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시 중
스님께서 하루는 대중을 모아 각각에게 매일매일의 공부를 물은 뒤에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렇다면 반드시 대장부의 마음을 내고 기어코 하겠다는 뜻을 세워 평소에 깨치거나 알려고 한 일체의 불법과 사륙체 (四六體) 의 문장과 언어삼매를 싹 쓸어 큰 바다 속에 던지고 다시는 들먹이지 말아라. 그리하여 8만 4천 가지 미세한 망념을 가지고 한 번 앉으면 그대로 눌러앉고,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한 번 들면 늘 들되,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든가,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라든가, `어떤 것이 내 본성인가?'라든가 하라.
혹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은, `없다〔無〕' 하였다. 그 스님이 `꼬물거리는 곤충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한 화두를 들어라.
이 중에서도 마지막 한 구절을 힘을 다해 들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 들다 보면 공안이 앞에 나타나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린다. 고요한 데서나 시끄러운 데서나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거든 의심을 일으키되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대변을 보거나 소변을 보거나 어디서나 온몸을 하나의 의심덩이로 만들어야 한다. 계속 의심해 가고 계속 부딪쳐 들어가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분명히 캐들어가되, 공안을 놓고 그것을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전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모름지기 단박 탁 터뜨려야 비로소 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아 담담하고 밋밋하여 아무 재미도 없거든, 낮은 소리로 연거푸 세 번 외워 보라.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것이니, 그런 경우에 이르거든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라.
여러분이 각기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정진하는 중에도 더욱 더 용맹정진을 하라. 그러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사람을 만나보아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20년이고 30년이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부처의 씨앗 〔聖胎〕 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천룡 (天龍) 이 그를 밀어내 누구 앞에서나 용감하게 큰 입을 열어 큰 말을 할 수 있고 금강권을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 하며, 가시덤불 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며, 한 생각 사이에 시방세계를 삼키고 3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다.
그런 경지에 가야 비로소 그대들은 노사나불 (盧舍那佛) 의 갓을 머리 위에 쓸 수 있고, 보신불․화신불의 머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혹 그렇지 못하거든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을 좌복에 우뚝이 앉아 절박하게 착안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참구하여라."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16. 장상국 (張相國) 의 청으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변숭 (邊崇) 의 영혼이여, 밝고 신령한 그 한 점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어야 할 번뇌도 없고 구해야 할 보리도 없다. 가고 옴도 없고 진실도 거짓도 없으며 남도 죽음도 없다. 4대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4대를 떠난 때도 그러하다.
지금 을묘년 12월 14일 밤에 천보산 (天寶山) 회암선사 (檜岩禪寺) 에서 분명히 내 말을 들으라. 말해 보라. 법을 듣는 그것은 번뇌에 속한 것인가, 보리에 속한 것인가, 옴에 속한 것인가 감에 속한 것인가, 진실에 속한 것인가, 허망에 속한 것인가, 남에 속한 것인가 죽음에 속한 것인가. 앗 (咄) !.
전혀 어떻다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결국 어디서 안신입명 (安身立命) 하는가."
죽비로 향대 (香臺) 를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으면 마지막 한마디를 더 들어라. 영혼이 간 바로 그 곳을 알려 하는가. 수레바퀴 같은 외로운 달이 중천에 떴구나."
다시 향대를 치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17. 나라에서 주관한 수륙재 (水陸齋) 에서 육도중생에게 설하다
스님께서 자리에 올라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승의공주 (承懿公主:공민왕비 노국대공주를 말함) 를 비롯하여 여러 불자들은 아는가.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번 보시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을 막론하고 누가 본지풍광 (本地風光) 을 밟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잔소리를 한마디 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살피시오.
승의공주여, 36년 전에도 이것은 난 적이 없었으나 과거의 선인 (善因) 으로 인간세계에 노닐면서 만백성의 자모 (慈母) 가 되어 온갖 덕을 베풀다가, 조그만 묵은 빚으로 고요히 몸을 바꿨소. 그러나 36년 후에도 이것은 죽지 않았으니, 인연이 다해 세상을 떠나 생애 (生康) 를 따로 세웠소.
승의공주여, 4대가 생길 때에도 밝고 신령한 이 한 점은 그것을 따라 생기지 않았고, 4대가 무너질 때에도 밝고 신령한 이 한 점은 그것을 따라 무너지지 않소. 나고 죽음과 생기고 무너짐은 허공과 같으니, 원수니 친한 이니 하는 묵은 업이 지금 어디 있겠소. 이제 이미 없어졌으매 찾아도 자취가 없어 드디어 허공같이 걸림이 없소. 세계마다 티끌마다 묘한 본체요,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가 주인공 〔家公〕 이오. 소리와 빛깔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나고, 빛깔과 소리가 없으면 그윽이 통하오. 상황에 맞게 때에 맞게 당당히 나타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묘하고 오묘하오. 자유로운 그 작용이 다른 물건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 죽이고 살림이 모두 그의 힘이오.
승의공주여,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으면 이 산승이 공주를 위해 확실히 알려 주겠소."
죽비로 탁자를 치면서 악! 하고 할을 한 번 한 뒤에 말씀하셨다.
"여기서 단박 밝게 깨쳐 묘한 관문을 뚫고 지나가면, 3세 부처님네와 역대 조사님네와 천하 선지식들의 골수를 환히 보고, 3세 부처님네와 역대 조사님네와 천하의 선지식들과 손을 잡고 함께 다닐 것이오."
또 한 번 내리친 뒤에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많은 생의 부모와 여러 겁의 원수 친한 이를 제도하고, 이렇게 해서 세세생생에 함부로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해치고 친한 이를 원망한 일을 제도하며, 이렇게 해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승 저승의 모든 원수나 친한 이를 제도하시오. 이렇게 해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 모든 지옥중생을 제도하고, 주리고 목마른 아귀중생을 제도하며, 축생계에서 고생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아수라계에서 성내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인간세계에서 잘난 체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천상에서 쾌락에 빠져 있는 모든 하늘 무리를 제도하시오."
다시 죽비를 던지고 말씀하셨다.
"언덕에 올랐으면 배를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니, 무엇하러 사공에게 다시 길을 물으랴."
회향 (廻向)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 향을 사른 뒤에 죽비로 향대를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승의 선가 (仙駕) 를 비롯하여 여러 불자들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와 어울려 여러 세계에 잘못 들었소. 그리하여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혹은 천상에 있으면서 떴다 가라앉음이 일정치 않고 고락이 같지 않았으니, 그것은 오직 그대들이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본래면목을 몰랐기 때문이오.
승의선가여, 원수나 친한 이를 면하고 생사를 면하여 고해를 건너려거든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주인공의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 제일이오.
승의공주는 인간에 태어나되 왕궁에 태어나 30여 년을 인간세상에 노닐면서 한 나라의 공주가 되어 만백성들을 이롭게 하였으니,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면목이지만,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면목은 어떤 것인가.
지금 4대는 흩어지고 신령하게 알아보는 그것 〔靈識〕 만이 홀로 드러나고 텅 비고 밝은 그것 〔虛明〕 만이 혼자 비치어 멀고 가까움에 관계가 없고, 산하와 석벽도 막지 못하니 자, 어서 오시오. 지금 여기서 내 말을 분명히 듣는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확실히 보아 의심이 없으면, 시방 불국토 어딜 가나 자유자재할 것이오. 그렇지 못하다면 이 산승은 또 공주를 위해 수륙재 (水陸齋) 의 인연을 조금 말할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살피시오.
