서를 대본으로 하여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왜곡이 일어난다.
6) 기타 왜곡: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장과 절의 구분시 많은 오류 발생, 정경과 외경으로 분류하는 과정(예수 사후 2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현재의 27서 형태를 갖춤) , 복음서 변조(수정,가감,삭제 편집) 등의 왜곡도 무시할 수 없다.
이상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혀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내지는 사기(詐欺)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이다. 그러나 과연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것이다.
☞ 한마디로 바이블(bible)의 원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태어나 보지도 못했다. 원본이라는 것 자체가 번역본일 뿐 아니라 복사본이다. 바이블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모순과 오류투성이다. 교회라는 조직이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경만을 정경(正經)이라고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없다. 예수가 말했던 아람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해 쓰여졌으며,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엄청난 사기(詐欺)이다. 아직도 이러한 사기를 밑천으로 밥먹고 사는 한심한 성직자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 괴팅겐 대학에서 신약을 강의하는 한스 코첼만 교수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은 비판적 성서 연구 결과가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임을 자인한다. 10억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신학 도서관을 기웃거려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삼위일체나 예수의 신성(神性)과 같은 중요한 교리조차도 몇 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찬반투표로 인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3부] 바이블은 창작인가? 표절인가?
1. 구약성서는 창작인가? 표절인가?
서구문화의 근원을 보통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연원에서 찾았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의 발굴 결과로 수메르 문화가 나타나면서 두 근원이 수메르에서 나왔음이 밝혀졌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수메르가 가장 오래된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임이 밝혀졌다. 구약성서의 에덴동산의 모델, 노아 홍수, 모세율법, 욥기의 비극, 시문학 등이 모두 수메르에서 나왔음이 밝혀졌다.
수메르어의 세계 권위자인 미국의 크레머 교수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메르어는 고대 히브리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로 설형문자로 씌어진 문서를 복원하고 해독하면 수메르의 신화가 「구약성서」내용의 대부분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메르의 우르 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가 공포한 법전은 법전역사상 최초의 것으로 이보다 250여 년 후에 쓰여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근간이 되었으며 앗시리아 법과 힛티사람들의 법은 물론 구약성서 모세법의 가장 기본을 이루었다. 수메르인들은 또한 안식일 제도와 한 달이 4주가 되는 제도도 만들었다.
▣ 창세기의 원형
구약「창세기」의 장소적 배경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창세 신화를 엮어 새롭게 번안하고 개작한 것이었다.
「창세기」의 태초 이야기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가운데 수메르의 창조신화인「지우쑤드라의 홍수 이야기」와 바빌론의 창조신화인「에누마 엘리쉬」에 담긴 주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천지창조에서 인간 창조, 에덴동산, 도시의 건설, 계보, 인간의 타락, 끝내는 홍수로 이어지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축복받는 계약으로 끝난다.
수메르의 「지우쑤드라」 |
( ) - 인간창조-에덴-도시-계보-홍수-축복-( ) |
바빌로니아의「에누마 엘리쉬」 |
천지창조 축복 활 |
구약「창세기」2~8장 |
인간창조-에덴-도시-계보-홍수-축복 |
구약「창세기」1~9장 |
천지창조 홍수-축복 무지개/활 |
먼저 천지창조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면 구약의 창세기에는 천지창조의 시작에 물(대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빌론의 천지창조설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바빌론창조신화에는 바다의 티아맛이라는 여신과 육지의 말둑이란 남신과의 싸움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구약성서의 창조설화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구약 창세기는 물을 혼돈, 흑암, 즉 “테홈(Tehom)"이라 하여 ”티아맛“과 그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도 야훼 엘로힘 신이 혼동을 쳐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1:6~19의 내용인, 창공을 만들어 달과 해와 별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에도 나온다. 티아맛의 주검을 둘로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든 과정은 「창세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창공을 만든 뒤 그곳에 별, 해, 달을 세우고 이를 절기와 날을 세는 징표로 삼았다는 것과 아래의 물을 모이게 하여 육지와 바다가 생기게 했다는 것은 똑같다. 게다가 ‘안식일’의 발상도 수메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카드어 ‘샤파투’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행하는 종교일이었는데 이 ‘샤파투’에서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정결례를 행하는 ‘샤파투’는 “신의 심장이 쉬는날”이라고 해석했다. 즉 신이 쉬는 날이 안식일인 ‘샤파투’였고, 이스라엘인들은 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샤바트’라고 부른 것이다.
