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안장正法眼藏/선의 법열 禪之法悅

설잠(雪岑)선사(김시습) - 불교 암흑시대를 밝힌 고승

윤지환 철학연구소 2014. 1. 5. 00:28

 

설잠(雪岑)선사(김시습) - 불교 암흑시대를 밝힌 고승            

 

매월당 김시습

 

불교 암흑시대를 밝힌 고승, 설잠선사


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1435-1493)스님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스님은 유가(儒家)로 시작, 불가(佛家)에서 생을 끝냄으로써 ‘불심유관(佛心儒冠)’, ‘심유천불(心儒踐佛)’, ‘적불반광(跡佛伴狂)’ 등 보는 사람에 따라 다각도로 평가되는 삶을 살았다. 조선 성리학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용납하기 힘든 파격적 삶을 산 그이지만, 승려로서는 뛰어난 저술을 통하여, 득통기화(得通己和) 이후 이렇다할 고승과 고승의 저술이 없었던, 불교 암흑기의 적막을 깨뜨린 걸출한 고승이었다.

불교 암흑기 적막 깨뜨린 걸출한 고승

스님은 성장 후 대부분의 생을 승려로서 살았다. 그는 뛰어난 자질로 유학에 통달했으나, 본인의 성품에 맞지 않는 현실세상을 뛰쳐나와 결국 불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선문(禪門)이 이단시 되던 당시 스님의 이와 같은 삶은 특히 유학자들에게는 괴기하다던지 희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스님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동(神童)이라 불릴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3세에 ‘꽃이 난간 앞에서 웃고 있으나 그 소리 들리지 않고/ 새가 수풀에서 울고 있으나 눈물은 보기 어렵구나’ 등의 시를 남겼고, 5세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여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불렸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당시 옆집에 살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뛰어난 재주를 보고 지어준 것이라 전한다.

다음의 일화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천품을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세종이 오세신동의 소문을 듣고 궁궐로 그를 불러 시험을 했다. 스님을 보고 먼저 “네 이름으로 글을 지어보겠느냐”고 묻자 스님은 바로 “올 때 강보에 싸여 있던 시습입니다(來時襁褓金時習)”라고 답했다. 세종이 신기해하며 다시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가치키며 시를 지어보라고 하자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小亭舟宅何人在)”라는 시로 답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세종은 아이가 커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크게 기용하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고는 비단 30필을 하사했다. 그리고 무거운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 가 시험해보고자 스스로 가져가라고 하니 시습은 비단을 풀어 매듭을 묶고는 허리에 매어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설잠의 글을 보면 그의 나이 18세에 송광사에서 함허의 제자인 선승 준상인(峻上人)과 함께 하안거를 보내면서 참선지도를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부터 이미 출가인(出家人)으로 자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님은 21세 때 경전공부와 무술연마를 위해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여기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3일간 통곡한 끝에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불명은 설잠(雪岑)이라 지었다.

출가 후의 득도와 수행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세상에 대한 울분을 술과 시로 풀며 전국을 방랑하던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오세암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다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느 날 오도(悟道)하고 말하기를 “선리(禪理)가 자못 깊어 5년을 공들인 끝에 투관(透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가 후 전국을 떠돌던 설잠은 29세가 되던 해(세조 9년) 책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가 효령대군의 부탁으로 내불당에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을 돕게 되었다. 서울에 머물던 당시 설잠은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하지 않았던지 세조의 숭불사업을 찬송한 시문을 여러 편 남겼다. 이후, 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나 31세 때 경주 남산(일명 금오산) 금오산실에 정착한 설잠은 그곳에서 7년간 머물면서 [금오신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37세가 되던 해 성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10여 년간 머물렀다. 이후 47세가 되던 해 환속을 하고 안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그녀가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출가 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설잠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충남 부여 무량사인데, 스님은 이곳에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원융적 선관 지닌 선사(禪師)

승려로서의 설잠은 간화선 계열의 선승이면서도 화엄(華嚴)․법화(法華) 사상과 조동선(曹洞禪)까지 깊이 연구, [화엄법계도주(華嚴法界圖註)]와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을 저술하여 조선 초기 불교 암흑시대에 불타의 혜명을 잇는다.

스님은 원융적인 선관을 가진 선사(禪師)이었다. 그는 의상의 [화엄법계도]를 주석함을 통해서 화엄사상의 원의가 가장 간명하면서도 생동력있는 실천성에 있다고 본다. 그 뿐 아니라 각 구절의 말미에 격외선적인 송(頌)으로 귀결을 시켜 화엄을 궁극적 경지에서 선과 원융시킨다.
법화사상을 봄에 있어서도 그 핵심을 지행양전(智行兩全)에 있다고 보아 각품의 찬(讚)에서 법화사상의 원의를 간명하고 생동하게 밝히고 또한 말미에 [대혜어록]이 중심이 된 간화선적 송을 결구로서 귀결시키면서 천태사상과 선을 일치시킨다.

다시 말해서 스님은 보다 근원적인 입장에서 화엄사상과 천태사상의 핵심을 충실하게 밝혀 선과 일치를 이루게 한다. 대각국사 의천이 한국의 천태종을 창립하여 교관겸수라는 면에서 교와 선을 일원으로 보았으며,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쌍수의 입장에서 선교일원을 강조한 한국불교 사상사적인 면에서 볼 때, 스님의 교선일미(敎禪一味)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일 것이다. 특히 의천이 천태종을 토대로 한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했고, 지눌이 대혜종고의 간화선과 이통현 화엄을 토대로 한 선교일원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볼 때, 스님의 조동선의 의미를 내포한 선과 화엄 그리고 법화를 각각 간화선에 융회시킨 점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실이 된다. 스님의 유저(遺著)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하여, [매월당집(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화엄법계도주(華嚴法界圖註)]·[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이 있다.

스님은 소외와 고독에 찬 평생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회통성과 삶과 이 세계에 대한 긍정성은 실로 돋보이는 점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선과 교의 관계를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 선과 교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설했으며, 격외선(格外禪)의 입장에서 천태(天台)와 화엄(華嚴)의 사상을 논하고 있다.

 

-이덕진/창원전문대 교수

 

 

'정법안장正法眼藏 > 선의 법열 禪之法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 - 방정본  (0) 2013.08.31
육조단경   (0) 2013.08.31
나옹록 9...終  (0) 2012.03.30
나옹록 8  (0) 2012.03.30
나옹록 7  (0) 201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