물과 땅의 어둡고 밝은 큰 도량에서 티끌 같은 세계를 다 드러내오. 3도 (三途) 에서는 법을 듣고 고통을 모두 떠나고, 6취 (六趣) 에서는 은혜를 입어 법체 (法體) 가 편안하오. 원한 있는 마음은 끊기 쉬우나, 끝이 없는 성품은 헤아리기 어렵소. 이 집에 가득한 형제들이여, 알겠는가. 청풍명월이 곳곳에서 반짝이니 이 법회에는 부처님네가 다 내려오셨고, 3현10성 (三賢十聖) 이 다 귀의하오. 마음을 편히하고 공양을 받아 기쁜 마음을 내고, 금강 (金剛) 의 묘각 (妙覺) 으로 점차 들어가시오. 중생들 이 항하수 모래만큼의 죄를 골고루 지으나, 한마디 〔一句〕 에 다 녹이고 한 기틀을 돌리시오. 이러한 공덕 한량 없거니, 승의 선가는 정토로 돌아가오. 말해 보시오. 승의 선가는 정토에 있는가, 예토에 있는가. 부처세계에 있는가. 중생세계에 있는가. 이 세계에 있는가, 저 세계에 있는가."
또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정토라 할 수도 없고 예토라 할 수도 없으며, 부처세계라 할 수도 없고 중생세계라 할 수도 없으며, 이 세계라 할 수도 없고 저 세계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어디라고도 할 수 없다면 결국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죽비를 던지고 말씀하셨다.
"미세한 의혹을 모두 없애 한 물건도 없나니, 대원경지 속에서 마음대로 노닌다."
빈당 (殯堂) 에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승의공주를 부른 뒤에 말씀하셨다.
"승의공주는 36년 동안 4대를 부지해 오다가 불과 바람은 먼저 떠나고 흙과 물만 남아 있소. 산승은 독손 〔毒手〕 으로 끝까지 헤쳐놓고 한바탕 소리칠 것이니, 마음대로 깨치고 마음대로 쓰시오."
할을 한 번 하고 말씀하셨다.
"승의선가는 허공을 누비되 앞뒤가 없고, 한 티끌도 붙지 않아 당당히 드러났소. 몸을 뒤쳐 바로 위음왕 밖을 뚫어, 크나큰 참바람을 헛되이 간직하지 마시오."
주장자로 널을 세 번 내리친 뒤에 또 부르고는 "승의공주여, 맑은 못에 비친 가을달을 밟아 보시오. 온 천지에 얼음 얼고 서리치리니" 하고 할을 한 번 하셨다.
18. 정월 초하루 아침에 육도중생에게 설법하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들이여, 그대들은 마음을 씻고 자세히 들으라. 지금 4대는 각기 떠나고 영식 (靈識) 만이 홀로 드러났소. 비록 산하와 석벽에 막힌 것 같으나 이 영지 (靈知) 는 가고 옴에 걸림이 없어 티끌 같은 시방세계에 노닌다. 그러면서도 그 자취가 끊어졌으므로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청하면 곧 온다. 지옥에 있거나 혹은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있거나 그들은 지금 계묘년 섣달 그믐날 다 여기 와서 분명히 내 말을 듣고 있다. 말해 보라. 지금 내 말을 듣는 그것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멸하는 것인가, 멸하지 않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가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앗 〔咄〕 !.
산 것이라 할 수도 없고 죽은 것이라 할 수도 없으며, 멸하는 것이라 할 수도 없고 멸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오는 것이라 할 수도 없고 가는 것이라 할 수도 없으며,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없으며, 무어라 할 수 없다는 그것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니, 결국 그것은 무엇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빨리 몸을 뒤쳐 겁 밖으로 뛰어넘으라. 그때부터는 확탕 (湯:끓는 솥에 삶기는 고통을 받는 지옥) 도 시원해지리라."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불자들은 자세히 아는가. 여기서 만일 자세히 알면 지옥에 있거나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있거나 관계없이 불조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산승이 그대들을 위해 잔소리를 좀 하리니 자세히 들으라.
그대들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망령되게 4대를 제 몸이라 여기고 망상분별을 제 진심으로 알아 하루 내내 일년 내내 몸과 입과 뜻으로 온갖 악업을 지어 왔다. 그리하여 그 정도가 같지 않으므로 지옥에 들기도 하고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인간이나 천상에 있기도 하는데, 지금 갑진년 섣달 그믐날 모두 여기 와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인연을 버리고 온갖 일을 쉬고, 여러 생 동안 지은 중죄를 참회하여 없애고 자심3보 (自心三寶) 에 귀의하라. 불법승 3보는 그대들의 선지식이 되고 그대들의 큰 길잡이가 될 것이다. 3세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님네와 천하 선지식들도 다 이것에 의하여 정각 (正覺) 을 이루고는, 시방세계의 중생들을 널리 구제하여 다 성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미래의 부처와 보살도 이것에 의하지 않고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일체종지 (一切種智:모든 것을 아는 부처의 지혜) 가 뚜렷이 밝고 10호 (十號) 가 두루 빛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자심3보에 귀의해야 할 것이다.
귀의란 망 (妄) 을 버리고 진 (眞) 을 가진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지금 분명히 깨닫는, 텅 비고 밝고 신령하고 묘한, 조작없이 그대로인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불보 (佛寶) 요, 탐애를 아주 떠나 잡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광명이 피어나 시방세계를 비추는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법보 (法寶) 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한 생각도 생기지 않아 과거 미래가 끊어지고 홀로 드러나 당당한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승보 (僧寶) 인 것이다.
불자들이여, 이것이 그대들의 참귀의처이며, 이것을 일심3보 (一心三寶) 라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철저히 알았는가? 만일 철저히 알아낸다면 법법이 원만히 통하고 티끌티끌이 해탈하여 다시는 3도와 6취에 윤회하지 않을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옛 성인이 도에 들어간 인연을 예로 들어 그대들을 깨닫게 하겠다.
삼조 승찬 (三祖僧璨) 대사가 처음으로 이조 (二祖) 를 찾아뵙고, `저는 죄가 중합니다. 화상께서 이 죄를 참회하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조는 `그 죄를 가져 오라. 그대에게 참회하게 하리라' 하였다. 삼조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하기를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조가 `그대의 죄를 다 참회해 주었으니, 불법승에 의지하여 살아가라' 하였다.
삼조가 다시 묻기를 `제가 보니 스님은 승보이지만 어떤 것이 부처와 법입니까?' 하니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니 부처와 법은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하였다. 삼조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본성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고, 마음이 그런 것처럼 부처와 법은 둘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니 이조는 `그렇다' 하였다.
불자들이여, 죄의 본성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고 한다면 결국 어디 있겠는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일어난 곳을 찾아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의 본성이 공 (空)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의심이 없는가. 여기에 대해 분명하여 의심이 없다면 바른 안목이 활짝 열렸다 하겠으나 혹 그렇지 못하다면 또 한마디를 들어 그대들의 의심을 풀어 주겠다. 옛사람들의 말에 `물질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 그러나 중생들은 물질만 보고 마음은 보지 못한다' 하였다."
이어서 불자를 세우고는, "이것이 물질이라면 어느 것이 그대들의 마음인가?" 하시고, 또 세우고는 "이것이 그대들의 마음이라면 어느 것이 물질인가?" 하셨다.
그리고는 불자를 던지고는 말씀하셨다.
"물질이면서 마음인 것이 그 자리에 나타나는데, 요새 사람들은 형상을 버리고 빈 마음을 찾는다."
19. 최상서 (崔尙書) 의 청으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가 영혼을 부르며 말씀하셨다.
"나 (羅) 씨 영혼이여, 나씨 영혼이여, 아는가? 모른다면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겠다.