참고로 「에누마 엘리쉬」와 「창세기 1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자. 한마디로 창세기 1장의 창조신화는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를 개작한 것이다.
에누마 엘리시 |
창세기 1장 |
신과 우주적 질료가 동시에 존재하며 양자 모두 영원함 |
신과 우주적 질료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함 |
원초적인 혼돈을 나타내는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는 어둠에 감싸여 있음 |
땅은 텅 비어 있으며 어둠이 깊은 물(테홈) 위에 있음 |
마르두크가 바람을 타고 티아마트 여신을 잡으러 감 |
신의 바람이 깊은 물(테홈:"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와 어근이 같은 말) 위에 휘돌고 있음 |
신들에게서 빛이 나옴 |
빛을 창조함 |
하늘을 창조함 |
하늘을 창조함 |
마른 땅을 창조함 |
마른 땅을 창조함 |
섬광체(해와 달)를 창조함 |
섬광체(해와 달)를 창조함 |
인간을 창조함 |
인간을 창조함 |
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축하함 |
신은 휴식을 취하고 안식일을 정해 거룩하게 하게 함 |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로써 우리는 우리 나라의 1천 2백만 신도, 나아가 전 세계 17억의 인구가 믿고 있는 성서가 더 이상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오류가 없는 책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수집하고 편집하였으며 그들의 머리와 사상에 의해 덧칠해진 인간의 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신앙할 것이 아니라, 성서에 담겨 있는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를 합리적으로 연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여 인류의 한 고전(古典)으로서, 인류가 축적한 한 지혜의 산물로서 올바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 인간 창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중 바빌로니아의 홍수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에는 죄짓고 처형당한 신의 살과 피에 점토를 섞어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발상은 동일한데 여기서 구약의 내용과 차이가 있는 점은 “죄지은 신의 살과 피가 결국 사람의 혼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도 “살의 혼은 피에 있다”[레위 17:11]고 풀이하여, 피가 사람의 혼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레위기」의 해석을 염두에 두면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내용 중 구약성서에서 배제한 것은 “죄짓고 처형당한 신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부분뿐인데 이러한 ‘인간창조와 죄의 연관성에 관한 신화’가 구약성서에서는 정결한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속죄례’라는 종교적 관습으로 실행되었으며 ‘속죄 신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속죄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어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죄지은 신의 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간창조 신화’가 살아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왜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학자, 종교가, 학자가 논쟁을 벌여 왔으나 최근에 수메르의 설화에 나오는 신 엔키와 여신 니프르사구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자 완전히 해명이 되었다. 수메르어로 ‘티’란 말은 ‘갈비뼈’와 ‘생명을 주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의 물의 신 엔키와 갈비뼈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태어난 여성은 닌티라 부른다. 이것은 ‘갈비뼈의 여인’ 또는 ‘생명을 주는 여인’이라는 뜻이 있다. 결국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도 수메르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에서 몇 십 명 정도에 불과한 수메르어 전공자의 한 사람이며, 현재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조철수 박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의 ‘여자가 태어난 이야기’에 따르면 야웨는 남자의 갈비뼈 중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대 수메르신화의 한 부분을 히브리어로 번안한 것이다.”
▣ 에덴동산의 모델
기독교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의 딜문(Dilmun)동산의 신화로부터 차용한 이야기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기 위해 아담을 창조해 놓고는 늘 어떻게 하면 아담을 좀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이건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로부터 차용한 이야기이다. 수메르 신화에 보면 신들은 누군가가 동산을 돌보고 필요한 먹거리를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사내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2, 3장에 나오는 신화의 배경은 바로 수메르 신화인 것이다.
조철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은 수메르어 명사인 gan₂eden(들판의 일궈놓은 밭)과 같은 단어이다. ‘들판’이나 ‘들판의 일궈놓은 밭’의 수메르어 보통명사가 창세기에서는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수메르 이야기에 사람들이 땅에 기는 것들(즉 뱀)과 들짐승과 서로 즐겁게 살았다는 부분도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담(사람)이 온갖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뱀과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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