나씨 영혼이여, 63년 전에 4연 (四緣) 이 거짓으로 모인 것을 거짓으로 이름하여 남 〔生〕 이라 하였으나 나도 난 적이 없었다. 63년 뒤인 오늘에 이르러 4대가 흩어진 것을 거짓으로 이름하여 죽음이라 하나 죽어도 따라 죽지 않았다. 이렇게 따라 죽지도 않고 또 나지도 않았다면,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나고 죽고 가고 옴에 실체가 없다면 홀로 비추는 텅 비고 밝은 것 〔虛明〕 만이 영겁토록 존재하는 것이다.
나씨 영혼을 비롯한 여러 불자들이여, 그 한 점 텅 비고 밝은 것은 3세 부처님네도 설명하지 못하였고 역대 조사님네도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하지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했다면 4생6도의 일체 중생들에게 각각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본래 갖추어져 있다면 무엇을 남이라 하고 무엇을 죽음이라 하며, 무엇을 옴이라 하고 무엇을 감이라 하며, 무엇을 괴로움이라 하고 무엇을 즐거움이라 하며, 무엇을 옛날이라 하고 무엇을 지금이라 하는가.
삶과 죽음, 감과 옴, 괴로움과 즐거움, 옛과 지금이 없다고 한다면, 그 한 점 텅 비고 밝은 것은 적나라하고 적쇄쇄하여 아무런 틀 〔窠臼〕 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 시방세계는 안도 없고 바깥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바로 깨끗하고 묘한 불토 (佛土) 요 더 없는 〔無上〕 불토며, 견줄 데 없는 불토요 한량없는 불토며, 불가사의한 불토요 말할 수 없는 불토인 것이다.
이런 불토가 있으므로 이 모임을 마련한 시주 최씨 등이 지금 산승을 청하여 이 일대사인연을 밝히고, 망모 (亡母) 인 나씨 영가 (靈駕) 의 명복을 비는 것이다. 말해 보라. 영가는 지금 어느 국토 (國土) 에 있는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티끌 하나에 불토 하나요, 잎새 하나에 석가 하나니라" 하고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0. 조상서 (趙尙書) 의 청으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가 죽비로 향탁 (香托) 을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채 (蔡) 씨 영가는 아는가. 이 자리에서 알았거든 바로 본지풍광 (本地風光) 을 밟을 것이오, 만일 모르거든 이 말을 들으라.
50여 년 동안을 허깨비 바다 〔幻海〕 에 놀면서 온갖 허깨비 놀음을 하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4대가 흩어져 각각 제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밝고 텅 빈 〔虛明〕 한 점만이 환히 홀로 비추면서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청하면 곧 오는데, 산하와 석벽도 막지 못한다. 오직 이 광명은 시방세계의 허공을 채우고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찬란히 모든 사물에 항상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산하대지는 법왕의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초목총림은 모두 사자후를 짓는다. 한 곳에 몸을 나타내면 천만 곳에서 한꺼번에 나타나고, 한 곳에서 법을 설하면 천만 곳에서 한꺼번에 법을 설한다. 한 몸이 여러 몸을 나타내고 여러 몸이 한 몸을 나타내며, 한 법이 모든 법이 되고 모든 법이 한 법이 되는데, 마치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받아들이고 크고 둥근 거울 〔大圓鏡〕 처럼 영상이 서로 섞인다. 그 가운데 일체 중생은 승속이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지혜있는 이나 지혜없는 이나, 유정이나 무정이나, 가는 이나 오는 이나, 죽은 이나 산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성불한다'라고.
채씨 영가여, 아는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 의심이 없으면 현묘한 관문을 뚫고 지나가, 3세의 부처님네와 역대의 조사님네와 천하의 선지식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다니면서 이승이나 저승에서 마음대로 노닐 것이요,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마지막 한 구절을 들으라."
죽비로 향탁을 한 번 내리치고는 "한 소리에 단박 몸을 한 번 내던져 대원각 (大圓覺) 의 바다에서 마음대로 노닌다" 하고 할을 한 번 한 뒤에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1. 장흥사 (長興寺) 원당 (願堂) 주지의 청으로 육도중생에게 설법하다
스님께서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죽비로 탁자를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승의공주 선가와 이씨 영가와 여러 불자들은 아는가. 4성6범 (四聖六凡) 이 여기서 갈라지고 4성6범이 여기서 합한다. 그대들은 아는가. 만일 모른다면 내가 한마디 하여 그대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살피라.
승의 선가와 이씨 영혼이여, 만일 이 일대사인연으로 말하자면 지옥세계에 있는 자나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세계에 있는 자를 가리지 않고 각기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에서 저녁까지 저녁에서 아침까지 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움직이는 동안 배고프고 춥기도 하며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면서 어디서나 갖가지로 작용하는데, 다만 미혹과 깨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즐거움을 누리는 이도 있고 항상 지독한 고통을 받는 이도 있어 두 경지가 같지 않다.
불자들이여, 이 한 점 신령하고 밝은 것 〔靈明〕 은 성인에 있다 하여 늘지도 않고 범부에 있다 하여 줄지도 않으며, 해탈하여 의지하는 곳이 없으며 활기가 넘쳐 막히는 일도 없다. 비록 형상도 없고 처소도 없으나 시방세계를 관통할 수 있고 모든 부처의 법계에 두루 들어간다. 물물마다 환히 나타나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고 버리더라도 언제나 있다. 한량없이 광대한 겁으로부터 나도 따라 나지 않고 죽어도 따라 죽지 않으며, 저승과 이승으로 오가지만 그 자취가 없다. 눈에 있으면 본다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 하며, 6근에 두루두루 나타나되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다.
불자들이여, 과연 의심이 없는가. 여기서 분명하여 의심이 없으면, 바른 눈이 활짝 열려 불조의 혜명 (慧命) 을 잇고 스승의 기용 (機用) 을 뛰어넘어 현묘한 도풍을 크게 떨칠 것이다. 만일 그래도 의심이 있으면 또 한 가지를 들어 남은 의심을 없애 주리니 자세히 보아라."
죽비를 들고 "이것을 보는가" 하고 한 번 내리치고는, "이 소리를 듣는가. 보고 듣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인가?" 하셨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2. 신백대선사 (申白大禪師) 를 위해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도로 멸한다. 63년 동안 허깨비 바다에서 놀다가, 인과를 모두 거두어 진 (眞) 으로 돌아갔나니, 근진 (根塵) 을 모두 벗고 남은 물건이 없어 손을 놓고 겁 밖의 몸으로 갔구나."
그 혼을 부르면서 말씀하셨다.
"신백 존령 (尊靈) 은 과연 이러한가. 과연 그러하다면 생사에 들고 남에 큰 자재를 얻을 것이다. 혹 그렇지 못하다면 마지막 한마디를 들으라."
밤이 고요해 거듭 달을 빌리기 수고롭지 않나니
옥두꺼비 (玉蟾:달) 언제나 허공에 걸려 있네.
夜靜不勞重借月 玉蟾常掛大虛中
23. 해제에 상당하여
태후전 (太后殿) 에서 가사 한 벌을 보내오다
스님께서 법의를 들고 말씀하셨다.
"대유령 (大庾嶺) 꼭대기에서 들어도 들어지지 않을 때에는 다투어도 모자라더니, 놓아버려 깨달았을 때에는 양보해도 남는구나."
향을 사른 뒤에 말씀하셨다.
"천 분 성인도 전하지 못하던 것을 어찌 한 사람이 친히 전하겠는가. 대중은 아는가. 접고 펴기는 비록 내게 있으나 거두고 놓기는 그대에게 있다."
가사를 입고 법좌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 자리는 많은 사람이 오르지도 못하였고 밟지도 못하였는데, 이 산승은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올라갈테니 대중은 자세히 보라."
스님께서는 향을 사뤄 황제를 위해 축원한 뒤에, 가사자락을 거두고 자리를 펴고 앉아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구 (主句) 인가, 빈구 (賓句) 인가. 파주구 (把住句) *인가, 방행구 (放行句) *인가. 대중은 가려내겠는가. 가려낼 수 있겠거든 당장 흩어지고, 가려내지 못하겠든 내 말을 들으라. 맨처음 한마디와 마지막 한 기틀 〔機〕 은 3세의 부처님네나 역대의 조사님네도 알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대중의 면전에 들어 보이니 북을 쳐서 대중운력이나 하여라.
천년의 그림자 없는 나무가 지금은 밑 빠진 광주리가 되었다. 2천년 전에도 이러하였고 2천년 후에도 이러하며, 90일 전에도 이러하였고 90일 후에도 이러하다. 위로는 우러러야 할 부처도 없고 밑으로는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는데, 무슨 장기 (長期) ․단기 (短期) 를 말하며 무슨 결제․해제를 말하는가."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양쪽을 끊었고 가운데에도 있지 않다. 빈 손에 호미 들고 걸어가면서 물소를 탄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구나."
할을 한 번 하고는 "안녕히 계시오" 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4. 승하하신 대왕의 빈전 (殯殿) 에서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향을 들고 말씀하셨다.
"손 가는대로 향을 집어 향로에 사르는 것은 승하하신 대왕 각경선가 (覺穀仙駕:공민왕을 말함) 께서 천성 (千聖) 의 이목을 활짝 열고 자기의 신령한 근원을 증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향을 꽂으셨다. 스님께서는 법좌에 기대앉아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주장자를 들고 말씀하셨다.
"대왕은 아십니까. 45년 동안 인간세상에 노닐면서 삼한 (三韓) 의 주인이 되어 뭇 백성들을 이롭게 하다가, 이제 인연이 다해 바람과 불은 먼저 떠나고 흙과 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대왕은 자세히 들으소서. 텅 비고 밝은 이 한 점은 흙이나 물에도 속하지 않고 불이나 바람에도 속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속하지 않고 현재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가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오는 것에도 속하지 않으며, 나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죽는 것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금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장자를 들고는 "이것을 보십니까?" 하고 세 번 내리치고는 "이 소리를 들으십니까?" 하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허공을 쳐부수어 안팎이 없어 한 티끌도 묻지 않고 당당히 드러났다. 몸을 뒤쳐 위음왕불 (威音王佛) 뒤를 바로 뚫고 가시오. 둥근 달 차가운 빛이 법상 (法滅) 을 비춥니다."
향대를 한 번 내리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5. 납월 8일 한 밤의 법문 〔晩參〕
스님께서 자리에 오르자 동당․서당의 스님들이 문안인사를 드렸다.
스님께서는 죽비를 들고 말씀하셨다.
"산승이 방장실에서 나와 이 자리에 오르자, 시자도 인사하고 수좌도 인사하고 유나 (維那) 도 인사하였다. 인사가 다 끝났는데 또 무슨 일이 있는가?"
한 스님이 나와 말하였다.
"오늘은 납월 (臘月) 8일입니다."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 들어가라" 하고 죽비를 들고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 보아도 머리가 없고 밑으로 보아도 꼬리가 없다. 해같이 밝고 옷칠같이 검으며 세계가 생기기 전이나 산하가 멸한 후에도 허공에 가득 차 있다. 3세의 부처님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고, 역대의 조사님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으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대들은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죽비로 탁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산산조각이 났도다. 안녕히 계시오" 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6. 경술 9월 16일 나라에서 시행한 공부선장 (工夫選場) 에서 법어를 내리다
스님께서는 법좌에 올라가 한참 있다가 말씀하셨다.
"고금의 격식을 깨부수고 범성의 자취를 모두 쓸어버리고 납승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중생의 알음알이를 없애버려라. 죽이고 살리는 변통이 모두 때에 맞게 하는 데 있고 호령과 저울대가 모두 손아귀에 돌아간다. 3세의 부처님네도 그저 그럴 뿐이고 역대의 조사님네도 그저 그럴 뿐이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그저 그럴 뿐이다. 산승도 다만 그런 법으로 우리 주상전하께서 만세 만세 만만세토록 색신 (色信) 과 법신 (法身) 이 무궁하시고 수명과 혜명 (慧命) 이 끝이 없기를 봉축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분도 모두 진실로 답안을 쓰고 부디 함부로 소식을 통하지 말라."
학인들이 문에 이르자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행은 지극한데 말이 지극하지 못하면 그것은 좋은 행이 될 수 없고, 말은 지극한데 행이 지극하지 못하면 그것은 좋은 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말도 지극하고 행도 지극하다 하더라고 그것은 다 문 밖의 일이다. 문에 들어가는 한마디는 무엇인가?"
학인들은 모두 말없이 물러갔다.
입문삼구 (入門三句)
문에 들어가는 한마디 〔入門句〕 는 분명히 말했으나
문을 마주한 한마디 〔當門句〕 는 무엇이며
문 안의 한마디 〔門裏句〕 는 무엇인가.
入門句分明道
當門句作麽生
門裏句作麽生
삼전어 (三轉語)
산은 어찌하여 묏부리에서 그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며
밥은 어찌하여 흰 쌀로 짓는가.
山何嶽邊止
水何到成渠
飯何白米造
17일에 법어를 내리다
스님께서 향을 사른 뒤에 법좌에 올라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의심덩이가 풀리는 곳에는 마침내 두 가지 풍광이 없고, 눈구멍이 열리는 때에는 한 항아리의 봄빛이 따로 있으니 비로소 일월의 새로움을 믿겠고 바야흐로 천지의 대단함을 알 것이다. 그런 뒤에 반드시 위쪽의 관문을 밟고 조사의 빗장을 쳐부수면 물물마다 자유로이 묘한 이치를 얻고 마디마디 종지와 격식을 뛰어넘을 것이다. 한 줄기 풀로 장육금신 (丈六金身) 을 만들고 장육금신으로 한 줄기 풀을 만드니, 만드는 것도 내게 있고 쓸어버리는 것도 내게 있으며, 도리를 말하는 것도 내게 있고 도리를 말하지 않는 것도 내게 있다. 왜냐하면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있어서 자재하기 때문이다."
주장자로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과연 그런 납승이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와서 말해 보라."
학인들이 문에 이르자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한 걸음 나아가면 땅이 꺼지고 한 걸음 물러나면 허공이 무너지며,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으면 숨만 붙은 죽은 사람이다. 어떻게 걸음을 내딛겠는가?"
학인들은 모두 말없이 물러갔다.
27. 공부십절목 (工夫十節目)
1.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2. 이미 소리와 모양에서 벗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그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3.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
4. 공부가 익었으면 나아가 자취 〔鼻軫〕 를 없애야 한다. 자취를 없앤 때는 어떤가.
5. 자취가 없어지면 담담하고 냉랭하여 아무 맛도 없고 기력도 전혀 없다. 의식이 닿지 않고 마음이 활동하지 않으며 또 그때에는 허깨비몸이 인간세상에 있는 줄을 모른다. 이쯤 되면 그것은 어떤 경계인가.
6. 공부가 지극해지면 동정 (動靜) 에 틈이 없고 자고 깸이 한결같아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어지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포기하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나니, 그때에는 어떻게 해버려야 하겠는가.
7. 갑자기 120근 되는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아서 단박 꺾이고 단박 끊긴다. 그때는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 (自性) 인가.
8.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본래 작용은 인연을 따라 맞게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본래의 작용이 맞게 쓰이는 것인가.
9.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벗어나야 하는데, 안광 (眼光) 이 땅에 떨어질 때에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10.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4대는 각각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28. 왕사 (王師) 로 봉숭 (封崇) 되는 날 설법하다
신해년 8월 26일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 불자를 들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이 산승의 깊고 깊은 뜻을 아는가. 그저 이대로 흩어져버린다 해도 그것은 많은 일을 만드는 것인데, 거기다가 이 산승이 입을 열어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를 기다린다면 흰 구름이 만 리에 뻗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고 글로는 기연에 투합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뜻을 잃고 글귀에 얽매이는 이는 어둡다. 또한 마음으로 헤아리면 곧 어긋나고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며, 헤아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면 물에 잠긴 돌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사 문하에서는 길에서 갑자기 만나면 그대들이 몸을 돌릴 곳이 없고 영 (令) 을 받들어 행하면 그대들이 입을 열 곳이 없으며, 한 걸음 떼려면 은산철벽 (銀山鐵璧) 이요, 눈으로 바라보면 전광석화 (電光石火) 인 것이다. 3세의 부처님도 나와서는 그저 벼랑만 바라보고 물러섰고, 역대의 조사님네도 나왔다가는 그저 항복하고 몸을 감추었다.
만일 쇠로 된 사람이라면 무심코 몸을 날려 허공을 스쳐 바로 남산의 자라코 독사를 만나고, 동해의 잉어와 섬주 (曳州) 의 무쇠소 〔鐵牛〕 *를 삼킬 것이며 가주 (圈州) 의 대상 (大像) *을 넘어뜨릴 것이니, 3계도 그를 얽맬 수 없고 천 분 성인도 그를 가두어둘 수 없다. 지금까지의 천차만별이 당장 그대로 칠통팔달이 되어, 하나하나가 다 완전하고 낱낱이 다 밝고 묘해질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임금님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한꺼번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주장자를 들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 주장자 밑의 잔소리 〔註脚〕 를 들으라" 하고 내던지셨다.
29. 갑인 납월 16일 경효대왕 (敬孝大王) 수륙법회에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죽비를 들고 탁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말씀하셨다.
"승하하신 대왕 각경선가는 아십니까. 모르겠으면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이 별 〔星兒〕 은 무량겁의 전부터 지금까지 밝고 신령하고 고요하고 맑으며, 분명하고 우뚝하며 넓고 빛나서 온갖 법문과 온갖 지혜와 온갖 방편과 온갖 훌륭함과 온갖 행원 (行願) 과 온갖 장엄이 다 이 한 점 (點) 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한 점은 6범에 있다 해서 줄지도 않고 4성에 있다 해서 늘지도 않으며, 4대가 이루어질 때에도 늘지 않고 4대가 무너질 때에도 줄지 않는 것으로서 지금 이 회암사에서 분명히 제 말을 듣고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이 법을 듣는 그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미혹한 것인가 깨달은 것인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결국 어디 있는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탁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그 자리 〔當處〕 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고요하나 그대가 찾는다면 보지 못할 것이오" 하고 죽비를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육도중생에게 설법하다
스님께서 자리를 펴고 앉아 죽비를 가로 잡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나 부처의 경계를 알려 하거든, 부디 마음 〔意〕 을 허공처럼 깨끗이 해야 한다. 망상과 모든 세계를 멀리 떠나고, 어디로 가나 그 마음 걸림이 없게 해야 한다. 승하하신 대왕 각경선가를 비롯하여 6도에 있는 여러 불자들은 과연 마음을 허공처럼 깨끗이 하였는가. 그렇지 못하거든 다시 이 잔소리를 들으라.
이 정각 (正覺) 의 성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위로는 모든 부처에서 밑으로는 여섯 범부에 이르기까지 낱낱에 당당하고 낱낱에 완전하며, 티끌마다 통하고 물건마다 나타나 닦아 이룰 필요없이 똑똑하고 분명하다. 지옥에 있는 이나 아귀에 있는 이나 축생에 있는 이나 아수라에 있는 이나 인간에 있는 이나, 천상에 있는 이나, 다 지금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모두 이 자리에 있다. 각경 선가와 여러 불자들이여!"
죽비를 들고는 "이것을 보는가" 하고는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이 소리를 듣는가. 분명히 보고 똑똑히 듣는다면 말해 보라. 결국 그것은 무엇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부처님 얼굴은 보름달 같고, 해 천 개가 빛을 놓는 것 같다."
죽비로 향대를 한 번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30. 병진 4월 8일 결제에 상당하여
스님께서 향을 사뤄 황제를 위해 축원한 뒤에 법좌에 올라 불자를 세우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집안의 이 물건은 신기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되, 해같이 밝고 옻같이 검다. 항상 여러분이 활동하는 가운데 있으나 활동하는 가운데서는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산승이 오늘 무심코 그것을 붙잡아 여러분 앞에 꺼내 보이니, 여러분은 이것을 아는가? 안다 해도 둔근기인데 여기다 의심까지 한다면 나귀해 〔驢年〕 에 꿈에서나 볼 것이다. 그러므로 선 (禪) 을 전하고 교 (敎) 를 전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요, 경론을 말해 주는 것도 눈 안에 금가루를 넣는 것이다.
산승은 오늘 말할 선도 없고 전할 교도 없소. 다만 3세의 부처님네도 말하지 못하고 역대의 조사도 전하지 못했으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뚫지 못한 것을 오늘 한꺼번에 집어 보이는 것이다."
주장자를 가로잡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당장에 마음을 비울 뿐만 아니라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는 주장자를 던지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2. 짧은 글
1. 승종선화 (勝宗禪和) 에게 주는 글
이 한 점 (點) 은 전연 자취 〔巴鼻〕 가 없어, 3세의 부처님네도 말하지 못하고 역대의 조사님네도 전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고 전할 수 없다면 어디에다 붓을 대고 어디에다 말을 붙이겠는가. 말하려 하나 말로는 할 수 없으니 숲 속에서 잘 생각하여라.
2. 일주수좌 (一珠首座) 에게 주는 글
이 큰 일을 기필코 해결하려거든 반드시 큰 신심을 내고 견고한 뜻을 세워, 지금까지 배워서 안 불법에 대한 견해를 싹 쓸어 큰 바다 속에 버리고 다시는 꺼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8만 4천의 미세한 생각을 한 번 앉으면 그 자리에서 끊어버리고, 그저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중에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한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없다 〔無〕 '고 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한마디 힘을 다해 들되, 언제나 들고 언제나 움켜잡으면, 움직이거나 고요한 가운데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자나깨나 늘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될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그저 때만 기다려라.
혹 들어도 냉담하고 전연 재미가 없어 부리를 꽂을 곳이 없고 힘을 붙일 데가 없으며, 알아지는 점이 없고 어찌할 수가 없더라도 부디 물러서지 말라. 그때야말로 그 사람이 힘을 붙일 곳이요 힘을 덜 곳이며, 힘을 얻을 곳이요 신명을 놓아버릴 곳이다.
3. 굉장주 (宏藏主) 에게 주는 글
이 더러운 가죽 포대 속에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며 언제나 사람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있지만 활동하는 가운데서는 붙잡을 수가 없다. 이것을 비로자나 법신의 주인이라 한다.
굉스님은 아는가. 안다 해도 몽둥이 30대를 맞을 것이며, 모른다 해도 30대를 맞을 것이니 결국 어찌하겠는가? 이 나옹도 30대를 맞아야 하겠다. 말해 보라. 허물이 어디 있는가? 빨리 말하라.
4. 각성선화 (覺成禪和) 에게 주는 글
진실로 이 일대사인연을 기어코 이루려 하거든 결정적인 믿음을 세우고 견고한 뜻을 내어,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중에 늘 참구하던 화두를 들어야 한다. 언제나 들고 늘 의심하면 어느 새 화두가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심덩이가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는 몸을 뒤쳐 한 번 내던지고 다시는 부질없고 쓸데없는 말을 말아야 한다.
혹 그렇게 되지 않아 어떤 때는 화두가 분명하고 어떤 때는 분명하지 않으며, 어떤 때는 나타나고 어떤 때는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으며, 어떤 때는 틈이 있고 어떤 때는 틈이 없거나 하면 그것은 신심과 의지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을 허송하면서 헛되이 남의 보시만 받으면 반드시 뒷날 염라대왕이 음식과 재물을 계산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부질없이 세상에 와서 한번 만났을 뿐이라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쓸데없는 말을 하고 짧은 소리․긴소리하며, 이쪽을 가리키고 저쪽을 가리키겠는가.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5. 운선자 (雲禪子) 가 병이 있다 하기에 그에게 글을 주다
그대의 병이 중하다 들었는데 그것은 무슨 병인가? 몸의 병인가, 마음의 병인가?
만일 몸의 병이라면 몸은 흙․물․불․바람의 네 가지 요소가 거짓으로 모여 된 것으로서, 그 4대는 각각 주관하는 바가 있는데, 어느 것이 그 병인가? 만일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은 허깨비 〔幻化〕 같은 것이어서 비록 거짓 이름은 있으나 그 바탕은 실로 공하다. 그렇다면 병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만일 일어난 곳을 캐보아도 찾을 수 없다면 지금의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고통을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살피되 살펴보고 또 살펴보면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 바람이다. 부디 부탁하고 부탁하노라.
6. 지득시자 (志得侍者) 에게 주는 글
그대가 진실로 이 일대사인연을 참구하려거든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가운데 `모두 타서 흩어졌는데 어느 것이 내 성품인가?'라는 화두를 들되, 언제나 들고 항상 의심하여 고요한 데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부디 틈이 있게 하지 말라. 자거나 깨거나 한결같아야 하고 어디서나 언제나 분명하며, 기뻐하는 때나 성내는 때나 화두가 다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 경지에 실제로 이르면 의심덩이가 부서지고 바른 눈이 열릴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혹 그렇지 못하여 낮이나 밤이나 되는대로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 혼침과 산란이 섞이고 순간순간에 어긋나 온갖 선악과 성색에 끄달릴 것이다. 그리하여 금년도 그렇게 보내고 내년도 그렇게 갈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미륵이 하생하기를 기다려도 붙잡을 때가 없을 것이다.
7. 상국 목인길 (相國 睦仁吉) 에게 주는 글
이 일은 재가․출가에도 있지 않고 또 초참 (初參) ․후학 (後學) 에도 있지 않으며, 또 여러 생의 훈습이나 수행에도 있지 않습니다. 갑자기 깨치는 것은 오직 당사자의 한 생각 분명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자 공덕의 어머니여서 일체의 선법 (善法) 을 자라게 한다.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자라게 하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한 것입니다.
부디 상공도 집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지휘할 때나 관에서 공사를 처리할 때나, 손님을 영접하여 담소를 나누거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거나, 다니고 서고 앉고 눕거나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 하십시오. 다만 이렇게 끊이지 않고 참구하고 쉬지 않고 살피면 어느 새 크게 웃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리하여 이 일이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고행하고 계율을 지니는, 방석과 대의자 〔竹倚〕 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8. 득통거사 (得通居士) 에게 주는 글
만일 그대가 이 일을 참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승속에도 있지 않고 남녀에도 관계없으며, 초참․후학에도 관계없고 또 여러 생의 훈습에도 있지 않는 것이오, 오직 당사자의 한 생각 진실하고 결정적인 믿음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미 이렇게 믿었거든 다만 하루 스물 네 시간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화두를 드시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다' 하였다는, 이 마지막 한마디를 힘을 다해 드시오. 언제나 끊이지 않고 들어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속에서도 공안이 앞에 나타나며, 자나깨나 그 화두가 분명하여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심덩이가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면, 마치 물살 급한 여울의 달과 같아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어지지 않을 것이오. 진실로 그런 경지에 이르면 세월을 기다리지 않고도 갑자기 한 번 온몸에 땀이 흐르게 되리니, 그때는 잠자코 스스로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오. 간절히 부탁하오, 부탁하오.
9. 상국 이제현 (相國 李齊賢) 에게 답함
주신 편지 받았습니다. 상국께서 떠나실 때 병에 대해 하신 말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산승도 구업을 꺼려하지 않고 우리 집의 더러움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일은 승속에도 관계없고 노소에도 관계없으며, 초참․후학에도 관계없고, 오직 당사자의 진실하고 결정적인 신심에 있을 뿐입니다. 3세의 부처님네나 역대의 조사님네도 다 결정적인 신심에 의해 도과 (道果) 를 성취하셨으므로, 이것에 의하지 않고 정각 (正覺) 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여서 일체의 선법을 자라게 한다' 하시고, 또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자라게 하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하셨습니다.
상국께서는 젊어서 과거에 높이 올라 한 나라의 정승이 되고 또 제일가는 문장가로서 나라의 큰 보배가 되셨는데, 또 우리 불법문중에 마음을 두시니, 고금의 현인들에 비해 백천만 배나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에 마음을 두었더라도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아마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해 죽고 나서는 가는 곳마다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철저히 깨치지 못했으면 꼭 하고야 말겠다는 큰 뜻을 일으켜 옷 입고 밥 먹고 담소하는 하루 스물 네 시간 어디서나 그 본래면목을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의 말에, `금생에 이 세상에 나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바로 부모가 낳아준 면목이지마는, 어떤 것이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본래면목인가?'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끊이지 않고 참구하여,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의식이 움직이지 않아 아무 맛도 없고 더듬을 수도 없는 데 이르러 가슴속이 갑갑하더라도 공 (空) 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상국께서 힘을 얻을 곳이요 힘을 더는 곳이며, 또 안신입명 (安身立命) 할 곳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합니다.
다시 답함
전에 산매화를 보냈을 때 선물을 주시고 또 회답에 무자 (無字) 화두를 드신다 하니, 산승은 상국께서 일찍부터 `무'자를 참구하였기 때문에 친히 소식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으매 다시 묻는 말에 이렇게 공부하리라 하시니 도리어 근심스럽고 놀랍습니다. 부디 마음을 그대로 두시기 바랍니다. 옛사람들은 한마디나 반마디를 내려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잡고서 움직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비록 일상생활에 천차만별한 일이 있더라도 뜻이 위에만 있어 다른 것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다른 화두를 참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다른 화두를 들 때에도 `무'자를 참구해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무'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것입니다. 부디 다른 화두로 바꾸어 참구하지 말고 다만 하루 스물 네 시간 무엇을 하든지 늘 드십시오.
한 스님의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없다 〔無〕 ' 하였다는데 `무'라고 한 마지막 한마디를 힘을 다해 들되, 부디 언제 깨치고 깨치지 못할까를 기다리지 말고 재미가 있고 없음에 신경쓰지도 말며, 또 힘을 얻고 얻지 못함에도 관계치 마십시오. `무'자 그것만을 오로지 들어 그대로 나아가면, 들지 않아도 화두가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며 하나도 재미가 없어 마치 모기가 무쇠소의 등에 올라간 것 같더라도 공 (空) 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거기는 과거의 여러 부처님과 조사님이 몸과 마음을 던져버린 곳이요, 또 상국께서 힘을 얻고 힘을 덜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곳입니다. 거기서 몸을 뒤쳐 한 번 던져버리면 비로소 도란, 첫째는 짓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쉬지 않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한 주먹에 황학루 (黃鶴樓) 를 때려눕히고
한 발길로 앵무주 (鵡洲) 를 차서 뒤엎는다
의기 (意氣) 에 의기를 더 보태니
풍류스럽지 않은 곳도 풍류스럽구나.
一拳拳倒黃鶴樓 一蹋蹋翻鸚鵡洲
有意氣時添意氣 不風流處也風流
10. 지신사 염흥방 (知申事 廉興) 에게 주는 글
진정 이 큰 일을 참구하려면 승속과 남녀를 묻지 말고 상중하의 근기도 묻지 말며 또 초참․후학을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직 당사자가 결정적인 믿음을 세우고 견고한 뜻을 내는 데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여서 모든 선법을 자라게 한다' 하셨고 또,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자라게 하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하셨습니다.
공 (公) 은 젊어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임금님을 만나 사무가 매우 번거로운 때인데도 우리 불법에 대해 의심없는 확실한 믿음으로 마음 닦는 방법을 물으시니, 어찌 세간 출세간을 막론하고 가장 역량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 닦는 법을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내가 광명사 (廣明寺) 에 있을 때 공에게 말씀드린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들되, 어디서나 언제나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끊지 않고 들며 쉬지 않고 참구하여 조금도 틈을 주지 말고, 다닐 때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섰을 때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 하며, 앉았거나 누웠을 때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 하십시오. 옷 입고 밥 먹으며 대소변 보고 손님을 영접하며, 나아가서는 공무를 처리할 때나 임금님 앞에서 나아가고 물러날 때나 붓을 들고 글을 쓸 때나 필경 `이것이 무엇인가' 하십시오.
그저 이렇게 끊임없이 들고 참구하다 보면 어느 새 들지 않아도 화두가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어, 밥을 먹어도 밥인 줄 모르고 차를 마셔도 차인 줄 모르며, 또 이 허깨비몸이 인간에 있는 줄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같고 자나깨나 매한가지인 곳에서 몸을 뒤쳐 한 번 던지십시오. 그런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관직이나 속인의 모양을 바꾸지 않고 화택 (火宅) 을 떠나지 않고라도, 서천 (西天) 의 스물 여덟 분 조사와 동토 (東土) 의 여섯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들이 전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본유 (本有) 의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합니다.
11. 세상을 탄식함 〔歎世〕 ․ 4수
1.
어지러운 세상 일 언제나 끝이 날꼬
번뇌의 경계는 갈수록 많아지네
미혹의 바람은 땅을 긁어 산악을 흔드는데
업의 바다는 하늘 가득 물결을 일으킨다
죽은 뒤의 허망한 인연은 겹겹이 모이는데
눈앞의 광경은 가만히 사라진다
구구히 평생의 뜻을 다 부려 보았건만
가는 곳마다 여전히 어찌할 수 없구나.
世事紛紛何曰了 塵勞境界倍增多
迷風刮地搖山嶽 業海漫天起浪波
身後妄緣重結集 目前光景暗消磨
區區役盡平生圍 到地依先不輓何
2.
눈 깜박이는 사이에 세월은 날아가버리나니
젊은 시절은 백발이 되었구나
금을 쌓아두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 어찌 그리 미련한고
뼈를 깍으며 생 (生) 을 꾸려가는 것 진정 슬퍼라
흙을 떠다 산을 북돋움은 부질없이 분주떠는 일이요
표주박으로 바닷물 떠내는 것 진실로 그릇된 생각이다
고금에 그 많은 탐욕스런 사람들
지금에 와서 아무도 아는 사람 없구나.
乏眼光陰賑過去 白頭換却少年時
積金候死愚何甚 刻骨營生事可悲
捧土培山徒自迫 持楞酌海諒非思
古今多少貪婪客 到此應無一點知
3.
얼마나 세상 티끌 속에서 빠져 지냈나
백가지 생각이 마음을 얽어 정말로 시끄러운데
5온 (五睛) 의 빽빽한 숲은 갈수록 우거지고
6근 (六根) 의 어두운 안개는 다투어 나부끼네
명리를 구함은 나비가 불에 들고
성색에 빠져 즐김은 게가 끓는 물에 떨어지네
쓸개가 부서지고 혼이 나가는 것 모두 돌아보지 않나니
곰곰이 생각하면 누구를 위해 바빠하는가.
幾多汨沒紅塵裏 百計縈心正擾攘
五睛稠林增霽鬱 六根冥務競飄颸
沽名苟利蛾投焰 嗜色滛聲蟹落湯
膽碎魂亡渾不顧 細思端的爲誰忙
4.
죽고 나고 죽고 나며, 났다가 다시 죽나니
한결같이 미쳐 헤매며 쉰 적이 없었네
낚싯줄 밑에 맛난 미끼를 탐할 줄만 알거니
어찌 장대 끝에 굽은 낚시 있는 걸 알리
백년을 허비하면서 재주만 소중히 여기다가
오래고 먼 겁의 허물만 이뤄놓네
업의 불길이 언제나 타는 곳을 돌이켜 생각하나니
어찌 사람들을 가르쳐 특히 근심하지 않게 하랴.
死死生生生復死 狂迷一槪不曾休
只知線下貪香餌 那識竿頭有曲鈞
喪盡百年重伎倆 搆成久遠劫愆尤
翻思業火長燃處 寧不敎人特地愁
12. 지공화상 (指空和尙) 기골 (起骨) *
"밝고 텅 빈 한 점은 아무 걸림이 없어, 한 번 뒤쳐 몸을 던지니 얼마나 자유롭소."
죽비로 탁자를 한 번 내리치며 할을 한 번 하고는 `일으켜라!' 하셨다.
입탑 (入塔)
스님께서 영골을 받들고 말씀하셨다.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은 3천 가지 몸가짐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8만 가지 미세한 행에 무슨 신경을 썼는가. 몸에는 언제나 순금을 입고* 입으로는 불조를 몹시 꾸짖었으니, 평소의 그 기운은 사방을 눌렀고 송골매 같은 눈은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원나라에서 여러 해를 잠자코 앉아 인천 (人天) 의 공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전하매 천룡팔부가 돌아오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아침에 정성스레 탑을 세우고 삼한 (三韓) 땅에 모시어 항상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나 그 법신은 법계에 두루해 있다. 말해 보라. 과연 이 탑 안에 거두어 넣을 수 있겠는가. 만일 거두어 넣을 수 없으면 이 영골은 어디 가서 편안히 머물겠는가. 말할 수 있는 이는 나와서 말해 보라. 나와서 말해 보라. 없다면 산승이 스스로 말하겠다."
할을 한 번 한 뒤에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기는 오히려 쉽지만, 겨자씨를 수미산에 넣기는 매우 어렵다."
13. 각오선인 (覺悟禪人) 에게 주는 글
생각이 일고 생각이 멸하는 것을 생사라 하는데, 생사하는 그 순간순간에 부디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라. 화두가 순일하면 일고 멸함이 곧 없어지는데 일고 멸함이 없어진 그 곳을 신령함 〔靈〕 이라 한다. 신령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그것을 무기 (無記) 라 하고, 신령함 가운데 화두에 어둡지 않으면 그것을 신령함이라 한다. 즉 이 텅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은 무너지지도 않고 잡된 것도 아니니, 이렇게 공부하면 멀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14. 지여상좌 (智如上座) 를 위해 하화 (下火) *하다
세 가지 연 〔三緣〕 이 모여 잠깐 동안 몸 〔有〕 을 이루었다가 4대가 떠나 흩어지면 곧 공 (空) 으로 돌아간다. 37년을 허깨비 바다에서 놀다가 오늘 아침 껍질을 벗었으니 흉년에 쑥을 만난 듯 기쁠 것이다. 대중스님네여, 지여상좌는 어디로 갔는지 알겠는가. 목마를 세워 타고 한 번 뒤쳐 구르니, 크고 붉은 불꽃 속에서 찬 바람을 놓도다.
15. 두 스님을 위해 하화하다
"혜징 (慧澄) 수좌와 지인 (志因) 상좌여, 밝고 신령한 그 한 점은 날 때에도 분명하여 남을 따르지 않고, 죽을 때에도 당당하여 죽음을 따르지 않는다. 생사와 거래에 관계없이 그 자체는 당당히 눈앞에 있다."
횃불로 원상 (圓相) 을 그리면서 말씀하셨다.
"대중스님네여, 이 두 상좌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57년 동안 허깨비 세상에서 놀다가 오늘 아침에 손을 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아는가. 불빛에 함께 들어가나 감출 곳이 없구나."
16. 신백대선사를 위해 뼈를 흩다
큰 들판에 재가 날으매 그 뼈마디는 어디 갔는가. 깜짝하는 한 소리에 비로소 뇌관 (牢關) 에 이르렀다. 앗! 한 점 신령스런 빛은 안팎이 없고, 오대산 하늘을 둘러싼 흰 구름은 한가하다.
17. 지보상좌 (志普上座) 를 위해 하화하다
근본으로 돌아갈 때가 바로 지금이거니, 도중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말아라. 별똥이 튀는 곳에서 몸을 한 번 뒤쳐, 구품의 연화대로 자유로이 돌아가라.
18. 숙녕옹주 묘선 (淑寧翁主 妙善) 에게 드리는 글
이 한 가지 큰 일을 성취하려면 그것은 승속이나 남녀나 초기 (初機) ․후학 (後學) 에 있지 않고, 오직 당사자의 마지막 진실한 한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제가 옹주를 보매 천성이 남과 다른 데가 있어, 본래부터 사심이나 의심이나 미혹한 마음이 없고, 오직 전심으로 더 없는 〔無上〕 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어찌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반야의 바른 법을 훈습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장부란 남자 여자의 형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요, 네 가지 법 〔四法〕 을 갖추면 그를 장부라 한다' 하였습니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른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 말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참으로 장부라 하고, 이 네 가지 법이 없으면 비록 남자의 몸이라 하더라도 장부라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옹주님도 이 말을 확실히 믿고 그저 날마다 스물 네 시간 행주좌와의 4위의 (四威儀) 속에서 오직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들되 끊이지 않고 들며 쉬지 않고 의심하면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가운데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며, 자나깨나 화두가 앞에 나타나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고 일어나려 해도 일어나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 모르는 사이에 몸을 뒤쳐 한 번 내던지면, 거기는 여자의 몸을 바꾸어 남자가 되고 남자 몸을 바꾸어 부처를 이루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합니다.
19. 매씨 (妹氏) 에게 답함
나는 어려서 집을 나와 햇수도 달수도 기억하지 않고 친한 이도 먼 이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늘까지 도 (道) 만을 생각해 왔다. 인의 (仁義) 의 도에 있어서는 친하는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마는, 우리 불도에서는 그런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큰 잘못이다. 이런 뜻을 알아 부디 친히 만나겠다는 마음을 아주 끊어버려라.
그리하여 하루 스물 네 시간 옷 입고 밥 먹고 말하고 문답하는 등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여라. 끊이지 않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헛되이 6도 (六道) 에서 헤매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부탁하여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마음에 붙여두고 부디 잊지 말아라
생각이 다하여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여섯 문 〔六門〕 에서 언제나 자금광을 뿜으리.
阿邇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20. 대어 (對語)*
무제 (武帝) 가 달마에게 "내 앞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달마가"모른다"고 대답하니 무제가 말이 없었다. 이에 대해 보녕 (保寧) 스님은 대신해 혀를 내어보였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들려 주고는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 하셨다.
태종 (太宗) 이 한 스님에게 "어디서 오시오" 하고 묻자 그 스님이 "와운 (臥雲) 에서 옵니다" 하니 왕은 "와운은 궁벽한 곳이라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는데 무엇하러 왔는가" 하였다. 이에 대해 보녕스님이 대신해 말하기를, "밝음을 만나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들려 주고는 "정치가 잘 되는데 누가 달아나겠는가" 하셨다.
적 (寂) 대사가 삼계도 (三界圖) 를 올렸을 때 임금이 묻기를, "나는 어느 세계에 있습니까?" 하니 적대사는 대답이 없었다. 보녕스님이 대신해 말하기를, "폐하께서야 어디로 가신들 누가 존칭하지 않겠나이까" 하였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들려 주고는 "합장하고 몸을 굽히는데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하셨다.
고사인 (高舍人) 이 한 스님에게 "시방세계가 모두 부처라면 어느 것이 보신 (報身) 이며 어느 것이 법신 (法身) 입니까?" 하고 물었다. 보녕스님이 그 스님을 대신해서 "사인님, 다시 누구냐고 물어 보십시오" 하였다.
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 주고는 "비구니 〔師姑〕 는 여자로 된 것이니라" 하셨다.
설봉 (雪峰) 스님이 덕산 (德山) 스님에게 "옛부터 내려오는 종승 (宗乘) 의 일에 저도 한 몫이 있습니까?" 하였다. 덕산스님이 때리면서, "무어라고 말하는가?" 하니 설봉스님은 말이 없었다. 보녕스님이 대신해 말하기를, "가슴을 치고 곧 나가라" 하였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들려 주고는 "발을 밟고 나가라" 하셨다.
남전 (南泉) 스님이 양흠 (良欽) 에게 물었다.
"공겁 (空劫) 중에도 부처가 있는가?"
양흠이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그는 어떤 부처인가?"
"양흠입니다."
"어느 세계에 사는가?"
양흠이 말이 없었다.
보녕스님이 대신해 말하기를, "선상 (禪滅) 을 한 바퀴 돌고 나가라" 하였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들려 주고는 "어느 세계에 사는가?" 하셨다.
21. 감변 (勘辨)
스님께서 한 좌주 (座主) 에게 물었다.
"교가 (敎家) 에서는 일시불 (一時佛) 을 말하는데, 그 부처는 지금 어디 있는가?"
좌주가 어물거리자 스님께서 할을 한 번 하고 나가다가 다시 좌주를 불렀다. 좌주가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알았는가?" 하니 좌주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더 맞아야겠구나" 하니 좌주는 절을 하였다.
스님 셋이 와서 절하는 것을 보고 스님께서 물었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하나는 지혜가 있을 것이니, 지혜로 이르지 못하는 경계를 한마디 해보아라."
그 스님이 말이 없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는 말에 있지 않다. 둘째 스님은 어떤가?"
그 스님도 말이 없자 스님께서는 "셋째 칠통 (漆桶) 은 어떤가?" 하셨다.
그 스님도 역시 말이 없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노승이 스님네에게 감파 (勘破) 당했소. 앉아서 차나 드시오."
스님께서 한 도사 (道士:老莊) 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호주 (毫州) 에서 옵니다."
"그대가 호주에서 온다면 노자 〔老君〕 를 보았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 눈이 어떤가?"
도사가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노자가 석가에게 절하는구나."